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의
세계로 가는 배를 타보세요.
글/사진:이종원
대승사가는 길은 참 좋다.
물길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좁은 산길이 나온다. 사과밭이 있어 풋풋한 향내를 따라 가면 그만이다. 원시림을 헤치면 기암괴석을 만나기도 한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속세의 마지막 티끌도 떨쳐나가는 후련함이 느껴진다.
차로 올라갔을 때도 이렇게 정갈한
느낌이 드는데 자연과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자연에 들어오면 문명의 이기도 이렇게 야속할
때가 있다. 유난히 키가 큰 일주문에는 '사불산 대승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진리의 배에
승선하게 되는 것이다.
"저 탔어요..부처님 오라이.."
대승사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것은 감로수였다. 그것도 활짝 피어오른 꽃에서 떨어지는 물이었다.
물이 떨어지면서 둥근 파장을
일으킨다. 핑크빛 꽃잎은 사르르 떨면서 떠다닌다. 입맛을 보기 전에 이미 눈맛이 취해 버렸다. 소담스레 물을 퍼
담은 바가지를 입가에 댔다. "캬- " 꽃잎이 녹아서일까 달콤함이 혀끝에 착 달라 붙는다. 행복은 이렇게 작은 곳에서 찾을 수
있건만.......
대승사
신라 진평왕때 사불산
산마루에 비단으로 감싼 바위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조심스레 펼쳐보니 사면에 여래상이 새겨진 바위였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친히
현장을 찾았고 감탄하면서 이곳에 대승사를 짓도록 명령했다. (삼국유사)
대승(大乘)이란 큰 배를 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열반뿐 아니라 대중의 열반을 위해 큰 배가 되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평왕 이후 오늘날까지 대승사는 수 많은 고승을
배출했다. 어쩌면 노아의 방주마냥 대승사 가람 자체가 큰 배다. 누구나 탈 수 있도록 문도 활짝 열어 놓았다. 1천5백년동안 기라성
같은 뱃사람들이 수많은 대중을 싣고 진리의 뱃길을 따라 간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피안의 세계로 가는 배는 변함없이 달리고
있다.
목각 후불탱 (보물
575호)
대승사를 찾은 이유는 이 목각
후불탱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목각탱중에서도 규모가 크면서도 정교하고 치밀한 조각미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대웅전 마룻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넋이 빠진 사람마냥 목각탱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화려한 조각에 반했고 그 우아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목각후불탱은 가로
3미터 높이 4미터의 대형조각이다. 연꽃 대좌위에 아미타 여래좌상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로 3구씩 상하로 4열씩 맞추어 좌우대칭 구조를 만들었다.
이런 목각 목각탱은
전국에 5개도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대승사 목각탱이 단연 최고다. 예천 용문사,상주의 남장사등 경상도 북부지방에 목각
후불탱이 몰려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각탱과 함께 전해내려오는 문서가
4부 있다. 이것을 보면 목각탱화의 유래를 살펴 볼 수 있다. 원래 목각탱은 부석사 무량수전 후불탱이었다. 그러나 부석사가 폐사가
되고 나서 대승사로 옮겨졌다. 뒤에 부석사가 목각탱 반환을 주장하자 두 절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1876년 작성된 이 문서에는 대승사가 부석사
조사전 수리비용을 대주기로 하고 시비를 종결시켰다고 적혀 있다.
국보와 보물이 가득한 부석사가
후불탱을 양보하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대승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웅전 문살이다 . 진리의 꽃이
활짝 피어 올랐다. 세월에 퇴색된 나무결이 고색창연함을 말해준다.
수키와에 덮힌 수로가 대웅전 마당을
지나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이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기와를 이어 만든 울타리도 감상해보라. 산내 암자로는 나옹, 혜근 스님의 출가 암자이자
성철스님이 정진했던 묘적암이 있고 , 비구니 선원인 잘 알려진 윤필암과 보현암이 있다.
대승선원은 H자형의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겹지붕이다. 건평만 106평이며 40여명이나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큼직한 건물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극락전,
나한전, 옹진전등이 있다. 1천5백년 맥을 이어온고찰이지만 대부분 전각들은 근래에 다시 세운 것이다. 산사에 걸 맞지 않게 하얀
건물도 보였다. 전각의 배열도 축선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서 있었다.
명부전과 장독대의 색깔이 비슷하다.
항아리처럼 맛갈스럽고 우직한 신앙을 기대해보자.
점심공양이 끝났나보다. 대승선원에는
각 방마다 젊은 학승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어떤 스님은 차를 마시고 있고 어떤 스님은 책을 읽고 있다. 토론에 목소리를 높인 스님들도
보인다. 꽉 짜여진 스케줄 속에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내 마음이 편해졌다. 우산걸이대에는 각양각색의 우산이
걸려있다. 원색의 우산은 찾아볼 수 없다. 우산 손잡이마다 스님의 이름이 적혀 있다.
승복이 빨래줄에서 펄럭이고 있다.
역기도 있고 , 아령도
보인다.
입구에 걸레와 빗자루도 걸려있다.
