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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군 다압면 쫓비산(536.5m)을 가다.
글 쓴 이 牧 鉦 高 達 五
3월9일 광장타운에 도착하여(7:25) 벽송님, 능선님, 박태옥님, 김광열님, 박태두님, 윤갑용님 등과 합류해서 차(앞산산악회)에 오르니 앉을 자리가 모자란다. 다행히도 정회원(앞산산악회)님들의 배려(配慮)로 자리를 양보해 주셔서 고맙고도 송구스런 맘을 금할 수 없슴니다 그려!
차는 신나게 달려서 현풍 휴게소에서 조식을 하는 동안 잠시 주위를 돌아보니, 차와 사람들로 북적 북적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요, 차산차해(車山車海)로다! 인하여 화장실 앞에는 남녀가 공히 일렬종대로 줄을 서 있어 장사진(長蛇陣)을 이루고 있으니, 울긋불긋 봄의 향기가 상춘객(賞春客)들의 옷깃에서 느껴집니다.
식후 휴게소내의 ‘보호수(保護樹:당산목)’ 앞에서 우리 남산님들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줄곧 내달아 함안휴게소에 잠시 들려 휴식을 합니다. 여기도 붐비기는 매한가지라! 광양 “매화축제”가 소문이 나서인가?
한참을 더 달려서 하동부근에 이르니 섬진강변(蟾津江邊)엔 넓은 청솔밭이 장관(壯觀)을 이루며, 연하여 강변(江邊)의 소공원(小公園)에는 매화(梅花:매실나무)꽃이 반쯤피어서 배시시 웃으며 반겨 주시고, 남촌(南村)의 평화로움과 강건너 아름다운 ‘매화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봄의 향기는 ‘남국으로부터’라 드니... 대구와는 확연히 다름니다 그려! 다리를 건너 다압면(多鴨面) 문화마을(청매실농원) 근처에는 “매화축제행사장”이 거창하게 준비돼 있으며, 벌써 많은 차량들이 도열해 있도다!
그럭저럭 출발기점인 ‘관동마을’에 도착하니 시계는 11시가 다 되어간다. 장거리에 고단한 몸을 10여분 동안 구령없이 각자가 풀고 모두들 줄지어 오르시니, 질서가 정연하고 끝간데를 모르겠슴니다.
길섶에 매화나무는 한참 물이 올라서 필동말동 하여 꽃봉오리가 몽실~ 몽실~ 귀엽게도 한껏 부풀어 있슴니다. 성급한놈들은 벌써 피어서 낯선 상춘객들을 반갑게 맞아 주시고, 일주일 전후로 만개(滿開)할 것 같슴니다.
민가는 뛰~엄 뛰~엄 몇채 보이지 않는데... ‘매실농장’은 수십만평의 넓은 산야(山野)에 잘 가꿔져 있으며, 자세히 보니 홍매화도 보이고, 감나무 밤나무 등 유실수 나무들이 엄청나게 심어져 있슴니다.
경사도 꽤 심하고 비탈진 돌밭을 일구어 층층으로 돌축대를 쌓아서 과실나무들을 심어 놓았는데... 여러대에 걸쳐서 잘 가꿔진 농장임을 짐작케 합니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드리고는 잠시 쉬면서 지나 온 길을 되돌아 봅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과수농장’을 지나 그 너머로 아름다운 섬진강이 좌에서 우로 굽이쳐 흐르고, 강건너 하동군에는 갈미봉(397m) 일대의 산들이 장엄하고 아름답게 감싸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 지형이다.
‘섬진강’은 원래 모래가람, 또는 다사강(多沙江) 이었으나, 고려 초기부터 두치강(豆恥江)으로 불리어 오다가 고려 우왕 11년(1384)에 섬진강(蟾津江)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일설에 고려 말기인 우왕때는 왜구들의 침입이 극심하여서, 한번은 왜구들이 하동쪽에서 강을 건너 광양쪽으로 침입하려하자 진상면 섬거(蟾居)마을에 살던 두꺼비 수만 마리가 5Km나 떨어진 지금의 다압면(多鴨面) 나루터로 떼를지어 몰려와 진을 치고 울부짖어 왜구들이 놀라 도망쳤다 한다.
