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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백경한(白慶翰)
미상-1812년(순조 12)
조선후기 홍경래의 난 이후 호조참판에 추증된 의사(義士)이다.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자점(子漸), 호는 부호(鳧湖). 아버지는 백선양(白善養)이며, 어머니는 해주노씨(海州盧氏)로 노현진(盧玄軫)의 딸이다. 최경림(崔敬林)에게서 배웠다.
1811년(순조 11) 12월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 정주가 난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동지를 규합하여 정주성내의 적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사방에 보내고 신안충의군(新安忠義軍)이라는 기를 세워 의병을 불러모으면서, 한편으로는 적정(賊情)을 안주병사영(安州兵使營)에 밀보하여 내응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홍경래가 입성하면서 백경한을 맨 먼저 체포하였다. 그러나 백경한의 명망을 높이 산 난군은 투항시키려고 여러 가지로 협박을 다하였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다가 거짓 항복하고서 다시 관군과 밀통하다가 탄로되어 1812년 1월 마침내 피살되었다.
난이 평정된 이듬해 정주성 남쪽에 단을 세워 백경한를 포함한 일곱 의사를 제사지내게 하고, 아울러 순절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정주의 표절사(表節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부호집(鳧湖集)』 8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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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 제32권 / 신도비(神道碑)
증 호조 참판 부호 백공 신도비명 병서- 경자: 1840, 헌종 6)
(贈戶曹參判鳧湖白公神道碑銘 幷序 - 庚子)
순조 재위 11년(1811) 겨울에 토적이 서쪽 변방에서 일어나니, 이때 부호(鳧湖) 백경한(白慶翰) 공이 포의(布衣)로서 대의를 선양하여 역적을 토벌하려 하다가 그들에게 사로 잡혀서 굽히지 않고 죽었다. 적이 평정된 뒤에 도신(道臣)이 이 사실을 보고하니, 조정에서 명을 내려 가선대부(嘉善大夫)와 호조 참판을 추증하고, 그 마을에 정려문을 세우기를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 하였으며, 또 그 어린 아들을 녹용(錄用)할 것을 명하니, 듣는 자들이 감탄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 우리나라가 태평한 지 200년이 됨에 백성들이 병난(兵難)을 알지 못하였다. 황지(潢池)의 작은 경계로부터 시작해 그 위엄이 나라와 대적해서 열흘이 못 되어 도의 절반이 함락되니, 혹은 항복하고 혹은 도망하여 여기에 죽은 자는 오직 정 충렬(鄭忠烈) 한 분뿐이었다.
조정과 민간이 크게 요동하고 경사(京師)는 계엄(戒嚴)을 하니 참으로 위태롭고 위태로웠다. 공은 한 보루를 지키는 책임도 맡은 것이 없었는데 여항에서 일어나서 충절을 잡고서 흉포한 칼날 아래에 목숨을 바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로써 구차히 살아남으려 했던 왕신(王臣)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 막 일어나려는 적도들의 기운을 꺾을 수가 있었던바, 1년이 되지 못하여 요망한 기운을 깨끗이 청소했던 것은 바로 공이 한 번 죽은 데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니 이는 이른바 ‘적을 꾸짖는 혀가 백만의 정예병보다 강하다’는 것일 것이다. 이와 같은 자는 그 죽음이 태산(泰山)보다 무거움이 있는 것이다.
공은 자가 자점(子漸)이니, 그 선조는 수원 사람이다. 신라의 대상(大相) 백우경(白宇經)이 시조가 되는데, 인주 부사(仁州府使) 휘 역(繹)에 이르러서 정주(定州)로 이사해서 관서 지방의 큰 문벌이 되었다. 증조는 휘가 채후(采後)이고, 조부는 휘가 일영(日永)이고, 선고는 휘가 선양(善養)이니, 유학으로 집안을 이어왔다. 선비(先妣) 해주 노씨(海州盧氏)는 노현진(盧玄軫)의 따님인데, 영조 신사년(1761, 영조37)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특이하였는데, 처사 최경림(崔敬林)을 따라 배우면서 뜻을 가다듬고 학문을 쌓으며 선철들의 명절(名節)을 흠모해서 책을 읽다가 살신성인(殺身成仁)한 경우에 이르면 번번이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공순하고 신실하여 자신의 어짊과 지혜를 내세워 남보다 앞서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리를 보고서 용감히 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마치 여울물이 골짝으로 세차게 흘러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뜻을 빼앗지 못하였다.
