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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농촌, 살아있는 농민 - 이종구 근작전에 부쳐
유홍준(영남대, 미술평론)
봄
현대작가선 5 / 이종구의 땅의 사람들 1992 / 학고재
수몰지의 늦가을
나는 1986년, 이종구의 첫개인전 때 그의 팜플렛 서문으로 "그의 진실된 눈빛을 생각하며" 라는 제목 아래 그가 어떻게 해서 그의 고향 오지리 사람들의 초상을 양곡부대에 그리게 되었는가를 비교적 상세하게 증언한 적이 있었다. 그 글에서 나는 다른 어느 구절보다도 " ...이종구의 작업을 현재의 상태에서 평가내리는 일은 그에게 좀 억울한 일이 된다" 고 못박아버리고 비평의 많은 부분을 유보해 두었다. 그 이유는 이종구가 새롭게 제시한 그림들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반론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토 - 벼베기
하나는 그가 농민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넣는 일이 그 인물의 개별성이 강해서 전형성에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고, 또 하나는 양곡부대라는 재료의 선택이 작위적인 모더니즘의 센세이셔널리즘과 연계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당시 나는 이런 의문에 대해 반론을 펼 의사를 분명히 갖고 있었지만, 말하자면 이종구를 위한 변론을 유보했다. 왜냐하면 그의 이후 작업과정이 자연스럽게 그런 우려를 덮어버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에 대해 답할 때가 된 것같다.
논두렁
농민의 전형성이란 곧 어느 것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농민의 감정상태가 여러가지로 나타나고 있듯이 농민의 삶 자체도 일하고 휴식하고, 싸우고, 잠자는 등 여러 양태로 나타난다. 더구나 미술은 다른 장르와 달리 작품상에 시간성을 끌어들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니까 한 작품 속에서 농민의 전형성을 모두 담아내려고 하면 결국 이 시대의 '표준 농민상' 같은 것이 되어 '어둡고 암담한 농촌현실의 모순을 사회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여기에 의연히 일어나 싸우는 농군" 으로 묘사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그려진 그림이란 거의 대부분 조작된 의식 속에서 산출된 농민일 뿐 진짜 농민의 살냄새, 땀냄새, 흙냄새가 다 빠져버린 생경한 인물화로 전락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새봄 - 밭갈이
둘째는 양곡부대라는 바탕 재료의 선택 문제이다. ... 실제로 이종구의 그림은 이 양곡부대의 발견 내지 사용 이후 급속한 발전을 볼 수 있었다. 캔버스에 농민의 초상을 그릴 경우,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농민미술로 드러내기 힘든 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어떤 식으로 배경처리를 하든 현실성 내지 사회성을 서술해야 하는 어려움, 또 하나는 인물이 화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화면 밖으로 돌출하는 듯한 박진감을 어떻게 살려낼 수 있느냐는 문제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지만 양곡부대에 착안함으로써 동시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길 - 여름날
그러나 이 편리함 때문에 그는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져 조형적 긴장을 상실하는 경우도 겪게 되었다. 새롭게 창출한 형식이지만 그 형식이 다음 작품의 내용에 간섭하는 일이 많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최근에 이루어진 이종구의 변화는 이러한 재료와 형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내용상에서도 고향땅 오지리를 벗어나 우르과이 라운드로 결정타를 맞고 있는 농촌의 구조적 위기와 산업화과정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수몰지의 '실향민'이 겪는 고통으로 확대되면서 그의 농민미술은 전보다 커다란 사회적 현실, 역사적 의미를 끌어안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전의 작업 주제가 '땅의 사람들'이었다면 이제는 '죽어가는 농촌, 살아있는 농민'으로 전환해가고 있는 것이다.
씨앗 1
이런 작품들은 문학으로 말한다면 짧은 서정시에 해당되는 것이 될 터인데 내 기억으로 신경림, 정희성, 김용택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종구 자신의 시적 영상이라고 해야 옳을 것같다. 세상이 어찌 변하든 지난날 살아온 방식대로 낫을 갈고, 호미질하고, 길을 걷는 농부들의 모습이고 보면 이들은 정치적으로 각성되지 못했고, 사회적 삶과 실천이라는 것도 모르는 무지랭이 농군이라고 쉽게 생각해 버릴 수도 있는 대상들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들은 이 세상에 어떤 해코지 한 일이 없는 분들이다. 세상은 그들을 핍박했어도 이들은 처연히 그렇게 살아온 분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시대의 이름없는 군자자들인 것도 같다.