또 두꺼비가 몰려나온 섬거마을(蟾居里)은 고려 초부터 역참(驛站)이 존재했다고 한다. 지금도 “말죽거리” “마장터” 등 옛 지명을 간직하고 있으며, 음력 정월 초이튿날이면 마을 주민들이 모여 ‘천룡제(돌배나무)’, ‘지신제(당산나무)’, ‘별신제(승려송별터)’를 지낸다고 한다. 이 때부터 두치강에서 섬진강으로 부른다고 전해온다.
한편 두꺼비 섬(蟾)자에는 달(月)을 나타내는 뜻도 있어, ‘모래가람’의 맑은물에 십오야(十五夜:보름달) 밝은달이 비치는 풍광을 연상(聯想)할 수도 있으니... 이 어찌 아름답다 아니하리요!
연하여 섬진나루에 군사가 배치된 것은 임진란(壬辰亂) 이후이지만, 숙종 32년(1705)에는 정식 수군이 설치되어 별장이 1개 중대병력을 거느리고 주둔하였다고 하며, 섬진나루에는 수군별장들의 공적비 좌대로 쓰인 두꺼비석상이 12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4기만 남아 있다고 한다. 두꺼비석상이 있는 이곳에는 수월정 유허비가 함께 서 있는데, 수월정(水月亭)은 나주목사와 충청감사를 지낸 바 있는 “정설(鄭渫)”이 1573년에 세웠다고 한다.(이상 광양군지 참조)
이 밖에도 섬진강은 ‘임진왜란’ 때에 왜병의 주요 침입로가 되었으며, ‘동학혁명’ 때에는 일군에 쫒긴 동학군 수천명이 강 하류지역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애환어린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강이기도 하다.
오를수록 등산로는 좁아져서 산꾼들의 진행이 많이도 더딤니다. 각처에서 모인 등산객들로 붐비시니 우리 님들을 찾기도 쉽지 않으며, 날씨도 흐리고 쌀쌀해서 가벼운 싸락눈이 살짝 살짝 뿌렸다가 때론 비가되어 보슬보슬 뿌려서 모자를 썼다 벗었다, 외투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오름니다.
40여 분을 올라 ‘배딩이재’ 부근(게밭골)에 이르니 ‘매봉과 쫓비산’의 갈림길 이정표가 서 있으며, 몇 몇 회원님들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후미에 남산님들을 기다리며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얼마를 쉬다 다시 ‘갈미봉과 쫓비산’ 방향으로 오르니 등산로는 순탄하여서 걷기에 한결 수월하며, 광양군에서 자연보호를 잘 해주신 덕분에 산천은 태고적의 모습을 그대로 잘 간직하고 있슴니다.
한두군데 밧줄을 매어둔 곳은 있으나, 등산로 어디에도 인위적으로 설치됀 시설물은 보이지 않으며, 가끔씩 불어오는 남풍이 아직은 차갑게 느껴집니다. 20여 분을 걸어서 갈미봉(520m)에 도착하니, 정상표석은 나무판자로 새겨서 소나무에 걸어 놓았다.
벽송님과 윤갑용님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휴식없이 계속 ‘바람재’로 오름니다. 얼마를 올랐을까? 410고지 부근에는 이름(바람재)에 걸맞게 찬바람이 꽤나 심하게 불어서 벗었던 외투를 다시 꺼내입고 진행합니다.
매화는 반쯤 피어서 봄이라고는 하나 산마루에는 아직도 한참 멀었슴니다. 오늘따라 날씨도 잔뜩 흐려서 가끔씩 진눈-깨비가 오다말다를 반복하며, 잎떨어진 나목에는 싻눈이 약간은 부풀어서 그래도 봄의 기운을 조금은 느끼겠슴니다.
그럭저럭 ‘물범바위’를 지나 496고지 부근에 이르니 많은 등산객들이 중식을 하고 있으며, 일행이 도착할때까지 잠시 쉬면서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을 조금 지나있다. 가져온 과일들을 서로간에 나눠 들면서 얼마를 쉬다 정상에 가서 중식을 들자며 몸을 추스르고 쫓비산으로 진행합니다.
