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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김 동 리
유엔군 서북 전선이 철수를 개시한 십 일월 이십칠팔일 그 무렵, 아직도 북으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던 동북 전선 일대는, 바야흐로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뿌옇게 싸여 있었다. 이십오일에 이미 나남(羅南), 청진(淸津)을 탈환한, 국군 장병은 다시, 회령(會寧), 나진(羅津)을 향하여 이십구일에도 북진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경을 목적하고 맹진(猛進)하는 유엔 연합군을 좇아 이왕이면 두만강 얼어붙은 강면(江面)까지 바라보고 돌아오자고, 의견이 합치된 철(澈)의 일행 세 사람이 함흥(咸興)에서 청진 가는 선편(船便)을 교섭하러, 당지 주둔의 정훈대를 찾아간 것은 삼십 일 오후였다. 거기서 처음으로 이십팔일에 공포되었다는 맥¹ 원수의 특별 콤뮤니케²란 것을 듣게 되었다. “중공군 대거 침입으로 한국 전선은 신국면(新局面)에 돌입하였다” 는, 이 의외의 성명은, 서북전선의 유엔군이 이미 철수를 개시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말을 전하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두부(頭部)가 없어지는 듯한 순간이 지나갔다. 한순간의 진공(眞空)은 다시 현실로 메워졌다. 북으로 가려던 계획이 남으로 바뀌어졌다. 이튿날인 십이월 초하루, 세 사람은 다시 일단 흥남으로 돌아갔다.
철은 시인(詩人)이요, 다른 둘은 음악가와 화가(畵家)였다.
그들이 ‘사회단체 연합회(社會團體聯合會)’ 파견 ‘종군문화반(從軍文化班)’이란 이름으로 서울을 떠난 것은 십일월 초엿샛날이었다. 그날로(항공편) 원산에 도착하여, 사흘 묵은 뒤 다음 목적지를 함흥으로 정하고, 원산을 떠나 일단 홍남에 닿은 것이 그 달 열흘날이었다. 여기서 다시 일주간이란 날짜를 보내고, 정작 함흥으로 떠나게 된 것은 그달 스무날께였다.
‘사회단체 연합회’에서 그들이 맡은 임무는, 전과(戰果)의 보도나 전황의 기록을 위한 전선 종군이 아니라, 수복지구(收復地區)의 동포들에 대한 계몽 선전 위안을 주는 데 있었기 때문에ㅡ계몽 선전 위안을 주는 활동에 철의 일행이 뛰어들었다는 말에는 당연히 주석이 있어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다만 그즈음 그들이 처했던 사회적 분위기에나 그들 자신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그러한 사회적이며 또한 민족적인 감정이 회오리바람처럼 일고 있었고 특히 개인적 인 피해가 많으면 많은 사람일수록 그러한 감정은 더욱 격동하고 있었다는 정도로 우선해두고ㅡ, 이왕이면 보다 더 큰 도시를 무대로 하여 일하는 것이 일의 반향(反響)에 있어서나 그들 자신의 편익에 있어서나 좀더 효과적이리라 믿었고, 따라서 원산에서 두번째 목적지를 함흥으로 택한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 사람이 함흥으로 바로 내려가지 않고 흥남에 들른 것은, 흥남에서 정훈 책임을 맡아 있는 강대위(姜大尉)가, 그들 일행 중의 한 사람인 박철(朴澈)을 통하여 세 사람을 특별히 초청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빨갱이 놈의 새끼들이 어떻게 선전을 해왔던지 시민들이 모조리 산중에 가 숨고 나오지 않습니다.”
세 사람이 갔을 때 강대위는 박철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을 나오게 하고, 신념과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철과 그 일행의 사명이었다.
세 사람은 그 일에 착수했다. 키가 작고 몸이 마르고 얼굴이 새까만, 어딘지 신경 질적으로 보이는 이화백은, 그러나, 인상과는 달라, 대단히 명랑하고 유머러스한 시국 만화를 그려 붙이고, 이화백과는 반대로, 키가 크고 몸이 뚱뚱하고 얼굴이 복슬복슬하며 어딘지 애티가 있어 보이는 김성득 음악가는 학교로, 예배당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애국가」와 「봉선화」를 가르치고, 철은 직분이 시인이라 시를 외거나 강연을 맡을 수밖에 없었고 시민들은 그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이야기를 하는 자리면 안심하고 모여들었다. 특히 이정식의 보기보다는 다른, 그 경쾌하고 소탈한 익살에는 듣는 사람마다 배를 안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의외로 빠르고도 큰 효과를 나타내었다. 시민들은 나날이 산과 굴과 그 밖의 모든 숨어 있던 자리에서 자기들의 마을로 거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사흘째 되던 날부터는 또, 밤이면 으레 ‘위안의 밤’을 개최하였다. 이것은 연사흘 계속되었다.
그 첫날 밤이었다. 철들의 일에 최초로 협력하여 나왔던 정인수(鄭仁洙)라는 사람의 소개로 윤시정(尹時貞)이라는 소녀가 「봉선화」의 독창을 부른 것이 여러 사람의 눈에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가슴속에 충격을 주고, 사무치는 것을 주고,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세 사람의 일은 더욱 크고 빠른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소녀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몸매는 가늘고 동글며 얼굴빛은 몹시 흰 편이었으나 영양 부족으로 인하여 어딘지 누른빛이 돌았다. 눈썹은 우아(優雅)하고, 눈은 가늘고, 웃을 때는 서릿발같이 희고 가지런한 이를 보이곤 하였다.
박철이 윤시정을 처음 본 것은 그가 「봉선화」를 부르게 되던 그 전날 밤이었다. 서울을 떠난 지도 보름이나 되는 세 사람은, 가운데서도 철과 이정식은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으므로, 그날 오전에 알게 된 정인수를 통하여 어디 객주 영업을 하는 집이 없느냐고 물어서 그가 객줏집이라고도 하지 않고 아니라고도 하지 않고, 그냥 웃으며 인도해준 곳이 그 집이었다.
시가지 뒷골목에 있는 기역 (ㄱ)자로 된 조그만 양철집으로 맨 끝이 헛간이요, 다음이 부엌이요, 그다음이 방이요, 또 하나 꺾어진 ‘ㄱ’자의 짧은 한 획에 해당하는 쪽에 방이 있었다.
일행이 처음 문 안에 들어섰을 때, 방 둘과 헛간은 껌껌하고 부엌에만 유리등에 침침한 기름(석유)불이 켜져 있었다.
정인수가 먼저 들어가 무어라고 한참 교섭을 하고 나오더니, 일행이 들어가도 좋다는 것으로 되었다. 세 사람이 인도된 곳은 부엌과 바로 붙은 방이었다. 그들은 정인수의 소개로 주인과 인사를 치렀다. 주인은 나이 한 예순이나 가까울 듯한 키가 크고 목이 길고 얼굴빛이 검누르고 주름살이 많은 노인이었다.
