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 회주 밀운 부림 스님
“산 적시고 생명 보듬는 물처럼 살며 남 미워하지 마시라!”
1·4후퇴 때 남녘땅으로 피난 대오 스님 만나 초암사 출가
10년 군 생활도 철저히 ‘지계’ 해인사·통도사·정혜사서 정진
대 선지식 운허 스님에게 건당 고요한 정진 이어가 법호 ‘밀운’
성철 스님 “전무후무한 원주” 영암 스님 “허공에도 논 칠 사람”
주지 소임 강단·공평무사 정평 봉은사 땅 2만 평 찾은 장본인
불치사서 ‘무원근’ 체득 후 법열 참선·사유서 건져올린 게송 탁월
“부처·스님처럼 행동해야 불조” “사성제 못지않게 진공묘유 중요”
봉선사 회주 밀운 스님은 “한평생 살아가며 그 누구든 미워하지 말라”며
“자리이타 실천해 마음 편안한 때가 열반”이라고 전했다.
개안수면(開眼睡眠). 봉선사 회주 밀운(密耘) 스님의 주석처에 걸려있는 편액이다.
‘눈을 뜨고 잠에 드노라!’
조계종 현대사의 격동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24년간 무려 25명의 총무원장이 교체됐다는 사실이다.
의현 원장의 취임(1986) 후 다소 안정세를 보이는 듯했으나
강북 조계사에 이어 강남 봉은사에 또 하나의 총무원 현판이 걸리며
강남·북 양 총무원 시대가 열렸다.(1988) 당시 봉은사 주지는 밀운 스님이었다.
이듬해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 봉선사에 방 한 칸 얻어 칩거에 들어갔다.(1989)
그때 당호를 ‘비나 피할 곳’ 피우정(避雨亭)이라 하고 시 한 수 써 내려갔다.
‘부목은 땔 나무 버리고(負木捨柴), 이 정자에서 비를 피하네(寄避雨亭),
태풍·뇌성벽력도 상관치 않고(不關風雷), 눈 뜨고 잠에 들리라!(開眼睡眠)’
중도(中道)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가 행간을 따라 흐르고 있다.
황해도 연백에서 살다 18살의 ‘1·4 후퇴’ 때 누나 손 잡고 내려와 노량진에 정착했다.
고향 토미산(兎尾山)의 망해사(望海寺)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수학한 청년이었기에
남쪽의 도량에 뿌리를 내리고 싶었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다.
울적하면 서울 흑석동 화장사(현 지장사)에 가곤 했는데 마침 절에 머물고 있던
대오(大悟) 스님이 자초지종을 듣고는 “내가 받아 주겠다”고 했다.
소백산 초암사에서 삭발염의하고 비로사에서 사미계를 수지했다.(1954)
법명은 부림(部林)이다. 선방 수좌였던 은사 대오 스님의 언명에
불국사, 해인사, 통도사 극락암, 덕숭산 정혜사 선원에서 정진했다.
훗날 봉선사 운허(耘虛) 스님에게 건당했다.(1972)
새 제자를 유심히 지켜본 운허 스님은 고요하면서도 깊은(密) 정진(耘)을 이어가는
부림 스님에게 법호 밀운(密耘)을 내렸다. 봉선사 조실 월운(月雲) 스님과는 사제지간이다.
군대 모의투표에서 이승만 안 찍어 구금(?)되고도 끝내 의지를 굽히지 않았더랬다.
불국사 선원에서 정진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새벽 예불에 참석하니 모두 대웅전으로 모이라”는 전언에
“대통령 온다고 법당 가냐?”며 꿈쩍 않던 수좌다.
원주, 주지 등의 어떤 소임을 맡건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정평 났다.
1970년대 초반, 해인사 선원에서 정진할 당시
대중들이 애써 외면하는 원주 소임을 자청한 밀운 스님은
한 철 동안 불평 한마디 나오지 않을 정도로 멋지게 해냈다.
당시 해인총림 방장 성철 스님은 “전무후무한 원주”라 했다.
세간으로 넘어간 봉은사 땅 6만6천115제곱미터(2만 평)
매입을 성공시킨 장본인도 밀운 스님이다.
당시 주지였던 영암 스님은 “허공에도 논을 칠 사람”이라며 놀라워했다.
불교계 숙원불사였던 경승제도의 초석을 놓은 것도 밀운 스님이다.
