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인 워싱톤 디씨 북쪽 메릴랜드의 Olney에 위치하고 있는 워싱톤 한인 천주교회(St. Andrew Kim Catholic Church)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1965년 10월 워싱톤 지역의 동포 및 유학생을 중심으로 워싱톤 디씨에 있는 성모무염시태 성당 (The National Shrine of The Immaculate Conception)에서 최초의 모임이 형성된 이후 1974년 워싱톤 대교구에서 정식 공동체로 인가되었습니다. 1981년에 메릴랜드의 College Park에 자체 성전을 마련하였으며 2002년 11월17일에는 Olney에 있는 50에이커의 대지 위에 아름다운 새 성전을 마련하고 이전하여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습니다.
저희 워싱톤 한인 천주교회는 공동체가 설립된 1974년부터 워싱톤 지역 동포들의 신앙생활과 영적교류의 장이 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이웃에 복음의 씨를 전하고 주님의 사업을 실천하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워싱톤 한인 천주교회
미사 안내
한글 미사
토요일
특전 - 오후 7 시 30 분
(둘째 토요일: 오후 6 시 30 분)
일요일
아침 - 오전 7 시
교중 - 오전 10시 30분
청년 - 오후 6 시
평일 미사
화 ~ 금 - 오후 7 시 30 분
수요일 - 오전 9 시
영어 미사
주일학교
교리 오전 10 시 30 분
미사 오후 12 시 15 분
성사 안내
고해성사
주일미사 30분 전
평일미사 미사 전
유아세례
짝수월 첫째 주
토요일 (오후 6 시)
병자성사
위급하기 전 연락.
봉성체
매월 둘째 수요일
예비자 교리
일요일
한글 오전 9 시
영어 오후 12 시 30 분
혼인면담
적어도 3개월 전
(매주 수요일 오후 8 시)
주소
워싱톤 한인 천주교회
17615 Old Baltimore Rd.
Olney, MD 20832
사무실
전화: 301-924-8330
팩스: 301-924-8332
사무실
업무시간:
월, 화, 토: 9:00 오전 - 5:00 오후
수요일: 10:00 오전 - 6:00 오후
목, 금: 9:00 오전 - 6:00 오후
일요일: 9:00 오전 - 3:00 오후
사제관
전화: 301-924-8340
이찬일 안드레아 신부님
본당 사업계획
2005년 본당 행사 일정
1월 1일(토)
1월 2일(일)
1월 9일(일)
2월 15일(토)-16일(일)
2월 6일(일)
2월 9일(수)
2월 13일(일)
2월 20일(일)
3월
3월 6일(일)
3월 13일(일)
3월 13일(일)
3월 20일(일)
3월 27일(일)
4월
4월 21일(목)-24(일)
5월
5월 21일(토)
5월 29일(일)
6월
6월 5일(일)
6월 10일(금)-12(일)
7월 3일(일)
7월 10일(일)
8월 14일(일)
9월
9월 18일(일)
9월 20일(화)
10월
10월 9일(일)
11월
11월 12일(토)
11월 13일(일)
11월 19일(토)
11월 27일(일)
12월 18일(일)
12월 25일(일)
12월 25일(일)
12월 31일(수)
천주의 모친 성마리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
벨 콰이어 연주
단체장 연수(구반장, 사목위원)
구정 합동 위령 미사
재의 수요일
정두영 보나벤뚜라 신부 특강
예비자 환영식
(성 요셉 성월)
김병두 베르나르디노 신부 특강
Fr. Frank Donio 신부 특강
2005년 사목 협의회 총회
박상훈 신부 특강
부활 대축일 및 바자회
영적 독서 12권 읽기 운동 시작
치유와 은혜의 밤
(성모 성월)
성모의 밤
박아담 부제 사제서품 첫 미사
(예수 성심 성월)
예수 성심 대축일
구룹 성서 특강과 연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이동 5일)
교육관 본헌식 예정
성모 승천 대축일 (경축 이동 15일) 및 영세식
(순교자 성월)
추석 합동 위령 미사
성 김대건 안드레아/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 대축일
(묵주 기도 성월)
본당 골프대회
(위령 성월)
경노 잔치
연도 대회
문화의 밤 예정
본당 신부님 영명 축일 행사
대림절 특강
성탄 대 축일
송년 잔치
송구영신 미사
연중 제 23 주일 [가해]
제1독서:에제 33, 7~9; 제2독서:로마 13, 8~10; 마태복음:18, 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내이름으로 모인 곳
하느님의 참된 보초
남에게 해야할 의무
형제가 죄를 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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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며칠 동안 주문진 성당에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첫 날은 오대산에 들렀습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 때문에 오후 늦게 서야 갔는데, 인적이 드물었고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로 들어가는 길 이 비포장이라서 그런지 운치가 한층 더 했습니다. 상원사에 도착하니 어느 스님이 범종을 치고 또 다른 스님은 대 웅전에서 목탁을 두드리면서 염불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잿빛이 드 리운 산사, 적막함속에 부처님의 자비와 진리가 감돌고 있는 듯했 습니다. ‘저 스님의 화두(話頭)는 뭘까?’내려오는 길에 생각해보았 습니다.