주인은 인사를 끝내자 꾸무적거리며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부엌에는 검정빛 양복바지 위에, 역시 검정빛 스웨터를 입은 허리가 가느스름하고 얼굴빛이 새하얀 소녀 하나가, 그 아버지인 주인 노인을 거들어 냄비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 소녀의 이름이 시정이란 것은, 이튿날 오전에 정인수의 소개로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주인 노인과 소녀가 사십 분간이나 걸려서 만들어준 요리는 겨우 냄비에 멸치를 넣고 끓인 두부찌개 하나요, 소주가 한 병 있었다. 그러나 반달 만에 술자리라고는 처음 대하는 터라 그들은 흡족하게 흥겨움게 마시고, 취하고, 쓰러져 잤다. 그리하여 이튿날부터 세 사람의 숙소는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튿날부터 숙소를 아주 이 집으로 옮겨오자, 이 집에서는 ‘ㄱ’자의 꺾어진, 짧은 획에 해당하는 방을 철들에게 내어주었다.
주인 식구는 윤노인과 시정의 언니 되는 올해 열아홉 살 나는 또 하나 처녀와 이렇게 모두 세 사람이 있었다. 시정의 오빠 되는 윤노인의 아들은 괴뢰군으로 끌려나가고 없었으며, 시정의 언니되는 수 (壽貞)은 적어도 그들이 보는 데서는 방문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정인수는 그저 간단히 병인(病人)이라고만 했다. 윤노인도 그렇게만 말했다. 그들이 옮겨갔을 때, 윤노인은
“집 안에 벵재³ 있어서, 손님에게는 미안하오마는 하는 수 없소. 더운 기운이 나는 이쪽 큰방은 우리가 써야 되겠소.”
했다. 무슨 병인가 하는 호기심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렇게 일절 출입을 끊고 방 안에만, 드러누워 있을 때야 이만저만 중한 병이 아니면 보기에 썩 흉한 병이거니 하고 있을밖에 없었다.
시정이 「봉선화」를 불러 여러 사람을 눈물로 젖게 한 첫 번째의 ‘위안의 밤’이 끝난 뒤에도, 숙소로 돌아온 세 사람은 또한 어젯밤과 같이 두부찌개에 소주를 마시고 흡족하게 취했다.
“시정이 이리 와! 이리 들어와! 우리 앞에서는 노래 못 부르겠어? 「봉선화」 못 부르겠어?”
정식이 술에 취하여 이렇게 떠들었다. 철도 취중이지만 시정을 곁에 불러 앉혀놓고 말을 건네보고 싶었다. 다만 김성득이만이 술에 취하지 않은 맨송맨송한 정신이라 그런지 그렇지 않으면, 같은 음악인이란 의미에서 달리 생각하는 것이 있는지,
“이형, 주정은 제발 서울 돌아가서 합시다.”
하고, 그것을 말렸다.
“안 돼, 시정이 이리 와, 이리 들어와.”
정식도 듣지 않았다.
“허허, 그러지 말래두…….”
하며 성득은 끝내 반대를 했다. 그는 술도 담배도 못하는 색시같이 유순한 성격의 사람이었으나 이때만은 강경히 정식에게 대항하였다.
이렇게 되면, 시정이 보통 소녀인 경우에 들어오려고 할 리 만무할 것이다. 그런데 시정이 들어왔다. 철이 좀 뜻밖이라 생각했으리만치 그녀는 활발한 성 격인 듯했다.
“오오, 시정이 거기 앉아! 오늘은 수고했어 ! 대성공이었어!”
정식은 시정의 앞에 손을 내밀며 이렇게 감격적인 인사를 연발하였다.
“아니요, 정말 부끄러웠소.”
시정은 이쪽 말씨로 의젓이 받아넘겼다.
“본디 음악 공부를 했었나?”
이번에는 철이 물었다.
“공부를 특별히 한 것도 없소, 올해 제가 여학교 사학년인데, 작년에 첨으로 학생음악회에 나갔어요.”
“그럼 여기서도 음악대회 같은 것은 가끔 있었나?”
“있기는 있어도 모다 꼭 같은 김일성 노래뿐이고 정말 음악다운 음악은 있쟁이오.⁴”
“음악대회에서는 일 등을 했나?”
“예.”
시정은 말을 빨리하거나 흥분했을 때 이외에는 서울말을 곧잘 쓸 수 있었다.
“일등이고 이등이고 그런 것 상관없어, 시정이 그렇잖아? 문제는 예술에 있어, 예술이 되면 그만이야, 예술에 무슨 놈의 등수가 있느냐 말이야, 그렇잖아 시정 이?……”
정식이 또 기염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
시정은 잠자코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정식은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시정은 천재 예술가야, 알겠어? 예술이란 천재 없으면 못하는 거야, 알겠어? 그런데 예술에 무슨 놈의 일등 이등이 있겠느냐 말이야, 알겠어 응, 시정 이?·…‥”
“……”
시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번에 남북이 통일되거든 시정이도 우리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요, 서울 가서 공부하게…….”
철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이렇게 말했다.
시정은 이 말에, 갑자기 두 눈을 반짝거리며, 홱 변해진 사투리 말씨로,
“통일이 언제쯤 되겠소?”
하고 물었다.
“글쎄, 늦어도 내년 봄까지는 되지 않을까?”
“그럼 그때느, 선생님 저르 꼭 서울로 데려가주겠소?”
“그럼, 그러구말구.”
철은 취중에 흐믓하게 대답했다.
“인제 됐어, 인제 시정이 나가도 좋아.”
성득이 기다리고 있은 듯이 이렇게 말하자, 시정은 일어서며,
“그럼, 선생님 전 그렇게 믿고 있겠어요.”
하고 나갔다.
시정이 나가자 철과 정식은 또다시 술잔을 건네기 시작하였다.
시정이 새로 끓인 두부찌개를 들여다 주었다.
“어, 어, 됐어, 됐어.”
새로 들어온 두부찌개에 용기를 얻은 두 사람은 술 마시기 내기나 하듯 연방 잔을 바꾸어 넘겼다.
그들이 술상을 내고 잠이 든 것은―라기보다, 성득이 두 사람의 술상을 물리고, 그들을 자리에 끌어다 눕힌 것은, 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자정이나 되었을 때였다. 철은 취기와 피로로 인하여 죽음 같은 깊은 잠에 떨어져버렸다.
