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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 1. 25. 18:05
■ 금강산유록(金剛山遊錄: 금강산 유람기)
●지인들과 함께 금강산으로 떠나 장안사(長安寺: 강원도 금강산에 있는 큰절)에 들다.
나는 산수를 좋아하는 벽(癖)이 있어서, 매번 금강산을 보고 싶었으나 과거에 골몰하느라 아직까지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갑오년(1774, 영조 50)에 과거 때문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서울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 때 좌랑(佐郞) 밀성(密城) 안경점(安景漸)이 파직되어 고향으로 가면서, 가는 길에 관동(關東)의 명승지를 두루 보려 하면서 함께 유람할 사람이 없는 것을 한하고 있기에 내가 모시고 가기를 원했다.
서울에 있는 친척 중에 어떤 사람은 나를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놀리기도, 어떤 이는 길이 험하고 멀다며 위험하다 했으나, 이미 굳게 정해진 마음을 깨트릴 수 없기에 마침내 1백 동(銅)을 구해 전대에 넣고 길을 나서기로 결정하였다. 때는 7월 21일 갑진(甲辰)일이다.
서울로부터 금강산까지의 거리는 5백리라고 한다.
아침에 동소문(東小門 : 예전에, 동쪽에 있다는 데서 ‘혜화문’을 달리 이르던 말)을 나와 수월점(水越店)에 이르렀다.
밥을 먹고 잠시 누원(樓院)에서 쉬면서 시 한 수를 지었다.
의정부(義正部: 지금의 경기도 議政府市)에서 점심을 먹고 서오랑(西五浪)을 지나 축선령(祝仙嶺)에서 쉬었다.
이곳은 양주(楊州)와 포천(抱川)의 경계이다. 송우(松隅)를 향하는데 십 리를 못가서 마침 빈 말을 만났다.
내가 빌려 타고자 하니 곁에 있던 한 사람이 3전(錢)을 세(貰)로 주었다.
그러나 말 주인은 받지 않고 나에게 타고 갈 것을 재촉하였다.
괴이하여 이유를 물으니, “소인은 바로 송현(松峴)의 서씨(徐氏) 재상가의 노비입니다.
어찌 세를 받을 수 있으며, 어찌 빌려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 이름을 물으니 김만태(金萬太)라고 했다. 이 한 가지 일로 미루어 또한 그 집의 법도를 알 수 있었다.
저녁에 송우에 이르러 잠을 잤다. 이 날 80리를 여행하였다.
7월 22일. 맑았다.
안변(安邊)의 관사 노비 임봉춘(林逢春)을 시종으로 삼고 말을 세냈다.
일찍 출발하여 파발막(擺撥幕)에 도달하였다. 잠시 장가점(場街店)에서 쉬고 만세교(萬歲橋)에서 아침을 먹는데, 임봉춘은 곧장 양문(楊門)으로 향했다.
마을 앞 작은 시내를 건너니 바로 영평(永平)의 경계이다. 양문에 이르러 백당동(柏棠洞)의 유정(楡亭)을 지나고 굴곡천(屈曲川)을 경유하여 지슬포(只瑟浦)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총거리가 90리이다.
7월 23일. 맑았다.
일찍 출발하여 마을 앞의 작은 시내를 건너니 바로 철원(鐵原)의 경계이다.
아침은 갈현(葛峴)에서 먹었다. 신주점(新酒店)을 지나니 바로 금화(金化)의 경계이다.
유점(楡店)을 지나서 세갈현(細葛峴)에 이르고 금화읍에 도달하였다.
동천산(同仟山)의 답현(畓峴)에서 점심을 먹고 이동(二同)의 구정판(九亭板)에 이르렀다.
다리 앞의 홍씨(洪氏) 집에서 유숙하였다. 70리를 여행하였다.
7월 24일. 맑았다.
구정점을 돌아 나와 아침을 먹었다. 중추현(中樞峴)을 넘고 진본역(眞本驛)에 도달하였으니, 금성(金城)의 경계이다.
금성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경파현(鏡波峴)을 넘었다.
