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건너 강 건너 그 마을
양수리 가는 길은 계절마다 참 아름답다
濃淡농담의 짙고 옅음을 신중히 다룬 솜씨 좋은 화가의 한폭 水墨畵수묵화 같다
산 위 능선, 중첩이룬 산자락이 그렇고 또 산그림자 드리운 강물이 그러하다
맑은 날이나, 회색 짙은 안개 끼인 날에도, 초록의 유월 그 사이로 비가오는 날에도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난, 강에 바짝 붙은 옛길로 걷는 걸 좋아한다 황톳빛 강물이 비단 자락마냥 넘실거린다
언제나 강 바닥과 자갈 돌등을 드러 내놓고 있던 길가 얕은 강에 오늘같이 황톳빛으로
꿈틀대며 생명력을 보일때는 장마철인 이 때 뿐이다 자장가처럼 물빛 고요 드리우고
흐르는 강물도 좋지만 산골짜기마다 씻어 흘러 들어온 물은 몸 때 씻은 목욕물마냥 특특
하나, 자연의 개운한 물살이다 '강물은 늘 흘러야 한다' 는 말을 되씹으며,목청껏 소리
지르며 흐르는 물살이 시원하고 역동적이다
서둘러 찾아 왔는데도 어느새 '양수떡집'앞 입간판은 세로로 길게 누워있다 빨간색으로
크게 커피잔을 그려 놓아 한눈에도 떡과 커피를 파는 곳이란 걸 알지만 장사가 썩그리
잘되는 집은 아니다 그래서 서둘러 오지 않으면 문 닫혀 있기가 일쑤다
강가, 통유리로 만든 강풍경이 바라다 보이는 근사한 곳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에겐 그다지
이 떡집의 전통 떡과 커피가 구미를 당길리 없다
두손으로 텅텅!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방금 전 문을 닫아 좌판의 떡을 거두지는 않았다
떡판에 쓸쓸히 올라앉은 떡중에서 텃밭에서 딴 콩으로 만든듯한 풋내 겨우 가신 콩떡과 흰
가래떡 두줄을 샀다 드문 드문 박힌 콩이 입안에서 씹힐때마다 그려지는 고향의 맛이다
그 풋풋함이 좋아 가끔 양수리 와서 사 먹는 콩떡의 맛이 참 좋다 커피보다는 숭늉이나 보
리차로 목을 추기며 먹는게 좋아 일부러 숭늉을 물병에 넣어 와서 먹곤한다
양수리 떡집을 나와 골짜기를 접어들어 몇구비 돌때마다 차창 밖 풍경은 경이롭다
하늘 걸린 하얀 구름은 강 건너 풍경이 젖어 들도록 가슴을 타고 내리는 비처럼 잿빛이다.
잠깐 차를 멈추고 강물을 들여다 본다. 강을 사이에 둔 전원주택과 음식점, 아름다운 자연에 너무 고
급스레 도배한 듯한 건물들이 눈에 거슬린다 도무지 삶의 냄새가 배어있지 않아 늘 아쉬움이 남는다.
물이 넘친다는 뜻의 지명인 북한강가 마을 (무너미)문호리로 접어든다. 수능리, 정배리 가는 길목의
초입 동네이다. 좀 더 가면 '소나기'마을' 나오고 윤초시 손녀가 소년과 물장구 치며 순수한 사랑을 나
눈 그 개울가도 나온다 전원주택과 가든, 팬션이 점령하기 전 약 6~7년 전만해도 시골의 수수함을 지
닌 소박한 마을이었다
'먹물을 갈아 강물이 더럽혀졌다'는 유래에서 더러울 '문'자를 써서 문호리라 불렀단다
북한강을 낀 도로가 일직선으로 펴지고 나서 일부러가 아니면 굳이 들르지 않던 작은 동리였었다
함석 지붕아래 이발관과 낮은 떡집 그리고 가끔씩 문을 여는 방아간이 있다
100년 전에 세워 졌다는 언덕 위 작은 교회(한돌성전)과 종루, 큰 니티나무 아래 돌계단등 ...