이때에 역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난역(亂逆)이 우리 주(州)에서 나왔으니 내 무슨 면목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서겠는가.”라 하고는, 동지들을 규합해 이끌어서 건장하고 용맹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거짓 군수를 주벌하려 하였는데, 결행하기 전에 적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공은 민심이 거기에 빠져서 역(逆)과 순(順)을 구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반드시 자신이 선창하여 한 도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 깃발에 ‘신안충의군(新安忠義軍)’이라고 쓰고 이것을 가져다가 절도영(節度營)에 보내고 은밀히 적의 실정을 보고하였다.
또 절도영에 청하기를 ‘급히 기병을 출동시켜 샛길을 따라 곧바로 정주성(定州城)으로 쳐들어가서 적들로 하여금 머리와 꼬리가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하면 일고(一鼓)에 적의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으니, 부디 여러 의사(義士)들과 약속해서 그들을 향도(嚮導)로 삼으십시오.’
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에 대한 방략을 나누어 주어서 안에서 기습하고 밖에서 맞이할 계책으로 삼았다. 이어서 원근에 격문을 돌려 기개와 의리로써 서로 감동시키니, 사람들이 평소 모두 공을 중히 여겼으므로 이에 향응(響應)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유독 절도사가 이를 의심해서 병력을 일부러 출동시키지 않았다.
처음에 정주 목사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고 적도들이 거짓 군수를 세우고서 읍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군관을 삼았을 적에 공의 이름 또한 거기에 기록해 넣으니 공이 그 직첩을 찢어버렸다. 그러다가 괴수 홍경래가 성을 점거하고서 공이 불일간에 거의(擧義)할 것을 알아채어 급히 군대를 보내 엄습하여 포위하니, 공은 면치 못할 것을 알고는 의관을 정제하고서 가묘에 사직하고 여러 아우들과 이별하기를 “나는 끝났지만 너희들은 반드시 힘을 다하여 나의 뜻을 이어 가거라.”라고 하였다.
적에게 붙잡히자 적이 군대와 호위병을 성대하게 진열하고서 공을 회유하고 협박하니, 공은 분노하여 꾸짖기를 “내 너를 죽여서 너의 고기를 먹고 너의 가죽에서 자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우니, 어찌하여 속히 나를 죽이지 않는가? 나는 죽어도 너에게 굽히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적은 공에게 성대한 명성이 있음을 알고는 반드시 산 채로 항복받고자 하여 그대로 옥에 가두고서 날마다 참혹한 형벌을 시행하기를 수십 일을 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굽히지 않고, 은밀히 자기를 지키는 병졸을 시켜서 성안 사람을 회유하여 관군의 내응을 도모하게 하였는데, 병졸이 그 계획을 누설하니 적이 크게 분노하여 공을 죽이려 하였다.
공이 크게 고함치며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죽을 뿐이지만 응당 충성스런 영혼이 되어서 반드시 너희 개와 쥐 같은 무리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섬멸하겠다.”라고 하였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드높고 열렬하였으므로 여러 적들이 서로 돌아보고는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마침내 살해를 당하니, 바로 임신년(1812, 순조12) 정월 16일이었다.
다음 날에 첩자가 성을 넘어가서 이 사실을 매우 자세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3개월 만에 관군이 정주성을 함락하자, 공의 여러 아들들이 성안에 들어가서 공의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는 가산군(嘉山郡) 송창산(宋倉山)에 있는 부인 묘 오른쪽 자좌(子坐)에 나아가서 공의 옷과 신을 가지고 장례하였다.
다음 해 계유년(1813)에 정주성 남쪽에 단을 쌓아서 공과 충절을 세운 여섯 의사를 제사하고 또 비를 세워서 이를 기록하였으며, 정주의 인사들이 오봉산(五鳳山) 아래에 사당을 세워서 여섯 의사와 함께 제향하였는데, 조정에서 이 사당에 사액하기를 ‘표절(表節)’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표창하고 위무하여 높이 보답함이 구비되게 되었다.
공은 천성이 효성스러워서 집안일을 맡아 부지런히 수행함에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았으며 집이 가난함에도 뜻을 봉양함에 빠뜨림이 없었다. 추원(追遠)의 제사에 더욱 삼가서 새벽이면 반드시 사당에 배알하고 매년 가을에 곡식이 익으면 제수를 먼저 준비해 둔 뒤에 식구를 계산하여 양식을 배정하였다.
