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 환경에 적응·변화하는 진화론 관계성 중시하는 ‘연기법’과 맞닿아 ‘열린 관계’로 새로운 인식 지평 열어
생물학뿐 아닌 정치·사회·문화 등 전 영역에 영향 미친 획기적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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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은 자신의 저서 〈종의 기원〉을 통해 “생명체가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기보다는 주위 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변화하고 적응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근현대 사회 전반에 대해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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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이 다년간에 걸친 자신의 연구 결과를 1859년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이라는 책으로 출간함으로서 서구 사회에 미친 영향은 단지 생물학이나 자연과학에 그치지 않는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밝힌 생명의 모습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선택’된다는 점이었다. 이런 진화론은 직접적으로는 서구문명의 큰 줄기인 전통적 기독교의 창조론을 정면에서 부정한 것이기도 하고,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흔드는 입장이기도 했다. 또한 당시 프랜시스 베이컨 등에 의해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던 서구 근대과학의 귀납적 시각에 대한 재고도 담고 있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진화에 대한 이론을 담고 19세기에 등장한 다윈의 ‘종의 기원’이 20세기 서구문명의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 셈이고, 더 나아가 21세기 근대 서구문명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인류 100대 명저 선정에 언제나 빠지지 않는 주요 저서가 되었다.
진화론에 근거한 논의는 단순한 생물학의 영역을 벗어나 근대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학문 영역에 있어서도 ‘종의 기원’ 이후, 이를 뒷받침하는 유전학과 더불어 진화생물학,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진화발생생물학 등의 다양한 학문영역으로 분화하였고, 이어진 현대진화론에 있어서도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과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 간의 유명한 논쟁 사례처럼 지금도 진화는 뜨거운 주제가 된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자연에 대한 서술이지 규범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진화론이 격론을 유발하고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때로는 부정적으로까지 활용되는 것은 진화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입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말하고자 했던 진화는 우생학적 시각이 아니라, 생명은 주변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자연에 적응하면서 생존해간다는 뜻이고, 이는 시간의 전개에 따른 창발성(emergency)이자 역사성을 말한다.
생명체가 최선의 상태로 진보해 간다는 뜻도 담고 있던 진화에 대한 초기 오해는 후에 보다 많은 연구를 통해 생명체는 최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신의 생존 확보를 위해 자신도 변하고 주변 상황도 변화시킨다는 것으로 정착된다. 자연선택이라는 것은 ‘목적’이라기보다는 생명체와 주변 환경이 공동으로 펼치는 선택과 존속의 ‘상태’이며, 이러한 진화론의 관계적이며 적응주의적인 시각은 현대 생태학적 시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진화론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모를 거치고 그 논의는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진화론에 있어서 분명한 것은 생명체가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기보다는 주위 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변화하고 적응해 왔다는 것이기에, 모든 존재의 관계성과 그에 기반한 실상을 강조하는 불교의 연기적 관점은 진화론적 입장과 자연스럽게 서로 소통하고 동시에 서로 통찰을 제시할 수 있다.
불교의 연기법 그리고 다윈의 진화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연기법(緣起法)으로부터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경전인 아함경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나타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로 정리된 연기법은 상호의존적으로 항상 변화하며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지는 생명의 흐름으로서 표현되는 진화론의 개념과 다르지 않다.
불교의 상호의존적 변화에서도 한 개인의 삶에서 성취하는 개선은 있을지언정 피안을 향한 궁극적인 최선의 목적지향적이라는 개념은 불이(不二)로 부정된다.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을 밝힌 연기법에 의거할 때, 서로 의존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물의 관계성으로 인한 실체 없음을 지칭하여 일명 공(空)이라고 한다.
한계가 있는 감각기관에 의해 형성된 우리의 표면적 인식 체계를 넘어서 세상의 연기적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보다 바람직한 본래의 모습을 성찰하고 그에 따라 살아갈 것을 강조하는 불교는 존재의 관계성에 대한 무지(無知)로 인해 생겨나는 불필요한 고통과 폭력을 지적하면서 존재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재인식을 요구한다.
한편,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연기법이 밝힌 상호의존적 관계성은 원인과 결과로 나타나면서 끊임없는 변화로 이어지지만, 이런 인과관계를 발생시키는 의도적 행위를 업(業, karma)라고 부른다. ‘의도적 행위’는 불교의 인과법이 단순한 숙명론이나 운명론, 더 나아가 진화론의 표면적 기술과도 확고히 분리되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의 기원’에서 제시된 진화론과 연기법의 접점을 살피기 위해서는 진화 과정의 상호의존적 관계성과 더불어 이러한 시각으로부터 도출되는 불교의 업 개념이 다윈의 진화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 지 살필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인과의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강조한다.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체들로 구성된 생명계(biosphere)가 극히 적은 수의 물질원소와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이라는 한정된 공통 자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결국 자기만의 개체고유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생명체를 규정하는 것은 단순한 구성 물질들이 아니라 섭취된 물질의 관계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현하게 되는 생명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관계라는 현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실체 없이 지속적으로 변화를 계속하는 가변적 모습을 지니고 있기에 생명체는 매 순간에서의 현존(現存)만이 있으며 그러한 매 순간의 현존 역시 관계일 뿐이다. 단순한 물질로부터 나만의 개체고유성을 지니게 되는 생명체야말로 상호관계에 의거해서 유지, 변화되는 창발적인 존재다.
