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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경은 “지혜”에 대해서 분명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지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만큼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민이면서 독자인 유대인들은 지혜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성경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며 많이 읽고 묵상하는 탈무드는 지혜를 네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① 먼저, 지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완전한 지혜이십니다. 지혜 자체이십니다. 유일한 지혜이십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알고, 섬길 때 위로부터 임하는 참된 지혜, 진짜 지혜로 무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지혜로워져야합니다. 지혜롭게 살아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유일하고, 참되고, 진짜 지혜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합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하나님을 구할 수 있어야합니다. ② 또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를 알자.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데 전력하자. 날마다 새벽이 오듯이 주도 틀림없이 오실 것이다. 소나기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주께서 오실 것이다.”(호6:3)라고 외쳤습니다. 지혜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명철의 시작이다.”(잠9:10)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전심으로 경외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때 비로소 참되고, 유일한 하늘의 지혜로 무장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그렇지 않아도 끔찍한 고난 속에서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던 욥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지극히 편협하고 왜곡된 자신들의 지혜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참된 지혜로 무장하는 첫 걸음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외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들은 아무리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티끌에 불과합니다.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그들의 결국은 영원한 사망입니다. 허무한 생을 마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성경은 고해 같은 인생에 얼마나 많은 역설과 모순이 있는지 외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인생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인생 속에 얼마나 많은 역설들과 모순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성경을 읽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만 해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충분히 깨달아 알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허무와 절망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만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도 의미와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유일하고, 참되고, 진짜 지혜로 무장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알아야하고, 경외할 수 있어야합니다. ③ 또 지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방법입니다. 지혜자는 “지혜가 부르지 않느냐? 명철이 소리치지 않느냐?”(잠8:1)라고 외쳤습니다.
지혜를 인격화시켰습니다. 의인화시켰습니다. 계속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에 앞서 태초에 나를 가지고 계셨다. 영원 전, 맨 처음에,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세워졌다. 아직 대양들이 있기 전, 샘들이 있기 전, 내가 태어났다. 산들이 제자리에 세워지기 전 언덕들이 만들어지기 전 내가 생겨났으니”(잠8:22-25)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다. 지음을 받은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그분 없이 지어진 것이 없다.”(요1:2-3)라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여기서 “나”는 지혜입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고 참된 지혜이십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외침은 “(참되고 유일한 지혜인) 나를 찾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찾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는 자이다.”(잠8:35-36)라고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되고 유일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더욱 더 큰 은혜, 한량없이 부어지는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부어지는 은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완벽하게 삼켜버리고도 남을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환호성을 지를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큰 소리로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 우리 안에 계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지혜가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임하여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고 참된 지혜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삶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내일의 양식, 영원한 양식, 생명의 양식, 안식을 위한 양식, 또 참되고 유일한 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④ 또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게 합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보통 영광이 아닙니다. 독특한 영광 곧 세키나Shekinah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영광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완벽하게 하나님 닮게 만들어줄 수 있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특성을 설명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누가 사물의 이치를 깨우쳤는가? 지혜는 사람의 안색을 밝게 하여 찡그린 얼굴을 바꾸어준다.”(전8:1)라고 외쳤습니다.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의 안색이 바뀔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얼굴의 빛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찡그렸던 얼굴이, 굳어 있던 얼굴이 환하게 펴질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게 되어 있다고, 광채가 나게 되어 있다고 외쳤습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살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삶이 가능하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증거도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모세는 백성에게 말하기를 마친 다음에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와께 나아가 주님과 이야기를 할 때는 수건을 벗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수건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후 모세가 밖으로 나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 주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얼굴이 빛나는 것을 보게 되었으므로 다음에 또다시 여호와와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 모세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출34:33-35)라고 말씀합니다. 40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 모세는 하나님으로 충만했습니다.
