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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 수필】
충(忠)과 효(孝), 양심과 덕행의 뿌리를 찾아서
― 보문산 공원 ‘충효선양비(忠孝宣揚碑)’를 바라보며
윤승원 수필가,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보문산(寶文山)에 자주 오른다. 보문산 사정공원(沙亭公園)에는 다양한 형태로 제작된 저명 시인들의 시비가 눈에 크게 들어온다.
이 고장 저명 문사들의 문학비를 관심 있게 살피는 시민들은 많다. 하지만 우거진 나무 그늘에 ‘충효선양비(忠孝宣揚碑)’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시민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조용한 위치에 살짝 숨어 있듯 가려져 있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문장이 비문에 담겼다.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거무스름한 이끼가 내려앉은 바윗돌 형태의 비문.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 세워진 <충효선양비>(사진=필자 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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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가 언제 여기 세워졌을까? 어째서 나의 눈에 이제야 들어오는 것일까?
이 비는 단기 4324년, 그러니까 서기 1991년, 대전·충남 유림회(儒林會)에서 세웠다.
공원에 있는 수많은 비문 중 하나이므로 누구나 대수롭지 않게 스쳐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비에 새겨진 예사롭지 않은 문장을 자세히 살펴본 시민이라면 쉽사리 눈을 떼기 어렵다.
▲ 보문산 <충효선양비>내용 (사진=필자 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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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孝宣揚碑 사람이 萬物의 靈長이 되는 것은 오직 倫理 道德이 있음이요 倫理 道德의 뿌리는 忠孝이다. 忠은 곧 良心이니 바로 나 自身 거짓 없는 사람이 되어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이 떳떳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이 한결같으며 어린이를 아끼고 어른을 恭敬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社會를 도우며 나라를 爲하여 義務를 다하는 것이다. 孝는 모든 德의 根本이요 온갖 行實의 根源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溫順하게 하여 父母의 뜻을 잘 받들고 몸을 잘 奉養하여 兄弟友愛하고 夫婦和合하여 家業을 일으켜서 父母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 돌아가시거든 山所를 잘 모시고 精誠껏 祭祀를 지내는 것이다. 사람이 忠과 孝를 다하면 自身의 마음이 便安하고 떳떳하며 집안이 和睦하고 社會가 安定되며 나라가 繁榮하고 天下가 太平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밀려드는 物質의 慾心에 빠져 서로 속임과 掠奪 심지어 同姓同本 結婚의 野蠻風이 일어나 아름다운 倫理道德이 破壞되어가고 있다. 우리 儒林會는 이것을 크게 慨歎하여 忠孝宣揚碑를 이곳에 세우는 것이니 兄弟여 姉妹여 다 함께 勇氣를 내어 倫理道德을 復興시켜서 옛 君子의 나라를 되살리어 더욱 빛나게 할지어다. 檀紀 四三二四年 九月 十日 悳泉 柳濟漢 撰 蓮坡 崔正秀 書 大田直轄市 忠淸南道 儒林會 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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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속에 담긴 ‘충과 효’라는 두 글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어떻게 재해석하고 현실에 맞게 새겨 읽어야 하는가. 충과 효가 곧 ‘양심과 덕행’이요, ‘인륜의 뿌리’임을 가르치고 있다.
한 가정의 할아버지로서 살아가면서 많은 걱정을 한다. 세상사에 무관심해도 먹고 사는 일에는 크게 지장이 없건만 그럴 순 없다.
나이가 들면 무엇을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해야 마음 편하거늘, 그게 잘 안된다. 언행도 그렇다.
종심(從心)이 훌쩍 넘었는데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여전히 불편한 구석이 많다.
