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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봉황북초등학교 24회 원문보기 글쓴이: 玉山 천년바위
봉황면 마을소개 홈주소 http://naju.go.kr/jachi/bonghwang/sub_06_06.html
옥산리(玉山里) 면소재지인 신석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5㎞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옥산리는 동쪽은 유곡리와 접해 있으며, 서쪽은 금천면과, 북쪽은 산포면, 그리고 남쪽은 장성리와 각각 인접해 있다. ◎ 마을의 민속과 인물 잉읍(仍邑)마을 (인읍마을)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한 잉읍마을은 북쪽으로 산포면, 서쪽으로 금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유곡리 유정마을과 인접하고 있다. 또한 마을의 지형유래 중 특색있는 것을 소개하면, 먼저 장밑터가 있다. 이곳은 옛시장터라고 전해지는데 옛날에는 상선이 왕래할 정도로 장이 흥성했다고 한다. 1967~1968년의 해에 저수지를 만들기 위하여 장터밑을 판 적이 있었는데 배 옆부분의 판자가 나오고 솥과 기와 등이 나왔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상선이 장밑터까지 왕래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봉황면사무소 홈페이지
옥산리는 호구총서에 남평현 죽곡면 잉읍동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후 지방 행정구역 일람에서는 마을앞에 구슬형국의 산이 있다하여 옥산리로 개편되고, 1914년 지방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나주군 봉황면에 편입 현재에 이른다.
현재 옥산리는 옥산과 잉읍의 두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민들은 잉읍을 부르기 편한대로 인읍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옥산리는 봉황면 내에서 제일 먼저 천주교가 전래 되었으며, 카톨릭 농민회 발생지로도 유명하다.
옥산(玉山) 마을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년전 김해김씨(金海金氏) 65세손 근복(謹福)이 현 옥산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근거는 없고 그 후 1720년경 김해김씨 68세손 진근(璡?)이 현 금천면 상촌 마을에서 옮겨와 살게 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이 마을로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천성이 곧고, 행실이 바르며, 문장이 뛰어나 멀리서 제자들이 몰려들어 세칭 ‘죽은(竹隱)선생'이라 불렀다 한다.
그 후 1850년경 광산김씨(光山金氏) 37세손 영윤(永潤), 영욱(永旭) 형제가 함평군 손불면 궁산리 묘동 마을에서 이거 정착하여 차츰 마을이 크게 형성되었다.
현재의 옥산(玉山)이란 이름은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 남평현 죽곡면 옥산리로 처음 나타나는데 이같은 명칭은 마을앞에 구슬 무덤이 있다 하여 옥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구슬 무덤을 귀소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와우리와 황용리, 용전리의 경계에 있는 높이 54.3m의 봉황산(옛 지명은 봉학산)과 관련이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산은 수꿩이고, 야골(야학)은 암꿩이 되는데, 수꿩이 야골의 암꿩과 놀다가 이 구슬 무덤에서 쉬고 대실(죽곡)을 들러 대나무 열매를 따먹고 봉황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쉬어 간다고 해서 귀소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마을은 1931년경 본면의 갱생마을로 추천되어 진흥회가 조직되고 변소와 장독대를 개량하는 등 마을 진흥에 힘썼으며, 현재 주민들이 공동체적으로 소유 관리하고 있는 재산으로는 복지회관, 동각 등이 있다.
이 마을에 있는 옥산교회는 원래 장성마을에 있었으나 그곳은 신도들이 적고, 교통도 불편한 점을 들어 10여년 전에 주변 마을의 지리적 요충지인 이 마을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봉황북초등학교 옆에 지으려다 무산되고, 박외진과 신도들의 적극적인 건립계획과 기부금으로 끝내 완공시켰다. 그러나 이 마을 주민들은 거의 교회를 다니지 않고 인접한 유정마을이나 다른 마을의 신도들이 대부분이다.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전통적 유교주의의 관혼상제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옥산마을의 발전에 기여한 현대적 인물로는 1920년경에 마을에서 진흥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주민교화와 사립학교 건립으로 마을 주민들의 문맹퇴치에 앞장 선 김용균과, 해방 이후 봉황북초등학교를 설립, 초대교장으로 녹조훈장, 대통령표창,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김선중이 있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860년대 친목 도모를 위해 조직된 상부계가 있으며. 참여인원은 총 50여명에 이른다. 마을의 총인구는 310명으로 남자 215명, 여자 195명이 살고 있고, 총 면적은 0.44㎢로, 전 0.07㎢, 답 0.32㎢, 임야 0.05㎢가 해당되며, 총 87가구 중 농가는 81호, 비농가는 6호가 있다. 마을의 주요산업은 쌀농사이고, 특작물로 수박, 사과 무를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김해김씨 25호, 광산김씨는 18호, 밀양박씨 10호, 기타 34호가 있다.