또 여러 아우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어서 아우들이 모이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형제들끼리 단란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서로 간에 절절시시(切切偲偲)함을 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제들이 수행이 깨끗하다고 소문이 났다.
만년에 부호(鳧湖)에 거주하면서는 《주례(周禮)》와 《논어》를 연역하여 가르쳐서 시골 글방에서 가르침을 베풀었고 또 가난한 자를 물자로 도왔다. 그래서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공이 스스로 수행한 실제가 집안과 나라에 도달한 것들이다.
아! 공은 일찍이 인의도덕(仁義道德)의 설을 들어서 다만 알 뿐만이 아니요 또한 진실로 실천하였다. 처음에는 의리를 선양하고 끝내는 의리에 죽어서 의리가 있는 곳에 자신의 진수를 만들어내었으니, 여기서 학문의 공력이 큼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어찌 하루아침에 갑자기 취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바로 이른바 ‘안에서 나온 것은 정(貞)에 부합하고 밖에 행한 것은 의(義)를 꿰뚫는다.’는 것일 것이다.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공이 백공의 행장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죽음으로 지키면서도 도(道)를 잘하였으니, 이 말을 가지고 공이 어떤 사람인지 탐구한다면 공이 공이 된 이유를 알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군자들이 이 말을 진리를 아는 말이라고 하였다.
부인 백천 조씨(白川趙氏)는 조몽전(趙夢鸇)의 따님인데 곤범(閫範)을 모두 구비하였다. 세 아들을 낳으니, 전 현감 종륜(宗倫)과 종검(宗儉)과 문과로 벼슬하여 좌랑을 맡고 있는 종전(宗佺)이다. 종륜의 아들은 시술(時述)ㆍ시달(時達)ㆍ시탁(時逴)이고, 여서(女婿)는 김지무(金持懋)이다. 종검의 아들은 시현(時絢)이고, 종전의 아들은 시련(時連)이다.
공의 아우 백경해(白慶楷)가 몸을 지키고 학문을 좋아하니 사람들은 이난(二難)이라고 일컬었다. 신미년(1811, 순조11) 전란 때에 본도의 아사(亞使)로 관찰영(觀察營)에 달려가자 묘당이 “이미 훌륭한 형이 있으니 그 아우를 장려해야 한다.”라고 아뢰어서 특별히 태천 현감(泰川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뒤에 한성부 좌윤에 이르렀다.
좌윤이 일찍이 공의 묘지명을 청하므로 내 염치를 무릅쓰고 응하였는데, 또 다시 생석(牲石)에 명문을 지을 것을 청하니, 한 사람이 신도비명과 묘지명을 함께 저술하는 것은 사체를 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간청이 더욱 간절해지므로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수많은 인생이 / 衆萬之生
각각 하늘이 부여하는 것을 받았으니 / 各受天賦
그 부여 받은 것은 무엇인가 / 厥賦維何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길이었네 / 人心人路
그 길을 따르지 않고 그 마음 찾지 않아서 / 弗由弗求
이를 온전히 하는 이가 드물었네 / 尠克其全
원하는 바와 싫어하는 바를 / 所欲所惡
잃지 않는 이가 어진 사람이니 / 勿喪者贒
아름다운 백공이여 / 有美白公
만부 중의 어진 사람이었네 / 萬夫之良
집안에서 정사를 하니 / 爲政于家
효도하고 우애함이 하늘의 상도(常道)였네 / 孝友天常
성철들을 외고 본받아서 / 誦法聖哲
일찍이 스스로 스승을 얻었네 / 早自得師
날마다 복습한 것은 / 日用服習
사물의 법칙과 사람의 병이(秉彛)였네 / 物則民彝
산림에 몸을 숨기고서 / 晦身嵁巖
영재를 기르기를 좋아하였네 / 樂育才英
