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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솔성요론(率性要論) 1.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을 것이요, 2.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으로 믿을 것이요, 3. 사생(四生)중 사람이 된 이상에는 배우기를 좋아할 것이요, 4. 지식 있는 사람이 지식이 있다 함으로써 그 배움을 놓지 말 것이요, 5. 주색 낭유(酒色浪遊)하지 말고 그 시간에 진리를 연구할 것이요, 6. 한 편에 착(着)하지 아니할 것이요, 7. 모든 사물을 접응할 때에 공경심을 놓지 말고, 탐한 욕심이 나거든 8. 일일 시시(日日時時)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것이요, 9. 무슨 일이든지 잘못된 일이 있고 보면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를 살필 10. 다른 사람의 그릇된 일을 견문하여 자기의 그름은 깨칠지언정 그 그름 11. 다른 사람의 잘된 일을 견문하여 세상에다 포양하며 그 잘된 일을 잊 12. 정당한 일이거든 내 일을 생각하여 남의 세정을 알아줄 것이요, 13. 정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죽기로써 할 것이요, 14. 부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죽기로써 아니할 것이요, 15. 다른 사람의 원 없는 데에는 무슨 일이든지 권하지 말고 자기 할 일만 16. 어떠한 원을 발하여 그 원을 이루고자 하거든 보고 듣는 대로 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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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솔성요론인데요. 총 16조로 구성되어 있지요? 대종사님께서는 취사를 내어놓고, 크게 금지하는 취사로서 계문을 두셨고요, 권장하는 취사로서는 솔성요론과 보은을 두셨습니다. 금지는 계문과 배은, 권장은 솔성요론과 보은 입니다. 사은 보은에 대해서요. 취사를 잘 한 것은 솔성요론과 계문을 잘 지키면서 배은하지 않고 보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무궁한 복덕이 함께한다. 지혜도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성요론에서 제일 중요한 첫째는 실천을 잘 하자는 것인데,
무엇을 실천을 잘 하느냐. 첫째는 믿음에 대해서 실천하라고 해주신 것이에요. 왜냐하면, 한 때 아무리 뭔가를 잘 했어도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된다. 아까 사경하는 사람들 나왔잖아요. 사경을 열심히 했지만 믿음이 흔들리니까 교당은 안 나와요. 사경을 잘 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입니다. 수많은 경계 속에서 변화하는 환경과-일체만물은 변화하고 있거든요. 나도, 상대도. 환경도, 시대도, 국가도, 교무님도, 교도도, 자식들도, 부모님들도 다 변화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일원상 진리의 바로 무상의 도리. 항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변화의 중심 축은 불변에게 둬라. 불변에 중심 축을 두고 변화를 응용하라. 이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중생의 삶은 뭐냐. 불변의 중심 축을 놔버려. 관심을 안 가져요. 안 보이기에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놓고는 변화 속에 그냥 들어가서 마치 그것이 가장 열심히 살고 잘 살고, 잘 될 것 같이 착각하고 사는 것이 중생들이다. 그러나 불보살들은 중심축을 두는데 그게 바로 성품과 정신자리에요. 그리고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에 중심을 두고 다른 모든 것들을 해나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솔성요론 1조에다 먼저 사람과 법을 놓고 그 사람은 변화하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냐, 정사 이상의 스승을 믿어라. 둘째는 영원불멸한 진리요, 성품인 법을 믿어라. 먼저 그걸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두 번째도 믿음을 내 놓으셨지요. 여러 가지 중에서도 가장 핵심인 제일 좋은 것을 믿어라.