탄검(炭黔)을 거쳐 창도창(昌道倉)을 지나 상기성(上岐城)에 이르렀다.
앞 주막의 작은 시내를 넘어 이춘광(李春光)의 집에서 유숙하였는데, 나와 본관이 같았다.
사람이 매우 순박하였고, 대접이 매우 정성스러웠다. 족보를 꺼내 보여주는데, 천리 타관에서 근원이 같은 사람을 만나니 또한 하나의 행운이다. 이 날 70리를 갔다.
7월 25일. 맑았다.
관음굴(觀音窟) 조덕상(趙德常)의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다경진(多慶津)을 건너 통구창(通溝倉)을 지나 의(義)를 정려한 전백령(全柏齡)의 집에 들어가 잠시 쉬면서 말을 나누었다.
마니령(摩尼嶺)의 추정(楸亭) 김사달(金士達)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이로부터 길의 이수(里數)가 매우 멀어서 (길이 험하여) 경기의 이수에 비하면 삼분의 일 밖에 되지 않았다.
7월 26일. 맑았다.
김사달의 집에서 아침을 먹고 단발령(斷髮嶺)에 올랐다.
멀리 바라보니 한줄기 뜬 구름이 산꼭대기 부분을 가로질러 에워싸고 있는데 바로 금강산이다.
‘단발’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 세속에서는 세조 때의 일이라고 전하는데, 제나라 동쪽의 야담에 가깝다. 아래에 마니현이 있고 위에 단발령이 있으니, 생각건대 옛날 선사가 입산수도하려고 이곳에 이르러 머리를 잘랐기 때문에 이름한 것인가?
시 한 수를 지었다. 신원(新院)으로부터 철이령(鐵伊嶺)을 넘어 초천(初川)에 이르렀으며 고목(高木)을 지나 장안사(長安寺)에 당도하였다. 절에 이르기 5리 전에 주지승인 해운(海雲)과 길 안내하는 승려인 취담(就譚)이 골짜기 입구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앞에서 인도하여 절에 닿았다.
먼저 산영루(山瑛樓)에 앉으니 장경(長慶), 관음(觀音), 석가(釋迦), 지장(地藏)의 여러 봉우리들이 눈앞에 벌여 있다. 층암절벽이 모두 기이하고 빼어나 볼만 하였다. 저녁에 서방장(西方丈)에서 잤다.
●표훈사(表訓寺)와 정양사(正陽寺. 그 근처 암자들을 둘러보다.
7월 27일. 가늘게 비가 내렸다.
한가로이 절의 고적인 책자 한권을 보는데 그 가운데 ‘속객이 혹 들어오면 반드시 우레와 비를 내려 씻게 한다.’는 말이 있으니, 내가,라고
“이 비는 속세의 때를 씻는 것이 아니라 정토의 깨끗한 인연〔淸緣〕을 맺는 것이다.”
하였다.
서울을 떠나올 때부터 이미 비가 오려고 했었는데, 여기에 이르러 좀 쉬는 날에 빗방울이 떨어지니, 진흙길에서 어둡게 비를 맞는 군색함을 면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깨끗한 복을 나에게 내려 준 것이다.
이름을 적어서 산영루에 걸었다. 느즈막에 잠깐 비가 개었다. 주지승을 시켜 먼저 표훈사(標訓寺)에 통보하게 하고 길을 안내하는 승려와 더불어 지장암(地藏庵)에 올랐는데, 또한 고요하고 깨끗하여 좋았다.
시내를 따라 수백 보를 가자 작은 골짜기가 나왔다. 시내 가에 수십 사람이 앉을 만하게 큰 너럭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옥경대(玉鏡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기이한 봉우리와 첩첩의 바위가 좌우를 에워싸고 있으며 한 절벽이 시내의 동쪽에 높이 솟아 있는데 높이가 백여 길 정도 되었다. 바로 명경대(明鏡臺)이다.
아래에는 황천강(黃泉江)이 있는데, 노란 모래가 웅덩이를 가득 채웠으며 물빛도 모두 누런 색이러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명경대 위에 줄지어 앉아 우러러 석벽을 보고 황천강을 굽어보니 문득 세속의 생각이 없어짐을 깨달았다. 즐거워 돌아갈 것을 잊었다.
