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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李恒福 | |
이항복 초상 | |
출생 | 1556년 조선 한성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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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18년 7월 4일 (63세) 조선 함경도 북청부(유배지) |
직업 | 문관, 학자, 정치가, 시인, 작가 |
국적 | 조선 |
학력 | 1580년 문과 급제 |
장르 | 한시, 시조 |
부모 | 아버지 이몽량(李夢亮) |
친지 | 권율(장인) |
배우자 | 안동 권씨 부인 |
자녀 | 장자 이성남(李星男) 차자 이정남(李井男) 삼자 이규남(李奎男) 사자 이기남(李箕男) |
종교 | 유교(성리학) |
이항복(李恒福, 1556년 ~ 1618년 7월 4일(음력 5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정치가·시인·작가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靑華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의 사위이다.
이덕형과의 우정 이야기(오성과 한음)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선조를 수행하여 의주까지 몽양을 다녀왔으며, 호성공신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참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 및 영창대군, 임해군 처단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중풍으로 병사하였다.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어나서 사흘 동안은 울지도 않고 젖을 먹지도 않아 모두들 걱정을 하였는데, 점성술사가 보고 장차 큰 인물이 될 아기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는 해학에도 뛰어나 만인의 귀염을 받았음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1]
9세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으나 16세에는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어린 시절에는 놀기를 좋아하여 동네 불량배의 우두머리로 세월을 헛되게 보냈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정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을 치른 뒤 학궁(學宮)에 들어가 학문이 더욱 이루어졌다. 영의정을 지낸 권철은 이항복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이항복의 인물됨됨이를 알아본 권철은 아들 권율에게 이항복을 사위를 삼도록 권하여 이항복은 19세에 권율의 딸과 혼인하였다.[1]
1580년(선조 13년) 문과에 급제하여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다. 이 해에 이덕형도 20세에 문과에 을과 1인으로 급제하여 함께 벼슬을 시작한다.
과거 급제 이듬해에는 한림학사가 되고,[1] 1583년에는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친구인 이덕형과 함께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했다. 또 홍문관인 옥당의 벼슬아치로 천거받았다.[1] 호조참의가 되어 전곡(錢穀)의 출납에 밝았으므로 판서 윤두수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이후 1589년 예조정랑으로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어지러운 붕당 정치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려고 슬기와 인내로써 항상 조심하였으며, 본디 재치와 익살이 뛰어난 인물인지라, 그의 우스갯소리에는 모두들 웃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건저 사건이 일어나 정철이 수괴(首魁)로 몰리게 되었는데 친구들이 찾아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항복이 꺼림 없이 방문했으며, 승지(承旨) 때 정철의 죄안을 처리하는 데 태만하였다고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35세인 1590년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에 올라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로서 선조를 모시고 개성으로 피난을 갔고, 의주로 피난가는 도중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다시 두 왕자들을 모시고 먼저 평양으로 가서 형조판서에 특진하고 병조판서로 옮겨 왜군 격퇴의 지휘권을 얻게 되었다.
이때 조선 정부에서는 선조를 함흥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명나라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는 영변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영변과 정주를 거쳐 의주에 이르렀다. 의주에서 명나라에서 들어온 황응양(黃應暘)에게 조선과 일본이 협력하여 중국을 치려 한다는 유언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고 구원의 대병이 이르게 하였다. 그동안 형조판서를 거쳐 전란 중, 이덕형(李德馨)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맡으며 명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동시에 왕실 근위대 정비에 전력을 다하고 올바른 정치로 선조를 보필하였다.
그 공으로 우의정이 되었으며, 왜란이 끝난후 호성공신(扈聖功臣)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올랐다.[1] 정인홍 등이 성혼을 무고하자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자진하여 영의정 벼슬을 내놓았는데 예우(禮遇)는 그대로 받아 큰일에는 왕이 자문을 받았다.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으로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정응태는 명나라 구원병 책임자로 조선에 와 있던 양호(楊鎬) 장군과 갈등하던 중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침공할 것이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허위로 보고를 했다. 만약 명나라가 지원군을 회군한다면 전력에 손실이 나타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이항복은 당시 공조참판인 월사 이정구를 부사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으로 대동하고 명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명나라로 하여금 정응태를 파면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다.[2][3]
계축옥사 당시 훈련도감 도제조와 체찰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항복은 임해군의 사사 때 정인홍 등의 탄핵을 받았고, 영창대군의 사사와 인목대비 폐서인 사건이 논의될 때 이들에게 온갖 정성과 지혜를 경주했으며 목숨까지 바쳐가며 적극적으로 구제하고자 하였다. 국모를 폐위하는 논의가 결정되어 인목대비가 폐모되어 서궁에 갇히는 반인륜적인 사건이 발발하자 이항복은 비로소 글을 올려 극력 부당함을 간하였다.[2]
평생토록 당쟁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대북파에 의해서 폐모론이 거론되자 이에 반대하며 서인(西人)에 가담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의 폐위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다가 1617년 12월 21일(음력 11월 24일) 관직을 삭탈당하고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중풍이 재발하여 반신불수의 몸이 되고, 조정은 이항복의 신병 처리에 당황해했다. 1617년 음력 12월 16일(양력 1618년 1월 12일) 이항복의 유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위리 안치의 명이 떨어진 이후 계속 유배지를 옮겨다니며 17일 용강, 18일, 흥해, 21일 창성, 24일 경원, 28일 삼수로 다니다가 1618년 1월 31일(음력 1월 6일)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2]
광해군은 7월 9일(음력 5월 18일) 이덕형 사후의 예에 따라 관작을 회복시켜 주고 예장을 함은 물론 경유지마다 관에서 운구에 협조할 것을 명했다. 사후 정충신이 이항복의 시신을 수행했는데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는 경기도 포천으로 8월 7일(음력 6월 17일) 출발하여 8월 31일(음력 7월 12일) 도착했다.[1]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번지에 있다.