450고지를 지나서는 다시 내리막길로 이어지다가 마지막 쫓비산(정상)에 도착하니, 갈미봉과 마찬가지로 ‘정상표석’은 없고 ‘나무판자’에 “쫓비산(536.5m)"이라 새겨서 소나무에 달아놓았다.
선두로 도착하신 벽송(최영수)님과 윤갑용 회원님에게 기념촬영을 해드리고는 서둘러 적당한 자리에서 점심을 드심니다. 우리 옆에는 구미에서 오신 네분들과 함께 점심을 드시는데... 여분이 있다면서 김밥 한통을 주신다. 감사를 드리며 소주 한병을 답례로 드리니, 금새 분위기가 밝아져서 인정이 철~철~ 넘쳐남니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쌀쌀 하여서 가끔씩 싸락눈이 오락가락 합니다. 점심후 잠시 사방을 둘러보니 시계(視界)는 흐려서 제대로 조망(眺望)할 수가 없고, 정상봉에는 “추억의 아이스께끼(Ice-cake)"를 파는 아저씨의 목소리만 낭낭히 들려온다.
이곳 “쫓비산(536.5m)”은 “호남정맥”의 도상에 있으며, ‘백두대간’의 함양군 영취봉 부근에서 서남으로 한줄기가 뻗어나와 장안산, 팔공산, 진안의 마이산을 거쳐 주화산 부근에서 다시 남으로 달려서 담양의 추월산, 강천산, 광주의 무등산, 장흥의 사자산을 돌아 승주군의 조계산, 광양의 백운산을 거쳐 ‘쫓비산’에 이르고, 그 잔여지맥은 다시 불암산(431m), 국사봉(447m)을 지나 광양만의 망덕산(197.2m)에서 그 맥을 남해바다에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호남정맥(湖南正脈)”이라 한다.
연하여 산좋고 물맑은 광양군의 백운산과 쫓비산 일대에는 아름다운 전설과 오고 간 인걸도 많아서... 인근에 백학동(白鶴洞)은 지리산의 청학동(靑鶴洞)과 쌍벽을 이루는 절경이며, 백운산 끝자락에 위치한 ‘비평리, 황죽리, 어치리’에 소재한 12개 마을을 합하여 일컬어 지는 마을이다.
지리산 ‘청학동’이 도교적 색채가 짙은 신비주의적 이상향의 상징이라면 백운산의 ‘백학동’은 유교적 색채가 짙은 현실주의적 이상향의 상징이다. 아울러 이곳은 ‘병화불입지지(兵禍不入之地:전란의 재난이 없는땅)’의 땅이라 하며, 이웃하여 옥룡면 추산리에는 “한국풍수지리의 원조”로 일컬어 지는 “도선국사(827~898)”가 35년간 머무르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옥룡사(玉龍寺)가 있다.
또 봉강면에서는 조선 초기 명현의 한사람이었던 신재 최산두(崔山斗1482~1553)가 출생하여 이고장을 빛내고 있으며, 산두(山斗)라는 이름도 태어날 때 북두칠성의 광채가 백운산에 내린 까닭으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이 밖에도 구한말의 대학자요, 시인이자 우국지사(憂國之士)인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도 봉강면 서석촌에서 출생하여 이 고장을 빛내고 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없다 하리요!
아울러 바닷가 ‘태인동’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김 양식을 시작하여 ‘지방기념물 제113호’로 지정되어 있는 유적이 ‘궁기마을’에 있으며, 당시 김여익(1606~1660)은 영암 서호면 몽해리에서 태어 났으나 1640년경 광양 태인도에 들어와 소나무와 밤나무 가지를 이용한 김 양식법을 창안하여 보급하였다고 한다.
인하여 오늘날에는 광양만 일대에 ‘제2의포항제철(주) 광양제철소’가 들어서 있어, ‘관련 산업단지’에서 쏟아내는 엄청난 재력의 부(富)까지 갖추고 있으니... 가히 하늘이 점지하신 땅이라 할만 하도다!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30여 분을 걸어내려서 ‘문화마을과 청매실농원’ 근처에 이르니, 주위는 온통 ‘유실수농원’으로 가꿔져 있어 내려다 보는 풍광이 천하 제일이다.
수십만평의 넓은 매실농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농장을 지나서 ‘섬진강’엔 푸른비단을 펼쳐 놓은 듯... 굼실~ 굼~실~ 질펀하게 흐르며, 그 너머로 하동군 일대의 아름다운 연봉(連峰)들이 산첩첩(山疊疊)이로다!