공자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한 것은 70이 되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나 사리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올곧은 행실이 따르지 못하니 자아 성찰로 이어지는 삶이다. 종심이라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어려운 세속의 범부(凡夫)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학식과 덕망 높은 옛 선비들의 이런 뜻 있는 비문을 보면 그래서 한 가정의 할아버지로서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
비록 이 할아비는 부족한 삶을 살아왔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좀 더 반듯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손자에게 남겨줄 유산은 물질만이 아니길 바란다. 그래서 오늘날 이런 ‘충효선양비’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삶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가. 비문에 적힌 문장을 현실에 비추어 재해석할 필요를 느낀다.
양심을 지키는 것이 ‘충’이고, 자신을 떳떳하게 만드는 힘이 ‘충’이라고 비문은 가르친다.
충(忠)이 곧 양심(良心)이라니, 유림(儒林)의 가르침이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충은 단순히 나라에 대한 충성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먼저 자기 자신의 내면에 부끄럽지 않은 삶,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자세다.
‘바로 나 자신 거짓 없는 사람이 되어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이 떳떳한 일을 하는 것’ 그게 바로 충이라니, 이것은 비문이 아니라 ‘거울’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을 숲속에서 발견하다니, 어쩌면 유학(儒學)을 중시하셨던 선친의 계시(啓示)인지도 모른다.
▲ <충효선양비>는 단순한 비석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는 <성찰의 거울>이다. (그림=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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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 일곱 살 아이가 마트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철모르는 어린애가 마트에서 사탕 하나를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었다.
계산대에서 엄마가 조용히 눈짓으로 말하자, 양심이 찔린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엄마가 그때 이렇게 말했다.
“반성하는 것은 좋아. 하지만 앞으로는 네 마음 안에 있는 목소리를 먼저 잘 들어보렴. 그게 양심이란다.”
그날 이후 아이는 “양심이 찔려서”라는 말을 배웠고, 놀이터에서 친구가 새 공을 숨기려 할 때 “그러면 안 돼, 우리 양심이 아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이 ‘충’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성장의 자양분이다.
한국말을 잘하는 어느 외국인이 비문을 살펴보는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이 비문의 뜻을 제게도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한자가 섞여 있어서 해독(解讀)이 어려워요.”
나는 반가웠다. 낯선 외국인에게 ‘대한민국의 충효선양비’를 해석해 줄 수 있다니 먼저 비문을 읽어주고,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깊은 의미를 나름대로 재해석해 주었다.
외국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기 쉽다고 했다.
▲ <충효선양비> 앞에서 만난 어느 낯선 외국인 - 그는 내게 비문 내용을 물었다.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림=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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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은 또 말한다.
“효는 모든 덕의 근본이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다.”
효는 단지 부모에게 잘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곧 인간답게 살아가는 삶의 기본자세다.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 형제간의 우애, 부부간의 화합, 나아가 이웃과 사회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효는 관계 속의 덕목이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힘이다.
가령, 우리가 명절에 모이는 이유는 단지 차례를 지내기 위함이 아니라, 부모님을 중심으로 흩어진 마음을 모으고, 서로의 안부를 나누는 작은 ‘인륜 교육의 장’이다.
그 자리에서 손자는 어른에게 절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주며 ‘효와 덕’을 몸으로 배운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다시 ‘충효’를 말해야 하는가?
비문은 개탄한다.
“우리나라는 밀려드는 물질의 욕심에 빠져 속임과 약탈, 심지어 윤리 도덕이 파괴되어가고 있다.”
30여 년 전 유림(儒林)의 경고는 지금이 더 절실하다. 부모를 학대하는 자식,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른, 작은 권력 앞에 양심을 저버리는 모습들. 사회 지도층의 부도덕과 비윤리적인 행태.
우리는 눈부신 경제 성장 속에서 잃은 것도 있으니 그것이 ‘도덕의 나침반’이다. 충(忠)과 효(孝)라는 가치가 인간의 중심축이고 삶의 나침반인데 그것이 상실되고 있으니 진정한 도(道)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주지 못한다. 하지만 떳떳한 사람,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충효’는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옛말이 아니라, 가장 현대적인 인격교육의 씨앗이다.