그 다음 솔성을 가장 잘 하는 것은 배움이라는 거예요. 믿음 다음에는 배움이다. 그래서 3,4,5조는 배움을 두셨어요. 본인들은 혼자 사시지만, 저는 많은 분들이 사는 것을 봐요. 제 핸드폰에 명단이 3천명이 넘어요. 아무나 넣어주지 않아. 그런데 그 분들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자연스럽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살게 되고 저렇게 살게 되고 경험을 통해 알게 되고 예측도 가능해요. 그런데 문제는 본인이 본인을 잘 모른다는 거야. 우리는 다 보이는데. 그래서 배움에 대해서 먼저 내 주신 것이에요. 사람은 배워라. 지식 있어도 배워라. 노는 것은 적당히 하고 좀 배워라. 그래야 실생활에 취사를, 보은을 잘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6,7번째는 수양이 필요하다는 것이에요. 수양. 아무리 그 사람이 일을 잘 하더라도 마음에 착이 있거나 욕심에 걸려있으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그래서 수양적 솔성으로서 6,7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8,9조는 실제 경계 속에서 어떻게 적공해 나갈 것인가. 8조는 자기가 자기를 가르쳐라. 최고의 적공입니다. 저는 적공 중 최고의 적공은 이 솔성요론 8조라고 생각합니다. 일일시시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것이요. 어떤 스승이 뒤에 따라다니면서 이럴 땐 이래라, 저럴 땐 저래라 할 수가 있나요? 양심의 자기가 비양심의 자기를 가르치고, 성품의 자기가 아주 넘나들고 흔들리는 원숭이같은 마음을 가르치고. 도덕의 마음이 비도덕의 마음을 가르치고 정의가 불의를 가르치는 이 적공이야 말로 언제 어디서나 떠날 수 없는 통만법명일심(通萬法明一心)의 적공이다.
그 다음 9조는 경계 속에서 뭐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먼저 뭣을 봐라? 나를 봐라. 항상 내 마음공부로서 출발해라. 이것이 적공이다. 우리 애들이 걸어 다니는데 탁 넘어졌어. 그럼 엄마가 어떻게 해? 땅을 탁 치면서 ‘우리 애기를 다치게 하고!’ 하잖아요. 그럼 애기는 웃어. 누군가 원망의 대상을 찾아내면 위로가 됩니다. 중생들이 애기 때 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불보살들은 어떠하냐면 삼세 인과를 통해서, 외부 대상 보다는 내 안으로 나를 본다는 거예요. 내 마음을 보는 겁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기억해서 미안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삼세 인과를 보면 어찌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것인가. 먼저 내 안의 나를 살펴라.
10, 11, 12조는 우리가 하기 어렵다는 대인관계예요.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지. 일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의 관계성 속에서 참 어렵다. 대인관계를 잘 하는 방법 중 첫째는 10조 남 잘못된 것을 말하지 말라. 과실을 말하지 말라. 대인관계에서 깨지는 첫째가 과실을 말하는 것이더라. 옛날에 큰 회사의 신입사원들에게 선배들을 찾아서 ‘이 회사에서 고칠점, 문제는 무엇입니까?’하고 직접 가서 물어서 가져오라고 했대요. 그러니 신입사원이 물어서 다 모아 왔어. 그래서 좋은 것들이 나오긴 했어.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신입사원들이 ‘이 회사 문제가 너무 많구만? 나가야겠다.’ 하고 다 나가버렸어.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 문제없는 곳이 어디 있어요?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이 상황에서 완전한 것이 어디 있느냐? 시대에 따라 사회에 완전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에요. 시대에 따라 빠른 사람, 늦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바꿔야 할 것도 있을 것이고 살아온 인과에 의해 업이 다 다를 것이고 자라온 환경, 성향, 지역색이 다를 것이고 집안의 특성, 문화가 다를 것인데 어떻게 문제가 없겠느냐는 말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첫째는 과실을 말하지 말라는 것인데 저도 참 많이 한 것 같아요. 물론 예외 사항은 있습니다. 그건 넘어가고.
그 다음에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두 번째가 오늘 할 것이에요. 과실은 말하지 말되 칭찬을 해라.