복지회관의 전신은 1929년에 마을 주민들의 문맹퇴치를 위하여 김백중, 김영철, 김병희, 김동산 등이 사랑방에서 야학을 실시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마을 주민들이 1934년에 현 옥산리 351-1번지에 초가 4칸의 야학당을 건립하여 주었다. 야학당이 다른 마을에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어 비좁게 되자 진흥회 회장인 김용균이 자금을 모아 1939년 야학당을 철거하고 현 옥산리 351-3번지에 와가 4칸의 18평 교실로 옥산학원을 설립하였다. 해방이 되자, 사립학원은 해체되고 와가 4칸을 통털어 동회, 휴식공간 등으로 사용하여 오다가, 1984년에 마을공동 소유인 임야를 매각하여 30평의 콘크리트 건물로 복지회관을 완공하여 현재에 이른다.
마을 앞의 동각은 이영제가 마을 주민들이 휴식처가 없어서 아쉬워하는 것을 알고 동각 건립을 추진하여 1988년 10평의 동각을 지어 청간정이라 이름하였다.
이 마을은 약 300여년 전에 김해김씨(金海金氏) 금오랑공파(金吾郞公派) 18세손인 현삼(鉉三)이 현 낙동 마을에서 이거해 오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그 후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20세손인 기후(基厚)가 나주 노안면에서 이거해 와 차츰 마을을 크게 형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마을 이름은 지형이 곡식을 까부는 키의 넉줄째에 해당되는 곳이라는 연유에서 넉줄이라 불리워 왔다 한다. 그러던 중 마을에 살던 박성재(朴成載)가 옛날에 마을위에 시장터가 있어 장이 성할때는 읍이라고 함을 뜻하여 마을이름을 잉읍(仍邑)이라 개칭하여 현재까지 통용되고 있다.
또한 구전에 의하면 마을이 100호가 넘으면 읍이 잉태될 것이라 해서 잉읍이라 지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초랭이패가 마을사람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잔치를 벌려놓고 마을 사람들이 잔치에 흥겨워 술렁이는 틈을 타서 마을 뒤 명당자리에 묘를 2개 써 놓고 달아나 버렸다. 그로 인하여 마을이 99호를 채웠으나 100호를 채우지 못해 쇠퇴했다고 한다. 몇 년전 그 묘를 파보니 명정에 충의파평윤공지구(忠義坡平尹公之柩)라 쓰여 있었다 한다.
잉읍이란 지명이 문헌상에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은 호구총수로써 당시에는 남평현 죽곡면에 속해 있었다. 그 후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 개편 이전이나, 1914년도의 개편 이후에는 잉읍이란 마을이 기록에서 사라졌는데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남평현 죽곡면 옥산마을이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 현재의 행정구역인 옥산리에 통합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우와등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은 소가 누워있는 형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비석을 세울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소가 누워있는 곳에 비석을 세우면 소가 무거워 일어날 수 없으므로 벼슬을 하기 위해서는 절대 비석을 세워서는 안된다고 전해진다.
잉읍마을의 공동체적 삶을 다지는 민속을 보면 정월 대보름에 행하는 마당밟기가 있다. 마을 청년들이 농악을 치며 집집마다 돌아 다니면서, 모주를 얻어 마시고, 불베기(집집마다 흩어놓은 쌀을 거두어 들이는 것)를 해서 모은 돈은 마을을 위한 기금으로 쓰여졌다.
이처럼 성했던 농악은 잉읍마을의 으뜸가는 자랑거리로서 상쇠로 유명했던 정흥기 노인은 과거에 많이 쳤던 굿으로 ‘문제비굿', ‘당산굿', ‘시암굿', ‘풍장굿' 등을 들고 있다.
