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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기행문
11월 2일(수)
이제 이번 여행도 절반을 지나고 있다. 어제 시간 조절이 잘 안되어서인지 조금 더 서둘러 나선 듯한 느낌이다. 코스나 지도 등을 가지고 오늘의 일정을 보니 들를 곳이 거의가 한데 몰려 있어 어제보다는 시간적으로도 훨씬 효율적일 것 같았다.
오늘 코스 중에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반파(半坡)박물관이었다. 사람들이 농인지 진인지 모를 소리로 "반만 부서져서 반파라고 하나?"라 한다. 하긴 우리 음(半坡, 半破)으로나 중국어 발음(banpo)으로나 보니 다 그렇게 들린다. 이곳은 중국의 중요 선사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인근에 워낙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많아서인지 조용하다 못해 적적한 느낌까지 든다. 좀 일찍 들르게 된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입구쪽에서 왼쪽으로 유물관이 있었다. 익히 보던 반파유적지의 인물상을 그린 토기도 눈으로 확인했다. 그렇지만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시설이나 모든 면에서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보니 뒤편으로 박물관의 새 전시관 건물 및 전시실을 한창 짓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입구쪽에서 오른쪽에는 무슨 해양박물관 같았다. 진귀한 물고기들의 박제와 해초 등으로 전시관을 채운. 개인적인 생각이었지만 이런 역사적인 박물관에 그런 유치한 전시물을 섞어 전시한 것을 보니 마치 클래식 음반에 가요나 팝을 함께 녹음해 넣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 장소인 진시황의 병마용갱박물관으로 이동을 했다. 30분 정도 이동을 했다. 이동 시간도 아주 적당한 느낌이었다. 이곳은 완전히 새로 개발된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넓은 공원을 거쳐 매표소 앞까지 갔는데, 계속적으로 좋은 날씨에 남방 하나만 입었다. 이곳은 경비가 삼엄해 보였고 곳곳에 각국어를 구사하는 가이드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 표를 끊어서 들어갔는데, 표는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정액권 카드처럼 생겼다. 표에서도 다른 곳과 월등 다른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 표는 잃어버리면 안되고 나중에 진시황의 청동마차 전시관 입장 때 한번 더 제시를 하여야 한다고 한다.
큰 체육관 모양의 돔형 박물관이 눈 앞에 보인다. 슬슬 걸어 들어갔다. 들어서는 순간 정말로 눈을 압도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이드가 뭐라뭐라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놀란 눈에 좋은 장소를 찾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느라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아니 눈앞에 펼치진 광경을 보노라니 가이드의 설명 자체가 워낙 군소리처럼 들렸을 수도 있으리라. 단 하나 가이드가 첫날 말한 북경(北京)은 발관광이요, 장가계(張家界)는 눈관광, 이곳 서안은 귀관광이란 말은 생각이 났다. 무슨 한국의 경주에 해당한다는 말도 비교 자체가 성립이 안 될 것 같았다.
1, 2, 3전시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정말이지 너무나 생동적인 모습이라 당장이라도 호령을 하면 그대로 뛰쳐나와 눈앞에서 군진을 펼칠 것만 같았다. 중간중간에 유리 상자로 대표적인 병용을 전시하였고. 식사를 하기 전에 이곳의 발견자인 양지발이란 사람의 친필 싸인 도록을 샀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서 싸인을 부탁하는 형식이었다. 70년대 중후반에 그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이곳이 발견되었으니 그 사람 입장에서는 일시적으로 일자리를 잃었지만 30년간 아니 죽을 때까지 안정된 직장을 얻게된 계기였던 셈이다. 당초 글자도 몰랐으나 이름 석자만은 국가에서 가르쳐 이렇게 싸인을 하며, 그 사람 자체가 또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관광의 테마로 이용할 줄 아는 중국인들의 생각도 놀라웠다. 싸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름대로 멋을 낸 많은 실전 연습 끝에 나온 내공이 비쳤다.