그런데 여기서 연구가 없는 칭찬은 골치가 아플 수가 있어요. 여러분, 신동들 있지요? 명창이니 하는. 애들이 거의 중간에 헤매버립니다. 칭찬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만하고 거만해져 버리고. 연습을 안 하게 되어요. 우쭐해가지고. 신동이라고 하니까. 나는 뛰어난 능력을 본래 갖고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취사 솔성은 수양연구에 근간한 솔성이 되지 않으면 속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뭘 할 때 마다 돈을 줘봐. 나중에 조건적 아이가 되어요. 그래서 뭘 주지 않으면 안 해버려. 연구에 바탕 한 칭찬도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걸 말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
자 원문을 읽읍시다.
11. 다른 사람의 잘된 일을 견문하여 세상에다 포양하며 그 잘된 일을 잊어버리지 말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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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념을 하라는 것인데, 맨 먼저 다른 사람의 잘 된 일을 견문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견문하세요? 누가 어쨌다네? 그런 것은 견문을 잘 하는가? 다른 사람의 잘 된 일을 견문하면 어떻게 되지요?
배가 아프잖아. 아, 속이 쓰려요, 왠지. 저는 미생 연속극을 몰아서 봤는데 핵심이 그거드만. 저기 우진교우 특진했다고 공양했는데, 다른 사람이 특진했을 때 열 받아서 대우빌딩 앞에서 담배 피우고... 제가 볼 때 부처님은 누구냐, 다른 사람이 잘 한 것을 기뻐하는 사람. 중생은 누구냐, 묘하게 배가 아파. 희한해 버려요. 사촌이 논을 샀으면 기뻐야지. 그래야 나중에 씨나락이라도 한 되 얻어먹지. 가까운 사촌이면 얼마나 가까워요? 사촌 결혼하면 다 몰려가잖아요. 삼촌이 어쩐다 하면서. 그런데 논을 사는 순간 속이 아파요.
여러분, 육군 사관학교 나온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면 소위, 중위, 대위를 넘어서 소령, 중령, 대령을 달고 준장, 소장, 중장, 대장 이렇게 올라갑니다. 그런데 투서가 들어옵니다. 특히 준장 올라갈 때나 소장 올라갈 때 감찰부에 투서가 들어오는데 그 투서가 누구 꺼냐, 거의 동기들입니다.
육사 다닐 때 모르게 나가서 술 마셨고, 놀았고, 모르게 울타리 넘어서 같이 엉뚱한 짓을 했단 말이에요. 그 때 같이 했는데, 왜 나는 못 올라가는데 저 x는 올라간단 말이야? 얼마나 속이 쓰리겠어요. 끄집어 내리려고. 그래서 얘기 언제 어떻게 이렇게 했다. 하고 투서를 내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중에 나는 과오가 없다는 사람? 손 한번 들어봐요. 나 뭐 줄게. 이 세상에 과오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어릴 적 기저귀에 똥 안 싼 놈이 어디 있어? 엄마에게 거짓말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어? 누구나 있는 과오임에도 불구하고 내 것은 안 보이고 다른 사람 것은 그냥 잘 보여요.
교당에서도 우리 6,7단은 내가 예상이 되어요. 50이 되는 순간 법호가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안 나오는 사람도 있죠. 또 60이 되어서도 몇 점이 부족하면 더해지는 점수가 있어요. 60대에 법호가 나온 사람은 점수가 낮은 사람이에요. 50대 나온 사람은 상당히 점수가 높은 사람이죠. 같이 주욱 했어, 나름대로. 그런데 다른 사람 단장할 때 쏙 빠지고, 다른 사람 봉사할 때 자긴 쏙 빠지고, 다른 사람 헌공할 때 자기 조금 내고. 그래놓고는 이제 법호는 받고 싶어. 그래서 저 사람이 출석을 늦게 했고 어쩌고. 저 사람이 나 보다 못한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 다 나보다 잘할 리는 없으니까. 나보다 못 한 것 한두 가지 있을 거 아냐. 그럼 ‘그랬는데 어떻게 저 사람이 받느냐’. 법호만 주면 꼭 한 두명 씩 떨어지네. 항마 주고 나도 그래. 지자본위와 공도자 숭배가 안 되는 집단은 법호만 주고 나면 분위기가 싸~해져요. 그게 뭔 놈의 집단이에요? 뭔가 뜻이 있겠지. 뭔가 곡절이 있겠지. 그래, 나는 못받았어도 저 분이 받아서 참 고맙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상 받는다고 얼마나 뭐가 어쩌겠습니까. 그렇지만 참 고맙지. 나만 노력했어요? 저 사람은 더 노력 했거든.