다음 날, 9월 초하루 늑嗤 초여름처럼 햇살이 따가워서 오후 늦 게 설악산으로 갔습니다. 설악산은 여러 번 갔었는데, 소신 학생 때 수학 여행와 설악동으로 해서 대청봉에 올랐었고, 대신 학생 때는 백 담사 쪽에서 올라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설악동 안에서 뱅뱅 돌았을 뿐이었고 잘해야 케이블 카 타고 권금성에 가서 사진 한장 찍고 오거나 아니면 마음먹고 비룡 폭포 다녀오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더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신흥사를 거쳐 계 조암에 있는 흔들바위까지, 그 다음 날은 울산 바위까지 갔습니다. 혹시 왜 울산 바위라 일컫는지 아십니까? 이런 전설이 있더군요. 옛날 옛적에 조물주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금강산 을 만드시기 위해서 전국의 명산과 바위를 모이게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울산에서 대표할 만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바위가 참석하기 위 해 일찍이 길을 떠났지만 워낙 거대한 바위인지라 도착 시기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합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 에 설악의 비경에 탄복해서 그 자리에 눌러 앉게 되었다 해서‘울산 (蔚山) 바위’라 일컫고 있다 합니다. 이 얼마나 해학적입니까? 학창 쳄煊〈 빨리 오르는 그 자체와 정상에 올랐다는 쾌감에 만 족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올라가는 속도는 점차 뒤쳐지고 있지 만 대신 오르면서 산의 맛을,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으면서 흙냄새까지 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정상에 오르면 그 기쁨은 배가 됩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산이든 밑에서 그저 쳐다보거나 산보하는 것보다는 역시 힘은 들지만 그런 전설이 담겨 있는 바위에 기어 올라가야 그 산의 멋을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 습니까?
“주님, 제 몸을 막아주는 큰 바위”(31, 3) 라고 쳤 저자가 노래하 였듯이 거대한 울산 바위와도 같은 하느님을 우리 자신 일상 생활 속 에서 생생하게 신앙 체험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 생활하는 이 유이고, 신앙의 멋이고 맛입니다.
따라서 그저 하느님을 바라다보거나 남의 얘기를 전해 듣고 체험 된 남의 글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신앙 생활이 되어서는 결코 안되 겠습니다. 야뽁 나루에서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을 하였듯이(창세 32, 23~33) 땀 흘림과 유혹 극복, 곧 영신 수련을 통해서 하느님과 만나고 체험하는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산이든 마찬가지만 설악산 역시 정상으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아닙니까? 그처럼 하느님의 체험 역시 그렇습니다. 등산을 하는데 만일에도 한 코스만을 고집한다면 그 산을 다 이해했다고 말 할 수 없듯이 지금 실천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신심만을 고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떤 이는 성모 신심을 통해서 어떤 이는 성체 신심을 통해서 어떤 이는 봉사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 의 신심만을 고집한다면 반쪽의 하느님만을 만날 뿐입니다. 따라서 한 가지만 고집하기보다는 여러 신심 행위를 통해서 하느 님을 풍요롭게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애써 癤 바위에 올라갔었지만 운해 때문에 바위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설악의 비경을 접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습니다. 이처럼 자연이 그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비경을 접할 수 없 듯이 하느님 역시 그렇지 않겠습니까? 안간힘을 다해서 뭔가를 추구 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은총이 없어서 허사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구원과 하느님의 체험 역시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할 때 성취되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산하면서 너무 세상일에 집착하지는 않았는지, 언젠가 하산해 야 할 삶인데, 별것 아닌 것에 감정을 앞세웠고 너무 쫀쫀하게 살아 왔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은총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서울로 오는 날, 낙산사에 들려서 동해를 바라다보고 잠시 해변에 나가 보았습니다. 늦여름의 해변이라 썰렁했지만 파도는 여전했습 니다. 밀물과 썰물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하느님의 뜻입니다. 어찌 밀물만 있을 수 있겠으며 썰물만 있겠습니까? 밀물과 썰물이 공존하기 때문에 지구가 생존하듯이 인간의 삶 역시 밀고 당기는 것 이기 마련입니다. 드나듦을 통해서 파도가 돼서 동해로 나가는 것처럼 선과 악을 나드는 신앙 생활이지만 부단한 영신 수련을 통해서 하느님의 넓으 신 은총을 만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순교자 성월’9월 첫째 주일,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습 니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서 자연이나 성지를 찾아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무엇보다도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우리 자신의 신앙을 깊 이 반성해보면서 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신앙이 될 수 있도록 부단히 영신 수련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터무니없는 시기와 질투, 비난과 모 , 이렇 게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 물질적 피해를 당했을 때, 더욱 이 안하무인격으로 나올 때 어떻게 대응합니까?