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호숫가 찬란한 풍광에 어울려 고상한 자태를 뽐내는 백조를 본 일이 있는지? 그렇다면 그 물밑 광경은? 뭍에선 보이지 않지만 수면 위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기 위해 백조의 두 갈퀴는 쉴새없이 움직인다.
야구장의 꽃 치어리더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약 3시간. 짧다면 짧은 혹 길다면 긴 '쇼타임'을 위해 나머지 시간을 쏟아붓는다. 삼성 치어리더 팀의 최고참 김순희(27) 씨의 하루 일과를 중심으로 치어리더의 하루를 들여다봤다.
△기상: 낮 12시~오후 1시
야구 선수들과 엇비슷하다. 일반인들은 한창 바삐 움직일 시간 졸린 눈을 비비며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시즌 중에는 야간경기에 생활리듬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컨디션 회복에는 잠만큼 보약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잠이 쏟아지는 까닭은 왜일까. 미인은 잠꾸러기?
△출근: 오후 1시반
빵 또는 죽(누룽지)으로 가볍게 '아점(사실 아점이라고 하기는 너무 민망하다)'을 때운 뒤 사무실(이벤트 회사)로 향한다. 출근부에 도장을 찍은 뒤 스케줄은 경기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공연 준비를 서두르게 되고 없는 날에는 다른 행사에 투입되거나 강도 높은 연습으로 다음 공연을 준비한다. 치어리더가 야구장에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 더러 원정경기(대개 잠실)도 따라가지만 홈에서 경기가 없으면 대학 축제나 행사장에서 '각개전투'를 벌인다.
△공연준비: 오후 2시
워밍업 시간이다. 의상을 점검하고 화장을 하고 가벼운 댄스곡 몇 개로 간단히 호흡을 맞춰보기도 한다. 갓 팀에 들어온 막내 (조)정영(19)이가 보고 있는데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 2년차인 (김)민희(20)의 동작이 굼뜬다. "야, 붕어(민희의 별명) 정신 안차려? 지금 몇 번째야!"
△구장 도착: 오후 4시반
벌써 8년째(농구 포함) 무대 위에 서지만 좀처럼 떨리는 느낌은 없어지지 않는다. 종종 청심환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제 곧 쇼타임 개시. 제대로 된 끼니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화장 및 옷매무새도 최종 점검한다.
이벤트 팀장이 오늘 응원단상에 올라갈 4명의 이름을 부른다. 팀원 6명 중 4명만이 단상에 오르게 되고 2명은 대기다. '선발되지 못한 아그들아, 시무룩하지 말지어다. 2600여명의 열성팬을 이끌고 있는 이 왕언니도 무명의 시간이 있었단다.'
△플레이볼: 오후 6시 40분
야구 경기 개시 시간보다는 조금 늦다. 1회초 상대편 공격이 끝난 뒤 응원이 펼쳐지기 때문. 민희가 관중과 눈을 맞추며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 '첫 무대에 오를 때만해도 바닥만 쳐다보던 왕초보였는데….'
여기서 문제. 1경기에 몇 번이나 단상에 올라갈까요? 이닝 교체와 투구 교체 때는 물론 팀이 역전 또는 동점 무드 때는 수시로 올라가 흥을 돋운다. 그럼 도대체 몇 번이지? 아무튼 '다리 아퍼'이다.
올 시즌 준비한 응원 레퍼토리는 20곡, 그러나 공간이 협소해 12~13곡 정도 밖에 소화하지 못한 게 아쉽다. 앗, 진갑용 아저씨가 역전타를 쳤다. "얘들아, <어쩌다 마주친>(인기응원곡)이다!"
△딩동댕동: 밤 10시
경기 종료벨과 함께 우리의 일도 끝난다. 오늘도 무사히. 옷을 갈아입고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야구장을 나가는 사이 몰려든 팬들의 디카에 찍힘을 당하는 것은 피곤을 날려주는 청량제다. 마스코트 및 스태프 등 10여명이 탄 승합차에 몸을 싣는다. '아~, 아무리 좁지만 그래도 서 있는 것보다는 낫다.'