지금 청년회는 뜨거움이 예전만은 못한데 옛날에는 청년들 이맘 때 연말에 워크숍을 해요. 각 부서에서 연말에 발표를 해요. 우리부서는 어떻게 했고, 앞으로는 어떻게 하겠다. 전부 내가 제일 열심히 한 줄 알아. 나같이 열심히 한 사람 없어, 이렇게 생각을 해요. 저도 처음에 원불교 와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속으로 나보다 신심 있는 사람 있는 놈 있으면 나와 봐라, 그랬어요. 그렇듯이 자기가 제일 열심히 한 줄 알았는데 발표한 것을 봤더니, ‘오메, 저 사람도 나 못지않게 열심히 하네?’ 그럼 어때요? 너무 서로 고마운 거야. 서로 감동해요. 나는 그게 불보살 집단이라고 생각해. ‘너나 해라.’, ‘쟤는 이건 잘 하는데 저건 못한다.’, 아니면 ‘내 코가 석자다.’ 하며 무관심 하든지. 흠을 잡아 물어뜯든지, 시기질투 하든지. 중생의 세계는 그러하더라는 말이에요.
우리는 잘 하는데 저기 어디 가면 그러더란 말이에요. 칭찬을 안 해. 예를 들어서 우리 호겸 교우가 강연 진짜 열심히 준비해서 잘 들으셨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요? 이따 밥먹을 때 속으로 ‘열심히 하드만.’ 그래야 돼요? 아니 표현을 해줘야지요. 따라서 해봐요. ‘표현.’ 그것이 불공이에요. 입을 만져 봐요. 입을 뭐 하러 가지고 있어요? 표현하라고 있는 거예요.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우리 호겸 교도님 너무 좋았어요. 잘 들었어요. 준비도 많이 했고요. 나 오늘 호겸교우 강연 보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칭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고맙다. 하루에 몇 번 칭찬하기 유념을 잡아야겠다.’ 이렇게요. 이렇게 소득유무를 반조하여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공부로 이어진다면 얼마나 서로 은혜가 되느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교무 하나 보고 다니는 교당이 아니라 서로서로 스승 되어 서로서로 훈련이 되는 교화단이 되고 교도가 되는 것이지. 교무님 설교만 쳐다보고 교도가 하는 것은 안보고 하면 안 되죠. 준비하는 교도도 마찬가지로 이 많은 사람의 시간을 잡으니 철저하게 미리미리 준비해야지요.
정산종사님 어떻게 이런 법문을 하셨나 몰라요. 경성에 어떤 사람이 자기 아이가 천붕지통이겠어요? 그래서 주변에 온갖 친척들과 이웃들이 위로를 해줘요. 얼마나 마음 아프냐. 얼마나 힘이 드느냐. 그래도 이 사람은 계속 눈물로 세월을 보내요. 죽은 자식을 생각하면서. 그런데 얼마 후에 뒷집에도 똑같은 일이 생긴 거예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뒷집 아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어쩐지 시원~해. 희색이 만면해져. 참 묘하지요? 그게. 참 나쁜 사람 같지요? 옛날에 연속극 봤어요? 장희빈. 인형 만들어 찌르는 거 봤어요?
