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석환 작곡가를 기억하시는지요?
60-70년대 SingAlong의 선구자
작사·작곡 및 번안곡 무려 260여 곡
날이 밝으면 멀리 떠날 사랑하는 님과 함께
마지막정을 나누노라면 기쁨보다 슬픔이앞서
떠나갈 사 이별이란 야속하기 짝이 없고
기다릴 사 적막함이란 애닲기가 한이 없네
*전석환 작사 <석별의 정> 1절
학창시절 이 <석별의 정>노래를 안불러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노래를 다시 듣노라면, 고교대학시절 각종 모임, 야유회, 캠핑 가서 통기타를 연주하면서 함께 노래부르고 춤추던 그때의 추억이 뭉개구름처럼 떠오른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바로 전석환 씨(88). 번안곡에 아름다운 우리 가사를 붙여 ‘건전가요부르기’에 앞장 섰던 분이 바로 전석환 작곡가다. 그는 60-70년대 소위 ‘Sing-Along’, 즉 ‘다 함께 노래 부르기’ 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통기타 및 전자올갠 전파의 원조이기도 하다.
이제 미수(米壽)를 넘기신 전석환 작곡가는 볼음도라는 서해 최북단 섬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볼음도는 강화도 선수선착장에서 배로 55분 쯤 걸리는 섬으로 민통선 내 위치하고 있다. 전석환 작곡가가 볼음도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고향이 그리워서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벽성군 용매도(龍媒島)라는 섬. 북방한계선(NLL) 바로 위 북한 땅에 위치하고 있다. 용매도는 볼음도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섬이다. 볼음도 북쪽해안을 걷다보면 멀리 용매도가 아련히 시야에 들어온다.
지난 연말, 필자는 NLL 최서북단 ‘말도’라는 섬을 다녀오면서 볼음도에서 하룻밤 전석환 선생님 댁에서 묵었다. 함께 간 이재언 광운대 해양섬정보연구소장이 전석환 선생님과 알고 지내는 사이여서 만나게 된 것이다. 말도에 들어갈려면 행정당국(서도면)의 특별허가를 받아야만 하는 군사작전지역이다. 허가를 받은 사람만 볼음도에서 다시 행정선으로 바꿔타고 30-40분 더 들어간다.
전석환 선생님 댁은 볼음도에서도 제일 북쪽, 북한땅이 바로 보이는 곳이다. 저수지가 있고 800여 년 된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는 볼음2리 마을이다. 볼음도 북쪽 끝단 저수지 제방을 걷다보면 말도 뒤로 용매도가 시야에 잡힌다. 전석환 선생님은 매일 이 길을 산책하면서 용매도를 바라보고 고향생각에 잠기곤 하신다고 한다.
볼음도 선착장까지 전석환 선생님께서 직접 마중나오셨다. 반갑다. 연세에 비해 건강하고 기억력이나 말씨도 또렸하시다. 저녁 식사후 전석환 선생님은 지나온 삶 및 고향 용매도에 관해서 적지않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전 선생님께서 볼음도에 들어온지는 13년째. 한국전쟁 이전에는 남한 땅이었던 용매도에서 태어나서 서울유학으로 한성중학을 다니다가 중3 때 6·25사변이 터졌다.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용매도에서 유격군에 입대했다.
전 선생님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놀랄만한 일화도 소개한다.
서울에서 용매도까지는 580km거리. 전쟁소식을 듣고 혼자 닷새 동안 걸어서 용매도까지 갔다고 한다. “첫날은 파주, 둘째 날은 개성, 셋째 날은 봉서에서 자는 등 하루에 거의 100km씩 걸었습니다. 고향 가는 도중 인민군의 검문을 받았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하니 남한에서 북한으로 피난가는 사람은 너 밖에 없다고 어이없어 하더군요”라는 일화도 얘기해 주신다. 고향 용매도에 도착해보니 다행히 부모님 모두 안전하시고 섬 역시 별 피해는 없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인데도 고향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바로 유격군에 합류했다.
당시 용매도 청년단원이 800여 명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유격군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전 선생님은 “한국전쟁이 터진 후 1950년 9월 18일. 용매도 청년들로 구성된 유격군이 6·25후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용매도에서 의거를 일으켜 인민군, 내무서원, 보위부원, 인민학교 교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8명을 생포하여 연평도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해군에 넘기고 휴전 성립 때까지 용매도를 사수했지요”라고 당시의 전황을 이야기해주신다.