……부엌에서 도마에 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쇠고기나 무엇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손에 전기 장치가 되어 있듯 칼질은 빨랐다. 칼질이 빠르듯, 그녀의 입이 또 그렇게 빨리 달삭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입은 그렇게 빨리 염불을 외고 있다는 것이었다. 콩이든지 팥이든지, 콩이든지 팥이든지……그녀의 염불은 이것만을 자꾸 되풀이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염불이 아니라 주문(呪文)일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도마만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고개를 들지 않고, 그렇게 빨리 도마를 두드리고, 그렇게 빨리 염불이나 주문을 외는 것은 그 자신이 어느덧 주문에 걸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어느덧 고개를 든다면 그 주문은 철에게 향해 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철에게 거북한 노릇이었다. 철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주문은 철이 아이들에게 따뜻한 옷을 입히지 못하고, 신발을 신기지 못하고, 쌀을 넉넉하게 들이지 못하고, 회충약을 먹이지 못하고, 멸치 넣은 두부찌개를 먹이지 못하고, 벌레 먹은 이를 빼주지 못하고, 이발을 시켜주지 못하고, 창경원 구경을 시켜주지 못하고…… 이러한 죄목으로 철을 추궁하는 뜻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쓸쓸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쓸쓸하고 두려움이, 어느덧 용기가 되는 것이었다. 철은 어느덧 용기를 가지고, 그녀가 주문을 퍼부을 때, 그녀와 싸우리라 결심했다…… 아내는 원귀같이 창백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철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철은 이제야 군복을 입고, 어깨에 백을 걸고 집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대구서와, 부산서와, 석 달 동안이나, 그렇게 걱정하고 그렇게 안타까워하던 집을 찾아 이제야 유엔군과 함께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웃는 얼굴로 철을 맞이해 주는 것을 볼 때 철은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놓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도 즐거운 일은 어쩌면 현실이 아닐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꿈일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아내는 이미 죽고, 죽은 아내의 유령일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죽은 아내의 유령이 이렇게 창백한 웃음을 띠고 철을 맞이해준다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는 아이들이 다 어디 있느냐 말이다. 제 어미와 함께 와아 몰려나왔어야 할 아이들은 다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아이들은, 다 어디 있느냐 말이다…… 철은 가슴이 메어진다는 것이었다……
처음은 치운⁵ 바람이라 느껴졌다. 치워. 치워……
“박형, 박형, 이리 좀, 어이 박형!”
하는 소리는 얼음같이 싸늘한 바람과 함께 오는 것이었다.
"어이 이잉.”
하고, 철도 이번에는, 분명 꿈속이 아닌 기지개를 켰다.
새벽녘 이 되어, 철은 무엇인지 부드럽고도 포근한 체온 속에 눈을 떴다. 철은 즉각적으로 그 체온이, 화가 이정식이나 음악가 김성득이 아닌 젊고도 상냥한 여자의 것이라고 느껴졌다. 철은 과연 감장빛 치마저고리의 여자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방 안은 아직 어두웠으나 창문께엔 희부연 새벽빛이 어리고 있었다. 철은 상반신을 돌려서 방 안을 살펴보았다. 그의 등 뒤에는 화가 이정식이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음악가 김성득을 안고 누워 자고, 김성득은 또 이정식에게 등을 돌린 채 벽에 얼굴을 붙이듯 하여 자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같은 이불 밑에서 꼭 같이 등을 꼬부리고, 다리를 오그려서 흡사 한 쌍의 새우가 붙어 자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철이 안고 누워 있는 여자가 있는 쪽으로는, 그다음이 분명히 시정이요, 시정이 다음이 그의 아버지인 윤노인인데, 그는 벽에 등을 대다시피 하여 모로 누운 채 억지 코를 골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철이 안고 있는 누워 있는 여자는 틀림없이 시정의 언니인 올해 열아홉에 난다는, 거의 방문 밖 출입이 없던, 그 ‘벵재’라 불려오던 여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 주인 식구 세 사람이 다 이 방에 들어와 자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저께 밤에 철과 정식이 늦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것은 상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다음 그들 일행 세 사람이 전날 밤과 같이 이 방에서 담요 두 장과 주인집의 솜이불 한 채를 빌려 같이 덮고 누워 자게 되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어떻게 해서 주인 식구가 모두 이 방에 들어와 자게 되었는지, 또 철 자신이 어쩌다가 자기들에게 배당된 침구를 버리고 주인 식구의 이불 속으로 전신(轉身)하여 시정의 언니를 안고 자게 되었는지 그것만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철의 이러한 의문은, 그날 아침 해가 환히 돋아, 그 방 사람 여섯이 다 일어났을 때까지, 아직도 한밤중같이 늘어지게 코를 골고 자는 곁옛방의, 일곱 사람의, 낯선 손님들을 발견함으로써 자연히 해결될 수 있었다. 윤노인은,
“밤중에 손님이 일굽이 와서 기어쿠 방을 내달라고 해서 부득이 실례르 하게 됐소, 실로 미안하게 됐소.”
하고, 인사를 했고, 시정은 노인의 설명을 돕겠다는 듯이,
“새로운 손님들 자리에 눕는 것으 보고, 아버지하고 이 방에 와 보니, 아아 실로 큰일이오, 선생님 세 분과 언니하고만 한방이오…….”
그래서 처음엔 시정이만 수정이 다음에 눕고, 윤노인은 딸들의 발치에 눕겠다고 하는 것을, 시정이 우겨서 수정을 좀 밀치고 간신히 그 자리에 두 사람이 눕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사실은 이쪽 세 사람이 더 미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게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던 시정의 언니를 이제는 할 수 없이 한방 안에서 자리를 같이 하지 아니치 못하게 된 것이요, 그 위에 다시 그를 안고 잔 철이야말로 면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올시다. 저희야말로 실례가 많습니다.”
하고 정식이 세 사람을 대신하여 인사를 하기는 했으나 그보다도 나이 네 살이나 아래인, 올해 겨우 서른 살밖에 되지 않은 성득이와, 또 나이로는 성득이보다 서너 살 위나, 잠결에 약간 방정한 몸가짐을 갖지 못했던 철로서는 더욱 미안하고, 또 거북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벨말씀 다 하오다, 내 큰딸이 벵재 돼서 그렇지, 그렇재이먼야……”
노인은 이렇게 말을 흐려버렸다.
노인의 이 말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의혹과 당황에 빠지게 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그가 말하는 그의 큰딸 수정은 얼굴이 좀 네모난 듯한, 드물게 보는 미인으로 어느 모로나 ‘병인’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상하게까지 보이는 훌륭한 처녀였기 때문이었다. 불구자가 아닌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속에라도 병이 들어 있다면 얼굴이 그렇게 고상하게까지 보이도록 아름다움으로 빛날 수는 도저히 없으리라 믿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윤노인이 그를 가리켜 ‘벵재’라 하고 정인수 역시 ‘병인’이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들은 윤노인이 그들에게 그의 큰딸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철은 곁엣방의 일곱 분 손님이 숙소를 옮기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지금 들어 있는 방을 주인에게 내주고, 숙소를 옮기기로 상의한 뒤, 정훈대를 찾아갔다. 강대위는 곧 지난 밤중에 도착한 일곱 분 손님에 대하여 직접 그들을 인도한 부하 사병 한 사람을 불러 자세한 보고를 듣고 나더니,
그 일곱 분 손님 중 다섯 사람은 다른 특별한 용무를 띠고 온 사람들이요, 그 밖의 두 사람은 신문사에서 파견되어 온 종군기자인데, 다섯 사람은 오늘 중으로 떠나게 될 것이고, 두 사람은 오늘이나 내일이면 떠나게 될 예정이라 하니, 만약 두 분 손님이 오늘 밤을 여기서 묵게 되는 경우엔 불편한 대로 다섯분이 한방에서 하룻밤 지낼 수.없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철은 좋다고 했다.
과연 그들 일곱 분 손님 가운데서는 다섯이 그날 오후 두시에 먼저 떠나고, 둘은 남아 철들이 개최하는 ‘위안의 밤’을 위하여도 많은 협력을 해주고, 이튿날 오전에 함흥으로 떠났다.