《상신록》(相臣錄)에 실렸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1] 북청과 포천의 선비들이 각각 사당을 세워 모셨으며, 효종 때부터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노덕서원 등지에 제향되었다. 한음 이덕형 가문과의 우의는 지금도 이어지며 정인보 가계와도 친분이 있다고 한다.[2] 후손에 이광좌(李光佐), 이태좌(李台佐), 이종성(李宗城), 이경일(李敬一), 이유원(李裕元)은 정승에 올랐으며 소론의 명문가로서 독립운동가인 이회영, 이시영 형제도 이항복의 후손이다.
생애는 연보 및 계곡 장유가 쓴 행장과 상촌 신흠이 쓴 신도비명에 남겨졌다.[2]
이덕형 李德馨 | |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덕형 초상 | |
출생 | 1561년 조선 한성부 성명방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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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13년 (53세) 조선 경기도 광주부 조안면 (現 대한민국 남양주시 조안면) |
필명 |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
직업 | 문신, 학자, 정치가, 시인 |
학력 | 1580년 문과 급제 |
활동기간 | 1580년 ~ 1613년 |
장르 | 한시, 시조 |
부모 | 이민성(부), 문화 류씨 부인(모) |
친지 | 이산해(장인) 류전(외숙부) 이이첨(10촌 형) |
배우자 | 한산 이씨 부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이덕형(李德馨, 1561년 ~ 161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정치인으로 동인(東人)과 남인(南人)의 일원이다. 같은 동인이었다가 북인이 된 이이첨은 그와 10촌 형제간이었다.
본관은 광주,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다. 절친한 친구 이항복과의 평생에 걸친 우정은 '오성과 한음'으로 회자되었다. 한성부 출신이며 1613년 경기도 광주 사저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덕형은 1561년 한성 성명방(誠明坊 :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의 사이)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柳전)의 누이동생인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두뇌가 영특하여 소년 시절에 벌써 글 잘하고 얌전하기로 이름났고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문장과 인품에 감동받았다고 한다. [1] 14세 때에 영의정으로 있던 외숙부 유전의 집이 있는 경기도 포천의 외가로 가서 지냈는데, 당대의 글 잘하기로 이름 높던 양사언·양사준(楊士俊)·양사기(楊士奇) 형제들과 어울렸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 실력이 뛰어났다. 이후 당시 명망있던 문신 겸 서예가, 학자인 이산해의 둘째 딸이자 이지함의 종손녀인 이씨와 결혼하였다. 뒤에 그는 가문을 따라 남인이 되었고, 장인 이산해와 처남 이경전(李慶全) 등은 북인이 되었지만 그가 이산해의 사위인 덕에 화를 모면했다. 실록에 의하면 그가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화패(禍敗)를 면할 수 있었다.[2]'고 한다. 이때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하였다고 전해진다.
1580년(선조 14년) 약관 20세 때 문과 별시에 을과 1위(전체 2위)로 급제하였다.[3] 이어 승문원에 보직되고 대제학인 율곡 이이에게 발탁되어 홍문관정자(正字)가 되었다. 이때 25세인 백사 이항복도 문과에 급제하고 이덕형의 집안 형님인 이정립도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세 이씨’가 바로 그들이었다고 한다. 과거 합격 동기로 급제한 이 세 사람은 뒤에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나란히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한 뒤 함께 옥당인 홍문관의 직책에 배치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그 뒤 이덕형은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修撰)과 교리(校理),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90년 당상관에 올라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591년 31세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서 조선시대 최연소의 나이로 대제학이 되었다. 겐소, 다이라 등 일본인들로부터 존경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출처 필요].