점심은 박물관 내에서 해결했다. 보통 관광지 내의 식당은 별로인데 이곳은 달랐다. 여러 가지 음식을 먹은 것이 생각나지만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도삭면(刀削麵)이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칼국수인데 미는 방식이 다르다. 우리는 긴 방망이로 눌러가며 감아서 펴고 이를 다시 포개어 써는 방식인데, 이곳은 한 25Cm 쯤 되는 밀가루 반죽 원통을 들고 칼(刀)로 깎는(削) 국수(麵)인 것이다. 작년에 곡부(曲阜)의 안묘(顔廟: 안회의 사당) 앞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새로 봐도 신기했다. 모두들 이 신기한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진도 찍고 일부러 길에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도삭면을 먹기도 하였다. 짜장을 얹어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조그만 종자기에 주어서 두 그릇 이상을 먹는 사람도 많았다. 정작 그 면을 깎는 사람은 아주 성가셔하는 듯했다. 그리고 일행 중에 중국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유선발 사장은 이것이 우리 짜장의 원래 모습이라고 한다. 해설을 듣고 보니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진시황의 청동마차가 발견된 곳으로 이동을 하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입장권을 다시 제시하여 펀칭을 한 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말이지 절대왕권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이었다. 마차의 받침대는 조립식으로 여러 용도로 쓸 수 있게 모조품을 만들어 놓아서 가이드가 실연을 하며 설명을 해주었다. 나오면서 보니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란 표시를 나타내는 로고가 크게 걸려 있었다. 당시 백성들이 당한 고초를 생각하면 그 표시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그 무엇이 느껴졌다. 어쩌면 수많은 노동자들의 무덤 위에 건설된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로 거대한 것을 보고 난 뒤의 흥분을 잠시 가라앉히려고 일정을 그렇게 짰을까? 이번 여행 중 유일한 쇼핑센터에 들렀다. 옥쇼핑센터였는데 들어가며 보니 한국인과 기타 외국인의 전시 판매처가 달랐다. 한국인들이 지갑을 잘 푼다는 것을 감안한 조처였을 수도 있겠고 또 한국인들이 그만큼 많이 이곳 서안을 찾는다는 소리도 되리라. 여하튼 판매수당을 받는지 번호표를 하나씩 받아가지고 들어갔다. 모든 판매직원들이 모두 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였다. 참 사람들의 심리는 이상하다. 이런데 데려가도 안 보고 안 사면 되지…… 하면서도 일단 눈과 귀가 쏠리고 결국은 사게 된다. 나도 집사람의 진주 목걸이를 하나 샀다. 다른 사람들은 꽤 오랜 시간에 꽤 많이들 사는 모양이었다. 옥 베개를 사는 사람도 있었고……
다음은 진시황릉이었다. 성룡과 우리나라 배우 김희선의 어설픈 판타지물인 "신화(神話)"의 스토리 중심 장소로도 쓰일 만큼 유명한 곳인데 가보니 달랐다. 일단 이곳은 건릉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잡상인들이 있었다. 이곳의 특산물은 석류와 감이라며 많이 팔고 있었다. 가이드는 절대로 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필요한 만큼 사놓았으니 능만 둘러보고 오라고 ……
일단 외형적으로 이곳은 그래도 건릉과는 달리 모양새를 갖추었다. 정사각형의 피라미드 형태였는데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 경사가 완만한데서 가팔라졌다. 통로의 좌우에는 모두 석류밭이었다. 따면 변상조치를 한다는 팻말까지 있었다. 정부에서 개인에게 과수원용지로 불하한 것 같았다. 꼭대기에 서서 한참을 둘러보고 기념촬영도 하고 내려왔다. 《사기》의 그 기록을 떠올리니, 또 이곳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만든 병마용갱을 생각하니 내부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러나 아직 공식적인 발굴계획이 없다니 내 생전에는 구경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화청지에 들렀다. 가는 길에는 내가 중국인들과 말이라는 주제로 잠깐 이야기를 하였고, 화청지를 생각하고 유선발 사장이 얘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보다는 장개석과 장학량의 서안사변 관련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만큼 고대에나 지금이나 이곳이 통치자들에게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화청지라는 현판은 당대 중국의 석학 곽말약(郭末若)의 필체였다. 그리고 화청지 내부에도 유명한 문인들이 남긴 묵적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화청지의 뒤로 보이는 산은 여산(驪山)이다. 원래 이곳은 진시황 때부터 개발이 잘 되어 온천궁을 지어 온천을 할 때면 복도(複道: 2층 통로)를 만들어 진시황과 비빈들은 위의 통로로, 나머지 수행자들은 아래층을 이용했다. 당나라의 유민들인 백거이(白居易)나 원진(元진) 등은 상당히 동정적인 관점에서 현종과 양귀비의 애정행각을 로맨틱하게 그렸지만 후대의 문인들은 그렇지를 못했다. 특히 송나라의 소식은 여산을 화태(禍胎)라 하여 화의 근원지로 규정했고, 양귀비의 입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여지의 운송을 〈여지탄〉에서 강도높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 뇌리를 언뜻 스쳐간 것은 백거이의 〈장한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歸來池苑皆依舊 돌아오니 못과 뜰 모두 옛날 그대로였으니,
太液芙蓉未央柳 태액지엔 연꽃 피어 있었고 미앙궁에는 버들 늘어졌다네.
芙蓉如面柳如眉 연꽃은 얼굴 같고 버들은 눈썹 같으니,
對此如何不淚垂 이것 대하고도 어찌 눈물 흘리지 않으리.
