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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1일
1년 중 가장 덥다는 8월로 접어들었다. 어제 나가서 오늘 새벽에 들어왔으니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9시경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식사를 하고 의욕도 없이 뒹굴거리며 오전을 보냈다. 오후에 어머니 요양원에 가는데도 정신이 몽롱하여 가까스로 다녀와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데 어제 무리했고 다음부터는 절제를 하자는 영식이 전화가 왔다. 우리들 모임에 자신의 고향사람을 동석하게 하여 시간이 늦고 과음을 하게 된 것인데 항상 지적을 하는 일이지만 영식이는 술을 마시면 친분이 있는 여러 사람들을 불러들여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어 놓기 일쑤다. 어제도 늦은 시간에 나이가 많은 형님이라는 분을 우리들 자리에 참석시켰고 또 다른 그의 친구까지 불렀다. 자신이야 모두 가까운 존재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초면이고 그나마 나는 한 번씩 봐서 이해가 되어도 정식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럽고 불편했을 것이다. 영식이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고 그것보다는 친구들끼리도 앞으로는 매사에 절제하는 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
2일 날씨가 흐리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오늘은 아들까지 데리고 일찍 요양원에 도착했다. 훤칠한 키에 얼굴까지 잘 생겼다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니 아직 나이가 어린 아들은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진다. 어머니를 모시고 그늘이 있는 밖으로 나와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하는 중에 옆에서는 지루한지 핸드폰만 만지고 연신 하품을 하는 아들이 앉아 있다. 점심을 드시기 위해 다시 요양원으로 이동하면서는 아들이 휠체어를 밀고 나는 뒤를 따랐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머니를 보며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부러워하는 말을 던지지만 듣는 나는 쑥스럽기만 했다. 오면서 서대문세무서 근처에서 맛있어 보이는 김치를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 알맹이는 없고 겉저리뿐이다. 저녁에는 닭백숙을 만들어 무더위를 날리며 가족들이 맛있게 먹었고 식사 후에 아들이 이모댁에 간다는 것을 시간도 늦고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허락을 하지 않았다. 휴가철에는 가급적 서로 부담을 주지 않고 각자 편하게 지내는 것도 필요한데 이것이 내 생각뿐이었을까, 10시가 거의 되어 용구가 우리 집에 왔고 곧바로 아내와 아들까지 정동극장으로 심야영화를 보러 나간다. 밤 11시부터 내일 새벽까지 긴 시간 몇 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것으로 집에서는 나와 딸만이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3일 휴가의 절정을 이루는 8월의 첫 번째 일요일이다. 올해는 가족과 근교도 나가보지 못하여 아들이나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어제 영화를 보고 새벽에 들어온 아내와 아들이 잠에 빠져 들어 아침도 먹지 못했다. 북한산에 가서 식사를 하려고 음식을 준비하여 정릉에 도착하니 계곡에 물이 콸콸 흐르고 있다. 물소리를 들으며 보국문에 올랐다가 다시 칼바위로 돌아가 바람이 부는 정상에 앉아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녹음이 우거진 북한산의 맑은 공기를 몰고 내려와 한산한 거리를 달려 요양원에 들어가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왔다. 저녁에 좋은 요양원을 지정해 주어 고마워서 식사라도 함께 하자고 했더니 용구아빠가 한 걸음에 달려왔다. 소고기 등심을 한양상가에서 사다가 저녁을 먹었고 이후 아들과 딸 그리고 조카들까지 5명은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놀고 들어왔다.
4일 어제 밤에 맥주를 마셨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나는 맥주가 잘 맞지 않아 1컵 정도는 괜찮은데 1병 이상을 마시게 되면 속이 더부룩하고 편하지가 않다. 11시경 잤다가 눈을 뜨니 새벽 1시20분이 지나고 다시 잠이 들어 7시에 일어났다. 신문과 TV를 보면서 아침을 보내는데 가족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잠을 자고 있다. 결국 9시에 깨워 늦은 식사를 하고 종로도서관에 아들과 딸을 태우고 갔다가 조용한 안쪽 자리까지
지정하여 주고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점심쯤 집에 돌아오니 신설동 3층 명도소송에 대한 상대방의 답변서가 도착해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법정소송이나 적대감이 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지만 대화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일들이 많아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수단이다. 주변에 보면 말만 내세우고 겉과 속이 다른 인간 부류가 많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점심을 먹고 요양원에 들어서니 오늘은 새로운 간병인들이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고 있는데 아마 어제까지의 간병인들은 불친절?하여 쫓겨났지 않았나 싶다. 집으로 오는 중에 동생 정환이가 어머니(고모님)께서 간이 좋지 않아 부천에 있는 순천향병원에 정기적으로 다니는데 당장 이식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독하다고 심난해 하기에 힘을 내고 방법을 찾아보자고 위로를 했다.