제가 볼 때 이 세상의 문화 중에 정말로 잘 하는 사람을 박수쳐주는 문화가 된다면 이 세상은 정말 발전할 것이라고 봅니다. 미국에서 박사 딴 사람이 왜 국내에 안 들어오는 줄 아세요? 거기서 그만한 대우를 해줘요. 그런데 약자들 생각은 이래요. 같은 사람인데 너만 그렇게 많이 받느냐? 우리 교무님 중에는
총부에서 부장을 했지요? 부장을 하면 엄청난 교단을 보는 시각이 생겨요. 그리고 주인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약자 교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장 해봤으니 이번엔 오지에 가서 살아보래. 그게 평등입니까, 여러분? 그게 평등이에요? 그런 무지한 주장을 하면 안 되지. 그 좋은 자산을 어떻게 해요? 그 자산을 큰 데 가서 더 많은 대중에게 쓸 수 있도록 밀어 줘야지요. 너는 간부 했으니-좋은 것도 없드만- 저기 오지에 가서 해봐라? 그런 것을 악평등이라고 해요. 그런 말에 동의하면 자기도 약자야. 약자 3명의 말에 동의하면 자기도 약자야. 약자 소리가 다 맞는 말은 아니에요. 실패한 사람은 실패를 노래하고 성공한 사람은 성공을 노래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양쪽을 다 들어보고, 우리가 약자를 보호하고 지원하고 도울 것은 도와야 하지만, 4대 강령에 약자 보호가 있듯이. 타자녀 교육도 있고요. 그런데 지자와 공도자는 신앙에다 넣어놨어요. 지자는 본위해라, 공도자는 숭배해라. ‘너는 공도자를 했으니 이제는 내려가서 해봐라.’ 그게 맞나요? 공도자를 숭배해 줘야지요. 니가 하고 싶어서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누가 할까요? 다 자기가 자기 것 챙겨먹어요? 나도 내 새끼들 챙기고 찔끔찔끔 공도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럼 누가 하나요? 다 할 수는 없으니까 공도에서 애쓰는 사람은 공도자로서 숭배를 하자는 말입니다.
법회 볼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하려고 해요. 솔직히 말할게요. 여러분들이 제 가정 아세요? 제가 갈 때 되니까 다 말할게요. 제 후임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마세요. 제 후임자도 아마 아이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 아이 교육은 여러분들이 책임져 주세요. 모른 체 하지 마시고. 그 교무님이 공도에 적극적으로 하실 수 있도록 그 자녀만큼은 교당에서 책임을 져 주셔야지요. 내 코가 석자인가요? 너는 너 먹고 살고 나는 나 먹고 살고?
여러분들이 저에게 못하지는 않았어요. 잘 하셨어요. 그런데 모른 척 하더라고요. 저는 14년간 제 가정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안했어요. 자존심 상하더라고. 갈 때 해야겠다.(대중웃음) 내가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 내 후임자는, 공도자로서 출가한 그 사람의 자녀교육만큼은 교당에서 책임져 줘야 할 것이 아닌가.
불공이라는 것이 때에 맞아야 하고 상황에 맞아야 하고 적절해야 하잖아요? 제가 볼 때에 11조는 글이나 입으로 포양하라는 것이에요, 주로. 제가 이 교당에 있으면서 원불교 신문이나 한울안 신문에서 하는 것이 있어요. 다른 교당에서도 하는 것들은 내지 않았습니다. 안암에서만 하고 다른 교당에서 쓸 만한 것들 위주로 내었습니다. 교무님들은 자세히 안 읽어봐도 돼. 제목만 봐도 알아요. 아, 이것은 내가 갖다가 그대로 쓰겠다. 견문이 벤치마킹이거든. 벤치마킹 하겠다. 아니면 여기서 살짝 응용해서 내 환경에 맞게 보완해서 하겠다. 이런 정보를 주는 거예요. 예전에는 머릿수, 몸으로 채워주는 것이 불공이었어요. 어떤 행사에 참석해주고.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정보 문화 관리야. 어떻게 공유하게 할 것인가.