무엇으로 그들을 가르쳤는가 / 何以裁之
사교와 육행이었네 / 四敎六行
근본이 보존되니 / 本之則存
한 지방의 표준이 되었네 / 標準一方
추부에서 경계를 고함이 / 萑苻告警
마침 이 고을에 있었는데 / 適在是鄕
미친바람과 거센 불꽃이 / 狂猋劫炎
천 리에 피를 흐르게 하였네 / 千里流血
눈물을 뿌리며 격문을 쓰니 / 灑淚草檄
의지와 기개가 격렬하였네 / 志氣激烈
의병을 모아서 / 誓鳩義旅
창궐하는 적을 막겠다고 맹세했는데 / 以遏猖獗
힘이 다하여 사로잡혔으나 / 力窮就執
오히려 그 말을 높이 하였네 / 猶抗其舌
규벽은 부서질 수 있지만 / 圭璧可碎
견고하고 바른 지조는 이지러질 수 없네 / 堅貞靡缺
공을 핍박하기를 범과 같이 하자 / 縛公如虎
적을 꾸짖기를 개와 같다고 하였네 / 罵賊如狗
다섯 가지 혹독한 형벌이 몸에 두루 가해지며 / 五毒遍體
위엄으로 협박하고 이익으로 회유하였으나 / 威怵利誘
백 번 죽어도 변치 않아서 / 百死不變
그 지킴을 강하게 하였네 / 強矯其守
웅장(熊掌)과 어물(魚物)에 대한 취사선택은 / 熊魚取舍
본디 공이 평소에 하던 것이었지 / 自公平生
천지의 중간에 / 天地中間
우리 큰 대경을 세우니 / 立我大經
엄숙하고 엄숙함이 서리와 눈 같고 / 肅肅霜雪
밝고 밝음이 해와 별 같네 / 晶晶日星
중승이 여귀(厲鬼)가 되겠다는 것은 / 中丞爲癘
바로 공이 맹세한 말이었네 / 卽公矢言
규룡을 타고서 참창(攙搶)을 쓸어 달라고 / 鞭虯掃欃
위로 하늘 궁궐에 하소연을 하니 / 上訴天閽
하늘이 요망한 이의 허리와 난신의 목을 / 妖腰亂領
벼락으로 깨뜨려버렸네 / 霹靂宵砉
그리하여 이들을 영원히 소탕하니 / 永底廓淸
이는 공이 국가에 보답한 것이라오 / 是公報國
왕이 내린 조서와 붉은 정려문이 / 紫誥丹旌
가문에 찬란하게 빛나네 / 炳烺門闌
높이는 사당 또한 있으니 / 亦越崇祠
오봉산의 사당과 달천의 단이었네 / 鳳廟㺚壇
영광스런 하사가 구비되니 / 寵錫所備
왕의 도가 이로써 빛났네 / 王猷以光
높고 높은 송창산에는 / 嵂嵂宋山
공의 옷과 관이 묻혀 있으니 / 衣冠攸藏
누가 예가 아니라 말하는가 / 孰云非禮
영혼이 의탁한 곳이라네 / 精爽所托
신도에 명문을 새겨서 / 勒銘神道
천년에 명성을 드리우네 / 垂聲千曆
관서의 모든 사람들은 / 凡厥西人
순과 역의 구분에 어둡지 말지어다 / 毋迷順逆
만일 내 말을 믿지 않거든 / 如我不信
이 높은 비석을 보라 / 視此穹石
내 다만 공을 밝게 드러낼 뿐만이 아니요 / 非直昭公
이로써 인극을 붙드노라 / 用扶人極
<끝>
[註解]
[주01] 부호 백공 : 백경한(白慶翰, 1761~1812)으로,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자점(子漸), 호는 부호(鳧湖)이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자 의병을 모아 관군과 함께 난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반란군에 체포되었다. 갖은 고문에도 끝내 투항하지 않다가 이듬해 1
월에 피살되었다.
난이 평정된 다음 해인 1813년 정주성(定州城) 남쪽에 단을 쌓아 그를 포함한 일곱 명의 의사(義士)를 제사하고 순절을 기리는 비
를 세웠으며, 정주의 인사들이 오봉산(五鳳山) 아래에 사당을 세워 이 일곱 의사들을 제향하였는데, 1824년 이 사당에 사액할 것
을 요청하는 박영현(朴榮顯)의 상소를 계기로 ‘표절(表節)’이라고 사액되었다. 1812년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문집에 《부호
집》이 있다.
[주02] 토적이 …… 일어나니 : 1811년 관서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홍경래(洪景來, 1780~1812) 등이 조선 시대에
계속되어 온 서북인의 차별에 대한 울분을 격동시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1811년 음력 12월 18일에 가산(嘉山) 군청을 습격
하여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음력 4월 19일 반란군이 토벌될 때까지 4개월간 지속되었다.