△뒷풀이: 밤 11시~새벽 1시
경기 전 끼니를 때웠지만 3시간 동안 온몸을 날린 터라 배에서 곧바로 신호가 온다. 한 경기당 최소 2㎏정도는 빠진다. 오늘은 멤버들이 제일 좋아하는 중국집으로 골랐다. 보통 여자들은 S라인을 만들기위해 늦은 밤에 먹는 것을 금기로 여기지만 내일을 위해 먹어야 한다.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밤에 게걸스럽게 먹는 게 신기한지 여기저기서 쳐다본다. '흥, 이래뵈도 쭉쭉빵빵 S라인은 건재하다고요!'
뒷풀이 시간에 밥만 먹는 것은 아니다. 멤버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날의 공연을 '복기'하면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한다. 이때는 왕언니도 팀의 일원일 뿐이다.
치어리더 하려면 댄스 가수 못지않은 노력 필수 평균 하루 5~6시간 고된 훈련
"돈 보고는 못해요."
치어리더들은 언뜻 연약해 보이는 '언니들' 같지만 속은 근성으로 가득찬 프로들이다.
우선 일당(경력이 쌓이면 전속이 돼 계약을 맺기도 하지만)으로 계산되는 그들의 벌이는 신통치 못하다. 3시간 동안 파김치가 되도록 무대 위에서 뛴다고 해도 프로야구 선수 최저 연봉(2000만원)에 훨씬 못미친다. 그래도 "우리가 가진 끼를 발산하고, 우리들의 몸짓으로 흥을 돋우는 일은 몇 푼의 돈과 비교가 되지 않는 매력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때문에 데뷔 이력도 가지가지다. 삼성 치어리더팀의 왕언니 김순희(27)씨는 공개 오디션을 통해 입문했지만 '넘버2' 이진숙(26)씨는 길거리 캐스팅, 김민희(22)씨는 댄스 대회를 통해 발탁됐다. 최근 합류한 막내 조정영(19)씨는 댄스동아리 선배였던 김민희씨의 소개로 들어왔다. 춤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은 있다.
일단 들어오면 댄스 가수들 못지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루 5~6시간은 기본이고, 정식 무대에 오를 때까지 하루 10시간의 강행군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기 발로 찾아왔으나 훈련이 고되 나간 사람도 있다는 게 김순희씨의 귀띔이다.
삼성 치어리더 팀의 경우 비시즌(겨울철)에는 프로농구(대구 오리온스) 치어 팀으로 전속이 돼 있어 1년 내내 쉬는 날이 없다. 그러나 모두 감기 한번 걸린 적 없는 '건강녀'들이다. "몸이 재산이고 항상 긴장 속에 살기 때문에 자기관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한다"는 게 비결.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짧은 치마와 민소매 의상에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팬들이 많았으나 이제는 팬클럽도 생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치어리더를 보기 위해 구장을 찾는 팬들도 있는 등 치어리더에 대한 의식이 바뀌고 있어 뿌듯함을 느낀다고 한다. 코나미컵 등 국제경기가 많아지면서 한국만의 독특한 치어리더 문화가 국외로 널리 알려지는 것도 자랑거리. 삼성 치어리더팀은 2004년 대만과 2005년 일본에서 현지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된 바 있다. 남자친구가 꺼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민희씨는 "친구들을 모아 단체 응원온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관중석 텅 비면 속상해요"
"대구 팬님들, 야구장 좀 찾아주세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치어리더도 이젠 야구 전문가가 다 됐다. 투수교체 타이밍을 미리 파악해 단상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심판이 애매한 판정을 하면 여지없이 야유를 이끌어 낸다. 상대 투수가 의미없이 견제구를 남발하면 얼굴이 벌게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홈 팬들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홈경기가 열릴 때면 매일 같이 3루 스탠드 응원단석 앞에 자리를 잡는 골수팬들도 있지만 기껏해야 한 경기 관중이 2000명~3000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잠실 원정 때와는 많이 차이가 나요. 관중이 많아야 우리도 많아야 신나는데…. 잠실구장에서 응원을 하면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아요." 쭉쭉빵빵 아가씨의 멋들어지는 율동을 위해서라도 대구 팬들은 분발 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