15년 동안 정든 봉은사 도량을 떠나며 자신을 ‘부목’이라 했는데
땔나무를 버렸다고 했다. 내려놓았음이다.
태풍·뇌성을 관여하지 않겠다는 건 세상의 시비분별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뜻일 터다.
눈을 뜨고 있다는 건 현실·현상을 직시하고 있다는 것이요,
잠에 들겠다는 건 열반에 이르겠다는 의미이다.
7년 전 피우정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개안수면’ 편액을 걸었다.
회주채 사방의 벽에 글씨 액자가 제법 걸려있다.
오랜 수행과 사유에서 건져 올렸기에 선기 가득하다.
심지어 만공·월산 스님에게 올린 제문에도 남다른 선심(禪心)이 배어있다.
밀운 스님의 선기(禪機) 원천이 궁금했다.
‘불행불(佛行佛)’과 ‘무근원(無遠近)’ 액자가 걸려있다.
밀운 스님이 착석한 자리 왼쪽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수덕사 방장 원담(圓潭) 스님의 서체다.
‘불행불(佛行佛) 승행승(僧行僧) 인행인(人行人) 혜정계(慧定戒)’
포천 5군단에서 10년 동안 복무했던 밀운 스님은
입대 당시 자신이 ‘스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군 생활 핑계로 계를 파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지.
‘술·담배 하지 말자’고 결심하고는 끝까지 지켜냈어.
하사로 진급해서도 내무반 생활 않고 포천 동화사에 머물며 출퇴근했지.
한겨울에도 이불 뒤집어쓰고 참선했어.”
수좌의 치열함이 뜨겁게 전해진다.
어느 날 은사 대오 스님과 동암 스님이 면회 차 동화사를 찾았다.
법당에 들던 동암 스님이 말했다.
“부처님이 시원치 않아!”
정각 이루신 부처님이 시원치 않다니! 왜?
정진 안 되면 화두도 바꾸곤 했는데 ‘부처님이 왜 시원치 않지’라는 의문만은
한 시도 떠나지 않고 오롯이 빛났다.
“은사 스님 떠난 후 보름 즈음 참선하는데
문득 ‘불행불(佛行佛)’이 떠올라. 외출증 끊고 동암 스님께 달려갔지.
‘부처님답게 행하니 부처님입니다. 이 세상에 시원찮은 부처님은 없습니다.’
동암 스님께서 웃으시며 한 말씀 하셔.
‘난 그때 부처님 조성이 시원치 않다고 한 거라네. 정진 잘했다.
불행불은 큰 진전이야!’ 그 일이 큰 힘이 됐어. 지금도 그 힘으로 살아!”
불행불(佛行佛)은 승행승(僧行僧), 인행인(人行人)으로 이어졌다.
불과 혜, 승과 정, 인과 계로 연결하여 삼학의 지중함을 설파했다.
밀운 스님이 앉은 정면의 벽에 원담 스님 서체 액자가 또 하나 걸려있다.
약 40년 전 원담(圓潭), 고산(杲山), 성수(性壽), 정무(正無), 선래((善來) 스님과 함께
스리랑카 성지순례길에 오른 적이 있다.
이른 새벽 홀로 불치사(佛齒寺)로 걸음 해서는 부처님 치아사리가 봉안 돼 있는
2층 향실(香室) 앞에서 108배를 올렸다.
“참배를 마치고 좌선에 들었는데 불현듯 무원근(無遠近)이 떠올랐어.
아, 웃음 밖에 안 나와. 그 뜨거운 법열 딱 한 번 맛보았네.”
멀고, 가까움이 없다는 건 원(遠)과 근(近)이 둘이 아니라는 얘기다.
무원근(無遠近)은 생사일여(生死一如)와 궤를 같이한다.
거처로 돌아와 대중 스님들께 전하자 원담 스님이 무릎을 치며 한마디 했다.
“밀운 스님 혼자 복 받았네!”
원담 스님은 그 자리에서 게송을 지었다.
‘만물과 나의 근원(본래)은 다르지 않고(物我元無異)/
온갖 사물 모든 현상 거울(마음) 가운데 있다(森羅鏡相中)/
우주 전체가 적멸궁이니(十方寂滅宮)/
참다운 부처는 멀고 가까움에 있지 않다(眞佛無遠近).’
원담 스님은 밀운 스님과 함께 이 게송을 지었음을 적시했다.
‘적멸’과 직결된 글이 반짝였다.