시내를 건너 저쪽 편에는 작은 길이 나 있으니 영원동(靈源洞)으로 통하는 길이다.
돌을 축조하여 문을 만들었는데, 극락문이라 부르고, 지옥문이라고도 부르니 영암(靈菴)의 좌우에 시왕봉(十王峰)이 있는 까닭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여기서 영원까지는 20리인데 돌길이 험하고 별다른 경치가 없다고 하기에 지팡이를 돌려 표훈사로 향했다.
3,4리쯤 가자 수월암, 안영암(安影菴)이 나왔는데, 모두 폐기된 암자였다.
또 3,4리쯤 가니 명연담(明淵潭)이 있는데, 기이한 바위가 높이 솟아 있고 흐르는 물이 맑고 빨라 또한 신령스러운 경치였다.
그 위에 이름을 새기고자 하였으나 갈 길을 헤아리다 창졸간에 붓과 먹을 가져오지 않아 쓰지 못하였다.
몇 리를 더 가서 청룡암(靑龍菴)을 바라보았는데, 표훈사에 딸린 암자로 달리 구경거리가 없으므로 지나치고 들어가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 백화암(白華菴)에 이르러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비문을 보고 삼불암(三佛巖)으로 갔다.
삼불암은 길의 오른쪽에 있는데 앞에는 세 부처를 새기고 뒤에는 53부처를 새겼으니 또한 볼 만하였다.
주지승이 승려 서첨이 와서 바위 옆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함께 표훈사에 들어갔다.
시냇가에 있는 능파루(凌波樓)에 앉으니 물소리는 콸콸거리고 서풍은 서늘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승당(僧堂)에 들어가 쉬었다.
승려가 술을 조금 내오고 조금 후에 점심을 내왔다. 먹기를 마치니 날씨가 맑게 개었다.
재촉하여 정양사(正陽寺)로 올라갔다. 3리쯤 가서 시 한 수를 지었다.
헐성루(歇惺樓)에 올라 난간에 기대앉으니, 일만 이천 봉우리가 모두 눈 안에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청학대(靑鶴臺), 오선봉(五仙峰), 대향로(大香爐), 소향로, 혈망봉(穴望峰), 망군대(望軍臺), 석응봉(石鷹峰), 우두(牛頭), 백마(白馬), 차일(遮日), 수미(須彌), 비로(毘盧)의 여러 봉우리들이였다.
어떤 것은 새가 날아오르는 것 같고, 어떤 것은 짐승이 달리다가 엎드린 것 같고, 어떤 것은 나한이 예불 드리는 것 같고, 어떤 것은 손자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문안드리는 것 같아 기상이 천만 가지로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참으로 천하의 절경이라 할 만 했다.
누대 위의 현판을 살펴보았는데 이 경치를 그려내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고, 오직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무수하게 날고뛰는 모습은 혼연히 화난 듯하고, 때로 떨어져 뾰쪽한 것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구나.[無數飛騰渾欲怒, 有時尖碎不勝孤]’라는 구절이 있어서 얼마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절집을 두루 보았는데, 한 전각에 순금 부처 십여 개를 보관하고 있었다.
승려의 말이 ‘사람들이 훔쳐가기 때문에 높은 곳에 숨겨 받들고 있다.’고 하였다.
인하여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부처를 훔친 일을 매우 자세하게 이야기 하고, 또 현판을 가리켰는데, ‘정양사 추운 비에 향 태우는 밤, 거백옥이 사십 평생 잘못 산 걸 알았네.[正陽寒雨燒香野夜, 籧瑗方知四十非]’라는 시(詩)구는 대개 잘못을 뉘우치고 지은 것이다.
실소를 참지 못했다.
오랫동안 앉아 있으니 가슴이 상쾌하여 모든 세간의 시비와 영욕이 모두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문득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아 속세를 벗어나 신선이 되는 생각이 일었다.
사람이 여기에 이르러서도 만약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을 것이다. 정사룡이 끝내 맑은 이름을 얻은 것이 어찌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겠는가?