5일 열대야 현상이 계속되고 속도 거북하여 밤새 뒤척이다 아침을 맞이했다. 몸무게가 줄어든 느낌으로 일어나 신문을 보는 중에 고향에 내려가 유명한 영덕 풍력발전소를 산책한다는 영식이 전화가 온다. 아름다운 동해와 시원한 바다의 바람이 여기까지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아들은 언제쯤 잤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안에서 인기척조차 없다. 운동하러 가면서 신설동에서 보낸 답변서에 대하여 임대인의 입장에서 반론을 제기한 서류를 다시 법원으로 보냈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고 내일 회기동으로 이전하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가서 뵈었다. 정이 들만하면 떠나는 자리가 못내 아쉽지만 산다는 것이 이별과 만남의 연속이니 담담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다. 오후에 아들이 다니는 수학학원에 가서 상담을 하고 홍제천 남양아파트 입구에서 순대국으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올 여름에는 마음이 바빠서 휴가를 가지 못했고 다음에 상황이 나아지면 함께 여행을 가자고 하니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순대국을 맛있게 먹는다. 초저녁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밤에 여의도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고등학교 후배인 승용이가 선배이면서 나의 친구인 우현이와 함께 있다고 전화가 와서 택시로 나갔다. 내일 요양원 이전도 하고 늦은 시간이라 망설였는데 워낙 가까운 친구이고 후배라서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몇 시간을 보내고 우현이가 대리운전을 신청하여 자신의 차로 집까지 태워준다기에 어쩔수 없이 일단 승용이와 동승을 했다. 그런데 차로 이동하면서 후배 승용이와 대리기사가 말싸움이 생겼고 급기야 차에서 내려 몸싸움을 벌이고 나와 우현이는 말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리기사가 신고를 하여 여의도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다가 서로간의 주장이 엇갈려 영등포 경찰서로 인계되어 다음날 아침까지 대질 신문을 받았다. 하지만 서로 감정이 풀리지 않아 화해나 합의가 안 되었고 결국 법원에서 판결하기로 하고 아침에 경찰서를 나왔다. 싸움을 말렸던 우리까지 가담자로 분류되어 출두하게 되었는데 가만히 있어도 숨쉬기 어려운 무더운 여름날 또 일이 생긴 것이다.
6일 새벽부터 아침 8시까지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며 옥신각신 했고 담당 경찰들도 어렵게 서류를 작성하며 조서를 마쳤다. 싸움을 말리면서 옷깃에 닿기만 해도 상대방 입장에서 불쾌했다면 상처의 유무와 상관없이 폭행이 된다는 조항이 어이가 없었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 납득이 되는 부분도 있다. 설상가상 어제 저녁에 여의도에 나오면서 택시에 핸드폰을 놓고 내려 밤새 연락도 제대로 못하고 우현이와 승용이 전화를 빌려서 가까스로 사용을 했다. 오늘 어머니께서 요양원을 옮겨 가시는데 형에게 전화를 하여 잘 모셔달라고 하니 염려마라면서 시간이 될 때 뵈라고 한다. 핸드폰은 다행히 택시기사가 오전에 무악재로 가지고 와서 수고비용을 주고 찾기는 했지만 이래저래 피곤한 밤이었다. 잠이나 좀 자려고 오전에 누웠는데 눈도 감기지 않고 몽롱한 정신이 불안감으로 이어지는 시간이다.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아내와 오늘 이전한 어머니 요양원에 가면서 어제 폭행사건에 대하여 과정을 이야기하니 평소에도 내 성격이 이상하니 정신병원에 가서 감정을 받아보라고 한다. 싸움을 말리는 중에 뜻하지 않게 일어난 것이고 또한 살다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보다 더 난감하고 황당한 일이 생길 수 있는데 위로는 커녕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다니 화가 나서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밖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상식과 유머가 있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데 아내는 자신만의 한정된 생각이나 틀에 맞지 않으면 전혀 이해를 못하니 안식처處는 커녕 답답처妻일 뿐이다. 유자원에 들어가니 어머님께서 편안해 보이시고 이전 요양원과 달리 간병인들의 정성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었다. 이곳 유자원은 고려시대 박인로의 시조 <소반 위의 홍시감이 좋아도 보인다. 유자柚子가 아니라도 가져가서 부모님께 드리고 싶지만 반길 사람이 없으니 그것이 슬프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효도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육적의 회귤고사懷橘古事가 나오는 내용과 관련이 있는 명칭이다.
7일 요즘 낮에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아침과 저녁에는 선선하고 바람까지 불어 쾌적한 8월의 초순이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EM학원에 가서 진행상황을 점검하니 원장이 너무 신중하여 진전이 없다. 하지만 투자하는 입장에서는 학원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내가 조언을 한다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집으로 오면서 쇼핑이라도 하면 즐거울까 하고 딸에게 전화를 하여 서울역 롯데마트에 함께 가기로 했다. 오후 2시에 도착하여 세일 품목인 포도와 수박을 사려고 하니 물량이 다 팔렸고 김치와 젓갈 그리고 삼겹살만 사 가지고 돌아왔다. 점심을 하고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 뵙고 돌아오면서 먼저 온 형수님과 여동생을 태워 교통이 편리한 태능입구에 내려주었다. 공릉천에서 내부순환도로를 오르니 긴 여름 해는 서쪽 하늘로 기울어 있고 함께 간 딸은 잠이 들어 있다.