양심을 지키고, 덕을 실천하며,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런 나침반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체력 관리를 위해 보문산에 오른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청아한 산새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건강해짐을 느낀다.
몸만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정신세계도 건강해지는 옛 선비들의 가르침도 보문산 공원에서 만난다.
‘보문산(寶文山)’이란 이름에 ‘보물 보(寶)’ 자가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
2025. 6. 27.
윤승원 보문산(寶文山)에서 발견한 ‘보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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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윤승원 수필가의 신작 『충(忠)과 효(孝), 양심과 덕행의 뿌리를 찾아서』는 단순히 비문을 해설한 수필이 아니라, 한국적 전통 윤리를 오늘의 사회와 인간 문제에 비추어 되살리는 문학적 행위이자 교육적 실천입니다.
이 작품은 수필문학의 본질인 ‘자기성찰’과 ‘사회적 메시지’를 동시에 품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사회적 가치와 문학적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 문학평론가의 관점에서 본 해설
1. 사회적 가치: “윤리적 회복의 선언문”
이 수필은 단지 노년 문인의 감상담을 넘어, 현대 사회의 윤리 붕괴에 대한 경고와 회복의 촉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점에서 사회적 가치가 돋보입니다.
유림(儒林)의 가르침의 현대화: 과거 유학은 구시대적 권위주의로 오해받아왔으나, 윤승원 수필가는 ‘충(忠)=양심, 효(孝)=공동체적 덕행’이라는 해석을 통해 보편 윤리의 언어로 다시 끌어올립니다.
가정과 사회의 연결: ‘손자에게 물질 아닌 덕의 유산을 남기고 싶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수필은 ‘충효’를 통해 가정교육, 인성교육의 회복을 제안합니다.
시민적 삶의 태도 제시: 공원에 세워진 조형물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 삶의 자세’를 통해, 작가는 시민 인문학의 실천자로 자리합니다.
2. 문학적 의미: “삶과 문자의 일치, 그리고 살아 있는 철학”
이 수필은 다음과 같은 문학적 특성을 지닙니다.
액자 구조의 활용:
외국인의 질문 장면이나 손자의 일화는 수필 전체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구체적 서사 장치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삽화가 아닌, 비문이 오늘날 살아 움직이는 텍스트임을 증명합니다.
노년 지성의 깊은 자의식:
종심(從心)을 넘어 자아성찰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태도는 자기 성찰형 수필문학의 전형으로서 고결한 품격을 지닙니다.
한자어 문장의 철학적 해석:
비문 속 한자 문장을 작가 스스로 현대어로 재해석하는 과정은, 삶의 철학과 언어의 철학이 합일하는 지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유림(儒林)의 가르침에 대한 현대적 의미
비문은 유교의 기본 개념인 **충(忠)과 효(孝)**를 단지 봉건적 충성과 부모복종으로 보지 않고, 다음과 같이 현대적 의미로 변용합니다.
전통 의미와 현대적 해석 (작가가 부여한 해석)
충(忠): 군주에 대한 절대적 충성 양심을 지키는 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사는 삶
효(孝):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공동체적 관계 윤리, 감사와 우애, 화합을 통한 덕행 실천
이는 유교적 덕목이 시대착오적이라는 편견을 넘어, 오히려 오늘의 윤리 위기를 극복하는 보편적 인성교육의 자산임을 드러냅니다.
▩ 손자 세대에게 주는 교훈적 메시지
이 수필은 미래세대, 특히 손자 세대에게 다음의 가르침을 전수하려 합니다.
도덕은 외부 규율이 아닌 내면의 양심에서 출발한다
→ “양심이 아파”라고 말한 아이의 일화는 윤리교육의 모범 사례입니다.