세 사람은 그들이 떠난 뒤에도 사흘 밤을 더 묵어서 그곳을 떠났다. 그렇게 사흘 밤이나 더 묵는 동안에 철이 수정의 얼굴을 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시정이 인사를 하느라고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수정은 바로 문 앞에 바느질을 하고 있다가 시정이 갑자기 문을 열고 철에게 인사를 하자 그도 무심결에 따라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수그려버렸다. 그의 눈결같이 새하얀 두 볼에 발그스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때 철은 문득, 수정의 병이란 결국, 정신이 좀 모자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으나, 그 첫날 밤, 시정에게 바느질을 가르치느라고 하던 그 또렷한 말씨와 그 낮고 가늘면서도 어딘지 발랄한 생명력이 느껴지던 목소리를 생각할 때 또한 정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기도 했다. 어쨌든 그들 세 사람은 수정의 ‘병’에 대해서는 끝까지 의혹을 품을 채 그곳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철과 그 일행이 흥남으로 돌아온 것은 십 이월 초이튿날이었다. 그들은 그날 흥남에 와서, 강대위를 통하여 비로소 ‘동한(冬寒)에 대비하여 동북 전선의 철수를 지령’한 R소장의 언명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어저께부터, 장진호(長津湖) 부근의 유엔군이 후퇴를 개시하여 오늘까지 일면 후퇴 일면 격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세 사람은 강대위에게 그들이 서울로 돌아가기 위하여 일단 원산까지 걀 수 있는 차편을 부탁한 뒤, 전날 신세지던 윤노인의 집으로 돌아왔다.
윤노인은 반겨 맞으면서, 중공군이 들어왔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정말인가, 전세(戰勢)에는 별반 영향이 없는가 하고,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중공군도 중공군이지만 그보다 추위 때문에도 일단 후퇴를 하게 되는 모양이라고 철이 대답했더니,
“후퇴르 하오?”
하고 노인은 당치 않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시정은 중공군이 들어왔건, 후퇴를 하건 그런 건 아랑곳도 없고, 그저 그들이 의외로 빨리 돌아와준 것만 좋다는 듯이,
“저 기다렸어요, 선생님들 빨리 돌아오실 줄 저 알고 있었어요…… 저 이번에 선생님들 따라 아주 서울로 갈까 하고 있었지요.”
하고, 왼쪽 볼에 보조개를 파가며 가늘게 뜬 두 눈에 웃음을 담고 말했다.
철은 지금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나 전국에 대하여 긴말을 하기가 싫었다. 그는 생각난 듯이 그동안 수정 언니도 잘 있었느냐고, 딴전을 쳐서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 이튿날인 초사흗날도 차편은 좀체 얻어지지 않았다. 지프차는 가망도 없고, 트럭이나 스리쿼터도 쉽지 않았다.
중공군은 함흥과 원산 방면에 점점 더 병력을 증가하는 일방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하여옴을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인수가 이번에 그들이 흥남으로 되돌아온 이래 한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여간 수상쩍게 생각되지 않았다. 정인수의 마음이 이미 흔들리고 있다면 이 고장의 다른 사람들은 더 물을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은 정훈대에서 차편을 기다리기 위하여 허비되었다. 육로로 원산까지만 가놓으면 거기서는 공로로나 해로로나 한결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흗날 저녁때나 되어 강대위는 비로소 얼굴에 활기를 띠고 들어오며 내일은 떠나게 된다고 했다. 바로 부대에서 떠나는 트럭이 있어서 교섭한 결과, 세 사람이 다 한꺼번에 타게 될는지는 의문이나 하여간 아침 여섯시까지 부대로 나오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쨌든지 셋이 같이 떠나야 되겠다고, 강대위를 통하여 신신당부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 밤이었다. 그동안 사흘 동안이나 얼굴을 보이지 않던 정 인수가 그들을 찾아와서 자기의 사정 이야기를 터뜨려놓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본디 기독교 장로요, 자기도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갔는데, 아버지는 해방 되던 해에 죽고, 자기도 공산군이 들어온 이후는 그들의 박해를 겁내어 겉으로는 믿는 둥 마는 둥 하며 소학교 교원 노릇을 하여왔는데 이번 육이오 사변이 나자, 자기는 본디 몸도 성치 않았지만 소학 교원이란 직업도 있고 해서 이리저리 핑계를 대어 거의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괴뢰군이 도망을 빼자 혼자 굴속에 숨어 있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맨 먼저 나와 맞이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힘이 자라는 대로는 협력도 아끼지 않았던바, 갑자기 중공군 개입과 함께 유엔군이 후퇴를 개시한다는 말을 들으니 그만 정신이 어지러워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흘 동안 가만히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으나 지금 같아서는 아무래도 일단은 이 고장도 공산군에게 한 번 더 내주게 되지 않나 하고 생각이 드는데, 여기서 자기 한 몸 같으면 유엔군을 따라 남하해버리면 되겠는데 자기에게는 늙은 어머니와, 어린아이 넷과, 몸 약한 아내가 있어서 자기가 없으면 이 식구들은 집에서 굶어 죽거나 거리에서 얼어 죽고 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자기는 여기 남아서 공산당에게 붙잡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가족들 걱정은 말고 자기 한 사람의 목숨만이라도 건지도록 하라고 강경히 권하여 마지않는다는 것이다.
“선생님들과 함께 아무래도 이곳을 떠나가야 하겠수다.”
이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철은 난처하였다. 강대위의 말대로는 그들 세 사람도 다 타기는 어려우리라는 듯이 비쳤는데, 여기다 다시 한 사람을 더 보태어 네 사람이 된다면 더욱 곤란해질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그렇다고는 해서, 지금까지 예술가의 이름으로 조국과 민족을 부르짖고, 또 정의. 인도와 자유를 외쳐온 그들로서, 지금이야말로 생사를 헤아릴 수 없는 이 판국에 와서, 너는 모르겠다, 내가 먼저 떠나야겠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낼 아침 여섯시까지 부대로 나오슈.”
철은 동행 두 사람에게는 의논도 없이 이렇게 일러주었다.
새벽 여섯시라고 해도 날은 아직 밝기 전이었다. 눈이 얼어붙어 빙판이 된 검은 길 위에는 그저도 성긴 눈발이 부슬거리고 있었다. 이따금 한숨처럼 뿜어지는 뿌연 입김이 아득한 절망같이 누워 있는 시꺼먼 해면의 압력을 받는 듯 숨결이 가빠졌다.
정훈대에 들러 강대위를 찾았다. 강대위는 없었다. 그들의 초조한 마음은 그 자리에서 강대위를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트럭이 떠나기로 되어 있다는 부대로 향했다. 그때,
“박새 ― ㅁ!”
하고 어딘지 귀에 익은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철이 돌아다보니, 역시 부슬거리는 눈발 속에 검은 오버를 입고 륙색을 메고, 그 아래, 고무장화를 신은 정인수가 걸어오고 그 뒤에는 털수건으로 모두 머리를 싼 여자 세 사람이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내와 딸이, 그 아들이요, 남편이요, 아버지인 정인수를 보내러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부대로 갔을 때 거기는 이미 약 이십 명이나 되는 이 지방 민간인들이 짐을 가지고 나와 있었다. 군에서 직접 떠나는 사람 이외에, 이렇게도 많은 민간인들이 그들과 같은 차편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고는 예기하지 못했던 일이니만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섯시 반에 강대위가 뛰어왔다. 강대위도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는 앞으로 먼저 오더니,
“함흥에서 지정을 받아 온 사람이 열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군 관계로 소개장과 추천장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한 이십 명 가량 됩니다.”