임신년의 소
버림받은 정직성, 밑둥 잘린 삶터의 분노 - 이종구의 두 번째 "땅의 사람들' 전에
이태호(전남대, 미술사)
이종구는 '우리 시대의 농민화가' 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순박한 품성과 진지함, 그리고 성실성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는 그를 알거나 그의 그림을 대하는 사람마다 모두 한 입으로 얘기 하는 인간적인 매력인데, 그의 외모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덥수룩하고 둘글넙적한 얼굴에 뼈마디가 굵고 힘센 장사형의 첫인상은 그가 무던하게 형상화해 온 농투성이의 흙냄새와 정서적 친밀감을 느끼게 해준다. ... 반면에 이종구에게서는 외모와 달리 지식인 화가로서의 선선하고 세련된 면모도 발견된다. 그와 얘기하거나 그가 쓴 글을 읽어보면 매끄러우면서도 정확한 표현들과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낫
임술년1980), "구만팔천구백구십이(우리나라 총면적을 제곱킬로미터 단위로 나타낸 치수)"에서는 이종구를 비롯하여 박흥순, 이명복, 송창, 전준엽, 천광호, 황재형 등이 뜻을 모아 결성한 단체이다. '현실과 발언' 에 이어 1980년대 서구지향적이고 획일화된 기존 미술계에 회의을 제기하면서 서구에서 유입된 '왜곡된 가치관'과 '물질주의 문화'를 극복하고 '노출된 현실이거나 감춰진 진실' 속에 소외된 인간 또는 사물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그리기 시작하겠다는 주장을 펴며 회원들은 대체로 현대의 풍속도와 문명비판적 리얼리즘의 경향성을 띠었다.
부부
1989~90년에 오지리를 중심으로 작업을 해오던 이종구의 작품세계에 변화를 예시하는 과도기적 양상이 나타난다. 우선 "교사 생활이 그렇게 신명날 때가 없었다"고 말하듯 참교육운동과 전교조 결성에 다른 교사들과 같이 움직였고, 인천지역 미술교과 모임을 꾸리려는 노력 등 바쁜 생활 때문에 작업에 손댈 시간이 부족하여 작업량이 많이 줄어든다. 그러면서 색다른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 이종구는 전교조 활동과 참교육운동 속에서 자기 <신분증>과 사진명렬표, 그리고 시험답안지들을 바탕으로 서 있는 학생을 그리기도 했다. 이 시기 유일하게 농민화와 거리가 먼 작품에 해당한다. 축 늘어진 어깨에 무거운 책가방을 멘 학생의 뒷모습은 바로 우리교육의 현실이다. 이종구는 참교육운동을 통해 미술교육 방법에도 새롭게 눈을 떠 학생들과 공동작업을 하는 등 학생들에게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학생의 자주성이 발현되도록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마지막 농사요!
이종구의 회화세계는 '땅의 사람들'에서 '땅과 사람들'로 농촌현실에 대한 의식의 지평을 넓혔고 민족의 존립위기 까지 가져오게 하는 농촌의 몰락을 더욱 절실하게 인식하면서 변화된 것이다. '뿌린 만큼 거두어 들인다'는 정직한 자연의 순리가 외면당하고 이제는 '삶의 자리' 마저 내놓아야 하는 이 땅의 아픔을 노래한 그는 이시대 농민의 항의에 걸맞게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리밭
이종구는 농촌현실을 강한 어조로 대변해온 빼놓을 수 없는 우리시대 우리의 화가이다. 그 우직한 작업태도와 현실의 진정성이 뒷받침되었기에 이 시대의 내놓을 만한 민중화가로 성장하였다. 자기 목소리가 확실한 그의 회화적 성과는 바로 우리시대 민족민중미술의 가치를 지탱할 만한 든든한 기둥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의 흙냄새와 성실성을 믿는다.
명환아저씨
이삭줍기
이종구의 그림, 농민들에게 자기 모습 보여주기
김용택(시인)
...아무튼 나의 그림에 대한 외경감과 화가에 대한 존경심, 질투에 가까운 부러움은 사그러들지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어 나는 고민이다. 지금도 나는 이따금 전주엘 가면 꼭 화실엘 들려 그림도 보고 화집도 보고 잡지도 보곤 한다.
은행동 류씨
나는 이종구의 삽들을 좋아한다. 그의 아버지가 가뭄 길에 뒷짐지고 든 삽이나 삽자루가 빠진 녹슨 삽 위의 씨앗이 절망스럽지만. 나는 그의 번쩍이는 날을 잃어버린 녹슨 삽들이 좋다. ...그의 그림들 앞에 서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와 논두렁에 마주 앉은 느낌이 들고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추운 겨울 햇빛 좋은 양지쪽 담벼락 아래, 짚더미 아래 앉아 있는 우리 당숙, 우리 큰아버지, 늙으신 동네 어른들과 같이 앉아 있는 것같아서 좋다.