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단 둘이 만 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고,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모든 사실을 밝히고,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라”고 말씀하질 않았습니까? 따라서 남의 잘못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되받아친다든지 왕따시키 거나 어디 두고 보자고 벼르고 있기보다는 형제적 사랑을 가져야 하 겠습니다. 격정이나 분노보다는 인내와 지혜로써 남 잘못에 대해 충고해주고 개선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한다는 것, 인간적인 노력만으 로는 참으로 어렵기 때문에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이 필요 한 만큼,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오늘 복음 말씀대로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 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 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에제키 예언자를 이스라엘 족속 의 보초로 세우신 것처럼 우리 자신 이 사회가 더 이상 타락하지 않 도록 구조적인 악들을 감시하고 예방하고 개선시키는 보초로서 부 여받은 사명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이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는 이들에게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라고 타이르고 건전한 민주 사회를 이룩하는 데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을 명심하면서 일상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 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 다. …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겠고, 어 쩔 수 없이 잘못을 했다면 먼저 용서를 청하고 남의 충고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우리 자신의 잘못을 교정시켜나가야 합니다. 또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는 부정부패 에서 우리 자신 먼저 벗어나야 하겠고, 유혹에 빠지지 않고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99.9.5)
내이름으로 모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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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월 첫 번째로 맞이하는 주일이며‘순교자 성월’이 시작되 었습니다.
200여 년전 그 모진 박해를 감수인내하며 고귀한 자신의 목숨까지 도 바쳐가면서 천주교 신앙을 이 땅에 심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 게까지 전해주신 순교 성인들, 특히 103위 순교 성인들, 또한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셨던 순국선열들 가운데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또한 얼마나 많이 계십니까?
누구보다도 우리 민족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이등박문을 사살했던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바로 천주교 신자이셨고 그분의 세 례명은 도마가 아닙니까?
어느 증언에 의하면“안 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은 후 고해성 사를 받고 영성체를 하였으며, 여순 감옥에서 사순절에는 매일 아침 을 굶었고, 자신의 처형 날짜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본받기 위 해 성 금요일로 정해달라고 청할 정도로 깊은 신앙심을 갖고 계셨 다”고 합니다.
그런 신앙심이 바탕이 됐던 안 중근 의사의 애국 애족의 정신과 목 숨 바쳐 복음을 전하셨던 순교 선열들의 믿음을 본받아 그분들의 후 예들답게 최선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함은 물론이겠고, 우리 나라의 평화 통일을 위해서 애써 일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떤 본당 회장님이 아름다운 성모동산을 건립하고자 유명한 조 각가에게 성모상 제작을 의뢰하면서 조각하기 전에 샘플 몇 종류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조각가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심혈을 기울 여서 몇 종류의 성모상 모델을 제시하였더니, 그 본당 회장님께서 마 음에 들지 않았던지 그 조각가에게“당신은 성모님을 보신 적이 있 으십니까?”라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그래 그 조각가가“뵌 적이 없다”면서“그럼, 회장님은 성모님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어보자, 그 회장님이 기다렸다는 듯 이“그럼요. 뵌 적이 있고말고요.”라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 안에 모셔두고 있는 성모상을 가지고 와서“여기 계시질 않 습니까?”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 회장님이 성모님의 참 모습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 성모 상 역시 어떤 조각가가 상상해서 예술적으로 조각한 상에 불과할 뿐 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보면 그 회장님처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고정 관념을 버리 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그 무엇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어려운 경우가 우리에게도 비일비재하질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사실과는 전혀 다른 고정관념과 선입견 때문에 작은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간에 얼마나 상처를 주고받습니까?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 느님께 대한 우리 자신의 잘못된 고정 관념과 편견을 버려야 하겠습 니다.