문제비굿은 다른 마을 농악대가 잉읍마을로 들어올 때 마을의 입구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내보이는 것으로, 잘 치면 마을로 들어오고, 못치면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 당산굿은 당산제를 지낼 때 치는 굿으로, 다른 굿보다도 치기가 어렵다. 새암굿은 마을 우물가에서 치는 굿을 말하는데, 굿을 치면서 장단으로만 “퐁퐁 솟아라”라고 친다. 마지막으로 풍장굿은 만드리 할때 치는 굿을 말하며, 이 마을의 대농가인 손경태, 전길섭 등의 집에서 주로 행해졌다고 한다.
잉읍마을은 조선조 말에 이미 천주교가 들어왔다. 고인이 된 박민순의 집 앞에 성당이 있었는데, 그 성당이 1950년대에 신갈마을과의 중간 지점으로 옮겨졌다. 그런 여유로 해서 1985년 면내에서는 맨 처음 조직된 카톨릭농민회가 있다. 설립배경과 목적을 살펴보면, 카톨릭 광주대교구에서 발행한 교구보를 보고, 농민회가 조직되어 있는 것을 알고, 지금까지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자신들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해 본 적이 없었던 점과 흉년이 들면 마냥 운이 좋지 않아 생겼다는 소극적인 자세를 돌이켜보는 기회를 갖게 되던 중 현 농민의 실정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조직했다고 한다.
이 조직의 가장 큰 목적은 농민이 부당한 행위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크게는 농정이 바로 설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마을에는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1976년에 조직된 위친계와 농민의 권익향상을 위해 1985년 조직된 가톨릭농민회가 있다.
마을의 총인구는 173명이며, 남자 88명, 여자 85명이며, 총 면적은 0.95㎢로 전0.25㎢, 답 0.40㎢, 임야 0.19㎢, 기타 0.11㎢가 해당되고, 39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고추, 수박등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김해김씨 7호, 밀양박씨 3호, 송씨 5호, 기타 24호가 거주하고 있다.
▣ 인읍마을(일명 넉줄)
1. 위치 및 환경
봉황면 소재지 신석마을에서 북쪽마을에서 약6km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잉읍마을은 북쪽으로 산포면과 인접해 있으며 서쪽으로 금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유곡리 유정마을과 인접하고 있다.
ㅇ잉읍마을은 조선조 말에 이미 천주교가 들어왔다. 고인이 된 박민순의 집 앞에 성당이 있었는데, 그 성당이 1950년대에 신갈마을과의 중간 지점으로 옮겨졌다. 그런 여유로 해서 1985년 면내에서는 맨 처음 조직된 카톨릭농민회가 있다. 설립배경과 목적을 살펴보면, 카톨릭 광주대교구에서 발행한 교구보를 보고, 농민회가 조직되어 있는 것을 알고, 지금까지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자신들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해 본 적이 없었던 점과 흉년이 들면 마냥 운이 좋지 않아 생겼다는 소극적인 자세를 돌이켜보는 기회를 갖게 되던 중 현 농민의 실정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조직했다고 한다. 이 조직의 가장 큰 목적은 농민이 부당한 행위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크게는 농정이 바로 설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ㅇ마을의 총인구는 173명이며, 남자 88명, 여자 85명이며, 총 면적은 0.95㎢로 전0.25㎢, 답0.40㎢, 임야0.19㎢, 기타0.11㎢가 해당되고, 39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ㅇ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고추, 수박 등을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김해김씨 7호, 밀양박씨 3호, 송씨 5호, 기타 24호가 거주하고 있다.
2. 마을연혁
현재 옥산리는 옥산과 잉읍의 두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잉읍이란 이름은 1789년에 간행된「호구총수」에 남평현 죽곡면 잉읍동으로 처음 나타난다. 그 후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 개편 이전이나, 1914년도의 개편 이후에는 잉읍이란 마을이 기록에서 사라졌는데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남평현 죽곡면 옥산마을이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 현재의 행정구역인 옥산리에 통합된 것으로 추측된다.