8일 오늘은 더위가 마지막이라는 말복이다. 연일 찜통더위가 계속 되더니 급기야 오늘은 서울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간다고 하고 TV에서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으로 술렁이고 있다. 된장찌개로 아침을 하고 치과에 가는 아들을 태우고 인왕산 아파트 상가에 들렀다가 체육관으로 갔다. 운동을 마치고 요양원에 가서 매월 방문하며 많은 과일을 가져온 영식이를 만나 함께 어머니를 뵈었다. 잠시 후 요양원을 소개한 용구아빠가 병문안을 왔고 이어 여동생도 왔다. 요양원에서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밤 11시가 되어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팥빙수를 만들어 함께 먹었다. 늦은 밤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열대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밖으로 보이는 건너편 아파트도 집집마다 초저녁같이 불을 밝히고 있다.
9일 오늘은 장인어른 생신이라 청주에 가야 하는데 엊그제 폭행사건으로 마음이 찜찜하여 선뜻 내키지 않는다. 거기에 올림픽 개막식을 오늘 새벽까지 보고 늦게 잠이 들어 일어나기도 힘들고 주머니 사정도 넉넉하지 않아 내년이나 참석하려고 생각했다. 된장국으로 식사를 마치고 음악회 때문에 어차피 참석을 못한다는 아들과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두고 아내와 딸이 일찍 청주로 향한다. 오전에 컴퓨터만 하던 아들은 2시경 세종문화회관 음악회에 나가고 나는 창문까지 열어두고 오후를 보내는데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땀이 흘러 내린다. 오후 5시경이 되어 손톱만한 소나기가 20여분 쏟아져 내려 그나마 후련하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혼자 저녁을 준비하여 먹는데 아들은 음악회를 마치고 친구들과 영화까지 보고 왔다며 8시가 지나서 들어왔다. 함께 식사를 하고 초저녁에 나부터 잠들었다가 열대야로 12시에 일어나 거실에 나오니 아들은 아직도 컴퓨터를 하고 있다.
10일 바람이 서늘하게 분다. 일찍 안산에 올라 걷고 기구운동까지 하고 내려오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산에 온 사람들이 많다. 집에 9시에 와서 식사를 하고 의정부에 영식이 처남이 운영하는 잣골농원에 가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집을 나섰다. 영식이가 영양탕을 준비하여 나와 친구들 그리고 자신의 고향 사람들을 초대하여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비용도 많이 들지만 웬만한 여유가 없이는 어려운 행사다. 먼저 요양원에 가서 어머님 뵙고 7호선 중화역에서 정식이를 태우고 농원에 도착하니 12시40분이 되었다. 오전에 도착한 일행들이 식사를 하는 가운데 합석하여 음식을 푸짐하게 먹었는데 담백하고 맛이 있다. 술도 마시고 계곡에 발도 담그고 오랜만에 서울의 잡념을 잊고 시간을 보냈다. 오늘도 기온이 높아 그늘진 원두막에 있었음에도 땀이 흘러 힘들었지만 이열치열하는 심정이었다. 오후 5시경 농원을 나와 태능입구에 정식이 내려주고 집에 6시경 들어왔다. 어제 청주에 갔다가 오늘 일찍 올라온 아내는 저녁에 허리디스크 통증으로 고생을 하더니 밤 9시경에는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의 고통을 호소하여 걱정을 많이 했다. 나이가 들수록 꾸준히 운동을 해서 체력을 길러야 하는데 내가 손을 써 볼 수도 없는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11일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이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어제 허리통증으로 뒹굴던 아내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다. 아침에는 어제보다 많이 좋아졌다며 약간 불편한 자세로 식사를 준비한다. 밥을 먹고 침대에 누워 있으니 촌각을 다투며 살아온 지난 시간이 스쳐간다. 대학을 졸업하고 새벽에 나가서 강의를 하고 그러다보니 주말을 제외한 아침식사는 집에서는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다. 새벽 5시30분 기상하여 6시에 집을 나서는 부지런하고 치열했던 시간, 현재와는 완전 대조적인 지난 23년의 삶이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꿈과 희망이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백과 자신감이 있으니 나는 반드시 내 모습을 찾아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점심을 먹고 아내와 아들 딸에게는 물냉면을 배달시켜 주었는데 아내는 조금 먹고 학원에 가고 아들과 딸은 맛이 없다고 거의 남겨서 버리는데 돈도 아깝지만 점심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여 찜찜한 마음이었다. 차를 몰고 어머니 요양원에 가서 넓은 휴게실에 함께 있었는데 이 곳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실컷 활동할 수가 있어 좋다. 