‘진화라는 지속된 시간의 누적 속에 생겨나는 반복과 차이’가 ‘종의 기원’에서 다루는 생명체의 종간 다양성의 터전이라면, 모든 개인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관계 덩어리인 삶을 반영하고 있다. 탄생 이후 누적된 관계의 집합으로서 생명체를 말한다면, 비록 내가 나인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만 가능하지만, 지금의 나라는 존재도 긴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어릴 때의 나, 더 진행하면 내 부모도 담고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 모든 것이 시작된 약 137억 년 전의 우주 대폭발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생명체 하나하나는 지금 현재의 몸에 약 137억 년의 진화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에서 강조하는 의지적 행위의 결과이자,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힘인 업(業)과 다르지 않다. 모든 생명체는 존재하는 순간부터 생에 대한 의지를 지닌다.
서양의 기계론적 입장을 담고 있는 현대 생물학에서는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유전 정보에 따라 만들어진 몸’을 생명체라고 하여 기계론적으로 정의하기에, 생명체의 진화를 유전자에 의한 생명현상으로 환원시키려 하는 사회생물학의 수준으로 받아들인다면, 진화론과 불교의 근본적인 접점은 불가능하다. 생명체 진화의 근거가 단지 유전자라는 고정된 실체가 되어 기계적 유물론의 입장은 상론(常論)이 되어, 이는 그 어떤 고정된 실체도 인정하지 않는 불교적 세계관과 공존하기가 어렵다.
이렇듯이 진화론과 연기법은 생명체의 관계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본질적 차이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에게 제시된 모든 과학적, 종교적 개념이 그렇듯이 해석에 따라 매우 미묘한 입장 차이가 생겨나게 되어 같은 내용이라도 다양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 진화론의 중심으로서 ‘종의 기원’에서 다뤄진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은 진보라는 개념과 더불어 적자생존으로 전환되어 독일에서 창궐한 우생학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생명 존중과 더불어 전형적인 비폭력을 강조하는 것이 불교임을 고려할 때, 동일한 관계론에 의거한 진화론과 불교적 연기론의 시각이 서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사회에 나타난 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불교가 종교적 입장에서 열려있는 욕망과 지혜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진화론은 과학 이론의 한 분야로서 제시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의 가치 체계에 귀속되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다윈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진화론적 시각은 불교의 연기적 관점처럼 너와 내가 서로 의존해 살아가고 있으며, 이런 존재의 열린 관계성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본질이자 진화의 힘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우리에게 열어줬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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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 초판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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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상호작용과 생명의 모습
종의 기원에서 말하는 생명의 진화는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고 있으며, 생명체는 그러한 시간의 누적을 담고 있을을 역설한다.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긴 시간의 누적을 다루며, 결코 하루하루의 일상을 다루지는 않는다. 거대한 시간의 역사 속에 드러나는 생명현상이라는 결과에 주목하고 그 과정을 밝힌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거대담론의 형태를 취하게 되며, 앞으로의 긴 시간 속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진화해 갈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현상이라는 복잡계 현상의 예측불가능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다루고 있는 과학에서의 진화는 과거 지향적이다.
이에 반하여 불교의 연기적 관점에서 보는 관계성은 언제나 현장성과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 시간이 과거로부터 미래라는 직선으로 흐를 때 다윈의 진화론과 상통하지만, 불교에서 강조되는 관계성은 과거, 현재, 미래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공존하는 현재 지향적이다. 비록 한 생명체가 숨 쉬는 이 자리에서의 한 순간이 이미 현대천체물리학에서 말하는 137억년의 시간을 담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과학으로서의 진화론과 불교적 관점의 근본적 차이가 드러나게 지점은 진화과정의 시간을 선형적으로 볼 것인가 비선형적으로 볼 것인가의 차이에 있다. 대승불교에서의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직선상의 시간 개념을 떠나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비선형적인 시간의 개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삼세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의 오직 들숨과 날 숨 사이에 자리 잡는다.
업(業)이라고 하는 형태로 긴 시간의 누적 속에 지금의 내가 있지만 관심의 대상은 과거의 긴 시간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이다. 따라서 불교의 연기적 진화를 말한다면 찰나에 삼세가 담겨있고, 137억년을 담고 있는 거대 담론으로서의 생물학적 진화론과의 차이가 분명한 셈이다.
한편 비록 모든 생명체는 자연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 가지만 불교적 통찰은 주인으로서의 인간이 보다 능동적으로 주위와 바람직한 관계를 맺어 가야함을 강조한다. 생물학적 진화론이 생명체와 자연의 상호관계를 평면적으로 기술했다면, 블교의 상호관계성은 삶의 현장에서의 바람직한 관계맺음으로 이어진다.
진화론은 자연의 관계성을 기술하는 것에 그치지만 불교에서의 관계성은 그것이 자기 내면이거나, 가족이나 사회와 같이 주변과의 관계이건, 적극적인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의 근거로써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교의 생명체는 진화론에 근간한 단순한 진화가 아닌, 적극적 관계 형성과 실천의 진화를 매 순간 경험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자연 생태계의 한 모습으로서, 생명체와 환경간의 관계성에 기반한 진화라는 개념을 서구사회에 제시했다. 이는 비로소 생명과 자연의 근본 원칙으로서의 관계지향적 사유가 근대서구사회에 구체적인 형태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대 계기를 이루었다.
물론 진화론은 긴 시간의 역사 속에 이루어진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작용과 변화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공유되지만 진화론이 현재를 알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는 과거지향적 접근이라면, 불교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살피는 미래지향적이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비선형적 시간 속에서 오직 지금 이 자리에 집중하는 불교와 선형적 시간에 기반한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기본적으로 과학과 종교의 본질적 차이에 기인하는 바가 큰 것이기에 이런 점이 결코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저서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것은 아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불교적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비록 사물의 원리를 기술한 것에 불과할지 몰라도 관계에 의한 상호작용과 그에 의존한 생명의 모습을 밝혔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저서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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