멀리 숲 사이에 가려진 암자가 하나 보이는데, ‘은적암(隱寂菴)’으로 지금은 살고 있는 승려가 없다고 했다. 잠시 후에 천일대(天一臺)를 향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헐성루와 다름없었으나 훤하게 트인 맛은 그보다 못했다. 내려와 열마전(涅摩殿)에서 잤다.
●마하연(摩訶衍)을 둘러보고 보덕굴을 보다.
7월 28일. 흐렸다.
밥을 먹은 뒤에 마하연[摩訶衍: 대승(大乘)이라는 뜻]으로 향하였다. 겨우 절 문을 십여 보 나왔을 즈음에 큰 돌이 좌우에 우뚝 솟아 있는데, 두 꼭대기가 서로 합해져 저절로 골짜기 문을 만들고 있으니 ‘금강문(金剛門)’이라고 했다.
몇 리를 더 가니 만폭동(萬瀑洞)이 있었다. 그곳에는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元和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바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글씨다.
비바람에 깎이고 씻기어 수백 년을 지났는데도 글씨의 획이 강건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완연히 어제 쓴 것 같아 노선생의 심획(心劃)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마하연까지 7,8리 사이에 여덟 개의 담(潭)이 있다.
청룡(靑龍), 흑룡(黑龍), 벽파(碧波), 분설(噴雪), 진주(眞珠), 귀담(龜潭), 용담(龍潭), 선담(船潭), 화룡담(火龍潭)이 있고 벽파와 흑룡 사이에 또 비파담(琵琶潭)이 있으니, 굽이굽이 모두 맑고 깨끗하며, 걸음걸음 모두 신령스러운 경치이다.
이른바 진주 담이 여러 담 가운데 으뜸인데, 만 곡(斛)의 물결이 하늘로 튀겼다가 물굽이를 이루며 흩어질 때 진주와 같으므로 진주담이라 부른다. 담의 위에는 ‘천하제일명산(天下第一名山)’이란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진실로 이름은 헛되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주담의 오른쪽에 보덕굴(普德窟)이 있는데, 돌길이 기울고 험해 잡고 올라가는 것도 매우 힘들기 때문에 멀리서 구리로 된 기둥만 보고 갔다. 화룡담의 왼쪽에는 사자봉(獅子峰)이 있는데, 바위의 형상이 사자와 같았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마하연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표훈사까지의 거리가 십 리이다.
백운대(白雲臺)는 바위 뒤에 있어 쇠줄이 드리워져 있는데, 승려가 올라갈 수 없다고 하므로 두보(杜甫)의 ‘쇠사슬이 높게 드리워져 있는데 올라가지 못하네.[鐵鏁高垂不可攀]’란 구절만 읊조리고 말았다.
앞에 혈망봉(穴望峰)을 바라보니 큰 구멍이 바깥으로 뚫려 있는데 곧장 영원암(靈源庵)의 골짜기로 통한다고 했다. 소광암(昭曠巖)을 지나고 내수점(內水岾)을 넘어 십 리를 가니 고성(固城)의 경계였다.
잠시 정자에서 쉬면서 북쪽으로 중향정(衆香亭)을 바라보았는데, 내금강의 면목이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다. 유점사(楡岾寺)의 승려 벽청(碧淸)등이 고개 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구름이 하늘에 모이니, 벽청이, “바다 기운이 비가 올 조짐입니다. 빨리 내려가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표훈사 승려는 절하고 돌아갔다. 급하게 유점사로 향하는데, 얼마 가지 않아 옅은 구름이 비가 되어 삿갓을 적셨다. 몇 리를 더 가자 비가 그쳤다.
칠보대(七寶臺)에 이르렀는데 구름이 가득하여 그 진면목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앞에 일곱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칠보대라 부른다고 했다.
8,9리를 더 가자 선담(船潭)이 나왔는데 상하의 석벽이 배 모양 같았고, 삼킬 듯 일렁이는 푸른 물결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절에 들어와 산영루(山影樓)에 조금 앉았다가 서방장(西方丈)으로 쉬러갔다.