했다. 검푸른 해면 위에는 희멀건 아침빛이 서려오고 있었다. 철은 그 희멀건 해면 위로 하염없이 던지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강대위에게 돌리며,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번에 정형도 우리와 같이 꼭 떠나야 되겠는데, 특별히 좀 부탁하네.”
염치 불구하고 이렇게 입을 떼자 정인수도,
“부탁합니다.”
하고 머리를 수그렸다.
강대위는 당황한 얼굴로 그곳을 떠나버 렸다.
한 십오 분 뒤에 강대위는 표 석 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표찰에는 민(民)자를 쓰고 잇달아 번호가 들어 있었다.
‘民16’ ‘民17’ ‘民18’ 이렇게 석 장이었다.
“희망자가 너무 많아서 연대장님이 직접 승차표를 지정했습니다.”
강대위의 설명을 듣고 보니 표찰에는 과연 모두 도장이 찍혀 있었다.
철은 정인수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 그는 노기가 가득 찬 두 눈으로 강대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것도 싸우다시피 해서 겨우 타낸 겁니다.”
강대위는 그들이 입을 떼기 전에 앞질러 이렇게 변명을 했다. 철은 또 한번 정인수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다음 순간 철의 눈에는 정인수 뒤에 그를 전송하러 나와 서 있는 그의 어머니와 아내와 딸이 보였다.
“그럼 내 표를 정형이 가지시오. 나는 표 없이 타보겠으니까……”
철은 이렇게 말하며 표를 정인수에게 주었다. 강대위도,
“꼭 같이 가시려면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겁니다. 박선생은 부대에 안면이라도 있으니까…….”
구원이나 받은 듯이 이렇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하며 정인수는 철의 표를 받았다.
일곱시 오분 전부터 임검한 헌병에게 표를 제시한 사람들만이 트럭을 타기 시작하였다. 트럭에는 본디 부대에서 실은 짐이 좀 있었기 때문에, 사람은 삼십 여 명 타니, 빈틈이 없어졌다.
철은 강대위의 소개로 임검한 헌병에게 인사를 치르고 사정을좀 보아달라고 했다. 헌병은 담담히 자기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으니 연대장의 양해를 받아으라고 했다. 강대위가 또다시 간곡히 사정 이야기를 하자, 그럼 좀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철에게 차에 올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한 말을 잊어버리기나 한 듯이 잠자코 서 있을 뿐이었다.
검차를 끝마친 운전사가 운전대에 오르는 것과 동시에 철은 앞뒤를 살필 사이도 없이 차에 뛰어올랐다. 헌병은 그것을 보고도 눈을 감아준 건지 말이 없었으나 차 안에는 그의 몸을 용신할 빈틈이 없었으므로 그는 다른 사람의 몸 위에 엎어지듯이 하여 겨우 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의 헌병이 와서 마지막으로 승차 인원을 헤아리게 되었다. 철 곁의 사람들은 철이 한 번 다시 내렸다가 타는 것이 유리하리라고 했지만, 한 번 내렸다 다시 탈 때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그는 그냥 앉아 배겨보리라 했다. 드디어 철의 번호를 묻는 차례가 돌아왔다. 번호가 없다고 한 뒤, 철은 황급히, 강대위의 이름과 함께 먼저 임검하던 헌병을 끌어대었다. 그때 마침 강대위는 정훈대로 돌아간 뒤였으므로, 먼젓번의 헌병이 강대위의 부탁을 대신 전해주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빨리 내려달라는 것이다. 철이 억지를 쓰고 그냥 앉아 있으려니까 그는 또 일단 내려서 강대위를 데리고 오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철이 앉은 자리에서는 아무리 버티어본댔자 소용이 없겠음을 깨닫고 차에서 내려 정훈대로 달려갔다.
강대위는 철의 말을 듣자, 누구에게 향해서인지 화를 버럭 내며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훈대 문 앞을 나왔을 때는 이미 부대를 떠난 트럭이 시가지로 향해 이백 미터가량이나 앞서 달아나고 있었다.
철이 강대위와 헤어져서, 부대 앞을 돌아나오고 있을 때, 이번엔 또 시정이 감장 치마저고리에 털수건을 쓴 채 륙색을 메고 눈 속에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어찌 된 셈판인지 영문을 모르고, 시정이 가까이 올 때까지 그냥 눈 속에 말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시정이 철을 보자 이렇게 불렀다.
“아니 어찌 된 거야?”
“자동차 아직 안 떠났어요?”
시정이 철에게 되물었다.
“떠났다.”
“그럼……선생님은?”
“나는 못 떠났어.”
“왜요?”
“시정이와 같이 가려구.”
철은 자기 자신을 비웃듯 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그거 정말이오?”
시정의 입에서는 갑자기 사투리가 나왔다.
“두고 보라구, 글쎄, 그렇게 되지 않는가…….”
“그럼 좋소…… 저도 안심하겠어요.”
시정은 당황히 사투리와 서울말을 섞어가며 말했다.
“근데 시정은 또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 하고 싸웠어요.”
시정의 이 말을 듣자, 철은 문득 어젯밤 정인수가 돌아간 뒤 시정이네 세 식구가 말다툼을 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시정의 음성은 낮았고, 수정의 음성은 더욱 낮아 그녀들 두 사람의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드문드문 들려온 윤노인의, 딴은 낮게 하느라고 하던 몇 마디 말로 판단한다면, 시정이 정인수와 같이 그들을 따라 오늘 아침 여섯시 트럭으로 떠나겠다고 하는 것을 그 아버지가 언니(수정)를 남겨두고는 못 떠난다는 조건으로 반대를 하는 듯했다. 그러자 시정이 언니야 방문 밖도 나오지 않았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고, 저야말로 중공군이 들어오면 맨 먼저 잡아죽일 터인데 어떻게 남아 있겠느냐고, 아버지를 반박하는 모양이었고, 그것을 잠결에 대강 엿들은 철도 맘속으로, 시정의 말이 옳다고, 영감 말은 경우에 맞지 않는 상식 밖의 억설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시정이 정말 간다고 나서게 되면 그것도 난처하고 남의 집 이야기에 그다지 깊이 관심할 흥미도 없고, 그보다 잠에 눌려 그냥 꿈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싸움은 여섯시 이전에 끝이 났어야지……”
“끝이 앙이 났소, ˙……그러다가 선생님들 떠나시자 제 그만 울어버렸소, 너무나 겁이 나고, 또 화가 나서·…… 그래 그냥 옷으 갈아입고, 릭사끄⁶르 메고, 아버지가 붙잡는 것도 뿌리쳐버리고, 울멘서 나오는 길이오.”
시정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아버지와 더불어 말하듯 사투리를 뒤섞어 썼다.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수정이 혼자 그림같이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다가, 시정 이 되돌아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앙이 갔니?”
하고 물었다. 시정은 그 말에 대답도 없이,
“아버지는?”
하고 되묻는다.
“너 붙잡으로 가쟁 있나?”
“……”
시정은 잠자코 짐을 끄르는 모양이었다.