시집간 딸이 자기 친정집 오면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다 아니까 뒤져서 싹싹 가져가지요? 제가 이제 그러려고 해요.(웃음) 제가 총부 가니까 안암교당에서 좋은 것은 하나씩 하나씩 가져가고. 안암교당 장점이 몇 가지 있거든요. 그 중 교화단 관리. 특히 청년들이 잘 하거든요? 이걸 영상으로 종원교우님에게 부탁하려고 하고, 또 우리 수양회. 이걸 영상으로 찍어 각 교구에 전국에 날리겠다. 아까 SNS관리. 미래에 맞게. 이걸 사례로서 알려주려고 해요. 제가 포양을 하겠다는 겁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교화. 그렇죠? 그리고 그 미래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불공.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일반 단장ㆍ중앙 카톡방에다 글을 올리면 제가 무서운가 봐요. 답이 없어. 적막강산이야. 제가 단장ㆍ중앙에게 알리는 글은 아시오,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따다가 단원들에게 공유하시오, 그런 뜻이거든. 단장 중앙이 자기만 딱 읽고 알겠다고 하는 것은 자격이 없는 거예요. 이걸 단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단장중앙이지. 내 개인의 정보만 알고 개인 의견만 내면... 대의제도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에요? 대중의 생각을 나를 통해 전달하려고 내가 임원이 되는 것이지 내가 개인 의견만 말하려고 단장 중앙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이 공적 개념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교당에 누가 합격했다, 특진했다, 좋은 일이 있었다는 일들. 또는 안 좋은 일들도. 정말 가족이라면 서로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칭찬해주고 하는 것이 불보살 집단 아니겠는가. 맞지요? 그래서 누가 잘 할 때 깎아버리고 싶은 생각이 나잖아요? 그럴 것 같으면 그 때 멈춰서 한 마음만 돌라달라는 것이에요. 정말로 외면하고 싶고 깎아 내리고 싶지만 딱 멈추고 박수쳐줄 수 있는 심법. 이게 정말 좋은 것이다.
여러분 정말 기분 좋은 것이 뭔 줄 아세요? 예를 들면 내가 A라는 사람이야. 그런데 B라는 사람에게 불공을 하고 싶어. 그러면 단순한 사람은 B에게 뭔가를 해주려고 해요. 그것도 필요하지. 그런데 또 다른 방법이 있어요. 첫째는 사은님께 기도하는 거예요. ‘사은님, 나 이 사람과 잘 해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또 하나는 다른 처처 불상 C에게 B에 대해 포양, 칭찬을 해줘 봐요. 사실은 안 좋은 것 이야기 하면 바로 전달이 되어요. 너만 알아라? 너만 알지 않아요. 다 알게 돼요. 특히 안 좋은 소리는 다 전달이 돼요. 그런데 좋은 소리는 3명에게 말하면 1명에게 전달이 될까 말까 해요.
백화점에서 불만 손님이 있잖아요? 만일 만족한 사람이 10명이라면 만족한다는 소리는 한두 사람에게 한 대요. 그런데 불만이잖아요? 그러면 일곱 배의 사람에게 불만이라고 말을 한 대요. 그만큼 우리 안이비설신의 육근은 부정적이에요. 요새 사람들 보세요. 나에게 조금만 피해만 줘봐. 확 받아버려야지. 욕구불만에 꽉 차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사실은 상대도 문제가 있지마는 사은님에 대한 감사는커녕 불평불만 원망이 가득 차서...
그래서 법신불 사은님께 기도하는 방법, 직접 불공하는 방법, 제 3자를 통해서 전달하라고 말은 안 하더라도. 칭찬을 해주면 한 세 번 말하면 이 사람 칭찬을 하면 겨우 살짝 전달이 될 것이에요.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 칭찬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일 기분 좋아. 반대로 제일 기분 나쁠 때가 뭐에요? 다른 사람이 너 이러더라 하고 헐뜯을 때가 제일 기분 나빠. 그래서 우리가 잘 된 일은 잘 견문하는 것도 중요하다. 벤치마킹 하는 것도 중요하다. 잘 견문하세요? 저 같으면 기독교는 청소년 교화를 어떻게 하는가, 불교는 어떻게 하는가? 견문해야겠지요? 그래서 불교신문 저는 봅니다. 보다보면 우리가 갖다 쓸 것이 있겠다, 하는 것이 탁 와요. 이건 법문할 때 응용할 수 있겠다. 하고 탁탁 들어오거든요. 여러분 견문 많이 하셔야 해요.