함께하신 님들에게 사진촬영도 해 드리면서 여유롭게 10여 분을 더 나려오니, 우측 산 기슭에는 거대한 ‘팔각정자’가 세워져 있어 가뜩이나 아름다운 풍광에 운치(韻致)를 더해 주심니다 그려!
그 옆으로 아롱다롱 살포시 핀 ‘홍매화’ 아래 ‘돌비(石碑)’에는 김영랑의 “꿈밭에 봄마음”의 시(詩)가 새겨져 있어 간단히 옮겨 봅니다.
굽이진 돌담을 돌아서 돌아서
달이 흐른다 놀이 흐른다
하이얀 그림자 은실을 즈르르 올아서
꽃 밭에 봄 마음 가고 가고 또 간다
또 정자(亭子) 왼편 안내판에는 “영화 세트장의 매화마을”로 많은 작품을 촬영하였다고 광고를 해 놓았는데... “첫사랑, 북경반점, 청춘, 매화연가, 흑수선, 취화선, 다모, 매화연정, 바람의 파이터, 풀밭위의 식사, 노래여 마지막 노래여, 천년학, 날라리 종부전, MBC 돌아온 일지매” 등 다수의 작품을 찍은 곳이라고 적혀있다.
안내문에 ‘매화마을’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매화나무 집단재배지로서 ‘율산 김오천’ 선생이 1917년부터 재배하기 시작하여, 17살 되던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귀국하면서 밤나무 1만주, 매실나무 5천주 등 양질의 신품종 묘목을 가지고 들어와 45만여 평에 이르는 임야를 개간하였다고 한다.
‘매화농원’의 봄 향기를 느끼면서... 아울러 축제장의 풍광을 내려다 보면서... 다시 10여 분을 더 내려오니 거대한 돌비문에 “홍쌍리 매실家”라고 새겨져 있으며, 그 위쪽으로 마당에는 ‘수 천개의 옹기독’들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가끔씩 ‘홍쌍리 여사’께서 매스컴을 타시드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 소이다! 자료에 홍쌍리 여사는 경남 밀양에서 23세때 전남 광양으로 시집을 오면서부터 ‘매화사랑’은 시작되었다고 하며, 당시 시아버지 ‘율산 김오천’의 지도 노력으로 오늘날의 ‘매화농원’으로 성장 발전 하였다고 한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슴니다 그려! 부모대의 노력과 헌신이 자녀대의 성실로 이어져서 오늘날의 결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측 언덕위에는 정열의 여인 ‘동백꽃’이 세송이 피어서 주인 대신 반겨주심니다.
단기 4347년(서기 2014년) 3월 9일
전남 광양시 다압면 쫓비산(536.5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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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남 광양군 "쫓비산 후기가" 많이도 늦었슴니다.
산행당일 동참하신 벽송님, 윤갑용님, 박태옥님, 능선님, 김광열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복잡한 가운데도 환대해 주신 "앞산산악회원님"들에게도
감사를 드림니다. 아울러 앞으로 우리 남산산악회와 상호 활발한 교류가 있기를
희망하오며, 당일 진행에 수고하신 진회장님을 비롯하여 모든 임원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또 글중에 다압면 "수월정(水月亭)과 두끼비석상"은 다른 답사때 자료를 활용하여 올렸슴니다.
모든님들! 3/23일 경남 고성군 무이산과 수태산 등산에 많은 동참을 바라오며,
산행때까지 내내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빌겠슴니다.
고회장님 산행 후기 잘 보았습니다.~
이고문님께서 다녀 가셨군요!
늘 바쁘실텐데도 격려와 관심을 가져 주심에 감사드림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바라오며, 앞으로도 많은 협조를 바람니다.
고회장님 수고가 많아습니다.
언젠가 산사랑 2 책자가 발간에 좋은 자료가 될것 같습니다.
늘건강하시고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쫓비산 산행에 동참하신 남산님들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당일의 추억을 잊지못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발자취는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수 놓아 질것이며,
아울러 미래에 작은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늘 수고 많으신 벽송님께 감사드리며, 가내 행복을 빌겠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