철은 방으로 들어가자, 오버를 벗기도 바쁘게 아직도 그대로 깔려 있는 이불 속에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시정이 륙색만 벗어두고, 눈이 녹아 어룽진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철이 누워 있는 방으로 건너오더니 이불 속에 저도 두 발을 디밀고 앉으며,
“우리 아버지 실로 이상하오.”
한다.
철은 무언지 헤아리기 어려운 화가 북받쳐 오르고 또 고단하기도 하여, 그냥 눈을 감은 채 입을 떼지 않고 있는데 이번에는 시정이,
“선생님.”
하며, 그 얼음같이 싸늘한 손으로 그의 이마를 짚었다.
철은 역시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좀 찌푸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골 아프오?”
시정은 순전한 사투리로 이렇게 물었다.
“아니야.”
철은 화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시정은 그의 표정엔 개의할 바 없다는 듯이 저의 말을 계속하였다.
“먼젓번 국군이 처들어올 때도, 우리 아버지 언니르 내게 맽기구 혼자서 산으로 달아나쟁 있소?”
철은 시정의 말을 듣자, 윤노인의 어딘지 어린애같이 겁이 많고, 지능이 부족한 듯한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이다. 수정이 있는 방에서 돌연히,
“위이익……끄르르르르르…… 으그그그그그그…… 끄그그끄끄끄…….”
하는, 짐승이 우는 듯한, 도깨비가 웃는 듯한, 사람이 죽는 듯한, 기괴 망측한 소리가 들려 왔다.
철은 놀라, 이불을 차고 뛰어 일어나자, 곧 그쪽 방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수정이, 아직도 으그그그그……끄끄끄끄끄 하는 소리를 내며, 두 눈이 허옇게 뒤집힌 채, 입에 거품을 문 채, 팔다리가 쌍곡선으로 틀어져 고둥같이 꼬이며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철은 엉겁결에 뛰어들어 그의 양쪽 손목을 꽉 잡으며,
“물 가져와, 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시정은 그의 뒤에 서서,
“선생님 놓우다, 빨리 나오다!”
하며, 도리어 철에게 명령할 뿐, 물을 떠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철은 정신없이 시정을 돌아다보았다. 시정은 의외로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좀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철은 시정의 명령대로, 수정의 손목을 놓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거 처음 아닌가, 이거 뭐야, 왜 이래?”
철의 당황한 질문에, 시정은 대답도 없이, 한참 동안 수정의 발작을 지켜보고 있더니, 수정의 목에서 기성(奇聲)이 멈추고, 고둥 같이 틀어져 꼬이던 팔다리에서 경련이 수그러지는 것을 보자, 비로소 숨을 내쉬는 듯,
“선생님, 저 방으로 건너가우다.”
하고 어느덧 태연한 얼굴로,
“금년 겨울 들고서는 첨이오.”
하는 말을 덧붙였다.
이때, 철은 윤노인이 밤낮 ‘벵재 있어서’ 하던 말과 또, 정인수가 ‘병인이 있어서’라고 하던 말뜻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트럭이 떠난 이튿날 오후에는 또다시 우울한 소문이 들려왔다. 어저께 아침 흥남을 떠난 트럭이 원산까지 도착된 것은 확실하나 원산에서 서울로 향해 떠나지도 못한 채 그냥 원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원산과 고성 사이에 유엔군의 북진 직후부터 출몰하던 괴뢰군 낙오병들이 중공군 개입과 유엔군 후퇴 개시를 전후하여 부쩍 기세를 올리며, 연합군의 통로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원산에 아직도 유엔군이 건재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삼사 일은 더 육로로 돌아가는 차편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은 철의 막연한 희망적 관측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와 동시, 철은 극도의 불안과 초조에 빠져,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다.
그의 눈에는 장모에게 맡기고 떠나온 아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리기 시작하였다. 육이오 중에는 아내를 공산당에게 죽게 하고, 이번에는 또 아이들마저 잃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은 찢어지는 듯 쑤시고 아팠다. 동시에 그는, 육이오 사변 돌발 당시나, 구이팔 수복 직후에는 너무 흥분에 빠졌다가 이번에는 너무 감상(感傷)에 날뛴 것이라는 새삼스런 타산적 반성이 들며, 자기 자신에 대한 엉뚱스러운 염오와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도대체, 왜 육이오 때는 가족을 데리고 남하하지 못했으며, 또 구이팔 이후에는 무슨 놈의 분이 그렇게도 치밀어, 불쌍한 아이들이나 돌보지 못하고, 혼자서 원수를 다 갚을 듯이, 이렇게 눈과 얼음이 잠긴 동북 전선까지 쫓아왔으며, 또, 무슨 신의(信義)를 위하여 희생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제 표는 남에게 주고 자신은 이 꼴이 되어 혼자 눈구덩이 속에 자빠져 누워 있기를 원했단 말인가. 그는 생각할수록 자기 자신의 너무나 격정적(激I靑的)인 울분으로 인하여 오히려 본의 아닌 감상적인 양보를 일삼은 착하지도 악하지도 못한, 타성적인 행위에 스스로 치오르는 울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도 시정 이 ‘후퇴’에 대하여 불안을 말하거나 하면 철은 딴사람같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이렇게도 많은 유엔군과, 자유를 찾아 들끓는 백성들을 절마 비행기나 군함으로 실어가더라도 가겠지 여기서 그 야수 같은 놈들에게 봉변을 당하게 버려둘 줄 아느냐고, 유엔군의 역사적 인 사명과 공산군의 포악무도를 강조하기에 열중하곤 하였다.
“저느 선생님만 믿소, 선생님 뒤만 따라가겠소.”
시정이 이렇게 말하면, 수정도 그것이 자기의 의사를 대변하는 말이라는 듯이 바느질하던 손을 멈춘 채 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 이튿날이었다. 철이 정훈대에 들렀다가 ‘레이션’⁷을 한 상자 얻어 돌아오니, 그때 마침 시정과 그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수정이 혼자 방에 앉아 수를 놓고 있기에, 철이 사투리를 배워,
“이거, 뭐 들었나 떼보우다.”
하고, 주었더니 수정은 그것을 받아든 채, 약간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말없이 철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철이 돌아서 그의 방으로 들어오자, 수정이 잇달아 철의 방으로 건너오며, 약간 떨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선생님.”
하고 불렀다. 순간 철은, 언젠가 정식이 취하여 술자리에서 시정을 불렀을 때, 김성득이 곁에서 중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시정이 대담하게 그 방에 들어오던 것을 상기하고, 그렇다면 이 형제는 그와 같이 쾌활하고 대담한 점에 있어 공통적인 면을 가진 게로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두근거림을 깨달으며, 의아한 얼굴로 그의 아름다운 두 눈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수정은 그 대담하고 쾌활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떨리는 목소리로
“나도 이남 가서 병 고치고 살겠소.”
하며, 머리를 수그렸다.