자신의 편리에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불편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면 아니 되겠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지식으로 써가 아니라 성서를 통해서 올바르게 하느님을 만나야 하겠고 이웃 의 입장이 되어 남을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웃의 허상이 아닌 실상을 파악하려 하고 우상 숭배나 미신이 아 닌 참된 탑湛 애써 추구하는 생활이야말로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끊임없이 실천해야 할 신앙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 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자녀가 버릇없이 굴고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그냥 내버 려두는 것이 자식 사랑일까요? 아니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일 깨워주어야 합니다. 함께 생활하고 있는 동료나 이웃의 잘못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덮어두려 構킬 두둔하는 것이 우정이요 미덕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충고해주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한 일이 요, 그것이 참된 사랑 행위가 아닐는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그러나 듣 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모든 사실을 밝히라.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고 하질 않았습니까? 따라서 이웃에게 무언가를 충고하고자 할 때는 그 사람의 인격과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야 하겠고 한번에 그치지 말 고 끊임없이 충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진중거(陳仲擧)와 이원례(李元禮)라는 뛰어난 두 인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더 뛰어난가를 가려내질 못했습니다. 이 때 한 사람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진중거는 윗사람에게 충 고하는데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으며, 이원례는 밑의 사람들을 통 솔하는데 뛰어납니다. 윗사람을 충고하는 것은 어렵고, 밑의 사람을 통솔하기란 쉬운 일입니다. 고로 진 중거가 훨씬 인물이 뛰어납니 다.(世說新語)” 사 윗사람에게 무언가를 직언한다는 것, 성서 말씀(마태5,37)대로 ‘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라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아직도 YES MAN만 많고 NO라고 해야 할 때 NO라고 말하지 못하 는 요즘,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는 세태에서 살고 있지만 그 러나 우리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오늘 제1독서의 말씀대로 우리는 이 시대와 우리 민족의 보초요, 한마디로 하느님의 보초인 신앙인들 이 아닙니까?
보초의 임무가 뭡니까?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질 않습니까? 만약 누군가가 인간의 생명과 인격을 경시하려는,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려는 징후가 있으면 적발하여 알려야 할 것입니다. 남모르게 부정과 부패를 일삼는 사람이 있다면 충고해 주어야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고발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한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역사의 보초로서 직무유기요,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책임 추궁을 피할 수 없을 것입 니다.
하느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질 않으셨습니까? “내가 한 죄인에게‘너는 사형이다’라고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 네가 그 죄인에게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价括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 그러나 네가 그 죄인에게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라 고 타일러 주었는데도 그가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면 그는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너는 죽지 아니하리라.” 나만 올바르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 식의 자족하는 마음이나, 나만 구원받으면 그뿐이라는 이기적인 신앙심보다는 타인의 잘못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지고 잘못한 이들의 회개를 위해 애써 노력해야 하겠습 니다. 뿐더러 나 하나쯤이 아니라 내가 먼저 냉담 교우에게 다시 신앙을 권유하고 아직도 하느님을 모르고 있는 이웃에게 하느님을 알게 하 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 말씀대로“너희 중의 두 사람 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 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 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93.9.5)
하느님의 참된 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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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썬다싱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날 네팔 지방의 한 산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방향이 같은 여행자가 있어 두 사람은 눈발을 헤치며 바삐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인적이 드문 산비탈에 이르렀을 때 눈 위에 쓰러져 다 죽어가는 사 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썬다싱은 같이 온 여행자에게“우리 이 사람 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두면 분명히 얼어 죽고 말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행자는“미쳤소? 우리도 죽을 지 살지 모르는 판국에 한 가하게 누구를 도와준단 말이요?”하며 오히려 화를 내면서 먼저 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썬다싱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 등에 업고 있는 힘을 다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눈보라는 갈수록 더 심해지고 이젠 정말 걷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등에 업힌 사람의 얼었던 몸은 점점 녹아 의식을 회복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을 가까이에 왔을 때 썬다싱은 얼어붙은 시체 하나를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먼저 가버 렸던 바로 그 여행자였던 것입니다.
