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에서 지례로 달리는 길은 익숙하다. 어쩌면 2~3백년 전 우리 할배의 야밤도주 행로였을지도 모르기에 숙연한 맘이다. 중시조인 임 경자 업자 할아버지가 타살 당한 후 충주에서 반역의 집안으로 몰려 이곳 구성까지 야반도주, 다시 쫓겨 지례로 삶을 터전을 옮겼다는 족보 기록을 알기 이전에도 조부님 슬하에서 부터 무수히 들었던 슬픈 가족사의 그 길이다.
답사도 팽개치고 지례 속수 삼거리 건너편 여배와, 증산으로 향하는 아흔아홉 고개 좌측 산자락에 주무시는 6~9대 조부모님을 뵙고 오늘 편히 살고 있음을 감사드리며, 당당하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은데...
조마 신안리 석불 입상
입에서 육두 문자가 튀어 나온다. 도데체 우리문화유산 이정표가 이럴 수가 있는가? 혁신도시 유치에 총력을 경주하는 김천시가 진작에 관내 자산을 이렇게 푸대접하는 전시, 탁상행정이라니...
큰길가의 이정표를 보고 들어가서 거의 30분을 헤매었다. 큰길 가 이정표에서 불과 100m도 안되는 우사 좌측 골짜기에 계시는 석불을 아무런 푯말이 없으니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김천시의 이런 행정은 도가 지나치다. 눈앞에 보이는 문화재에는 거금을 투자한 거대 입간판을 세우지 않나!!! 진작에 필요한 곳은 설치하지 않고...( 김천시청 홈에 시정하라는 글을 올렸는데도 아직 해당부서 미지정으로 되어 있다. 니미* !!! 아마 주관부서가 없는 모양이다...12/20일 답변 게시되었다)
불두가 없거나,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얼굴이 뭉개진 불상을 볼 때마다, 측은한 맘보다는 울화가 치밀었건만 고생끝에 뵙는 탓인지 고맙기 한량없다. 절터의 흔적과 유구가 없지만 탑골로 불리워지던 이곳에서 논밭을 갈다 발견한 석불은 한개의 돌에 광배가 있으며, 불두는 목부위의 홈으로 보아 별도로 조성되었지만 현재 찾지 못하고 있다.
전각속에 모셔진 불상은 독립불이라는 이유로 여래로 추측된다고 여러자료에 기술하였지만 내눈엔 오른쪽 손에 든 정병으로 미루어 관음보살이 라는 생각이 든다. 정병을 들었다고 관음으로 꼭 여길수 없겠지만 독립불이라 해서 여래라는 근거는 있었든가?
찾느라 욕이야 나왔던 말든 엉터리 논리로 안내문에 시비를 거는 맛도 괜찮지 않는가?
그래봐야 나는 밤새 도깨비에 홀려 당산을 부여잡고 씨름을 벌인 혹부리 영감과 별반 다를바 없겠지만...
은퇴 후 마음 맞는 화상과 함께 이런 곳에 은거하며 잃어버린 부처얼굴을 찾으며 한세상 보내는 것도 멋진 인생의 마무리가 될텐데???
첫댓글 정말 표지판 하나 세울 정성도 없는 겁니까? 단 한 사람이 찾더라도요. 관세음보살 ()
관세음보살..........
얼굴없는 부처님~~~()()(). 부처얼굴 찾으며 보내는 인생..참 멋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