시간이 멈춰 버린듯한 풍경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고요한 동네이다
다만 가슴 아픈 것은 해질녘 서산에 해 걸치는 풍경을 볼수없게 산허리를 동강내어 터 닦고 올라 앉은
최고급 전원빌라와 강가의 빌리지, 고급 전원주택이 들어선 것이다
지금은 서울 사람들 최고의 전원주택지로 각광받고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문호리는 작은 서울로 불
릴만큼 교통의 요지(한강으로 이어진 뱃길)였었다
뱃길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조선시대 문호리(무내미)는 한양의 관문이었다고 한다
무내미(무너미) 나루터를 중심으로 주막이 즐비하여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붓을 씻은 먹물이 강을 더
럽힐만큼 선비들이 많아 문호리(汶 더러울 문, 湖 호수호)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문호리가 끝날즈음 나타나는 언덕 위 문호교회(한돌성전)는 1906년 2.5 평방미터의 방한칸에서 시
작해 1911년 여섯칸의 방에서 183명이 예배를 볼 만큼 교세가 컸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예배당이 전소되어 무내미 강가의 돌과 강 건너의 흙으로 1955년 10월 지금의 예배당 건물을 완성
하였으니, 교회의 역사는 백년이 넘었고, 내가 일부러 만나러 간 한돌성전은 복구한지 50년이 조금
지난 건물이다
언덕 위의 돌집 예배당. 사람들이 무내미 강가의 돌과 흙로 쌓은 성전
20년을 넘기지 못한 채 멀쩡해 보이던 다리가 무너지고, 20년만 넘어도 재건축을 위한 투자 수단
으로만 가치가 존중되는 시대에, 돌집 성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하고자 하는 예배당이다
이 시대에 50년이 넘은 예배당 건물이 언덕 위에 서 있는 한돌성전의 그 모습 만으로도 그 고고함
설명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여섯칸짜리 한돌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길 기도한다
돌과 흙을 날라 성전을 세운 그들, 하늘 향한 풀꽃같은 마음이 퇴색되지 않기를 바래본다
갈색 짙은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닥에 방석을 깔고 나란히 앉아 예배를 본다 남, 녀 자리가
따로 구별 되지 않은 것 말고는 백년전과 다를바 없는풍경이리라
비오는 토요일 아침, 문호리 청년들이 50년 전처럼 바닥에 방석을 깔고 예배를 보고 있었다
흡사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풍경 한자락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성전 출입구 앞 신발장을 유심히 보니 깜장 고무신이 선반에 죽 늘어서 있다 정겨운 옛 물건에 눈
이 가 오래도록 마음 머물게 한다
하얀 저고리에 깜장 치마를 입은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추어 목청껏 부르는 찬송가 소리가 들리
는듯하다. 담쟁이 덩굴 짙게 드리운 교회 주변을 찬찬히 돌아 보았다 새로 세워진 옆 교회로 들
어가던 여인 하나가 언덕 위를 향해 목례를 한다 나를 보고 인사를 했나!... 나 아닌 줄 알고 두리번
거려 보았으나 언덕 위에는 나 뿐이다
교회 앞 안내문을 읽어보니, 교회가 서 있는 이 작은 언덕 이름이 <당미산>이란다
무내미 강가의 돌을 온 성도와 주민들이 협력하여 머리에 이고 손으로 나르고, 강 건너편의 흙을
배로 날라와 당미산 자락 반석 위에 <한돌성전>을 세웠다고 한다 몇 억의 건축헌금을 하는 현대
인의 건축 방식과 비교되는 돌과 흙을 날라 성전을 짓는 가난한 마음이 결코 부족한 신심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테지....
한돌성전, 백년의 흔적들, 출입구의 고요 머금은 니티나무
노끈 질끈 매어 만든 소박한 샹들리에, 백년 기념동판 그리고
성경 말씀따라 너우너울 춤추는 담쟁이 잎사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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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제가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이쪽을 오가며 쓴 글입니다
지난 11월 13일(토) 문호리 '한돌성전'에서 두번째 시집 "창가에 서성이는 바람"
출판기념회를 갖었습니다 초대하고 싶었지만 폐끼치는게 아닌가해서 몇몇분에게만
이야기 했지요 그날, 시골 동리가 200명 정도의 하객으로 북적거렸어요
1부는 '한돌' 에서 부페 식사 그 후 2부는 문호리 다리골 저희집에서 또 다시 모였습니다
역사 깊은 곳에서, 큰 축복속에서 많은 이들 덕분에 행사 잘 마쳤음을 ... 감사합니다
첫댓글 그렇게 좋은 일이 있었군요. 부럽슴다. 축하드려요.
"창가에 서성이는 바람" 그 바람을 함께 쬐이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요.
우리가 되어가는 그 자리, 오래전 예약된 선약일정으로 못 간다 했었지요. 하지만
주예선 시인님께 축하드리는 마음만은 한가득이예요. 부러운 그대!
추카추카드려요!! 바지런히 언니의 길을 가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언니 자체만으로도 시가 되는 것을, 게다가 그처럼 마음이 열리는 곳에 바람 맞고 서 계시면 제3집 4집...10집까지도 자연스레 써지시겠네요. 지금 사시는 그 모습, 참 닮고 싶은데 막상 그러지 못함은 무얼까요?^^행복과 여유가 이곳 서울까지 전해집니다. 그 곳의 아름다운 삶을 전해주셔셔 감사합니다. 낼 이 모습 그대로 편안히 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