인도의 성인, 썬다싱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혼자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이 아닌 이웃과 더 불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의미 있는 인간다운 삶이요 영원 한 생명, 곧 구원으로 나아가는 참 신앙의 길임을 말해주고 있질 않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이웃을 위한, 더불어 사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전 주일 모 일간지 (동아일보, 90. 9. 2 )에‘그 운전사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사설이 실려 있었습니다.
“전주 천일 택시 소속 운전사 이일령씨가 31일 숨졌다. 29세의 청춘이 너무 아깝다. 이씨는 은행에서 돈을 찾아 나오는 낯모르는 행인이 소매치기 당하는 현장을 보고 택시에서 내려 범인 2명을 추적하다 범인이 휘두른 칼에 변을 당했다.
유명한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의 윤리가 썩어가고 있고 몰염치한 경제인들이 나라 살림이야 어떻게 되던 모리(謨利)에 몰두하는 판국 에 택시 기사라는 보통 사람, 무명의 백성 한 명이 범죄와 싸우다 숨 졌다. 있는 자, 가진 자, 누리는 자들이 거짓을 농하면서 특권과 특혜 를 만끽하고 있으며 일신의 안일을 도모하는 요즈음의 세상 돌아가 는 판에서 그의 죽음은 너무 아깝고 귀하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되듯이 온통 돈독이 오르고 권력욕에 맹 목되어 있는 이런 사회에서 그래도 깨어있고 눈 부릅뜨며 옳고 바르 게 살려 심지가 있었다. 범죄가 백주에 공공연히 자행되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붙잡아 내야하는 시민 정신이 있었다….” 폭력과 범죄가 일과처럼 터지다 보니 모두들 무신경, 무감각, 무관 심 속에서 내 몸 하나 다치지 않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범죄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이를 외면하고 방치하고 있는 오늘의 세태에서 과연 그 운전사의 의로운 죽음은 무엇입니까?
또 이런 이웃을 위한 더불어 사는 삶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요즘 어디를 가나 차의 홍수 속에 많은 사람들이 심한 몸살을 앓 고 있다. 오늘도 예외 없이 차들이 밀리기 시작 磯 . 출근길마다 많 은 차들이 붐비고 있는데, 사거리에선 차들이 신호등이 바뀌어도 아 예 교통규칙을 무시한 채 서로 먼저 가려고 하다보니 순식간에 차들 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사방에서 클랙슨을 울려대고 바로 앞에선 접촉사고로 험악하게 싸우고 있을 때, 어느 개인택시 기사가 차에서 뛰어내려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직진 차를 먼저 보내고 잠시 후에 우회전, 좌회전 차를 차례대로 통과시키니 차들은 다시 질서를 잡고 신호등에 따라가기 시작했다.
멋진 기사 아저씨. 한 푼이라도 수입을 더 올리려고 마구 규칙을 위반하는 택시 운전사가 많은데, 이분의 기사도는 오늘 이곳을 지나 는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벌어준 것인가?”(한국일보, 여 자의 마음, ‘멋진 택시 아저씨’, 90 . 8 . 29 )
차들이 제자리를 빠져나가고 다시 질서를 회복했을 때 차에 올라 유유히 사라졌다는, 그 운전사의 기사도 정신은 또 무엇입니까? 아무리 저 여행자의 말처럼“미쳤소? 우리도 죽을 지 살지 모르는 판국에 한가하게 누구를 도와준단 말이요?”라고 말하고 살아가는 오 늘의 우리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 택시 운전사의 의로운 죽음과, 그 기사도 정신은 참으로 이웃을 위한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분 명히 보여준 것이고, 그러기에 또한 그런 더불어 사는 삶이야말로 이 미 우리가 여태껏 살아왔어야 했을 그런 신앙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현재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무엇하는 사람들입니까? 이에 대해 오늘 예언자 에제키엘에 의한 제 1독서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보초로 세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하느님의 보초입니다. 그러기에 또한 이 나라 이 민족의, 이 사회를 지키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보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가 잠들고 방심해 있다하더라도 제자리를 지키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 적군의 접근을 보았을 때, 이웃 의 위험을 감지했을 때는 즉시 전체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더라도 이 사회를, 이웃을 철두철미 하게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겁이 나서 자기 혼자만 살 기 위해 도망쳐버린다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익과 영달만을 지킬 뿐,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 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무책임한 보초가 아니라, 매일 삶을 살아가면서도 진정 이웃을 위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 도 불사하면서까지 이웃을 보호해주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 느님의 참된 보초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겠습니다. (90.9.9)
남에게 해야할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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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여러분,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 니다.”(로마 13,8).