저녁식사 전에 간병인이 목욕을 시킨다고 해서 어머님을 인계하고 요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12일 새벽에 번개가 수십 번 치고 소나기가 내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이 되어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평온하고 맑은 날씨다. 그렇게 무서운 밤과 새벽이더니 전혀 딴 모습의 하늘이 되었으니 오히려 어안이 벙벙하다. 일찍 일어나 어제 산 책을 읽고 8시에 아침식사를 했다. 고등어조림을 만들었는데 정성을 들였는지 이전보다는 깊은 맛이 나온다. 사람을 대하든 동물을 기르고 식물을 가꾸든 음식도 마찬가지 정성을 들이는 마음의 정도가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9시가 지나자 허리가 아프다는 아내는 수업하러 나가고 나는 10시에 안산을 올랐다. 산에는 매미울음 소리가 요란한데 세월이 흘러도 어린시절 고향 툇마루에서 듣던 그 소리는 변함이 없다. 땀을 흘리고 산에서 내려오니 12시가 되었고 베이징 올림픽 수영 200미터 결승에 우리나라 선수가 출전을 하고 있어 거실에서 아들과 딸과 합세하여 응원을 했고 결국 수영에서 은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룬다. 점심을 먹은 후 아들에게 가급적 학습효과가 있고 선선한 오전을 이용하여 공부하라고 이르고 요양원으로 출발했다. 어머니와 1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교보문고에 들어가 어제 샀던 책을 교환하면서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라는 책을 한 권 더 사와 아내에게 주었고 저녁에는 국수를 만들어 모두가 맛있게 먹었다
13일 밤새 비가 요란하게 내려 새벽 5시에 거실에 나왔다. 아내와 딸이 자고 있고 어제 새벽 1시에 수학학원에서 돌아온 아들도 깊은 잠을 자고 있다. 신문을 보고 책을 읽다가 8시에 미역국으로 식사를 하고 오전에 개봉동에 다녀오니 12시가 넘었다. 라면을 끓여서 나와 딸 그리고 아들까지 함께 먹고 오후에 아들은 종로도서관에 딸은 학원에 간다고 집을 나선다. 나는 안방에서 깊게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10여분이 지났다. 오늘처럼 짧은 시간에 깊은 잠을 자는 것은 건강에도 좋지만 시간을 거저 얻은 것처럼 기분이 좋다. 오늘은 어제보다는 기온이 낮다고 해서 안산에 올라 열심히 걷고 내려오니 3시가 지났고 지하철로 위생병원 뒤에 자리잡은 요양원에 도착했다. 간병인들이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실내를 돌고 있고 오늘도 편안해 보이시더니 내가 도착하자 가슴이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하신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노래 몇 곡을 불러드리니 다시 괜찮다고 하여 요양원을 나와 방배동 전주집에서 영식이를 만나 식사를 하고 752번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14일 어제 만난 영식이가 전화를 하더니 영덕에서 올라온 복숭아를 방배동 아파트 경비실에 두었다고 와서 가져가라고 한다. 마음은 고맙지만 거리가 있고 내가 시간이 부족하여 미루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와서 빨리 가져가라고 독촉을 한다. 일단 오전에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는데 신설동 1층 종업원이 피해 의류 드라이 비용이 8만6천원 나왔다고 통보를 한다. 일전에 그들이 요구한 오백만 원의 돈을 순수하게 넘겨 주니 요구하면 되는 줄 알고 틈만 나면 문자를 보내는데 사기로 고소한다고 하니 더 이상 전화도 문자도 오지 않는 가소롭고 우스운 일도 있다. 차를 몰고 오전에 방배동 가서 복숭아를 싣고 점심쯤 노량진에 가서 10월에 공무원 학원이나 직무적성 학원을 준비한다는 김성만을 만나 식사를 했다. 2시경 나오다가 메가스터디 남부원장을 우연히 만났는데 이번에 메가스터디 방학특강에 수강생이 몰려 대성공이라고 자랑을 한다. 부럽기는 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고 왕십리 한양대병원으로 김용 선배 병문안을 갔다. 나하고 친하고 만날 때마다 어렸을 때 본 경목이 안부를 묻는 10살이나 더 많은 선배가 술을 마시고 지하철역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한 사고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수술을 하고 벌써 1달 가까이 병상에 있었다는데 나한테 늦게 연락을 한 것이다. 1시간 병문안을 마치고 어머니 뵈러 요양원으로 가서 저녁 드시는 것을 도와드렸다. 저녁에 집에 들어와 식사를 하고 밤에는 거실에서 과일을 먹으며 올림픽에서 선전하는 우리나라 선수들을 응원했다.
15일 광복절 국경일이다. 내일과 모레가 토요일이고 일요일이니 연휴가 시작된 셈이다. 쾌청한 날씨에 산에 가려다가 아들이 축구를 하자고 해서 안산초등학교에 함께 갔다. 나는 운동장을 먼저 10바퀴를 20분 돌고 슛팅을 하는 아들의 골키퍼를 자처하여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고 어머니 요양원에 가려다가 여동생이 도착했다고 하여 오늘은 집에서 올림픽 중계만 보았고 아들은 친구들과 노래방에 간다고 2천원을 가지고 나갔다. 오후에 아내는 허리도 아프고 컨디션도 좋지 않다며 딸과 찜질방에 가고 나는 5시에 들어온 아들과 교보문고에 가서 공무원 문제집 아들은 영어회화 책을 샀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려 우산도 없이 찜질방에 간 아내와 딸을 태우러 홍제역 근처에 갔다가 얼마 전 아들과 먹었던 순대국집으로 이동하여 담백하고 맛있는 저녁을 사 주었다.