당현종이 태액지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모두들 그곳의 연꽃[芙蓉]이 너무 아름답다고 한 마디씩 했다. 이에 현종이 양귀비를 자랑할 심산으로 양귀비를 내세우며 "여기 말을 알아듣는 꽃(解語花)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몸을 파는 여인에게 붙이는 말인 "해어화"라는 말의 기원은 이렇게 현종과 양귀비에게서 나왔다. 아들의 여자를 취해서였을까? 안록산의 난 때 양귀비를 잃고 궁궐로 돌아온 현종이 태액지에 가보았더니,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말하던 연꽃[芙蓉]은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양귀비를 생각나게 하는 양류(楊柳)도 그대로인데 현종의 사랑 양귀비는 지금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백거이의 이 시는 이곳에서 문학적 기교를 다하여 참으로 애절하게 두 사람의 사랑을 로맨틱하게 그리고 있다. 지금 이곳은 양귀비가 풍만한 몸매를 반쯤 가리고 욕탕에서 나오는 모습의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많은 관광객들이 그 우스꽝스런 양귀비상 앞에서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댄다.
뒷산인 여산으로는 케이블카가 오르내리고 있다. 장개석이 그 옛날 진시황 때부터 현종까지 나라를 말아 먹은 곳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그 산의 어귀에 있는 별장에서 쉬다가 장학량에게 체포되어 안경도 틀니도 놔둔 채 끌려간 곳이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곳은 공사 중이어서 접근이 안 된다고 한다. 책에서 본 당시의 총격으로 깨진 유리창을 떠올리는데 만족해야 했다. 참으로 세월이 무상하단 생각이 든다. 진시황 때 화의 근원이었음을 보여주었으면 뒤의 군주들은 마땅히 조심을 해야했거늘……
역사적 의의를 모른다면 이곳 여산과 화청지가 관광객들에게 무슨 감흥이 있을까? 양귀비가 머리를 말렸다는 양발대니 양귀비와 현종의 욕조는 무슨 심정으로 바라볼까? 수 천년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러 모택동의 친필로 적어 놓은 백거이의 〈장한가〉가 남아 있고,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일 수도 없이 많은 내·외국인들이 발이 닳도록 드나들고 …… 그곳에서 만난 종이공예가도 이제 역사의 일원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손가락보다도 훨씬 작은 자그마한 미용가위 같은 공예가위를 손 안에 감춘 채 표적을 물고 늘어져서는, 기가 막힌 손놀림으로 까만 종이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실루엣 모양으로 즉석에서 오려낸다. 모자끈 하나 머리카락 모양 하나 놓치는 법이 없다. 과연 영무희(影舞戱: 그림자 연극)를 즐긴 민족의 후예답다는 생각이다. 서툰 영어로 "투웬티 파이브 이어∼ㄹ쓰(25years)"를 외치며 자랑을 하던 그 사람은 우리 일행을 만나 목돈을 쥐었다. 내가 아는 사람만도 11사람이나 신청을 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1000원 밖에 안 되는 푼돈이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는 3~40분 만에 11000원이나 벌었으니. 그 가격도 당초 큰형님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실루엣을 오려와서 역시나 서툰 우리 말로 2000원을 외치던 것을 큰형님이 500원까지 깎았는데도 마침 1000원짜리 밖에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협정가격이 되었으니 그 사람은 예상 금액의 두 배를 번 셈이었다. 정말로 희한하게 돈을 버는 방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내년에 가면 또 한 해를 더 붙여서 "투웬티 식스 이어∼ㄹ쓰(26years)"를 외치면서 역사의 무상함을 묻어버리겠지.
다음에 들른 곳은 대당부용원이었다. 작년에 서안을 갔다온 누나에게 이곳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니 잘 모르겠노라고 한다. 알고 보니 올 4월에 개장을 한 놀이공원이었다. 아직 군데군데 마무리가 덜 된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들어가 보고는 그저 중국 사람들의 엄청난 규모에 놀랄 뿐이었다. 경주의 보문단지를 생각나게 하는 유원지였으나 규모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당나라의 화려한 과거를 떠올리기에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먼저 시간이 빠듯한지 서둘러 상설 공연장으로 갔다. [몽회대당(夢回大唐)]이란 공연이었다. [대당으로 돌아가다] 정도의 풀이가 맞겠다. 입장료가 100위엔(元)이나 되었다. 우리 돈으로 13,000원 정도 하니 우리의 경제사정으로도 꽤나 비싼 입장료였으니,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비싼 입장료였을 것이다. 그것도 부용원 입장료와는 별도로 다시 지불을 해야하는 것이니. 어쨌든 공연은 나름대로 볼만했다. 첫날의 입성식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이곳의 무희들은 모두 간드러진 몸매에 때로는 여리게, 때로는 역동적으로 멋진 공연을 보여줬다. 공연은 서막을 제외하고 모두 6막으로 구성이 되었다. 그 중에 볼만한 막으로는 1, 2, 4막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1막은 [예상우의곡]을 연상케하는 주제로 꾸몄고, 2막은 당나라의 군위(軍威)를 보여주었는데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4막의 주제는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유우석(劉禹錫)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죽지사(竹枝詞)〉 두 수 중 첫째 시를 이용한 내용이 이어졌다. 여기에 등장한 유우석의 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楊柳靑靑江水平 수양버들 푸릇푸릇 강물은 평평한데,
聞郎江上唱歌聲 낭군님 강가에서 노래 부르는 소리 들리네.