그렇습니다. 오늘 제2독서를 통해서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사 랑의 의무란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어찌 할 수 없는 의무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의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끊임없이 진실 하게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지켜야 할 첫째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무인 사랑, 우리가 마땅히 실천해야 할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옛날 옛적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에게는 불행하게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왕국 안에 있는 모든 마을마다 포고 령을 내렸습니다. 그 내용은 유능한 젊은이라면 모두 왕위를 계승할 수 있으며 왕과의 면담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두 가지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하였습니다. 첫째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그 포고문을 보고 자신이 진실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 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왕을 찾아가기로 하 늄윱求 . 그러나 그는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왕을 만나 뵐 때 입고 나갈 옷이 변변치 못하 였습니다. 또한 그는 궁궐까지 가는데 필요한 여비를 마련할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좋은 옷과 여비를 충분히 마련할 때 까지 여기 저기 구걸하며 다녔습니다.
마침내 그는 궁궐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길옆에 앉아 있던 한 불쌍한 거지를 만났을 때, 그의 여행을 그만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거지는 누더기를 걸친 채 떨면서 앉아 있다 가 팔을 뻗어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는“춥고 배가 고픕니다. 제발 저를 좀 도와 주세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젊은이는 그 거지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즉시 자기가 입고 있던 새옷을 벗어 거지의 누더기 옷 위에 걸쳐 주었습니다. 다른 것 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는 여비를 모두 털어 거지에게 주었습니 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집에 돌아갈 여비도 없이 누더기를 걸친 채 계 속 궁궐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궁궐에 도착하자 왕의 시종이 그를 안내하였습니다. 오랫동안 기 다린 후, 마침내 그는 왕의 방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젊은이는 왕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눈을 들어 왕을 본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당신은 거리에 있던 그 거지가 아닙니까?”
“그래, 맞다! 그 거지가 바로 나였다!”“그럼, 어째서 나에게 그런 거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까?”
“그것은 자네가 정말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아 보기 위해서 였지. 만일 내가 왕의 모습으로 자네 앞에 나타났다면 자네는 틀림없이 나의 황금 왕관과 비단 옷에 압도되어 내가 요구하 는 것은 무엇이나 했을 걸세. 그렇게 된다면 나는 자네의 마음속에 정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모르고 말았을 걸세. 그래서 나는 거지로 변장해, 자네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요구했네. 나는 자 陋 진정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발견했다네. 자네는 나의 후계자 가 될 거네. 그리고 나의 왕국을 차지하게 될 걸세.” 이 이야기 속의 젊은이가 보여준 사랑, 우러나는 마음으로 거지에 게 아무런 조건 없이 아낌없이 자신에게도 부족한 것들을 나누어 준 사랑,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런 사랑이 바로 우리가 마땅히 실천해야 할 진정한 사랑이 아니 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너무 선별적이고 조건적이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을 누구에게 구애됨 없이 아낌없이 나누는 사랑으로 뒤바꿔 놓아야 합니다. 원수까지라도 용서해 주는 사랑, 도 대체 용서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죄인들까지도 먼저 이해해 주고 용 서해 줄 줄 아는 사랑을 우리는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주변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오늘 복음 말씀대로 그들을 만나 그들의 잘못을 타일러 주는 것 역시 사랑의 실 천임을 잊지 마십시오.
특히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불의와 분열을 조장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인 것을 모르는 형제 자매가 있다면 그 이웃을 공공연하게 폭로 하거나 숨어서 험담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진정한 충고를 해 주곤 합니다.
충고를 해주는 데 혼자 하기 힘이 든다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며, 그것으로도 힘이 부치면 교회 공동체의 이 름으로 끝까지 충고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충고,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결코 잊어 서는 안 될 것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이란 바로 먼 저 이해하고 용서해 주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기도하는 마음으 로 사랑을 실천할 때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다시 한번 끊임없이 기도하 마음으로 누구든 구애됨 없이 사랑을 실천합시다.
우리 주변에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고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먼저 이해하고 용서해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찾아 가 충고해 줍시다. (87.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