유격군의 영문표기는 Partisan Forces, 우리가 흔히 '빨치산'이라고 부르는 비정규군대가 유격군이다. 한국전쟁시 지리산 속에서 활동했던 유격군인 빨치산과 마찬가지로, 당시 북한 점령지에서는 우리나라의 비정규군인 유격군이 우리측 빨치산으로 적진에서 공산군 섬멸과 함께 정보수집 및 교란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공로로 휴전이 이루어지자 우리 해군은 손원일 제독의 지시에 의해 LSD를 동원, 용매도 주민 3500여 명을 모두 남한땅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당시 용매도 주민이 800여 가구에 3500여 명이었다니 용매도가 꽤 큰 섬이었던 것 같다. 섬 길이가 동서약 3.5km, 남북 폭이 0.8km, 둘레 11.9km 정도. 전 선생님 응접실 벽에는 용매도 지도가 붙어 있다. 구글어스에서 다운받아 주요지명은 전 선생님께서 직접 써넣은 것이다.
전 선생님 댁 벽에는 제2함대사령관이 증정한 302호PK정 군함사진 등 해군 관련 사진도 여러개 보인다. 해군과의 관계를 여쭤보니 302호PK정은 용매도 사수를 지원했던 잊지못할 군함이고, 전 선생님께서 해군의 대표군가인 ‘앵카송’도 작곡하셨다고 한다. 앵카송은 해군 출신 군인들은 누구나 잘 아는 노래이다. 공군의 빨간마후라, 육군의 진짜사나이 등과 비견되는 군가이다. 해군에서는 앵카송 작곡에 대한 공로로 2008년 8월 5일 전석환 작곡가에게 ‘명예해군 제 11호'를 위촉하기도 했다.
전석환 작곡가는 연세대 종교음악과 출신이다. 그는 1963년 초, YMCA에서 ‘다 같이 노래하자’라는 이름으로 Sing-Along을 리드, 크게 히트했다. 이를 알게 된 동아방송에서 이를 녹음해서 라디오에 방송했고, 1964년 말, KBS TV가 개국되자 ‘3천만의 합창’이라는 제목으로 KBS 공개방송 프로그램을 개설하기에 이른다. 선생님은 KBS 등에서 방송생활 18년, 국방대학원에서는 역시 18년간 외부강사로 특강을 계속하기도 하는 등 학교, 단체 등 각종 모임에서 Sing-Along 행사를 이끌어왔다. 또, 개인적으로는 볼음도로 이사오기 전까지 서울 당산동에서 무려 33년간이나 시민들을 위한 노래교실을 여는 등 건전가요 대중화에 크게 힘써오기도 했다.
전석환 작곡가가 이제까지 작사·작곡 및 번안한 곡은 총 260여 곡. 2013년 11월에 제자들이 선생님의 팔순기념으로 ‘좋은 노래 260곡’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집을 발간해줬다. 새마을 노래로 알려진 ‘좋아졌네’를 비롯, 목장길 따라, 노래의 메아리, 릿자로 끝나는 말, 라쿠카 랏차, 그리운 고향, 우리 모두 다같이, 빙빙 돌아라, 석별의 정, 돌과 물 등 우리들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너무도 친숙한 노래들이 즐비하다. 윤석중 작사, 전석환 작곡인 ’돌과 물‘은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이 부르는 대표곡 중 하나이다.
전 선생님은 이 책 서문에서 “좋은 노래를 만들고, 다듬고, 펴내고, 부르게 하는 일을 해온 지 어언 50년! 가정문화, 학원문화, 농어촌문화, 공장문화, 군대문화 등 당연히 있어야 할 ‘생활문화’가 뒷전으로 사라지고, ‘술집문화’가 판치는 세상이 됐다. ‘생산문화’가 사라지고 ‘소비문화’가 판을 치게 하는 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영상매체, 특히 전파매체(TV)가 앞장 서 있다. 한(恨)과 탄(嘆)과 비(悲)의 ‘소리(耳)와 꼴(目)’들이 정상인 것처럼 매도되는 현실에서 이 책 한 권이 건강한 ‘생산문화’를 되찾는데 기여했으면 한다”고 말한다.
전석환 작곡가는 2018년말 인천광역시에서 인천 출신 중 국가사회문화적으로 공로가 지대한 분에게 수여하는 ‘인천인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인천광역시에서는 우리나라 건전가요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전석환 작곡가의 일생을 최근 직접 ‘구술채록’하여 곧 200쪽 내외의 책으로도 펴낼 예정이라 한다.(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