16일 올 여름 휴가도 못가서 집에서 가까운 무의도와 실미도를 다녀오려고 아침에 도시락과 과일까지 준비하여 나왔다. 아파트를 출발하기 전에는 뒤에 앉아 있는 아들한테 허리가 아픈 엄마를 위하여 자리를 바꾸어 앞에 앉으라고 하니 막무가내로 거절하여 말도 안 듣는 놈이라고 야단을 했다. 영종도 근처에서 배에 차를 싣고 무의도까지 건너는 5분에 승용차 운임으로 2만원을 지불했다. 다리가 있다면 1분이면 충분한 거리로 비용이 터무니없이 비싸고 오히려 이익을 위하여 주민들이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건설을 반대한다니 이것이야말로 이기적인 행동이다. 무의도를 돌고 서쪽 끝에서 바닷물이 빠진 시간을 이용하여 실미도에 들어가 북쪽 바윗길을 걸었다. 훤하게 트인 서해바다의 모습이었는데 물이 탁하고 밀려온 쓰레기가 많아 여기도 지저분한 바닷가와 다름아니다. 아내와 아들 딸은 조금 걷다가 되돌아가고 나 혼자 섬 한 바퀴를 돌아 과거 실미도 군부대 터를 지나 산으로 넘어왔다. 실미도는 북한 김신조 침입을 계기로 만들어졌고 김일성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특수부대원들이 주둔을 했던 곳이다. 부당한 대우와 혹독한 훈련을 이기지 못한 군인들이 서울로 진입하여 총격전을 벌이고 자폭하였는데 어린시절 나는 라디오에서 생방송 중계를 들었고 이번에는 영화로도 상영되어 감상을 하였다. 실미도를 출발하여 하나개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여 차안에서만 구경을 하고 다시 소무의도 방파제 쪽으로 이동하였다. 어디서나 멀리서 보는 바다는 낭만의 공간이지만 가까이서 보는 바닷가는 지저분함이 많은데 실미도와 마찬가지로 이 곳도 쓰레기가 많고 물까지 흐리다.
3시경 출발하여 공항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왔다가 곧바로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뵈고 저녁에는 휘경동에서 정식이와 대구탕으로 식사하고 돌아왔다.
17일 오늘은 늦잠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다가 어제 정식이와 술을 마시고 있으면서 피웠는데 이제는 분명하게 금연을 실천할 계획이다. 담배는 건강에 해롭고 주변이 지저분해지고 냄새도 나고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때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니 의지가 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9시경 식사를 하고 10시에 안산에 오르니 선선하고 바람까지 쌀쌀하게 불어 8월 중순임에도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정상을 오르고 약수터 근처에서 집에서 가져온 김치와 상추 그리고 고추장으로 점심도 먹었다. 산에서 먹는 밥도 맛있지만 아름다운 서울의 경치까지 감상하며 망중한忙中閑, 8월의 중순을 보냈다. 2시경 내려오니 아내는 허리가 아프다고 하고 아들은 TV를 보며 누워 있는데 산에서 보냈던 시간과는 달리 정반대로 집안은 우울한 분위기다. 차를 몰고 어머니를 뵈러 요양원에 들어가니 주무시고 계시어 바로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보냈다. 일요일인데도 사람소리가 없는 거실은 낮시간의 우울함을 넘어 이제는 음산하기까지 하다. 11시경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이 노크를 하더니 잠자려는 나를 보고 인사를 하는데 존경의 마음인지 컴퓨터를 하려고 내 동향을 보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평소에 안하는 행동을 생각하면 후자일 것이다
18일 비가 많이 내린다. 새벽에 신문을 보고 신설동과 관련한 서류를 작성하는데 장모님께서 서울대병원에 가신다고 청주에서 일찍 출발하여 오셨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장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도착하니 장대비가 쏟아지고 병원을 나와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집으로 오니 아들과 딸은 사이좋게 점심을 먹고 있다. 나도 옆에 앉아서 밥 잘 먹는 아들과 딸을 흐믓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장모님께서는 일찍 진단을 마치고 목동 이대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돈(동렬이 장모) 병문안 갔다가 들어오시어 함께 늦은 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사망한 김성우 미망인이 법무사에서 보낸 한정승인 서류가 도착했다. 한정승인은 고인의 남은 재산으로 채권자들의 채무를 갚는 것인데 이미 재산이 없는 성우이기 때문에 내 입장은 처음부터 미련을 두지 않았다. 다만 미망인의 입장에서는 어느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한정승인을 법적으로 신청해야만 고인이 된 남편의 채무(빚)에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신설동 3층 최종 조정기일이 9월10일이라고 등기도 함께 왔다. 조정기일이 되어서 밀린 임대료에 대한 쌍방합의가 안 되면 법정에서 판결을 하는 것이다. 한편 남부지원에서는 여의도 사건과 관련하여 이번 주 목요일 오후 2시에 검찰청으로 나오라고 전화가 왔다. 법원과 관련된 통보가 오늘만 3건이니 피곤하고 정신없는 하루다. 폭행사건에 대하여 친구 형준이와 상의를 하려고 전화를 하니 그도 큰 사건으로 고민을 하고 있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집에서는 아내가 허리통증이 계속되어 아파트 건너편 병원에 있다기에 가 보니 디스크라고 진단을 한다. 저녁에 삼겹살로 저녁을 먹었지만 법원 일정으로 정신은 다른 곳에 있다.