東邊日出西邊雨 동쪽에서는 해가 뜨는데 서쪽에선 비 내리거늘,
道是無晴却有晴 개지 않았다 말하나 도리어 개었다네.
마음[情]을 날씨의 갬[晴]으로 표현한 절묘한 시인데, 한갖 오락에 지나지 않는 이런 공연조차 이런 문학적 색채를 띠게 할 수 있는 중국의 오랜 문화적 전통을 느낄 수 있었다. 나머지는 좀 유치한 내용이었다. 현종과 양귀비의 화청지에서의 유희며, 태평성대를 묘사한 막에서 나온 서커스 공연 등등 ……
몽회대당 공연을 보고 난 뒤에는 저녁을 먹었다. 아마도 이번 여행을 통해서 제일 맛이 없었고 특색도 없었던 식사가 아니었던가 한다. 다만 조별로 앉지 않고 이리저리 흩어져 앉아 평상시와는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달까? 재미 있었던 것 중의 하나는 식당의 가격표시였다. 카운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每位25元, 兒童0.8米-1.3米10元.
우리 말로 하면 "일인당 25원(우리 돈으로 3200원쯤), 어린이는 0.8m∼1.3m까지는 10원(1400원 남짓)" 그리고 카운터 맞은편의 벽면에 0.8에서 1.3m까지 키 재는 표시를 해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이로 가격을 정하는데 대충 한두 살, 나아가 서너 살까지도 입심 좋은 아줌마가 빡빡 씌우면 도리가 없지만 여기서는 나이는 없고 키로 정하니 도저히 오리발을 내밀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과연 중국인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을 해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식당에서 나온 이후의 스케줄은 수막공연(水幕公演) 관람이었다. 한 시간 남짓 시간이 남았다. 낯선 곳에서의 남는 시간이라는 것은 "여유"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다들 전기차로 부용원을 한 바퀴 도느냐 산책을 하느냐 이러쿵저러쿵 많은 의견이 나왔지만 이장우 선생님과 나는 당나라 개국 24공신도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당태종이 글을 짓고 염립본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현재는 3장의 진본만이 전한다고 한다. 나머지는 모각한 것을 다시 옮겨 놓았다고…… 아는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나니 공연이 시작되었다고 가이드가 찾으러 왔다.
수막공연은 스크린에 해당하는 물안개를 분사하고 그 위에 영상을 투영하는 것인데 입체효과가 좀 있었다. 신기해서 한번쯤은 볼만하겠지만 두 번 보라면 좀 그럴 것이다. 내용이 유치하고 거의 계속적인 반복에다가 불꽃놀이 등등 …… 그런데도 세계최대니 어쩌니 하며 선전을 하는 것을 보면 규모나 스케일을 가지고 자랑하기는 우리나라나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재바른 가이드가 혼잡을 예상하여 공연이 끝나기 전에 자리를 떴다. 마지막날 저녁이다. 오는 길에는 보니 사람들이 길거리에 몰려나와 뭔가를 태우고 있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곽거병( 去病) 장군의 기일인가 그렇다는데 곽거병 장군의 이름이 "병을 물리친다"는 뜻이므로 모두들 나와서 무병 장수를 기원한다고 하였다. 뜻밖에 색다른 풍속을 보게 되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실상 이런 것을 보는 재미인데 ……
호텔로 돌아와서는 이번에는 남문 쪽을 한번 가 보고 싶었다. 많이들 피곤한지 오늘은 큰형님과 문정이만 나서게 되었다. 남문도 번화했고 이곳에는 주로 금융회사가 많이 몰려 있었다. 예쫑회이(夜總會: 나이트 클럽)도 많은 것이 이쪽 길은 아마 유흥가가 밀집해 있는 것 같았다. 재미 있는 것은 나이트 클럽 앞에는 경비를 서는 경찰들이 꼭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남문 통로에는 해금을 타며 예술을 파는 거지도 있었다. 남문을 지난 저쪽에는 다시 번화해보였지만 너무 멀어보여 돌아왔다. 구 성곽 주변은 비교적 침침하고 낙후되었다는 인상을 받았고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였다, 문화재 관리 차원인지는 몰라도……
돌아오니 정말 피곤하다. 상필은 벌써 잠들어 있었고 나도 대충 씻고 누웠는데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