수정의 이 한마디 말은 그 순간 철을 ㅎᅟᅳᆼ분시키기에 족하였다. 그는 조용히 수정에게로 접근하여갔다. 한쪽 손으로 수정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을 그의 어깨 위에 얹은 뒤, 그는, 간질같이 창백한 향기에 젖은, 신비로운 꽃송이가 피어나는 듯한, 그녀의 두 눈을 한참 동안 말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와 동시, 철의 극도에 달했던 초조와 불안도 고비를 넘기 시작하였다. 자기는 특별한 사람이라거나, 돌아가는 데도, 우선적인 대우를 받아야 할 것같이 생각하던 자기 본위의 생각을 버리고, 여기 있는 수십만의 자유 국민들이 모두 그와 동행이요, 그와 운명을 같이해야 할 사람들이라 생각하면서부터 철의 가슴은 한결 가벼워짐을 깨달았다.
다만 한 가지 수상한 일은 이날부터 윤노인이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그는 정인수들이 떠나던 날부터 어찌 된 까닭인지 그전과 같이 집에 붙어 있지 않고 늘 밖으로만 나다니고 있었으나, 아침 저녁 끼니때만은 들어오던 것이 열흘날째부터는 아주 행방을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시정의 말에 의하면 먼젓번 괴뢰군이 후퇴를 했을 무렵에도, 언니를 시정에게 맡겨버린 채 어디론지 닷새 동안이나 달아나 숨어있다가, 국군이 들어온 사흘 뒤에야 나타났다는 것이며, 그날 저녁 정인수가 다녀가던 날 밤에만 해도, 또, 수정을 시정에게 책임 지우려고 드는 것이 하기는 수상도 하더라는 것이다. 수정이 그 아버지를 애매하게 무함⁸할 까닭도 없는 것이고 보면, 위인이 본디 저능인 데다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쯤 해석해두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열흘날부터 함흥 흥남은 동북 전선의 후퇴 작전에 있어 결정적인 지점이 되었다. 십일일에 공산군은 원산을 통과하여 남으로 향했다.
그동안 장진호(長津湖)에서 격전을 계속하던 미군 제 ○ 해병사단과, 같은 미군 제○사단 제○○연대와 앞서 청진을 탈환했던 국군 O○사단이, 십일일에서 십사일 사이에 모두 흥남으로 집결되었다.
유엔군(국군을 포함한)의 흥남 집결과 동시에, 청진 이남, 원산이북의 주민으로서도, 눈 속에 걸을 수 있는 장정과 자유에 눈뜨시 시작한 겨레 십여만 명이 또한 흥남으로 모여들었다. 이리하어 흥남은 역사상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가장 장엄하고 처절한 자유 전선의 ‘교두보’가 되었다.
흥남 주변의 모든 고지는, 모든 종류의 포태로 무장되고, 불을 뿜는 철성 (鐵城)으로 화했다. 함재기를 포함한 각종 비행 편대는, 백설(白雪)을 의장(擬裝)하여 야음(夜陰)을 타고 침투하는 공산군의 머리 위에, 포격과 호응하여, 불비를 퍼부었다.
중공군은, 십이일 십삼일 양일에 걸쳐, 야음을 타고 함흥, 흥남 지구에 공격을 시도하여왔다가 수천 명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나갔다. 하루 거른 십오일에 또다시 결사적인 침투 작전을 시험하여왔던 공산군은 미군 제○○군단을 주력으로 한 유엔군(국군도 포함)의 폭우같이 퍼붓는 포화에 의하여 세번째 주검의 언덕을 쌓아둔 채 물러나갔다.
유엔군이 흥남 지구를 중심으로 ‘교두보’를 축소시키기 위하여 함흥을 포기한 것이 십육일이요, 흥남을 거점으로 하여 해상 철수를 개시한 것도 또한 이 무렵 이었다.
십삼일부터는 이미 함흥과의 군용로를 제외한 흥남 주변의 다른 모든 통로는 차단되어 있었다. 군인 민간인 합쳐서 이십여만이 뒤끓는 흥남 해안은 사람으로 덮였을 뿐 아니라, 무수히 디미는 피란민의 혼란 속에 공산군의 척후대와 오열⁹이 끼어들지 않으리라고만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진 이남, 원산 이북의 동해안 일대에서 모여든 십 여만 피란민 가운데는 연고를 따라 흥남 재(在)주인을 찾는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빈 창고 속이나 남의 집 처마 밑이나 눈과 얼음이 덮인 땅바닥 위에서 그냥 밥을 끓여 먹고, 잠자고, 굶고, 얼고, 하며, 그들의 입김보다 사뭇 더 눈과 얼음에 가까운 바다를 바라보며, 엊그제 떨어진 적군의 장거리포가 지금이라도 곧 그들의 뒤통수를 쥐어박을 것 같은 협위¹⁰와 초조 속에서 다만 배 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철수 희망자의 등록은 군인 가족별, 교회(기독교) 관계별, 기타 일반별로 대별하여, 거기서 다시 약 오십 명씩을 단위로 반(班)을 편성키로 되어 있었다.
철은 강대위를 통하여, 시정과 수정만을 그 자신과 함께 군인 가족 속에 등록시키게 되었다. 윤노인의 행방은 그때까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이 소속된 군인 가족 관계 제팔십칠번은 십육일 새벽부터 부듯가로 나오게 되어 있었다. 기역 (ㄱ)자 모양으로 된 넓은 부둣가에는, 기적을 기다리는 듯한 십여만 군중이 검푸른 해면과 대결이나 한 듯이 모여들었다. 배는 대이지 않았다. 그날 오후 네시가 되니, 일단 해산하였다가 내일 새벽 다섯시에 다시 모이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튿날은 오전 일곱시에 엘 에스 티¹¹가 뒷문을 열어
젖힌 채 부두에 닿았다. 그러나 군인 관계 가족은 제육십오번까지만 타고 그다음 번호부터는 다시 다음 배를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그날 밤이었다. 전날보다 더 마르고 주름살이 많아진 듯한 윤노인이 철을 찾아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철 앞에 꿇어앉은 윤노인은 죄인처렴 부들부들 떨며
“나는 안주구 흥남으 떠난 일이 없수다. 나는 여기서 나서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자구 했수다·…‥”
하고 고개를 폭 수그렸다.
“……”
“우리 아바이도 여기서 죽고, 우리 안에선 다 여기서 죽었는데, 나도 여기서 죽자고 했수다만, 가만히 생각하니, 함흥 사람이라믄 다 떠나가고, 내 딸 아아들도 다 가고 없을 게니 내 혼자 무슨 맛으로 살겠소…… 선생님 실로 미안하지만 나도 이남으 가야 되겠수다. 어디든지 나도 데리구 가두록 해주오다.”
윤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돌았다.
철은 윤노인의 눈에서 눈물을 보지 않으려고 외면을 하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늘, 기다렸답니다.”