사리 연구의 중요한 부분이 문사수 중에 첫째는 견문(見聞)이에요. 문(聞). 문은 견문이에요. 보고 듣는 것. 견문이 각지로 이어져야 하거든. 견문과 각지(見聞覺知). 많은 것을 보고 들어야 해요.
그런데 우리 머리가 하얀 할매들은 많이 들으려고 하면 안돼요. 법문만 들어요. 그런데 젊었을 때는 많은 견문이 중요해요. 견문은 입력이 되지요? 입력한 만큼 출력이 달라져. 어떤 견문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판단이나 생각이 달라지거든. 그것이 거기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것화 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게 각지예요. 견문은 벤치마킹이지만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각지거든.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의 3조와 4조의 관계에요. 회보에 보면 어느 교당은 이럽니다. 누가 희사했다고 안 내요. 배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가 돈 많아도 자랑하는 건가. 하면서요.
나는 다 내요. 왜? 사실이잖아. 누가 희사하고, 봉공하고, 누가 공부하고, 누가 훈련 했다. 아 그걸 내줘야지 그걸 따라올 사람도 있고 몰랐던 것을 물어보기도 하고 자극도 되고 하는 것이지. 안 되는 조직은요 뭔가 잘 하는 사람을 안 내놓으려고 해요. 다른 누군가가 배 아파 한다고. 참 시기 질투심은 나보다 확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둘 다 시비 별로 안 해요. 비슷비슷한 또래가 뭔가가 상을 받거나 조금만 못해도 민감해. 그것이 주착심. 참 희한하지.
생각을 크게 틔웠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어떤 경우는 그래요. 우리 카페 우리 단에만 올릴게요. 좋은 것이 있으면 전체적으로 공유하지, 꼭 자기 단에만 올리려고 해요. 좀 더 영역을 화대하면 좋겠다. 좋은 법문? 원음 방송에 공양해서 많은 사람들이 듣게 하는 거예요.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호감도가 올라가고 교화로 이어지고 하거든요. 안목을 크게 틔워서 그렇게 했으면 좋겠고 사실은 포양한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 안에 신앙하고 권장하고 숭배한다는 것도 들어있다고 봅니다. 미국 가서 놀란 것이, 여기는 링컨가래. 여기는 워싱턴가래. 도로명이. 우리도 이제 조금 하더만. 도로가 하도 늦게 생겨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미국은 예전부터 그러더라고요. 공도자를 동상이나 역사로 봉헌하기도 하지마는 대중들이 한번 쯤 생각하게끔 도로명까지도 미국은 하더라. 그게 포양하는 것 아니냐. 포양할 자리에 포양하지 않는 것은 무념한 것이다. 겸손으로 포장한 무념이요, 우치야. 말할 자리에 말하지 않는 것이 겸손을 포장한 무명이다. 한국 문화에서 공부를 잘 하는 애가 미국에 갔습니다. 우리 유가 문화가 있잖아요? 가만히 있는 게 중이나 간다. 하고 가만히 앉아있어요. 그러면, 미국가면 바보 취급 받는다는 거예요. 왜 의견이 없느냐? 질문이 없냐? 그것은 좋은 문화가 아니에요. 그래서 단회를 할 때도, 법회를 볼 때도 뭔가 문답을 하고 이렇게 해서 서로 주고받는 문화가 있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당은 그런 것 없지요? 누가 잘 하는 것 배 아파가지고. 나는 돈이 없어서 회보에 이름을 낼 기회가 없다고 하더라도 좋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에요? 박수. 아니면 미소, 아니면 칭찬 하는 것. 돈 안 들어요. 박수쳐주는 게, 웃어주는 게, 따듯한 말 한마디가 뭔가 돈이 드느냐고요. 그래서 서로 이 교당에서 각자 맡아서 뭔가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나는 벽을 볼 때마다 반타원, 진타원, 돌아가신 운타원님 참 고마워요. 처음에 와서 여기가 빨간 벽돌이야. 창은 외창에다 추워 죽겠네. 꼭 천주교같이 생겨서 분위기도 안 나고. 그래서 제가 오자마자 돈 내라고 하면 미안하니 몇 분에게, 말해도 오해 안 살만한 법사들에게 얘기했어요. 알아서 다 해주셨어요. 루바 하니까 얼마나 예뻐요. 창 하니까 얼마나 예뻐요? 지금은 덜 추운 거예요. 알고 보면 교당 곳곳에 군데군데 우리 교도님들이 희사하고 닦고 갈아주고 해서 운영되어 가는 거예요.