‘옥산’이란 명칭은 마을 앞에 구슬무덤이 있다하여 옥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구슬무덤을 귀소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와우리와 황룡리, 용전리의 경계에 있는 높이 54.3m의 봉황산(옛지명은 봉학산)과 관련이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산은 수꿩이고 야골(야학)은 암꿩이 되는데 수꿩이 야골의 암꿩과 놀다가 이 구슬 무덤에서 쉬고 대실(죽곡)을 들러 대밭에서 열매를 따먹고 봉황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쉬어간다고 해서 귀소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ㅇ마을 이름은 지형이 곡식을 까부는 키의 넉줄째에 해당되는 곳이라는 연유에서‘넉줄’이라 불리워 왔다 한다. 그러던 중 마을에 살던 박성재(朴成載)가 옛날에 마을위에 시장터가 있어 장이 성할 때는 읍이라고 함을 뜻하여 마을이름을 잉읍(仍邑)이라 개칭하여 현재까지 통용되고 있다. 주민들은 잉읍을 부르기 편한대로 인읍이라고 부르고 있다.
ㅇ또한 구전에 의하면 마을이 100호가 넘으면 읍이 잉태될 것이라 해서 잉읍이라 지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초랭이패가 마을사람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잔치를 벌려놓고 마을 사람들이 잔치에 흥겨워 술렁이는 틈을 타서 마을 뒤 명당자리에 묘를 2개 써 놓고 달아나 버렸다. 그로 인하여 마을이 99호를 채웠으나 100호를 채우지 못해 쇠퇴했다고 한다. 몇 년전 그 묘를 파보니 명정에 충의파평윤공지구(忠義坡平尹公之柩)라 쓰여 있었다 한다.
ㅇ또한 마을의 지형유래 중 특색 있는 것을 소개하면, 먼저 장밑터가 있다. 이곳은 옛시장터라고 전해지는데 옛날에는 상선이 왕래할 정도로 장이 흥성했다고 한다. 1967~1968년의 해에 저수지를 만들기 위하여 장터밑을 판 적이 있었는데 배 옆부분의 판자가 나오고 솥과 기와 등이 나왔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상선이 장밑터까지 왕래했음을 알 수 있다.
ㅇ그리고 우와등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은 소가 누워있는 형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비석을 세울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소가 누워있는 곳에 비석을 세우면 소가 무거워 일어날 수 없으므로 벼슬을 하기 위해서는 절대 비석을 세워서는 안된다고 전해진다.
ㅇ이 마을은 약 300여년전에 김해김씨(金海金氏) 금오랑공파(金吾郞公派) 18세손인 현삼(鉉三)이 현 유곡리 낙동 마을에서 이거해 오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그 후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20세손인 기후(基厚)가 나주 노안면에서 이거해와 차츰 마을을 크게 형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다. 문화유적과 민속
ㅇ잉읍마을의 공동체적 삶을 다지는 민속을 보면 정월 대보름에 행하는 마당밟기가 있다. 마을 청년들이 농악을 치며 집집마다 돌아 다니면서, 모주를 얻어 마시고, 불베기(집집마다 흩어놓은 쌀을 거두어 들이는 것)를 해서 모은 돈은 마을을 위한 기금으로 쓰여졌다.
ㅇ이처럼 성했던 농악은 잉읍마을의 으뜸가는 자랑거리로서 상쇠로 유명했던 정흥기 노인은 과거에 많이 쳤던 굿으로 ‘문제비굿', ‘당산굿', ‘시암굿', ‘풍장굿' 등을 들고 있다.
ㅇ문제비굿은 다른 마을 농악대가 잉읍마을로 들어올 때 마을의 입구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내보이는 것으로, 잘 치면 마을로 들어오고, 못치면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 당산굿은 당산제를 지낼 때 치는 굿으로, 다른 굿보다도 치기가 어렵다. 새암굿은 마을 우물가에서 치는 굿을 말하는데, 굿을 치면서 장단으로만 “퐁퐁 솟아라”라고 친다. 마지막으로 풍장굿은 만드리 할때 치는 굿을 말하며, 이 마을의 대농가인 손경태, 전길섭 등의 집에서 주로 행해졌다고 한다.
블로그 > 보산거사와 함께하는 보학여행
http://blog.naver.com/pjh6497/40021701589
첫댓글 다양한 정보네요
네. 반갑습니다. 돌로 잔디를 깔면 겨울엔 조금 위험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웃이네요,저는 세지입니다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