19일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오늘도 처리할 일이 많지만 정신을 차리고 순리대로 풀어가야 한다. 먼저 떠난 희선이 형과 성우가 마흔 아홉에서 쉰 살이 되는 나이에 세상을 버렸는데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가까이서 충분히 보았고 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인내심을 가지고 대처해야 하는지 나로서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식사도 거른 채 일찍 집을 나서 구기동에서 8시40분 북한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정상 사모바위에 도착하니 사람도 없고 시원한 바람만 불어온다. 미리 가지고 간 누룽지탕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위에 기대어 있으니 속도 든든하고 힘이 난다.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많을지라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겸비하는 강인한 나를 다짐하며 2시간을 더 걸어 문수봉과 대남문을 거쳐 출발했던 구기동으로 12시가 지나 내려왔다. 시내에 나가 마원장과 만나 식사를 하며 대치동학원 수강인원과 순수익 등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투자금에 대한 배당금을 받았다. 오후에 형준이 연락을 받고 종로 3가에서 5호선을 타고 화곡동으로 갔더니 어머니께서 갑자기 김제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셨다며 걱정을 하고 사고무친四顧無親 외아들이라 내일 내려가 본다고 한다. 형준이는 어린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왔고 지금도 자주 보는 죽마고우인데 힘을 내고 최선을 다해서 모시라고 일렀다.
20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신문을 보고 8시에 우거지 된장국으로 식사를 했다. 며칠 후면 개학이 되는 아들은 오늘도 늦게까지 잠을 자고 있다. 아침 뉴스에 녹번동에 위치한 은평소방서 대원 3명이 대조동 화재 진압 도중에 사망했다. 모두가 젊은 나이로 안타까움이 많은데 7년 전에도 홍제동 화재로 7명이 사망한 은평소방서 대원들이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EM학원 길목에 있는 은평소방서 앞을 지나면서는 숙연한 마음이었고 한편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소방차를 점검하는 어느 소방관의 모습은 슬프기까지 할 정도였다. 집으로 1시경 돌아오니 아내는 학생들과 실습을 했다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고 나도 곁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함께 했다. 3시경 요양원에 들어서는데 먼저 온 여동생이 걸어 나오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중학생인 나를 붙들고 울던 동생이었는데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마흔을 넘기고 있다니 세월이 참 빠르다. 잠시후 요양원에 들어가 어머니를 뵈었고 저녁식사 드시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자식간의 뗄 수 없는 이승의 인연이라 그렇겠지만 언제나 함께 있는 동안은 고민과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행복한 시간이다.
21일 지난 8월초 여의도에서 사건이 있었는데 마무리가 되지 않아 오늘은 판결 전에 검찰에서 신문이 있는 날이다. 아침에 식사를 하고 안산에 올라 마음을 정리하며 2시간을 걷고 12시경 집으로 내려오니 아들은 컴퓨터에 집중하고 있다. 점심을 조금 먹고 지하철로 목동에 가서 우현이와 승용이 후배를 만나 함께 검찰청에 들어갔다. 검찰 사무장과 당시 이야기를 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데 피해자라는 대리기사는 감정이 남았는지 화해를 거부하여 어쩔 수 없이 벌금형으로 서류를 마무리하고 검찰청을 나왔다. 밤에 필리핀에서 딸한테 영어말하기 전화가 왔는데 대화를 제대로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한다. 영어회화는 말하기와 듣기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실력향상에 도움이 되니 가급적 큰 목소리로 자신있게 임하라고 조언을 했다.
22일 새벽에 눈을 뜨니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신문을 보고 컴퓨터를 하며 신설동 3층에 관련하여 법원에 제출할 답변서를 작성했다. 소송이나 고소를 하면 원고나 피고의 의견이 다르니 법원에서는 여러 번 상대방의 주장을 보내어 판결하는 자료로 이용한다. 아들이 3일 후면 개학이라 방학숙제 등 철저하게 준비를 하라고 당부하고 10시경 광화문 공증사무실에 가서 마선일 원장과 투자한 금액에 대하여 공증서류를 작성했다. 비가 많이 내려 집으로 돌아오니 논술교실에서 돌아온 딸이 엄마는 교실에서 빵으로 점심을 먹는다고 전하여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차를 몰고 어머니 요양원에 3시에 갔다가 4시에 나오고 김제에 있는 병원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병원으로 오는 중이라는 형준이 전화도 온다. 우리도 그렇지만 형준이 어머님도 아마 고향을 등지는 마지막 여정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집에 6시에 들어오니 아내는 딸이 있는 방에서 두문불출 하고 거실에 혼자 우두커니 있던 나도 저녁도 거른 채 잠이 들었다.
23일 새벽에 비가 그쳤다. 현재가 힘들어도 나는 열심히 살아야 하고 당당하게 이겨 자상했던 아버지의 아들, 패기가 넘쳤던 희선이 형의 동생같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오늘은 아들이 학원에 가지 않는 날이니 외식이라도 하고 그리고 시간을 내어 형준이 어머니 병문안도 다녀와야겠다. 오전 11시에 안산에 올라 정상을 거쳐 내려오니 오후 1시가 지났다. 점심을 먹고 요양원에서 어머니 뵙고 오후에 친구 어머니 병문안을 미루고 지하철로 대치동 영어학원에 가서 마원장을 만나 은마아파트 주변 식당에서 감자탕에 저녁을 먹었다. 영어전문 학원을 운영하며 자신감을 보이는 마원장은 나보다 여섯 살 아래지만 항상 진솔하고 실력도 있는 미국 유학파 강사다. 대일학원에서 선배인 나를 잘 따랐고 나 또한 미국에서 온 그에게 입시나 강의기법 등에 대하여 멘토 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위치와 역할이 바뀌어 있는 듯했다. 베이징의 열기는 여기까지 계속되어 TV화면에서는 우리나라 야구가 쿠바를 이기고 금메달을 따는 장면으로 장식되는 저녁이다.