또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손님 하지 마세요. 교당 와서 법회만 보고 발만 담그고 가는 것. 재미없어요. 제가 공부방을 해보니까 외부 교도님들이 우리 공부방에 오잖아요? 다 떨어져 나가요. 왜 그런지 제가 연구를 해봤어요. 일단 오면 간식 주지요? 나도 내고 싶은데... 또 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고. 우리 교당도 아닌데. 그 다음에는 막 자료를 나눠줘? 돌아가면서 강연을 해? 본인은 얻어먹기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 어색하고 미안하고 결국 ‘영상으로 봐버리자.’하고 안 나오는 거예요. 특별히 공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오더라고요.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냐면 내가 뭐가 내 형편에 맞게 한 역할을 맡고 할 때 소속감도 있고 재미도 있고 자신감도 있고 눈치도 안 본단 말이지. 우리 도의씨가 사회 보니까 여기에 있지, 사회 안 봤으면 결석이 더 많아 마이너스일걸 아마? 더 많았을 거예요. 솔직히 말해봐, 그래요 안 그래요?
뭔가를 하나 맡아서 해주라. 내년에 우리 간사 없어요. 누군가 하나씩 맡아서 해줘야 할 것 아니에요? 그동안 누군가 했을 것 아니에요? 어저께 달력을 접었어요. 그 하나가 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 속에서 내 손에 쥐어지는가. 그래서 제가 감사생활에 대해서 느끼는 게 많아요. 감사생활 중 가장 우러나오는 감사는 경험하는 것이구나.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 감사가 적당할 수밖에 없구나. 자기가 책 써본 사람은 누가 책 하나 보내주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런데 책 안 써보는 사람은 별로 고마워. 그 노고를 모르거든. 모른다. 자기 달력 하나 만들어봐. 그 달력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그러면 고마운 마음이 절로 나는데 자기가 아무 것도 안 했으면 고마운 마음이 안 나요.
그래서 좋은 말 할 때 내년에는 한 가지씩 다 맡으셔서... 우리 반타원님도 그릇 닦잖아요. 이제 9학년인데. 그릇 닦으세요. 9학년 아래들 좋은 말로 할 때 다 닦으세요. 9학년도 하는데.
그래서 우리 교당이 곧 내 교당이다. 우리 교당을 가장 재밌는 교당으로 만드는 것은 누가 만드냐, 누가 만들어요? 내가 만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뭐라도 하나씩 맡아서 해야 해. 이게 공동체야. 나는 조그만 것 하나 했지만
여러 사람이 조그만 것을 나누다 보니 서로서로 도움이 되고 은혜로운 공동체가 된다. 이게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도덕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 솔성요론 했는데 이 중에는 그런 사람 없겠지? 법호 탈 때, 누가 항마위 올라갈 때, 상 받을 때 서운해 하고. 다음 주에 상 받을 때 나는 받을 것이 없으니 안 올 거예요? 박수 죽어라 쳐봐요. 그 공덕이 엄청나 버릴 거예요. 한번 예행연습 해볼까? 박수 시작~ (대중 박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