1591년 8월 그의 처남 이경전이 사가독서에 선발되지 않았으므로 장인 이산해가 크게 노하였는데, 이때 장인 이산해의 부탁을 받고 다시 아뢰게 하여 이경전이 마침내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4]
1592년(선조 25년) 사헌부대사헌의 직책으로 있을 때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은 좌의정으로 있던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과 화의 교섭을 했으나 실패, 결렬되었다. 그 후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임진왜란 중 1593년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가 되어 이여송을 수행하였고, 이후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우참찬, 우찬성을 지냈으며 특히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정책을 수행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울 방어를 강화하였으며, 1598년 4월 38세의 젊은 나이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의 아내 한산 이씨는 왜군에 포로로 사로잡혔고, 왜군에게 능욕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하였다.
1599년(선조 32년) 윤 4월 9일 중국 명나라의 장수 유제독(劉提督) 휘하의 항왜가 독약을 잘 만들자, 이덕형은 사사로운 목적으로 도감의 초료를 내서 항왜 사야여문(使也汝文) 등에게 주어 항왜를 꾀어내게 하였다. 그런데 그 항왜가 황해도 평산군에 이르러 달아나자 제독이 크게 노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끝까지 추적하여 잡게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선전관 이괄을 보내 계략으로 잡아 참수하게 하고 그 머리를 보내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투항한 항왜를 죽였다는 이유로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켰으나 겨우 무마되었다. 1599년 겸문학(兼文學), 그해 12월 의정부좌의정이 되었으며, 1600년 1월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를 거쳐 다시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곧 도원수를 겸하였으며, 1602년 3월 영의정이 되었다. 1601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의 4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전쟁 종결 후의 군대 정비 및 민심 수습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1604년 임진왜란 중의 공신을 책봉할때 호성공신, 선무공신에 모두 추천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1608년 6월 진주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1609년 10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명나라에서 임해군의 존재와 영창대군의 존재를 이유로 들어 광해군을 적통을 이어받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자 그는 스스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설득하고 되돌아왔다. 1611년 8월 좌의정, 1612년 11월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 6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대북파의 탄핵에 몰렸으며, 병을 얻어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 그의 일족인 이이첨이 대북의 영수였으나 그는 인목대비의 폐모와 영창대군의 사형을 극력 반대하였다.
이후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는 상소와 함께 병을 이유로 의정부영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모든 관직이 삭탈되었다. 1613년 10월 사저가 있던 당시의 경기도 광주부(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莎堤) 마을)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인조 즉위 후 복권되었으며, 경기도 포천시에 위치한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묘는 현재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번지에 있다.
조선 성종 때 정승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이극균(李克均) 부자가 이덕형의 선조이며, 이인손의 아들 이극균은 이덕형의 5대조가 된다.
당시 광해군 조정의 실력자이자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의 사형을 주장하던 이이첨은 그의 친족으로, 이덕형은 이극균의 5대손이고, 이이첨은 이극돈의 5대손이었다.[5] 이덕형의 5대조 이극균은 이극돈의 동생으로, 이들 형제는 각각 이인손의 넷째 아들과 다섯째 아들이었다.
광해군의 패륜정치에 항의하다가 경기도 양주목 노원(蘆原:지금의 서울특별시 노원구)으로 은퇴해 있던 이항복은 이덕형의 부음을 듣고 곧바로 이덕형의 사저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을 하고 그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어려운 일에 처해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그들은 우정을 지켰으며, 이항복은 무덤 속에 넣는 이덕형의 묘지명(墓誌銘)을 직접 지어 그의 높은 학덕을 제대로 평가하기도 했다.
전임 김수 |
제319대 한성부판윤 1592년 음력 12월 18일 ~ ? |
후임 한준 |
전임 유근 |
제322대 한성부판윤 1593년 음력 4월 25일 ~ ? |
후임 유근 |
“ | 항복은 호걸스럽고 시원한 성품에 넓은 아량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젊어서는 이덕형과 나란히 이름을 날렸으며 문학(文學)으로 두 분이 함께 진출하여 현달했다. 정철은 항상 상서로운 기린과 봉과 같은 사람이라고 칭했다.[4] | ” |
— 광해군일기 |
천성이 효우돈목(孝友敦睦)하며, 젊어서 기생을 좋아했으나 끊은 후 다시는 성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가 있는 40년 동안 항상 붕당 정치에서 초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항복의 저술은 사후 1629년 강릉에서 문하생들이 주도로 간행됐다가 경남 진주에서 1635년 정충신이 주도로 재간행되었고, 1726년에는 5대손 이종성의 주도로 각각 간행되었다. 현재 문집 15책이 남아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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