승려가 이 절의 고적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한(漢)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년(서기 4년)에 창건하였는데, 여러 번 화재를 겪었고, 또한 기묘년부터 무자년까지 십 년 사이에 세 번의 화재를 겪었다. 이번에 겨우 중창을 하여 공사가 반절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직 법당만 비로소 단청을 마쳤다. 여기서 수점(水坫)까지는 20리 이다.
●원통사(圓通寺) 발연사(鉢淵寺)를 두루 살피다.
7월 29일. 맑았다.
아침에 승려가 절 안의 옛 물건을 받들어와 보여주는데, 앵무배(鸚鵡杯), 유리대, 호박잔 등으로 모두 세조(世祖) 임금 때 궁중에서 내려준 것이었다. 또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친히 쓴 불경이 있었는데 화재를 면하였으니, 토실(土室)에 보관한 때문이었다.
밥을 먹은 뒤에 성불현(成佛峴)에 올랐다. 몇 리를 더 가서 불정대(佛頂臺)에 올랐다. 불정대는 박령(樸嶺)의 곁에 있는데 절벽이 천 길이나 되어 두려워 굽어볼 수 없었고, 또 한 구멍이 밑으로 통하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원통사(圓通寺)의 승려 영휘(永輝)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백 보를 내려오자 바람구멍이 있는데, 승려의 말이 더운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나온다고 하였다.
학소대(鶴巢臺)에 비켜 앉았는데, 우뚝 선 바위가 또한 수천 길이나 되었다. 옛날에 학이 와서 둥지를 틀었기 때문에 이름을 학소대라 하였다. 멀리 바위 주변에 새 둥지의 형상이 있는 것이 보였는데, 들에 사는 황새 종류가 와서 둥지를 튼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박령을 걸어 내려오는데, 고개가 위태롭게 깎아지른 것이 줄을 아래로 드리운 것 같아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힘들게 송림암(松林菴)에 도달하였다.
한 승려가 나와서 절을 하는데 이름은 성백(成白)으로 경주(慶州)의 승려였다.
빈 골짜기로 형벌을 피해온 자가 발소리를 듣고 기뻐한다는 것이 이것을 이른 것이 아닌가 하였다.
우리를 이끌어 석굴로 안내하였다. 굴의 넓이는 몇 칸의 집만 한데 큰 바위가 덮개가 되어 그 위를 덮어 굴을 이루고, 굴의 가운데는 53부처를 안치하였다.
원통사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20리를 더 가서 효양령(孝養嶺)에 올랐다. 고갯길은 험준하여 박령과 다름없으니 비록 아홉 번 꼬부라진 양의 창자라 해도 이것보다는 심하지 않을 것이다.
발연사(鉢淵寺)의 승려 성호(性浩)가 고개 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해금강(海金剛)을 가리키는데 열 두어 개의 큰 돌이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다.
형상이 금강산과 같으므로 해금강이라 한다고 했다. 채운봉(彩雲峰)과 집선봉(集仙峰)은 고개의 서북쪽에 있는데 바로 내금강의 뒤쪽이다. 산비탈을 걸어 내려와 발연사의 골짜기 문에 도달하였다.
폭포와 흰 바위돌이 넓게 퍼져 있고 맑은 물결이 튀기는데 넓고 상쾌하여 좋아할 만하였다. 작은 사미승을 시켜 폭포 속을 수차례 내달리게 하니, 또한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저물어 절에 들어가서 서방장에서 잤다. 원통까지의 거리는 20리 이다.
●신계사(神溪寺)에 이르다.
7월 30일.
밥을 먹은 뒤에 곧 출발하였다. 골짜기 문을 나와 수십 보 거리에 돌웅덩이가 있는데 그 형상이 바리〔鉢〕와 같았다.
절의 이름이 발연(鉢淵)인 것은 이 때문이다. 십 리를 가니 신계(新溪)의 승려 궤영(軌暎)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발연의 승려는 절을 하고 돌아갔다. 곧 신계사에 이르니 날이 아직 정오가 되지 않았다. 밀성 안 좌랑의 집 노비가 사령으로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세선당(說禪堂)에서 유숙하였다. 발연까지의 거리는 20리 이다.
