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학사의 흐름을 유교사학 · 불교사학 그리고 도가사학(道家史學, 즉 神敎史學)의 흐름으로 이해해 볼 때, 신교사학은 철저하게 억눌려 왔다.
근대 대종교의 등장은 그러한 신교사학의 부활과도 통하는 말이다. 따라서 대종교의 역사인식은 과거 유교와 불교중심으로 흘러내려오는 역사인식을 도가(道家) 또는 신교(敎), 즉 대종교적 역사 인식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요소들의 강조는 당연히 민족적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며 타율성(他律性) · 정체성(停滯性) ·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위장된 일제 식민주의역사학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역사학으로 자리잡았고 나아가 민족적 역사의식의 고취를 통해 항일운동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일제의 조선사 편찬 작업이다. 일제는1925년 6월 총독부 칙령(勅令)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를 공포하고 조선사편수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을 회장으로 하고 일본과 우리의 어용 학자들을 수사관(史官) · 수사관보(修史官補)로 동원하여 조선사 편수 실무를 담당케 하였다.
이 작업은10개년 사업으로 계획되어, 마침내 1938년 37책으로 구성된 조선사 37책이 편찬 · 간행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물론 고조선 등을 비롯한 우리의 상고사와 민족정체성과 연관된 요소들은 철저히 배제된 어용사서였다.
이 조선사 작업의 배경이 대종교와 연관이 된다는 점도 주목된다. 3.1운동 이후 대종교계 역사학자 박은식이 중국에서 지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국내에 유입되자, 일제는 크게 당황하였다.
조선사편수회 설치를 통한 ‘조선사’ 편찬을 서두른 이유다. 박은식은 신채호와 마찬가지로, 우리 정신의 근간인 단군신앙이 단군의 신교를 출발점으로 연면히 이어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신교사관의 통시적 당위성을 부여해 준 인물이다.
특히 한국통사에서 "대종교는 우리의 삼신 시조를 신앙하는 종교로써 가장 오래된 종교"라고 규정하고, 대종교가 우리 민족의 국교적 가치가 있음을 고증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두 사학의 성향을 신교적 민족주의 역사학과 신도적 식민주의 역사학이라고 불러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두 사관의 정신적 근간에서 신교(대종교)와 신도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 두 맥락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무원 김교헌과 두계 이병도다.
물론 두 인물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자체가 무게의 형평성에 어긋나지만, 김교헌 역사 인식이 신교사관과 관계가 깊고, 이병도의 역사 인식이 일본 신도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김교헌은 신교사관의 근대적 위상을 가장 잘 정리한 인물이다. 김교헌은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한 인물로서, 후일 대종교 중광 2세 교주를 역임했다. 그가 저술 혹은 감수한 ‘신단민사(神壇民史)’,’신단실기(神壇實記)’, ‘배달족역사’는 우리민족의 역사적 원형인 신교사관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후일 박은식이나 신채호 등등의 민족주의역사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반면 이병도 역사인식의 이면에는 신도사관의 냄새를 지울 수 없다. 그가 황국신민화의 첨병이었던 일제 관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도 그렇거니와, 황국사관의 이론적 공장이었던 '조선사편수회'에서 적극 활동한 이력만 보아도 직감이 된다. 나아가 그의 이러한 환각은 해방 이후까지도 지속되었다. 다음의 글을 보자.
"한 번은 두계(이병도의 아호)선생이 텐리대학 초청으로 일본에 다녀오셨는데, 그 대학에서 한(한우근 교수)교수와 나(김용섭)를 초청하니 두 사람이 상의해서 다녀오라고 하셨다며, '김선생 같이 갑시다. 김선생이 간다면 나도 가고 안 간다면 나도 안 갈래.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계 선생이 텐리대학에 가시니, 그 대학이 텐리교(敎)의 도복을 입히고, 예배에 참석토록 하였다는 군'이라고도 덧붙이셨다. 나는 거기는 아직도 총독부 시대이구나 생각하였다. 그래서 '선생님 저는 차멀미를 많이 해서 여행을 못합니다. 선생님만
다녀오십시오.'하고 사양하였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병도에 대한 일화를 적은 것이다.
일본에서 신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유명한 천리대학교에 가서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했다는 김용섭의 증언이다. 이병도의 가치 기반에 일본 신도의 작용이 적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는 부분이다. 더욱이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의 중심에 섰던 인물의 행동이기에, 충격을 넘어 인간적 절망감까지 엿보게 한다.
《김동환 ‘김교헌의 생애와 역사인식’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