[주03] 황지(潢池)의 작은 경계 : 반란군이 일어나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홍경래의 난을 가리킨 것이다. ‘황지’는 물이
고여 만들어진 작은 못으로, 이 말은 전한(前漢) 선제(宣帝) 때에 발해(渤海) 지방에 민란이 일어나자, 공수(龔遂)를 발해 태수로
임명하여 도둑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공수가 그 민란에 대해 설명하면서 “바닷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성스러운 교화가 미치지 않
는 탓에 백성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데도 관리들이 돌보아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폐하의 적자들로 하여금 폐하의 군사를 훔쳐서 황지 안에서 희롱하게 한 것입니다.[其民困于飢寒, 而吏不恤, 故使陛下
赤子盜弄陛下之兵于潢池中耳.]”라고 말했던 데서 유래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
[주04] 그 …… 대적해서 : 반란군의 위엄이 나라의 위엄과 대적함을 말한다. 이 말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장수 오한(吳漢)을 두
고 평하며 “오공은 사람의 의지를 분발하게 하니, 그 위엄이 마치 한 사람으로서 나라와 대적하는 듯하다.[吳公差彊人意, 隱若一
敵國矣.]”라고 한 데서 원용한 것이다.
[주05] 정 충렬(鄭忠烈) : 정시(鄭蓍, 1768~1811)로, 본관은 청주, 자는 백우(伯友), 호는 덕원(德園), 시호는 충렬이다. 1799년 무과에
급제하고, 1811년에 가산 군수(嘉山郡守)가 되었는데 이해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관아에 폭도들이 들이닥쳐 재물과 관인(官印)
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자, 그들의 대역무함을 꾸짖다가 부친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그의 묘지명이 본집에 실려 있다. 《梅山集 卷38
贈吏曹參判蒼坡鄭公墓誌銘》
[주06] 신안충의군(新安忠義軍) :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이 지은 백경한의 행장에 의하면, 신안은 백경한이 거주하던 마을의 이름이
라고 한다. 《老洲集 卷20 贈戶曹參判白公行狀》
[주07] 여섯 의사 : 홍경래의 난 때에 순직한 가산 군수 정시(鄭蓍)를 비롯하여, 한호운(韓浩運)ㆍ허항(許沆)ㆍ임지환(林之煥)ㆍ제경욱
(諸景彧)ㆍ김대택(金大宅) 등인바, 이들에 대한 전(傳)이 본집 권51에 실려 있으며, 한호운의 묘지명 역시 본집 권42에 실려 있다.
《梅山集 卷51 贈統制使諸公傳, 卷42 贈禮曹參判韓公墓誌銘》
[주08] 뜻을 봉양함 : 부모의 뜻을 헤아려 잘 모셨다는 말로, 증자(曾子)가 아버지 증석(曾晳)을 봉양할 적에 반드시 술과 고기를 밥상에
올렸으며, 상을 치울 때 증석이 “남은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반드시 “있습니다.” 하고, 계속해서 “누구에게 주시겠습니까?”라고
여쭈었는데, 맹자가 이러한 증자의 효에 대해 ‘뜻을 봉양한 것[養志]’이라고 하였다. 《孟子 離婁上》
[주09] 추원(追遠) : 먼 조상을 추모함을 말한다. 《논어집주》 〈학이(學而)〉에 증자(曾子)가 “종을 신중히 행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면 백
성들의 덕이 돈후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자의 주(註)에 “신종(愼終)이란 초
상에 그 예(禮)를 다하는 것이요, 추원이란 제사(祭祀)에 그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10] 절절시시(切切偲偲)함 :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는 것으로, 백경한의 형제들이 화락하게 잘 지냈을 뿐만 아니라 붕우 간에 해주
듯이 서로 간절하게 권면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 말은 자로(子路)가 어떠해야 선비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묻자, 공자(孔
子)가 답하기를,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며 화락하면 선비라고 할 수 있다. 붕우 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하게 권면하고, 형제간에
는 화락해야 한다.[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11] 안에서 …… 꿰뚫는다 : 이 말은 당(唐)나라 유종원(柳宗元)의 〈당고특진증개부의동삼사양주대도독남부군휴양묘비(唐故特進贈
開府儀同三司揚州大都督南府君睢陽廟碑)〉에 보인다.