●구룡연(九龍淵). 옥류동(玉流洞)에 가다.
8월 1일.
밥을 먹은 뒤에 구룡연(九龍淵)으로 향하다 잠시 좌정암(坐鼎巖)에서 쉬었다.
옥류동(玉流洞)에 이르러 석굴의 가운데에 이름을 적었다. 또 몇 리를 더 가니 비봉 폭포(飛鳳瀑布)가 있고, 또 7,8리를 더 가니 구룡연이 나왔다.
한 줄기 나는 폭포가 푸른 절벽에 걸려 있는데, 물이 흩어지는 것이 부서지는 구슬 같았고 물이 뿜어지는 것이 날리는 눈과 같았다.
높이는 오십 길 정도로 돌 위에는 ‘검은 절벽에 열린 황도(도교), 푸른 천하에 흰 무지개[玄壁開黃道靑天下白虹]’란 구절이 새겨져 있는데, 가히 잘 형용하였다고 할 만하였다.
물은 돌아 두 연(淵)을 만드는데 아래의 연은 깊이가 수 길이고, 위의 연은 검고 깊고 넓어 가까이서는 볼 수 없었다.
산 정상에 올라서 바라보니 넓이가 거의 몇 칸(間)에 이르는데 모양은 가마솥 같고 깊이는 몇 길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외금강의 제일의 장관이다.
차가워 오래 머물 수 없어 다시 옥류동으로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골짜기의 탁 트인 것과 담의 맑은 것은 내산의 팔담(八潭)과 더불어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옥류동으로부터 구룡연에 이르기까지 십 리인데, 돌길과 높이 솟은 잔교는 새의 길과 다름이 없어 한 걸음이라도 삐걱하면 바로 구덩이에 떨어지니 매우 두려웠다. 세선당에 돌아와 잤다.
●서울로 돌아가다.
8월 2일.
가늘게 비가 내렸다. 아침을 먹은 뒤에 안씨 어른은 남주(南州)로 향하고, 나는 서울로 향했다. 손을 잡고 이별하는데 그 동안의 정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온정령을 넘어 북창(北倉) 칠십 리에 있는 김좌수(金座首) 집에서 유숙하였다. 대접이 매우 정성스러웠다.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재주와 용모가 훌륭한 동자라고 할 만 했다.
8월 3일. 맑았다.
통구(通口)의 의를 정려한 전씨의 집에서 잤다. 주인은 출타 중이었는데 대접이 매우 정성스러웠다. 칠십 리를 갔다.
8월 4일. 맑았다.
금성의 송오응(宋五應)의 집에서 잤다. 팔십 리를 갔다.
8월 5일. 맑았다.
갈현의 신점에서 잤다. 팔십 리를 갔다.
8월 6일. 맑았다.
파발 막에서 잤다. 백 리를 갔다.
8월 7일. 비가 내렸다.
서울에 도달하였다. 구십 리를 가 곧장 서울의 척형의 집으로 갔다. 진사 남경복(南景復)씨가 악수를 하며 매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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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진택(李鎭宅 : 1738년(영조 14)∼1805년(순조 5)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요. 자(字)는 양중(養重), 호(號)는 덕봉(德峯). 경상북도 경주출신이다.
아버지는 운배(雲培)요,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 국망(國望)의 딸이다. 이진원(李晉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80년(정조 4)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사헌부감찰.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김상로(金尙魯). 홍계희(洪啓禧)가 사도세자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주장한 사람이다.
또, 1793년 그가 대간으로 있을 때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를 주장한 상소를 올려 사노혁파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개혁론의 여파로 1801년(순조 1)에는 공노비해방을 보게 되었다. 한때, 정조의 신임을 크게 받았으나 관운이 좋지 않았다.
1802년 서유방(徐有防) 등을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삼수로 귀양 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났고, 그 다음해에 죽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덕봉집》이 있다.
※ 경주이씨 교감공 존사(存斯 : 교감공파 파조)의 후손으로 익재공 후 판윤공파 소정문중의 양자로 입적 가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