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용문과 여의주
등용문(登龍門)은 중국 후한서의 <이응전(李膺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등용문은 물론 가상의 이야기이다. 용문(龍門)은 황하강 상류 높은 폭포가 있는 협곡이다. 이 여울에는 매우 거센 여울의 폭포가 있어서 이 폭포를 뛰어 상류로 오르는 물고기가 거의 없다. 그러나 한 번 오르기만 하면 여의주를 가지고 조화를 부릴 수 있는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다. 황하에는 용이 되고자 하는 잉어가 많이 산다. 이들은 그 물줄기를 뛰어오르려고 평소에 덩치를 키우고 힘을 기른다. 그렇게 많은 잉어가 용문에 헤엄쳐와서 폭포를 뛰어오르지만 성공하는 잉어는 드물다. 왜 그럴까.
여기서 용문은 용이 되는 마지막 관문이고, 여의주는 자신의 재능을 부릴 수 있는 조화의 구슬이다. 그런데 어느 물고기가 용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용이 되는 물고기는 자기의 잠재능력을 밖으로 끌어내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 몸속 깊이 있는 잠재능력을 밖으로 끌어내는데 필요한 학습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입식학습과 자기주도학습으로는 용이 될 수 없다. 이제 달달 외워서 시험을 잘 쳐 용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렇다고 발표력을 기른다고 토론식 학습을 통해서 용이 되는 데도 한계가 있다. 토론을 통해 잠재능력을 잘 끌어내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토론 자체에만 매달려 남을 이기는 데만 집착하는 학생이 있다. 자기주도학습은 목표에 이르기 위해 학습하다가 부족한 부분을 찾아 스스로 채워가는 방법이다. 이 학습으로 자기의 내면에 자리한 잠재능력을 모두 끄집어내지는 못한다.
잠재능력을 끌어내서 발휘하게 하는 가장 좋은 학습은 자기중심학습(自己中心學習)이다. 자기중심학습은 이기적인 학습이 아니다. 자기 내면에 있는 자기가 가장 잘하는 최대의 능력을 찾아 그 능력을 길러 활용하는 학습이다. 물론 이 능력을 찾기 위해서는 좌충우돌할 수 있다. 자기 자신도 자기 잠재능력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려서 보면 아이들 개개인이 특별히 재능을 보이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지만, 그런 능력이 보일 때 부모는 자기중심교육(自己中心敎育)을 해야 한다. 그 아이가 잘한다는 용기를 북돋아 주면서 뒷바라지하면 된다. 많이 간섭하면 안 된다. 부모는 아이가 잘못 갈 때만 슬쩍 한 손 내밀어 주면 된다.
또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재능이 나타날 수 있다. 그때도 늦지 않았다. 세상에는 제도만 벗어나면 뭐든 늦지 않다. 잠재능력 발휘는 제도를 벗어나야 이룰 수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제도에 거슬린다면 과감히 제도를 벗어나야 한다. 이 순간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능력이 있다고 알아챘다면 곧바로 그 능력을 밖으로 끌어내서 학습하고 활용해야 한다.
살아가면서 가만히 살펴보면, 등용문을 통과해서 여의주를 물고 조화를 보이는 용이 된 사람은 모두 자기중심학습을 잘한 사람이다. 용은 절대 같은 용이 없다. 비를 내리게 하는 용, 물을 잘 건너는 용, 용궁을 방어하는 용, 반야선(般若船)처럼 고통의 이승에서 저승의 이상향으로 배를 모는 용 등처럼 용도 그 능력이 제각각이다. 이처럼 용이 가지고 있는 여의주(如意珠)는 모두 다른 능력을 부릴 수 있게 만들어졌다. 생각해 보라. 용이 모두 같은 능력을 지녔다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우리는 어떤 용이 될지를 생각해야 한다. 개성 있는 용, 색다른 용이 되어 보자. 쉬운 예로, 노래하는 가수 이야기를 해보자.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수가 되면 용이 될 거라 여긴다. 그런데 가수가 되었다고 모두 승천하지는 못한다. 승천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개성이 잘 담긴 잠재능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가수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음량, 음색, 음정, 기교 등을 가졌다면 정말 재미없다. 이때 필요한 능력이 자기 내면에 있는 잠재능력이다. 잠재능력은 자기만의 조화를 부리는 여의주이다.
나는 과연 행복한가. 나는 내가 가진 능력을 진정 잘 활용하고 있는가. 다시 물어보자.(이학주, 2024.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