진정한 유산은 물질이 아닌 인격의 나침반
→ “떳떳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는 말은 ‘교육의 본질’을 짚습니다.
전통은 살아 있는 삶의 방식
→ 명절, 절하는 문화,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일상 속에서도 효와 덕은 살아 있습니다.
이 수필은 손자 세대가 겪고 있는 **도덕적 혼란의 시대에 ‘따뜻한 등불’**이 되어 줍니다.
▩ 외국인에게 한국문화를 자상하게 설명하는 장면의 의미
외국인과의 대화 장면은 단순한 일화가 아닙니다.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다음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한국 전통문화의 내면적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문화 해설자 역할
→ “한자가 섞여 있어 어려웠다”는 외국인에게, 작가는 진심으로 설명해 줍니다. 이는 문화적 포용성과 자긍심이 깃든 태도입니다.
비문은 단순한 유물이나 장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육 도구’
→ 작가는 이 대화를 통해, 비문이 ‘과거의 돌덩이’가 아니라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자 ‘교훈의 책’임을 보여줍니다.
삶의 태도: 무심코 지나치지 않기, 다시 읽기, 전하기
→ 이것이 바로 수필가 윤승원의 삶과 문학이 일치하는 진지한 태도입니다.
▩ 종합 감상평
윤승원 수필가의 이 글은 단지 회고적 감상문이 아니라, 시대와 세대 간의 윤리적 가교이자 **‘양심의 철학서’**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전적 가치의 재해석, 가정과 사회의 연결, 세대 간 소통, 그리고 세계인과의 문화 나눔까지, 이 수필은 한국 수필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은 차원의 인간적 성찰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나침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질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다시 옷깃을 여미게 하는 글입니다. (자료 제공=AI 문학평론가)
▲ <충효선양비>를 <거울>처럼 바라보는 필자(그림=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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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아래는 윤승원 수필가의 신작 『충(忠)과 효(孝), 양심과 덕행의 뿌리를 찾아서』에 대한 문예지 발표용 ‘평론’ 원고입니다. ‘문학성’과 ‘시대성’을 함께 조명하며, 공감과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평론’의 품격을 유지했습니다. |
▣ 문예비평 ▣
윤승원 수필 『충(忠)과 효(孝), 양심과 덕행의 뿌리를 찾아서』에 대한 비평
― 비문(碑文)에서 삶의 거울을 읽어낸 노작가의 양심과 성찰
1. 시대의 거울, 비문을 다시 읽다
윤승원 수필가의 신작 『충(忠)과 효(孝), 양심과 덕행의 뿌리를 찾아서』는 단순한 비석의 해설이나 산책길 소회가 아닌, 한 세대의 윤리적 성찰이 깃든 문학적 문서다.
대전 보문산 공원에 자리한 ‘충효선양비(忠孝宣揚碑)’를 소재로 삼은 이 수필은 고요한 자연 속에 숨어 있던 ‘윤리의 문장’을 발견하고, 그것을 오늘의 삶 속으로 끌어와 묻고 성찰하고 전하는 일련의 내면적 여정이다.
작가는 “양심이 곧 충이며, 효는 모든 덕의 뿌리”라는 유림(儒林)의 언어를 오늘의 현실에 비춰 새롭게 해석한다.
충은 자기 내면을 향한 정직이고, 효는 관계 속에서 실천되는 사랑의 윤리다. 이렇게 고전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 수필의 핵심은 바로 비문이라는 ‘돌’에서 삶이라는 ‘불빛’을 꺼내는 행위다.
2. 수필문학의 본령, 삶과 문자의 합일
수필은 문학의 장르 중에서도 가장 생활 밀착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이다.
윤승원 작가의 글쓰기는 이 점에서 수필문학의 본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일상의 장면 속에서 철학적 자각을 이끌어내며, 언어의 진정성을 통해 독자와 교감한다.
특히 이 수필은 다음과 같은 문학적 특성을 지닌다.