얼굴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빛났던지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모세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데반도 그랬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복음을 위해 순교했던 수없이 많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밝고 환하게 회복된 얼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얼굴은 유일하게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교제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훈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유일하고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했을 때 익히 경험한 바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지혜는 우리의 상한 심령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얼굴빛은 물론 삶까지도 바꿔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유일하게 참된 진짜 지혜로 무장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무장하셨습니까? 우리의 얼굴은 밝고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까?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참된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과 안식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 누리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충분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신조차 놀랄 수밖에 없는, 이전과는 다른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욥28장은 3장에서 27장에 이르는 욥과 친구들의 세 차례의 논쟁과 29장에서 31장에 이르는 욥의 긴 독배, 32장에서 37장에 이르는 또 다른 친구 엘리후의 책망, 38장에서 41장에 이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앞뒤의 격앙된 욥의 발언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해설입니다. 중립적입니다. 차분하게 중요한 신학적 요점 가운데 하나인 참된 지혜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 탐구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만 알고 계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편, 보상교리는 전통적인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과 세 친구들 모두 인정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보상교리만으로는 현재 욥이 당하고 있는 혹독한 고난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의 지혜는 결코 포괄적일 수 없습니다.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지식과 신학과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지혜는 포괄적입니다.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는 한 누구도 가질 수 없습니다. 제한적인 우리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오로지 자신들만 참된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정말로 큰 착각이었습니다. 그 결과 극한 교만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무리 양보해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던 욥을 판단했습니다. 집요하리만치 공격했습니다. 혹독하게 정죄했습니다. 하나님처럼 행동했습니다. 옳지 못했습니다. 욥은 바로 이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각종 광물질이 묻혀 있는 바위와 땅 속 깊은 곳들, 광물질을 채굴하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포괄적이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제로 욥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서 “은은 나는 광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취하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욥28:1-2)라고 외쳤습니다. 은은 은광에서 나옵니다. 금은 금광에서 나옵니다. 철은 철광에서 나옵니다. 동은 돌을 녹여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광물질은 반드시 나는 출처가 있습니다. 참된 지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출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실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한편, 참된 지혜는 단순히 거룩함과 속됨을 구별하고 나누는 종교적인 용도로만 쓰이지 않습니다. 본질상 통치, 정치, 정의, 법정, 자연에 대한 관찰 등 사회 전반적인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가족,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생활까지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지혜는 우리의 생활 전반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지혜는 진주보다 값지고 네가 갖고 싶어 하는 어떤 것도 이것과 비교할 수 없다.”(잠3:15), “지혜는 그것을 얻는 사람에게 생명의 나무니 그것을 붙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잠3:18), “하나님께서 (바로 그) 지혜를 주신다.”(잠2:6a)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세상 그 어떤 보화보다 값지고. 귀합니다. 지혜로 무장한 사람은 그 누구보다 복됩니다. 가장 복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지혜를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편협한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지혜를 먼저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참된 지혜로 무장하셨습니까? 그 지혜는 과연 누구의 지혜입니까? 포괄적이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아니면 지극히 편협하고 제한적인 자신의 지혜입니까?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혜를 철저히 내려놓으셨습니까? 강의실에 들어온 교수는 아무 말 없이 분필을 집어 들었습니다. 2, 4, 8이라는 숫자 세 개를 적었습니다. 돌아섰습니다. 한동안,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서 “여러분은 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숫자 셋을 모두 더하면 14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수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다른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적어 놓으신 숫자는 수열인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다음에 오게 할 수 있는 수는 16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는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다른 학생은 “모두 곱해 64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전히 교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최선을 다해서 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교수가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은 답을 찾는 일에만 골똘 하느라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칠판에 적힌 숫자를 보며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고집스러운 사람과 나름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고집스러운 사람은 3×9=28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3×9=27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참동안이나 서로 옳다며 싸웠습니다.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그들은 마을 원님께 찾아갔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던 원님은 고집스러운 사람에게 “3x9=28이라고 하였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당하게 “그렇습니다. 저는 당연한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 놈이 27이라고 우기지 뭡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원님은 곧 “28이라고 주장한 놈은 풀어주고, 27이라고 주장한 놈은 곤장을 열대 쳐라!”라고 명령했습니다. 고집스러운 사람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놀리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곤장을 맞았습니다.
곤장을 맞은 똑똑한 사람은 원님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원님은 “3x9=28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놈과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 이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는 가장 큰 문제, 곧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또 자기 스스로 무엇보다 큰 문제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유일하고 참된 지혜이신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이라는 사실도 모르면서 잘난 척은 다합니다.
실제로는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똑똑한 척은 다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관계없는 세상에만 매달려 열정을 소모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나가 하나같이 쓸모없게 되었다.”(롬3:10b-12)라고 외쳤습니다. 유일하고 참된 지혜이신 하나님을 찾는 의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우리 인생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크고 근본적인 문제라고 외쳤습니다. 또 지혜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영광을 얻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잠3:35)라고 외쳤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닮은 인생이라면 반드시 지혜로워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지혜의 여부에 따라서 영광을 얻을 수도 있고, 수치를 당할 수도 있다고 외쳤습니다. 특히 사도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약1:5)라고 외쳤습니다. 주어진 환난을 기뻐하고 온전히 인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외쳤습니다. 바로 그 유일하고 참된 지혜를 결코 인색하지 않게, 오히려 풍성하게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외쳤습니다.
72년 동안 산에 머물며 성경을 읽고 수행했던 사막의 교부 시소에스Sisoes 역시 “하나님께서 사시는 곳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의 저자 조이 도우슨Joy Dawson 또한 “지혜는 우리가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을 품을 때 함께 따라온다.”라고 말했습니다. 유일하고 참된 지혜이신 하나님을 구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유일하고 참되고 진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복된 삶, 고해와 같은 인생 속에 가득한 각종 역설들과 모순들을 얼마든지 참고 견디며 이길 수 있는 복된 삶,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는 복된 삶, 더욱 더 크고 한량없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부어지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복된 삶, 참된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안식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얻고 누릴 수 있는 복된 삶,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밝고 환하고 건강한 얼굴을 가진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