[주12] 독실하게 …… 잘하였으니 : 이 말은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주13] 백경해(白慶楷) : 1765~1842.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성익, 호는 수와(守窩)이다. 1786년(정조10)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였고, 운산 군수(雲山郡守), 태천 현감(泰川縣監), 사헌부 장령, 동지중추부사, 한성부 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에 《수와집
(守窩集)》이 있으며, 본집 권17에 왕복 편지가 실려 있고, 본권 아래의 〈좌윤 백공 신도비명(左尹白公神道碑銘)〉은 바로 백경해
의 신도비명이다.
[주14] 이난(二難) : 난형난제(難兄難弟)와 같은 말로, 덕행과 학문이 뛰어난 형제를 가리켜 이난이라고 한다. 후한(後漢) 때 진식(陳寔)
의 여섯 아들 가운데 진기(陳紀)와 진심(陳諶)이 가장 덕행이 뛰어났는데, 하루는 진기의 아들 진군(陳群)과 진심의 아들 진충(陳
忠)이 각기 자기 아버지가 낫다고 다투다가 조부에게 묻자, 진식이 “원방은 형 되기 어렵고 계방은 아우 되기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원방은 진기의 자이고, 계방은 진심의 자이다. 《世說新語 德行第一》
[주15] 본도의 아사(亞使) : 백경해는 1811년 8월에 평안 도사(平安都事)에 제수되었다. 《承政院日記 純祖 11年 8月 11日》
[주16] 생석(牲石) : 신도비를 말한다. 옛날에는 제사에 쓸 희생을 신도비에 묶어 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17] 그 …… 드물었네 : ‘사람의 마음’은 인(仁)한 마음이고, ‘사람의 길’은 일을 행할 때에 따라야 하는 마땅함으로서의 의(義)인데, 이
것이 천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인한 마음을 잃어버리고서 찾지 않고, 마땅함의 길[義]을 버리고서 따르지 않으므로 그
천부적으로 본유한 인심(人心)과 인로(人路)를 온전히 보존하고 따르는 이가 드물다는 말이다.
이 말은 《맹자》 〈고자 상(告子上)〉의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며 그 마음을 잃어
버리고 찾을 줄을 모르니, 애처롭다.[仁, 人心也, 義, 人路也. 舍其路而不由, 放其心而不知求, 哀哉!]”라는 말에 의거한 것이다.
[주18] 원하는 …… 사람이니 : 사생취의(捨生取義)하는 병이(秉彛)의 양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 어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삶이고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사생취의할 수 있는 것은, 의(義)를 삶보다 더 원하고 불의(不義)를
죽음보다 더 싫어하기 때문인바, 이렇듯 사생취의 할 수 있게 하는 마음은 사람의 천부적 양심, 구체적으로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이다.
이 말은 《맹자》 〈고자 상(告子上)〉의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원하는 바가 삶보다 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삶을 구차히 얻으려
고 하지 않으며,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바이지만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기 때문에 환난을 피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이다. ……
이 때문에 살 수 있는데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쓰지 않는 경우가 있고, 이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
다. 이러므로 원하는 바가 삶보다 심한 것이 있고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으니, 다만 현자만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건마는 현자는 능히 이것을 잃지 않을 뿐이다.”라는 말에 의거한 것이다.
[주19] 집안에서 …… 상도(常道)였네 : 혹자가 공자에게 “왜 정사를 하지 않느냐?”라고 묻자, 공자가 《서경》 〈주서(周書) 군진(君陳)〉
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정사에 베푼다.[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라고 한 것을 인용하고서 “이 또한 정사를 하는 것
이니, 어찌 지위에 있어야만 정사를 하는 것이 되겠는가.[是亦爲政, 奚其爲爲政?]”라고 답하였는바, 이 공자의 말을 원용한 것이
다. 《論語 爲政》
[주20] 사물의 …… 병이(秉彛)였네 : 병이는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떳떳한 본성을 말한다. 사물의 법칙과 사람의 병이는 《시경》
〈대아(大雅) 증민(烝民)〉의 “하늘이 백성을 내시니 사물이 있는 곳에 법칙이 있도다. 백성이 지닌 본성은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
도다.[天生蒸民, 有物有則. 民之秉彝, 好是懿德.]”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주21] 사교(四敎) : 글을 배움[文], 행실을 닦음[行], 충(忠)과 신(信)을 마음에 보존하게 함, 이 네 가지로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바, 《논
어》 〈술이(述而)〉에 “공자께서는 4가지로써 가르치셨으니, 문ㆍ행ㆍ충ㆍ신이었다.[子以四敎, 文行忠信.]”라고 한 데서 온 말이
다.