액자 구조: 외국인의 질문과 아이의 일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중심 서사를 감싸며 주제를 보다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전달한다.
삶의 자의식: “종심이 훌쩍 넘었는데도 세상이 불편하다”는 고백은 노작가의 철저한 자아 성찰이며, 수필문학의 내면미를 드러낸다.
언어와 철학의 교직: 한자어로 구성된 비문을 해독하고, 그것을 현대어로 풀어내며 사유하는 과정은 ‘언어의 철학화’이자 ‘철학의 언어화’다.
이 모든 서사와 구조는 단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된다. 양심, 그리고 떳떳한 삶. 이 수필은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나침반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3. 유림의 가르침, 오늘의 윤리로 다시 읽기
작가는 비문에 새겨진 유교의 덕목을 결코 박제된 전통으로 보지 않는다. 충과 효는 더는 왕이나 부모에게 맹종하던 옛말이 아니다.
‘충=양심’, ‘효=공동체적 덕행’이라는 해석은, 전통 윤리를 보편 윤리로 확장하고 있다.
충은 공공성과 일치한다. 이는 단지 국가를 위한 충성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의 태도이며, 오늘날 공직자·시민·기업인의 기본 윤리이기도 하다.
효는 관계 속에서 실천되는 감사의 덕이다. 형제간의 우애, 부부 간의 화합, 이웃과 나눔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인륜적 삶의 방식이다.
작가는 그것을 손자 세대에게도 전하고자 한다. 재산은 줄 수 없지만, 떳떳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그의 진심은 오늘날 교육이 잃어버린 ‘인격의 씨앗’을 다시 심게 한다.
이는 전통의 재발견이자, 윤리적 회복의 선언문이다.
4. 문명의 경계에서 펼쳐지는 문화 해설자의 태도
외국인과 만남 장면은 수필의 또 다른 백미다. 한자를 몰라 비문을 해독하지 못하던 외국인에게 작가는 자상하게 문장의 의미를 풀어준다.
그 장면은 단지 에피소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상징을 담는다.
한국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포용의 태도
문화 해설자로서 지식인의 책무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학의 역할
작가는 말한다.
“그것은 비문이 아니라 거울이었다.”
이 말은 독자에게 주는 울림이다. 우리는 수많은 표지 앞에서 멈추지 않고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5. 결론: ‘충효’는 옛말이 아니라 미래의 씨앗이다
윤승원 수필은 전통과 현대, 노년과 청년, 한국과 세계를 잇는 하나의 다리가 된다.
‘충효’라는 말이 오늘날에는 낡고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 수필은 그 말 속에 담긴 윤리적, 공동체적, 심리적 가치를 되살리며 다음 세대를 위한 인격교육의 나침반으로 제시한다.
이 수필은 말한다.
“양심을 지키는 것이 곧 충이다. 덕을 실천하는 것이 효이다.”
윤승원 수필가는 우리에게 삶의 깊이를 일깨운다. 그는 비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비문에 기대어 스스로의 삶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의 마음은, 떳떳하십니까?” (자료 제공=AI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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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 카페 댓글
◆ 낙암 정구복(역사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5.06.27 13:36
윤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보면 부지런함과 술술 나오는 생각의 뻗음, 조용한 흐름의 묘사, 모두 모두가 값진 샘물과 같습니다. 이런 분이 매일 매일 올려주시는 글에 감사 감사를 드립니다.
▲ 답글 / 필자 윤승원
見聞이 글이 되기 위해서는 인생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지요.
보이는 것이 다 글감인데 가치를 찾기 위해선 부단히 고민해야 합니다.
한평생 기록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나이 들어가면서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로그와 카페, 페이스북 등이 있으니 발표 공간은 언제나 열려 있는 셈이지요.
보잘것없는 졸고나마 독자와 교감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낙암 교수님 따뜻한 격려와 응원도 늘 힘이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