들 - 늦가을
이종구 충남 서산 생 중앙대 예대 회화과, 인하대 교육대학원
땅의 사람들전, 오지리 사람들전, 조형전, 임술년전, 해방 40년 역사전, 우리시대의 30대 기수전, 4인의 우리땅 동행전,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 전, 교육현장전, 오월이여, 광주여전, 조국의 산하전, 통일전...
성묘길
산 자락이 끝나면 갯벌 이어지는 해안의 모퉁이를 찬바람 묻은 두루마기를 저으며 돌아오시거나 장악산 드렁칡 한 다발로 꼰 노끈 고드랫돌 묶어 왕골자리 한 잎으로 삼복을 넘기시거나 그림자 흔들며 제삿날 어두운 저수지 둑길로 흐트러짐 없이 걸어 오시거나 윗 주머니는 언제나 비어 있더라 마른 연초 부스러기 송진냄새 풀냄새 붉은 해 솟아오르는 조일성냥 한 갑 발 걷고 들어가 한번 휘저으면 그만인 논바닥 큰 자식은 염부로 작은 자식은 머슴으로 아홉 살 일곱 살 새벽 헛기침 소리에 일어나 너희들의 일터로 가거라 자식들이 재산일 수는 없어도 황토밭 질긴 잡초 너희 손이 아니면 에미 애비 가진 것 없어 태평으로 잠잘 수 있느냐 모루산 돌밭 해지기 전 나무 한짐 깎아 절절 끓게 불지펴 허리 지지고 어서 어서 일어 나거라 가랑잎 부스러지는 목소리로 새벽마다 말씀하셨다 십원 한장 너희 할아버지는 벌어보지 못했다고 글자 한자 자식들에게 깨우쳐주지 못했다고 지금도 환갑 지난 숙부는 한이 된 말씀을 하지만 지난 섣달 할아버지는 두루마기 저으며 저수지 둑길을 지나 자식의 땅 황토언덕 잡목더미 헤치고 반듯하게 누우셨다 빈 주머니 빈 손으로 누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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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으로 하이퍼리얼리즘을 구사 하는 붓으로 기억나는 화가는 전준엽, 박흥순, 이명복, 황재형의 캔버스들이 환하다. 말하자면 리얼리즘이 민중시대의 창작기법으로 완강하던 시절이니 '하이퍼'를 익힌 솜씨가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 같은 촌이야 끈적끈적한 오지호나 이인성이 어른거리고 박수근 과 이중섭도 쭈뼛거리는 두엄자리가 강세였으니 풀냄새가 나도 많이 났다. 독재권력과 일전을 치르기 위해서라면 그림이 포스터가 되거나 프로퍼간다 가 되어 철저히 메시지적이거나 계몽적이었어야 했던 시절, 이로만 보아도 '현 실과 발언'에 이은 '임술년' 그룹의 미술은 가위 민중미술운동의 '기수' 임을 자 임할만했다. 그러고보면 항쟁의 진앙지 광주미술도 만만치는 않았다. 엘리트화 가의 지적 비판이 곧 한계로 비칠 수 있는 '민중적 신명' 같은 전투적 회화로의 왈짜한 밀어붙임이라 할 수 있었으니! 눈이 호수처럼 맑아 깊이 빠져드는 천성 때문인지, 후딱 그려서 피켓이나 삽화나 걸게나 찌라시에 대용하는 그림들관 딴판으로 그의 그림은 이렇게 부럽도록 철저했다. 그의 농촌과 연장과 일감 들이 일으킨 먼지와 물꼬와 소발자욱들이 쓸쓸하다. 그의 붓과 푸대자루와 오지리가 번진 평론과 감상과 소개들이 감회롭다. 서로 잘 아는 사이지만 화가로서나 교사로서도 별반 나눔이 없었고 그러니 세월이 흘러 추억이 랄 만한 것도 썩... 그것보다 요 근래 화가 이종구의 작업이 더 궁금하 다. 학교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무얼하며 누굴 만나며 어떻게 변했 을까... '현실과 역사'가 춘풍에 흩날리는 매화꽃잎처럼 처연 한데 술기운도 없이 이 오싹한 계절에 뉘 불러 홀로 마음 달래려 하는가! 이사람 진수~ 09.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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