[주22] 육행(六行) :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나오는 여섯 가지 행실로, ‘부모를 잘 섬김[孝]’, ‘형제간에 우애함
[友]’, ‘구족간에 화목함[睦]’, ‘외척간에 화목함[婣]’, ‘붕우 간에 신뢰함[任]’, ‘힘들고 가난한 이를 진휼함[恤]’이다. 《周禮注疏
卷10 地官 大司徒》
[주23] 추부(萑苻)에서 경계를 고함 : 도적이 일어나 소요를 일으킨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홍경래의 난을 가리킨 것이다. 추부는 춘추 시
대 정(鄭)나라에 있던 늪지대 이름으로 도적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다. 《春秋左氏傳 昭公20年》
[주24] 웅장(熊掌)과 …… 취사선택 : 사생취의의 선택을 말하는 것으로,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어물도 내가 원하는 바요 웅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어물을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
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
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주25] 대경(大經) : 크고 떳떳한 도리를 이른다. 《중용장구》에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천하의 대경을 경륜할 수 있다.[唯
天下至誠, 爲能經綸天下之大經.]”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대경이란 다섯 가지의 인륜이다.[大經者, 五品之人倫.]”라고 해설하
였다. 《中庸章句》
[주26] 중승이 …… 것 : 중승은 당(唐)나라 어사중승 장순(張巡)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이 수양성(睢陽城)을 지키고 있었는
데, 수양성이 오랜 시간 적에게 포위되어 식량이 다 떨어지고 장병이 병들어 더 이상 가망이 없자, 서쪽을 향해 재배하고서 말하기를
“신은 힘이 다하여 성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살아서 이미 폐하께 보답하지 못했으니, 죽어서 마땅히 여귀가 되어 적을 죽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귀’는 죽어서 돌아
갈 곳 없는 떠돌이 귀신을 말한다. 《通鑑節要 卷42 唐紀 肅宗》
[주27] 참창(攙搶) : 혜성의 이름인데 병화(兵禍)를 주관하는 별로 간주되었는바, 전하여 사악하고 흉포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주28] 달천의 단(壇) :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이 지은 백경한의 행장에 의하면, 백경한이 별세한 다음 해인 1813년에 순조가 정주 동
쪽 달천가에 단을 쌓고 매년 적을 평정한 날에 백경한과 여섯 의사를 제사하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老洲集 卷20 贈戶曹參判白公
行狀》
[주29] 인극(人極) : 인간의 윤리ㆍ도덕에 있어서 최고의 표준 혹은 최고의 원리를 이르는 말로,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에 “성인은 중ㆍ정ㆍ인ㆍ의로써 정하되, 정을 주장하여 인극을 세운다.[聖人定之以中正仁義, 而主靜立人極.]”라고 보인다.
