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기 정읍은 자생차가 곳곳에 분포하였으며, 차의 북한계선으로 그 차 맛이 좋아 조선시대 왕에게 진상될 정도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그 자생차를 상업적으로 대량재배하였는데 그게 바로 입암의 오가와 농장에서 재배하던 천원차이다. 오가와(小 川)는 당시 입암초등학교 여교사로 근무하면서 천원차라는 브랜드로 일본까지 수출했던 장본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상업적 목적으로 시작한 다원으로는 광주 무등다원이 최초였으며, 이곳 오가와 다원이 그 뒤를 이었다. 요즘 유명한 보성다원보다 훨씬 먼저 개원했으니 이 전통이 잘 이어졌다면 정읍은 차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이어갔을 것인데 해방후 판로가 끊기면서 차나무는 다른 작물로 대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입암 천원차는 그야말로 전설속의 얘기가 되고 있지만 그 흔적이라도 있을까하여 수소문해보았다. 다행히 입암면 하부리와 신면리 일대에 대규모로 재배되었던 구릉지에서 그 흔적을 찾아내었다.처음 발견한 순간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찾은 느낌이었다. 호남고속도로 내장산 나들목 입구(입암교차로) 오른쪽에 위치한 감나무밭에 10 여 그루의 싱싱한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수령과 그 내력이 궁금하여 입암면 접지리 제내마을에서 차를 재배하는 김혁근씨(60세)를 만나 자문을 구하였다.얘기를 드렸더니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곳에 남아있는 차나무들은 일제강점기 차밭의 흔적이라는 말씀을 해주신다.
한 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입암면 내장산나들목 근처의 차나무 군락. 일제강점기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해방 후 이곳은 과수원으로 변경되었다. 현재는 감나무밭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주인분이 이정도라도 차나무를 남겨 보존했다는 것이 대단하게 생각된다.
이 분 집을 찾아갔더니 이곳에는 수령이 거의 300년 정도 되었다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호남고속도로 내장산나들목 공사를 하면서 없어질 뻔 한 자생 차나무를 여기에 옮겨심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기명서씨 밭에서 몇 년전에 옮겨심었다는 것이다. 하동에 있는 차나무에 이어 두번째로 수령이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입암면 접지리 제내마을 금향농장(김혁근씨 운영)에 있는 오랜 수령의 차나무
차나무의 수령이 짐작되는 나무줄기.
김혁근씨는 2003년 정읍시에서 자생차를 대대적으로 장려할 때 차나무 재배를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차에 대한 전반적인 소비가 줄고 판로가 막히면서 차나무를 대부분 뽑아내고 대체작물인 베리류를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희망찬 꿈을 안고 시작했던 차 재배가 십수년이 지난 오늘날 차 재배 농민들에게 절망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런 상황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했다면 처음부터 차나무를 심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요즘 현대인들은 달달하고 자극성이 강한 음료에 길들여지고 인스턴트 음식에 익숙하여 차(녹차나 홍차)에 대한 관심과 소비가 줄어드는 것 같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입암의 천원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던 그 천원차의 흔적이 아직은 입암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참으로 감격적인 사실인데 정작 차를 재배했던 경험을 가진 당사자들은 상업적인 이익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현실때문인지 그 역사성에 대해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언제나 다시한번 입암 천원차의 명성이 부활할 지 모르겠지만 그 역사의 흔적만큼은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