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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이전의 아브라함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율법 이후에도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율법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고난 후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므로 영광을 받으실 것을 바라보고
믿으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다윗이 법궤를 곁에 두고도 그는 항상 여호와를
그 앞에 모셨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부르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모델임을 주님께서 말씀하셨고(마22:41-46) 베드로 또한 그와 똑 같은
내용을 설파했습니다.(행2:33-35)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윗과 베드로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주의 이름을 부르므로 구원을 받습니다.
마1장에서 예수님이 나시기 전 이미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마1:21)하십니다. 그 다음에 따라온 말씀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마1:23)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차적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 안에
오셔서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예수와 임마누엘' 둘인
것을 유념하세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돌아가시고
3일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아들로 인정받으시고 그리스도 영으로 우리 안에 오십니다.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실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이 성취됩니다.
임마누엘,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을 가졌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빌려 교회를 제2의 성육신 이라고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하신 그 말씀이 주님의 육신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1의 성육신이죠. 누구든지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일로 인해 세계 역사는 BC와 AD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성도들의 심령 속에 오셨습니다. 바로 제2의 성육신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말씀이신 예수가 육신이 된 역사적인 사실은 철석 같이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성육신(incarnation) 했다는 사실을 잘 안 믿어요.
그 이유는 계시가 없으면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우리 안에 임하시는 그리스도는 계시로만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고린도후서 4장에서 세상의 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계시네,
주님이 보내신 성령이 계시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네'하고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임마누엘이고 그리스도를 내가 모시고 있으면
바로 내가 임마누엘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셨다 하나님을 가졌다입니다.
마2장에서 아기 예수가 동방박사들 곧 점성가들에게 경배를 받습니다.
천사들이 이들을 가르칩니다. 헤롯이 동방 박사들을 부르니까 동방박사들이
딴 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헤롯이 열을 받아 2살 이하의 모든 아이를
다 죽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갈릴리에 가서 사십니다. 그 분은 분명히 동방박사들에게 경배를 받을 수 있는
왕이 되심에도 갈릴리 나사렛 촌에서 사는 아주 초라한 왕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3장에선 요단강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구원이 일어날까요? 그럼에도 많은 목사들이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는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이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남의 고통을 대신 질 수는 있어도 사람의 생명을 대신 살릴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는 이런 예고의 말씀은 할 수 있어요.
죄를 지적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세례요한은 생명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에 비로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마3:17)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는데 마4장에 들어오자마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십니다.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실지라도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래서 마귀를 물리칩니다.
마5장에 들어와서는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말씀이신 그분이 드디어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셔서 그것이 우리에게 영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레에마)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기 시작합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만이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다.
광야에 외치는 소리나 기록된 말씀의 인용은 죄를 알게 하고,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고, 말씀을 바로 세우고, 주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외증)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요5:25)
이스라엘에 있어서 옛적과 새로운 시대의 구분은 광야에선 표적과 기사만 있을 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는 큰 표적과
기사는 안 일어나지만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이 광야에서는
오직 말씀을 순종하는 훈련을 하는 이유입니다. 훈련 중에 만약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주지 않았으면 하나님께서 훈련을 하셨다고 말씀하지 않겠지요.
예를 들면 군인에게 먹는 것과 입는 것, 신발 등을 안 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들이 벌어먹으며 훈련한다면 누가 국가가 나를 훈련시켰다고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훈련을 하셨다는 증거가 뭐냐면 한번이라도
옷이 떨어진 적이 있느냐, 먹을 것이 떨어진 적이 있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내 말을 안 들었다는 겁니다. ‘너희들을 낮추어 너희들이 내 말을 듣는가
안 듣는가 시험해 보기 위하여 광야로 집어넣었다’(신8:3)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라고 했는데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는 이 아들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그만 옛적의 조상들의 늙은 신앙이 되고 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직접 듣지는
못했습니다. 멀리서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였습니다(히11:1)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이 멀리서 보고 믿는 조상들과 같은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옛날이라고 하여도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상황적 개념입니다.
지금도 때가 바뀌었다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오늘날에 소속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오늘날의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경에는 율법의 때가 있고 은혜의 때가 있고 진리의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은혜 안에서 진리의 때이기에 모든 사람이 다 진리에 속해 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율법 아래 갇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지금도 구약을 펴 놓고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운운 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를 두고 신 유대주의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아직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 증거 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선지자들로 통해서 말씀을 듣습니다. 귀가 둔해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엘리야 시절에 표적과 기사는 일어나도 귀가 둔해 하나님 말씀은
듣지 못합니다. 그 시대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곳에는 표적을 구한다고 말입니다(마16:4)
참된 신앙은 아들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려야 합니다. 그래서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2)하신 그 분의 말씀에 따라
더욱 풍성해져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말씀이 없으면 이적과 기사만 찾습니다.
말씀 없이 신비한 체험만 바라면 속사람이 점점 약해집니다. 말씀으로 생각과
마음이 견고히 쌓아지면 온전해 지고 속사람이 담대해지며 강건해집니다.
제대로 된 신앙은 의지가 강해져야 됩니다.
의지가 강해야 행동하는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주제는 1장1절의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신다 입니다.
이 하나님을 내가 만나는 것이 히브리서 주제입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누굴 만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납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주제입니다. 이 히브리서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중요시하게 됩니다. 요한1서 1장에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바 된지라. 이 말씀과 우리가
사귐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귐이 있으면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주안에서 주님과 사귐이 있으면 내게 기쁨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언제나 빛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건너가기만하면 주의 보혈이 자동으로 깨끗케 합니다(요일1:7)
그리고 사귐이 있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사귐(코이노니아)이란 바로 관계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관계 곧 사귐입니다. 능력도 이 관계에서 나옵니다.
모든 은사와 복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사귐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주님이 나의 보화로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유라는 것은 반드시
물질만이 아닙니다. 나하고 이해타산이 되는 모든 것이 다 나의 소유입니다.
히브리서가 왜 중요하냐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영은 실제적으로 성령님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이걸 믿는 것은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관념이나 추상이 아닙니다. 성경의 마지막 단계는
성령이 마무리를 하십니다. 성령 다음에 구원의 순서가 없으므로 말세인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인자는 거역해도 성령은 거역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니까요. 그래서 아들이 있는 자는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요일5:12)
예수님도 육신으로 오셨을 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인자라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4절 이하에 보면 ‘그가 혈통으로는 다윗의 혈통이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성결의 영(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이제 그리스도의 영이 되셨으므로 그 분을 받아들이면 아들을 받아
들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 모든 날 마지막이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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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입니다.
기록된 말씀이 "입을 열어 가라사대" 의 들리는 말씀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 들리는 말씀이 심비에 새기는 "생명의 말씀" 으로 제게 다가와 주시니 감사합니다.
히브리서 개관이 모든 서신서의 총론으로 아주 쉽게 다가옵니다.
기록된 말씀이 영과 생명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들린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