24일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아들의 방학이 오늘까지라 내일 개학준비 잘 하라고 또 당부했다. 영식이 전화가 와서 자신의 형과 도봉산에 가는데 함께 가자고 한다. 나이든 친형과 동생이 함께 산에 다니며 술을 마시고 노래방도 다니며 티격태격 하는 모습이 부럽기도하고 한편 어색하게 보이는 장면도 많았다. 오전 10시경 집 앞에서 북한산성을 거쳐 송추로 향하는 704번 버스를 타니 산행하는 사람들로 초만원이다. 송추 입구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행락객들은 일찍부터 물놀이를 하고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영식이와 1시에 오봉에서 만나기로 하여 서둘러 올랐고 도착하여 기다리는데 우이암 주변으로 오라는 전화가 와서 도봉산을 가로질러 걸었다. 하지만 내가 방향을 잃어 결국 혼자 점심을 먹고 산행을 하다가 4시에 도봉산역으로 내려왔다. 산에 가는 것은 건강을 위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는 정도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25일 월요일 아침 아들이 개학이다. 중학교도 전체 3학기를 마치고 이제 4학기를 시작하니 반환점을 돌았다. 밥도 안 먹고 대충 옷을 걸치고 나가는 아들이 오늘도 불안하여 엘리베이터 앞에서 교복을 잘 입으라고 지적하고 2학기 시작하는 날 어깨를 두드려 격려를 하며 보냈다. 거실로 들어와 아들을 생각하니 커 갈수록 산만해지고 어딘지 모르게 불성실한 모습이 많이 보여 걱정이 되었다. 오전에 홍제천으로 나가서 9월 27일 풀코스 마라톤에 대비하여 성산대교 아래까지 달리고 돌아오는 약 14킬로 1시간 20분 연습을 했다. 어제 산을 많이 걸어서 그런지 지치지도 않고 가볍게 달려온 오늘이다. 11시 지나 딸을 태우고 구산동으로 가서 핸드폰 A/S를 받았는데 실미도에서 찍은 사진 등이 모두 삭제되어 아쉬움이 있었다. 오는 길에 불광동 킴스클럽에 들어가서 쇼핑을 하고 음식코너에서 자장면을 시켜 딸고 함께 먹었는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후 1시가 지나 집에 도착하니 아들이 와 있고 개학을 하여 오랫만에 만난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지하철로 어머니 요양원에 갔다가 엊그제 계획했던 화곡동 제일정형외과 형준이 어머님 병문안을 갔는데 생각보다는 건강하시어 좋았고 인사와 함께 용돈을 드렸다. 고향에 갈 때마다 아들을 만난 것처럼 나를 반갑게 맞이한 전형적인 전라도 어머님이시다.
26일 어제 늦게 들어와 8시에 일어났다. 아들은 벌써 학교에 갔고 방안을 보니 옷과 책 등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뒹굴고 있다. 건강하게 자라면서 무엇을 하든 능력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학습이나 행동에 대하여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콩나물 김칫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아내는 수업하러 나가고 늦게 일어난 딸도 식사를 마치고 컴퓨터를 한다. 커가면서 야무지고 눈치도 빠른 딸을 보니 엉성한 아내나 아들보다 더 낫고 아마 세상도 훨씬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같아 미리부터 안심이 된다. 10시경 집을 나서 등산도 하고 금전거래를 하는 의정부에 있는 후배도 볼 겸 지하철로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으로 향하는데 종로 3가부터 나들이 행락객들로 붐빈다. 의정부를 지나서는 들판의 곡식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소요산역에 도착하니 교통이 편리해서 그런지 나이든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소요산은 국립공원이 아니라서 아직도 불편한 점이 많고 돌길과 흙길로 된 야트막한 산인데 오늘은 오른쪽 방향 공주봉을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된장찌개와 더덕삼겹살로 맛있게 점심도 먹었다. 검찰청 벌금 액수가 궁금하여 여의도 후배한테 전화를 해서 알아보라고 하니 각각 60만원 정도라고 이미 연락이 왔다고 한다. 싸움을 말리면서 옷만 잡았을 뿐인데 그것도 폭행이라니 목소리 크고 우기는 사람이 앞서가는 억울한 세상이다. 집에 오후 6시경 들어와 김치비빔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27일 어제와 오늘은 연속 쾌청한 날씨에 기온도 28도에 불과하니 다른 해에 비하여 선선한 여름이다. 이번 주 내내 비슷한 온도가 계속되다가 주말쯤 비가 온다고 한다. 식사를 하고 홍제천에 나가서 한강 성산대교를 지나 양화대교까지 45분을 달렸다가 돌아오는 16킬로 90분 마라톤 연습을 했다. 천천히 한다고 해도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은 지루하고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풀코스대회 9월27일을 위해서는 더 혹독하게 연습을 해야 한다. 딸이 내일 개학이라 점심이라도 사 주려고 전화를 하니 집에서 라면을 먹겠다고 하여 그대로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기구운동을 하고 집에 왔다가 어머니 계시는 요양원으로 향했다. 저녁식사 드시는 5시까지 함께 있으면서 어머니의 손톱과 발톱을 정리하여 드렸는데 이것도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다. 평생 농사만 지으며 고생하시어 손발톱이 닳아져 없고 몇개는 신경이 죽어 검게 변해 있는 모습이었다. 집으로 오면서 논술학원 학생용 의자를 사려고 신당동 가구백화점에 갔지만 눈에 띄는 것이 없어 그대로 나와 종로 거리를 통과하는데 대통령의 종교편향 정책으로 불자佛子들이 규탄집회를 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광우병 시위로 도심이 복잡하더니 이제는 깊은 산에서 수도를 하고 참선을 하는 까까머리 스님들 수천 명이 서울 한복판으로 나와 속세와 탈속의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 놓고 있다. 여기저기 눈만 돌리면 두피만 반질거리는 스님들이라 가로등이 없는 밤이라도 대낮이 될 수 있겠다. 홍제동에 도착해서는 아내가 부탁한 족발찜을 1만3천원을 주고 사다가 집에서 막걸리와 맛있게 먹었다.