(사)해동경사연구소 | 신상후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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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戶曹參判鳧湖白公神道碑銘 幷序 - 庚子
純宗在宥之十有一年冬。土冦起西陲。時鳧湖白公慶翰。以布衣將倡義討賊。被其所獲。不屈而死之。及賊平。道臣以聞。命贈嘉善大夫戶曹參判。旌其閭曰忠臣之門。且命錄孤。聞者感歎泣下。嗚呼。國家昇平二百年。民不識兵。因潢池小警。隱若敵國 。未旬日。半省失守。或降或逃。而死者惟鄭忠烈一人耳。中外大震。京師戒嚴。誠岌岌殆哉。公非有一障之責。而起委巷秉忠節。授命於猘鋒之下而靡悔。是可以愧王臣苟活之心。而折賊徒方生之氣。不淹歲而掃盪妖氛者。卽公一死之力也。所謂罵賊之舌。強於百萬精兵者歟。若是者死有重於泰山也。公字子漸。其先水原人。新羅大相宇經爲初祖。至仁州府使諱繹。遷定州爲關西鉅閥。曾祖諱采後。祖諱日永。考諱善養。以儒術世家。妣海州盧氏。玄軫女。以英宗辛巳擧公。天姿絶異。從崔處士敬林學 。厲志居業。慕往哲名節。讀書至殺身成仁。輒慷慨流涕。恂恂不以賢智上人。而及其見義敢爲。如湍之注壑。人莫能奪也。至是聞賊起。痛哭曰亂逆出吾州。何面目立天壤之間乎。糾率同志。擬募壯勇誅僞倅未果。而賊勢鴟張。公患人心陷溺。不辨逆順 。必欲自我先倡。作一路士氣。題其旗曰新安忠義軍。賷送節度營。密報賊情。且請亟出奇兵。從間道直擣定墉。俾賊首尾不相救。一皷渠帥可擒。願約束諸義士鄕導。遂分授方略。爲內襲外迎計。仍傳檄遠近。以氣義相感。人皆雅重公。無不響應。獨節度使疑之。兵故不出。始牧使棄城走。賊徒爲僞倅。選邑子爲軍官。亦錄公名。公裂其帖。及渠魁洪景來據城。詗公不日擧義。急發兵掩圍。公知不免。整衣冠辭廟。訣諸弟曰吾則已矣。必戮力繼吾志。旣被執。賊盛陳兵衛誘脅。公憤罵曰恨不能殲汝。食肉寢皮。何不速殺我。我死不爲汝屈。賊知公有盛名。必欲生降。仍繫獄。日施毒刑者數旬。而終不屈。陰敎守卒。諭城中人爲官軍內應。卒泄其謀。賊大恚。將殺公。公大呼曰吾死則死耳。當爲忠魂。必殄滅汝狗鼠輩。無遺類。聲氣抗烈。羣賊相顧失色 。遂被害。卽壬申正月十六日也。翌日諜者踰城。道其事甚悉。越三月官軍拔定城。公諸胤入求公屍不得。卽嘉山宋倉山夫人墓右子坐。葬以衣履。翌年癸酉。命築壇定州城南。祀公及立慬六義士。又樹碑以紀之。定之人立祠五鳳山下。幷享六義士。宣額曰表節。褒恤崇報。於是備矣。公性於孝。服勤幹蠱。不自有其身。家貧而志養無闕。尤謹追遠。晨必謁廟。每秋熟。先庤粢盛 。而後計口食。與諸弟共爨。不會則不食。不以湛樂而廢切偲。以故子弟以修潔聞。晩居鳧湖。演周禮論語爲訓。施敎鄕塾。資助其貧者。無賢愚皆獲歡心。此公自修之實。達于家邦者也。噫。公夙聞仁義道德之說。非苟知之。亦允蹈之。始焉擧義。終焉死義。義之所在。判得頭顱。是可見學問功大。豈一朝襲取者哉。卽所謂出乎內者合乎貞。行乎外者貫乎義者耶。老洲吳公煕常狀公行曰。篤信好學。守死善道。以是而求公。可以知公之所以爲公。君子以爲知言。夫人白川趙氏夢鸇女。閫範咸備。生三男 。宗倫前縣監。宗儉,宗佺文科佐郞。宗倫子時述,時達,時逴。女金持懋。宗儉子時絢。宗佺子時連。公弟慶楷。守身好學。人稱二難。辛未之役。以本道亞使。奔赴觀察營。廟堂白旣有其兄。宜奬其弟。特除泰川縣監。後至漢城左尹。左尹嘗謁公隧誌。强顔以應之。又請銘牲石。一人而傡述碑誌。非所以重事體。辭彌苦而懇彌切。有未忍終讓。遂爲之銘曰。
衆萬之生。各受天賦。厥賦維何。人心人路。弗由弗永。尠克其全。所欲所惡。勿喪者贒。有美白公。萬夫之良。爲政于家。
孝友天常。誦法聖哲。早自得師。日用服習。物則民彝。晦身嵁巖。樂育才英。何以裁之。四敎六行。本之則存。標準一方。
萑苻告警。適在是鄕。狂猋劫炎。千里流血。灑淚草檄。志氣激烈。誓鳩義旅。以遏猖獗。力竆就執。猶抗其舌。圭璧可碎。
堅貞靡缺。縛公如虎。罵賊如狗。五毒遍體。威怵利誘。百死不變。強矯其守。熊魚取舍。自公平生。天地中間。立我大經。
肅肅霜雪 。晶晶日星。中丞爲癘。卽公矢言。鞭虬掃欃。上訴天閽。妖腰亂領。霹靂宵砉。永底廓淸。是公報國。紫誥丹旌。
炳烺門闌。亦越崇祠。鳳廟㺚壇。寵錫所備。王猷以光。嵂嵂宋山。衣冠攸藏。孰云非禮。精爽所托。勒銘神道。垂聲千曆。
凡厥西人。毋迷順逆。如我不信。視此穹石。非直昭公。用扶人極。<끝>
梅山先生文集卷之三十二 / 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