“은사이신 운허 스님이 봉은사에 역경장을 설치(1971)하고
‘능엄경’ 강의하실 때 내 나름 의문 하나가 있었지.
열반(涅槃)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하는데 ‘락(樂)자’가 걸려.
모든 번뇌를 떨쳐 낸 ‘진정한 즐거움’이라고는 하지만
그 즐거움마저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닌가 했지.
지난해 성우 스님이 선사들이 남긴 생의 마지막 게송을 해설한 ‘열반사상’을 출간했는데,
아난존자 게송에 ‘락’자가 빠져 있어. ‘…열반은 나이며 청정함이니(涅槃常我淨)…’”
40년 동안 품어 온 견해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생멸멸즉적멸(生滅滅卽寂滅)이요 상아정시열반(常我淨是涅槃)이라!’
‘BTN 활안 스님의 교단사’(4회)에서 의미 깊은 법을 들었다고 했다.
“녹야원에 당도하자 제자들이 ‘무엇을 깨달으셨는가?’라고 묻자
부처님은 허공을 가리켰다고 해.
교진여(阿若驕陳如·안나콘단냐)는 그 즉시 공(空)을 깨달았어. 진공(眞空)을 체득한 거야.
그다음 (모든 것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不生不滅),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不垢不淨),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不增不減)고 말씀하셨어.
이것은 묘유(妙有)의 말씀이거든.”
활안 스님을 찾아가 “그렇다면 부처님 최초 설법은 진공묘유”라고 하니
활안 스님은 “90 노승이 진취적인 생각을 하며 제 설법에 동의한다니 놀랍다”며
이와 관련된 글을 써 책으로 출판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한다.
밀운 스님은 법문할 기회나 불자들을 만날 때면 중도와 공, 연기가 응축된 진공묘유의 진수를 전하고 있다.
20년 전에 지었다는 ‘열반송’도 보인다.
‘1700공안이 거짓말(無量公案 佛祖妄語)이요
중생의 헛된 생각이 불조의 본성에 있다(衆生妄想 佛祖存性).’
“근자에 와서 바뀌었다”는 밀운 스님의 미소와 함께 시선이 머문 액자에는
‘우주일광(宇宙一光)’이 새겨져 있다.
“우주가 진공이자 빛이고 빛이 묘유이자 우주인 거야!
그러니 지금의 ‘나’가 부처이고 우주인 거지. 마음을 잘 쓰면 돼!”
우주의 빛이 불행불(佛行佛)), 무원근(無遠近), 개안수면(開眼睡眠),
열반(涅槃), 상아정(常我淨)을 관통했다.
봉선사에서 30년 넘게 주석하며 시자 한 명 두지 않았다.
비타민류의 영양제도 드시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강건하다. 그 비결을 여쭈었다.
“물처럼 살아! 물은 산을 적시고도 강물과 바닷물이 되어
그곳을 터전으로 삼은 생명을 돌보고 있어.
그러나 어느 물고기, 어느 농부 안 가려. ‘내 덕’이라는 내색도 안 해.
한평생 살아가며 손해 좀 보면 어때?
그 누구든 미워하지 마. 그럼 편안해. 열반이 따로 있겠나!
은사이신 운허 스님은 평생 남 헐뜯는 일 없으셨어! 눈이 오시네.”
그러고 보니 의현 스님 사면에 결정적 역할을 한 건 대척점에 섰던 밀운 스님이다.
검은색 바탕 하얀 글씨의 주련에 2월의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산은 모든 짐승 가족처럼 안아 들이고(山抱禽獸族),
물은 물고기들을 어루만져 준다.(水摩魚蟹羣)’
밀운 스님 게송임이 분명하다. 조실채 자체가 선림(禪林)이다.
2월의 하얀 눈송이가 편액 ‘개안수면(開眼睡眠)’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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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운 스님은
1954년 영주 초암사서 출가. 1971년 비구계 수지.
1972년 봉선사에서 운허 스님 법사로 건당. 2004년 조계종 대종사 법계 품수.
1967년 봉선사 교과 수료. 스리랑카 승가사범대학 박사.
스리랑카 국립 푸리베나대학 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1969년 경기도 포천 동화사 주지, 1980년 제5, 6, 7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1981년 서울 봉은사 주지. 총무원 재무·총무부장, 부원장, 법규위원장, 광동학원 이사,
1997년 제25교구본사 봉선사 주지. 2006년 국가원로회 위원,
2012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조계종 쇄신·혁신위원장 역임.
2022년 2월 2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