반들 반들 마루를 닦는 모습이 그려진다. 빗자루에 긴 막대를 연결해 놓은 것이 재미있다.
나무 그늘아래 엄마가 딸을 위해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다. 스님이 공중전화를 거는 모습도 보기 좋다.
붉은 고추...피나는
정진
나는 절에 가면 은근히 해우소의
모습에 기대를 건다. 대승사 해우소 역시 낡았지만 초록빛 울타리 덕에 싱그럽게 보인다.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고...힘겹게
탑이 서 있다. 그 안에 모신 부처님상도 온전하지 못하다. 구도를 향하는 길은 이처럼 고행이 따른다.
대승사 가는길
1)중부내륙고속도로 서울-영동고속도로-여주- 중부내륙고속도로-괴산IC-수안보-문경시-예천가는 34번 국도- 영강교 건너 반곡리에서
좌회전-단양 가는 59번 지방도- 대하리 3거리에서 좌회전 - 대승사 ( 좁은 산길을 10여분 차로 올라 가야한다. 길이 좁으니 조심해야
한다.)
2) 중앙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단양나들목-5번 국도-구단양 방향-36번
국도-하방리-하선암-중선암-상선암- 33번 지방도 문경방향-대하리 삼거리-좌회전- 대승사
입장료/주차비:
없음 |
대하리 소나무(천연기념물
426호)
두 개의 우산을 양쪽에 펼쳐놓은 것
같다. 높이 6미터, 가슴둘레가 3미터며 동서 15미터, 남북이 20미터나 된다. 수령은 400년이고 마을의 수호목 역할을
한다.
대하리 3거리에서 좌회전 하자마자
푯말이 서 있다.
내화리 삼층석탑 (보물
51호)
대하리에서 단양가는 59번 국도를
타고 노루목고래를 넘어 가면 좌측에 푯말이 나타난다. 휘어진 도로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쉽다. 분명 푯말엔 50미터라고 적혀
있는데 마을로 한참 들어서도 도무지 탑이 보이지 않는다.
마침 개울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여기에 삼층석탑 못
봤니?" "삼층석탑이 뭐예요?" "돌이 불쑥 튀어 나온 것...."
그제서야 알아채렸다는 듯 내 손목을
잡아 이끈다.
사과밭을 헤치며 들어가는데 저
멀리서 탑이 힐끔 보였다. 아-. 이런 산골마을에 이렇게 멋진 탑이 서 있다니...세상의 어느 영화도 이처럼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의 공덕으로 자란 사과 나무마다 과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본래 신라시대 화장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100년전쯤 화재가 나서 폐사가 되고 불상등은 대승사로 옮겨 가도 탑만 덩그러니 남은 것이다.
내화리 삼층석탑은 신라석탑에서는 보기 드문 단층기단의 탑이다. 기단의 갑석(덮개돌)의 윗면은
경사도 거의 없고 특별히 장식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붕돌받침이 4단으로 구성되어있다. 또한 지붕돌의 지붕면이 넓고 경사가 급하면서 반전이
약하게 표현되어있다. 그러나 지붕면의 하부는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지붕돌의 밑면이 일직선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제외한 이러한 특징들은
통일신라후반기에 만들어진 탑들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이 탑에서 주목하여 볼 부분은 지붕돌의 형태이다. 지붕돌과 탑신이 만나는
부분에서 지붕돌이 흘러내려오는 선을 자세히 보면 우동의 상부가 약간 배가 불러있는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곡선은 고려시대로 가면
더욱 두드러져 지붕돌 상부가 배가 부른 상태로 원호를 그리다가 급격하게 내려오고 다시 우동 끝에서 강한 반전을 이루게 된다.
신라계탑의 석탑의 변화를 보면 초기에 크기와 강인함(고선사지, 감은사지)을 보이다가 비례의 절대미를 보여주는 양식(석가탑,
마동사지석탑 등)으로 변화한다. 신라시대 말에 들어오면서 힘이 약해지고 장식성(진전사지, 의성 관덕동삼층석탑 등)이 강해지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형태의 다양성과 선들 간의 비례의 미보다는 선의 유연함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형식으로 변화된다. 그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신라계탑의 지붕돌의 형태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에 대하여 확실한 예를 찾지 못하였는데 이 내화리삼층석탑에서 그 해답을 얻게 되었다.
내화리 삼층석탑주변은 이 지역의 다른 곳에 비하여 그런 대로 넓은 지형을 보이고 있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고 강 너머에는
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진 산이 있다. 주변이 모두 깊은 산이다. 아마도 이 절은 점촌에서 단양으로 가는 목을 지키고 나그네의 숙소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 절은 통행로를 확보한다는 준군사 성격과 숙소의 역할을 한 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개울가에 놀고 있던 아이들이 탑 주변에 몰려 왔다. 탑을 빙빙 돌면서 뛰어 놀고
있는 아이 한 놈을 잡아서 머리를 쓰다 듬어 주었다.
'앞으로 이 탑을 지켜야 할 사람이 너희들이고, 바로 너희들의 아들딸이다.
'
* 음악:임을 품에 안고서 (해성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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