28일 새벽에 거실에 나오니 안방에 있어야 할 아내가 허리가 아프다고 전기장판을 켜고 찜질하면서 거실에서 자고 있다. 아들도 새벽에 불을 켜고 책상에 앉아 있더니 등교할 때 보니 잠이 부족했는지 얼굴이 약간 부어 있다. 오늘은 초등학교도 개학이라 딸도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엄마가 사 준 세련되고 예쁜 진밤색 메이커 운동화를 신고 8시경 학교에 간다. 식사를 마치고 홍제천으로 나가 모래네까지 왕복 6.5킬로를 가볍게 달리고 오면서 안산에 올랐다가 다시 체육관으로 이동하여 기구운동을 하고 집에 왔다. 요즘 며칠 긴 거리를 달렸더니 몸이 힘들고 다리가 피곤하여 오늘은 짧은 거리를 달렸지만 내일은 다시 20킬로 이상을 달려 볼 것이다. 점심을 하고 지하철로 어머니 요양원에 3시에 도착하니 여동생이 먼저 와 있어 휠체어에 모시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7시가 되어 집에 돌아왔고 장모님께서 보내주신 칡으로 담근 술을 마시고 아들과 딸이 학원에서 오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29일 새벽에 거실에 나오니 오늘도 아내 혼자 잠을 자고 있다. 수업도 해야 하는데 허리는 아프고 자상하지 못한 나조차 도움이 안 되어 심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아침에 홍제동 근처에 사는 차용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문자가 온다. 금년 초에 병원에서 암으로 진단을 받았고 가족들이 정성껏 병간호를 한다는 이야기를 하더니 결국 운명하셨다. 10시에 홍제천으로 나가 성산대교와 양화대교 그리고 신촌과 국회의사당을 연결하는 서강대교까지 왕복 20킬로 2시간 이상을 달리고 돌아왔다. 9월27일 대장정을 위하여 더욱 강도 높은 훈련을 해야 하는데 지치고 힘이 들어 5분을 더하기가 쉽지 않다.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어머니 요양원에 갔다가 집으로 오면서 경기학원에 들어갔다. 부원장이 9월 수업준비를 요구하는데 고맙긴 해도 수강생도 없는 마당에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을 했다. 돈암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수유리 성당 조문을 갔더니 어머니를 보낸 차용곤이 눈이 벌건 채 나를 맞이한다. 정식이는 오늘이 월급날이라고 전화가 와서 영안실을 나와 신설동으로 갔더니 그가 삼겹살과 소주를 사 주어 먹고 돌아왔다.
30일 어제 저녁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정식이와 일찍 헤어져 집으로 왔지만 영안실에서 음식이 안 좋았는지 오늘 아침까지 속이 거북하다. 오늘 아내가 수업이 없는 토요일이라 가족여행을 하려고 아들 딸에게 물으니
일정이 있다고 해서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 오전에 아내는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고 나는 안산에 올랐는데 어지럽고 힘이 들어 약수터 근처에서 한참을 누워있다가 내려왔다. 오후에는 아내와 딸을 태우고 요양원 가는 중에 성북동 경기학원 들어가 크고 깨끗한 학원 내부를 구경도 시켰고 요양원에서는 밖으로 나와 넓은 마당 귀퉁이에서 어머니와 우리들 3명이 늦여름 시간을 보냈다. 행복하고 아름답고 정겨운 우리들의 이 시간도 언제까지 멈추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오후에 요양원을 나와 집으로 왔다가 아들만 태우고 연희동 칼국수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31일 일요일 8월의 마지막 날이다. 식사를 하는 중에 아들에게 공부를 재촉하는 아내와 강요하지 마라는 내가 목소리를 높이며 대립이 생긴 아침이다. 어느 가정이나 자녀가 다니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학업문제로 부모자식간 또는 부부간에 갈등으로 부딪치는 시간이 많다. 도봉산에 오르려고 식사를 마치고 704번 버스로 송추계곡 입구로 갔다. 엊그제 다녀간 오봉을 향하여 쉬지 않고 걸으니 12시30분이 되었고 다시 이동하여 영식이 형제를 만나 점심을 함께 먹었다. 도토리가 지천으로 많아 금방이라도 다람쥐가 몰려 올 것같은 오봉샘을 뒤로하고 아래로 내려오니 해는 시들어 자운봉을 넘어가고 어둑한 그림자는 8월을 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