하고, 우선 위로 삼아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강대위를 찾아간 철은 그 자리에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오직 하나, 힘으로 믿고 찾아간 강대위가 그 전날 밤으로 떠나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은 용기를 내어, 철수 관계 장교에게, 자기의 성명과 신분을 말하고, 윤노인에 대한 특별 등록을 부탁해보았으나, 그런 사정을 호소하는 사람은 만 명도 넘는다는 이유로 간단히 거절되고 말았다. 그는 또 말하기를 사무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세 사람이 먼저 떠나고 윤노인만을 일반에다 따로 추가 등록을 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미 등록된 일반 철수민과 철의 군인 가족 관계 세 사람과를 바꾼 뒤, 윤노인을 일반에 추가시켜서 합치는 방법과 두 가지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철은 마음속으로 그 어느 것도 응할 수 없었다. 윤노인만을 떨어뜨려두고 자기들 세 사람만이 먼저 떠난다는 것도 차마 할 수없는 노릇이요, 그렇다고 해서 시간에다 생사를 걸고 다투는 이 마당에서 언제 떠나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반 등록자와 승선권을 바꾼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윤노인을 일단 일반 철수반에나마 등록을 시켜두는 것이 유리할 듯해서 그 자리에서는 전자를 취하겠다고 ‘수속’을 치르고, 속마음으로는 눈을 딱 감고, 억지를 써서라도 윤노인을 그냥 끌고 함께 타버릴 작정을 했다. 그날의 아침 배는 여섯시 십오 분에 닿았다. 눈바람을 무릅쓰고 얼음판 위에서 밤을 새운 군중들은 배가 부두에 와 닿는 것을 보자 갑자기 이성을 잃은 것처럼 ‘와’하고 소리를 지르며 곤두박질을 하듯 부두 위로 쏟아져나갔다. 물론 대부분은 군인 가족 관계와 기독교 관계에 등록된 사람들이었으나 간혹 일반 등록자와 무등록자도 섞여 있었다. 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하여, 일단 혼란은 멎었으나, 그와 동시, 이번에는 또, 그 혼란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가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듯했다. 이 배 다음엔 다시 배가 없을는지도 모르고, 다시 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 많은 사람들이 언제 다 탈 수 있으며. 또 십오, 십육 양일에 걸쳐 두 번이나 공산군의 장거리 포탄이 시내에 떨어진 지금 언제 중공군이 우리의 방위선을 돌파하고 흥남에 침투하여 들는지 모를 일이라는 비관적인 군중심리가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함께 그들을 휩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과 초조와 절망의 아우성 속에, 아직도 매일같이 퍼붓는 눈과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손과 발과 귀가 얼어터지며 다시 사흘이 지났다. 이와 동시, 극도에 달했던 불안과 초조와 절망도, 십칠팔일을 고비로 하여 도리어 수그러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십구일부터 현저히 수송선의 철수가 늘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십 일부터는 거의 연속적으로 엘 에스 티의 큼직한 뒷문이 부두를 향해 열려졌다. 이십일일부터는 흥남 주변의 모든 포대 진지에서 퍼붓는 포화와, 미조리 함에서 발사되는 함포사격과, 공중에서 쏟는 비행대의 불비와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눈보라가 오히려 무색했으리만치 흥남 앞바다는 수송선으로 뒤덮였다.
이십 일일 오선 일곱시 오분 전이었다. 봇물이 터지듯 부두 위로 쏟아지는 군중 속에 휩쓸려 철과 시정의 가족 세 사람도 부두로 향해 발을 옮겨놓았다. 철을 앞장으로 하여, 그 뒤에 수정이 따르고, 수정이 다음이 시정이요, 맨 뒤가 윤노인이었다. 수정은 이따금씩 그 창백한 얼굴에 눈보라가 몰아칠 때마다 불안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곤 하였다.
철이 부듯가를 네댓 걸음 걸어갔을 때였다. 철의 뒤에 따르던 수정이 처음엔 이― ㅇ 이― ㅇ 하는 소리와 함께 빙판 위로 슬그머니 미끄러지는 듯하더니 뒤이어, 위이익…… 으그그그그…… 끄끄끄……하는, 며칠 전에 듣던 그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버렸다. 눈이 허옇게 뒤집힌 채 입에 거품을 물고 팔다리가 쌍곡선으로 틀려져 고둥같이 꼬이는 수정의 발을 밟으며, 엎어질 듯이 사람을 밀치는 시정의 “아― ㅇ 이 ―”
하는, 새되고 높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 수정의 발 위에 쌀자루를 떨어뜨리며 엎어지는 윤노인을 밀치며, 철이 손을 흔들었다. 시정이 또한 철을 따라 손을 흔들며 계속적으로 비명 소리를 질렀다.
수정의 몸에서 발작이 멎은 것은 옐 에스 티의 뒷문이 닫히기 아직도 사오 분 전이었다. 얼굴빛이 종잇장같이 새하얗게 질리고, 팔다리가 축 늘어진 수정을 처음엔 윤노인이 들쳐업었다. 그러나 윤노인은 세 걸음을 옮기지 못하여 갑자기 담이 결리는 듯이 왼쪽 가슴에 손을 얹으며 그 자리에 퍽 주저앉아버렸다. 이번에는 쌀자루와 옷보퉁이를 윤노인에게 맡기고, 철이 수정을 업었다. 시정은 큰 보따리를 머리에 얹은 채, 한쪽 손으로 수정을 밀며 철의 뒤를 따랐다. 그 뒤를 역시, 수정의 체중보다 가볍지도 않은 쌀자루와 옷보퉁이를 메고 기침을 쿨룩거리며 간신히 일어선 윤노인은 그러나 시정을, 따라 바로 걷지 못하고 옆으로 두어 발짝 비틀거리며 때마침 몰아치는 눈바람에 또다시 기침을 쿨룩거리더니 그대로 철버덩하고 바다에 떨어져버렸다. 그때 이미 시정은 철과 수정이 먼저 건넌 배 안으로 향하여 작은 보퉁이 하나를 던져놓고 큰 보퉁이를 머리에 얹은 채 막 배를 타려고,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이었다. 바로 뒤에 따라오고 있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고개를 쳐들었을 때, 한 스무남은 걸음 저쪽에서 그의 아버지가 바다 위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본 시정은
“아바이!”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머리에 얹었던 보퉁이도 그냥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채 부두 위로 달려갔다.
시정이 그의 아버지를 부르며 부두 위로 달려간 동안 그 배에 더 탈 수 있는 마지막 이십여 명이 마저 건너오고, 부두에 걸쳐졌던 걸침판이 일어서고, 양쪽으로 열렸던 뒷문이 닫혔다.
“시정아! 시정아!……”
철은 목이 찢어지도록 높은 소리로 시정을 불렀으나, 으르대는 포격 소리, 비행기 소리, 휘몰아치는 눈바람에 가려 아버지를 찾는 시정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듯
“아바이! 아바이!”
하고, 바다에 뛰어들듯이 발을 구르며 아버지를 부르던 시정이, 철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돌린 듯 다시 배 있는 쪽으로 달려왔을 때, 배는 이미 뒷문을 닫고 닻을 올린 뒤라,
“선생님! 선생님!”
눈물에 젖은 시정의 얼굴에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차운¹² 것은 아니고, 배 안에서 주먹을 쳐들어 흔들며,
“시정아! 시정아! 다― ㅁ 배에 다― ㅁ 배에……”
하는 철의 목소리가 꿈인지 생시인지 다만 아찔한 순간, 시정은 저도 모르게 부두에서 바다 위로 한 발짝 내딛고 말았다.
“와―”
하는 사람들의 놀란 고함 소리와 함께,
“시정아!”
하고, 철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다가 뱃전에 철껀하고 이마를 부딪힌 것은, 그 자신이 사람을 밀치고 뱃전으로 뛰어올랐기 때문이 아니요, 때마침,
“부一 ㅇ.”
하는 기적 소리와 함께, 부두에서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끝-
2016년 5월 17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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