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노래 (1)
김영만
일출관
그리고 환희심
불교를
접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참선을 통하여 시공을 초월한 과거로 돌아갈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학교 공부보다는 사상서를 고등학교 졸업 할때까지 아마 3일에 2권 정도 읽은 것 같다. 그래서 책을 통하여 알게 된 달마대사를 禪을 통하여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참선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81년도 그해 겨울은 몹시 추었다.
당시
禪에 대한 서적중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서적으로는 경허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공성의 피안길"과 선의 자세와 선의 세계를 소개한 "선으로
가는길"이란 선관련 서적이었다. 참선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목포의 보현정사 (지금 법륜종 중앙 교육원)의 천불전에서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무박으로 철야 정진을 하고 있었다. 몇일 후, 조계종으로 출가를 하시어 태고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신 지금 법륜종 종정 스님 '정각' 큰스님께서
나를 스님방으로 부르셨다. 스님께서 "요즘 참선을 한다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 하냐" 하시기에 말씀을 드리니 빙그레 웃으시며 당신께서 공부하실때는
아무도 없는 섬에서 3년동안 동해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관(日出觀) 하셨다시며 일출관을 설명해 주셨다.
일출관은
벽을 향하여 손벽을 뻗어 벽과 손바닥이 닿을 듯 말듯한 자리에서 좌복을 하고 지금 보이는 벽이 벽이 아니라 동해바다에서 막 떠오르는 해가 떠
오른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렇게 해를 관하면 정말 둥그런 해가 떠오르며 커져 나중에는 자기 몸을 둘러싸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실상을 볼 수 있다고 하시며 무슨 경계가 오면 매일 점검을 받으라고 하셨다. 다음날 부터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스님이 지도하여 주신데로 바람이
들어오는 천불전 마루 바닥에 앉아 하루에 8시간 이상씩 해를 관하는 면벽참선 정진을 하였다. 그러기를 3일째 되는날 저녁에 참선을 하려고 천불전
법당을 여는 순간 엄청나게 커다란 불덩어리가 법당가운데에서 활 활 타오르는 것이었다.
그
불덩어리는 설명하기 어려운 환희심으로 그야말로 신비함 그 자체 였다. 한참을 타오르던 불덩이는 몇일 앉아있던 자리의 벽에서 한참을 타오르더니
사라졌다. 다음날 스님을 알현하고 저녁에 일어난 경계를 말씀 드리니 경계가 몹시 빨리온다시며 계속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정말 그 타오르는
불덩이를 보는 순간 아 이러한 세계가 있구나 하는 확신과 비록 마음으로 지어진 상에 의한 해덩어리 었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도인이 된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덕사는 우리나라의 대자유인 선지식 경허 큰스님의 법제자 만공스님이 달을 가지고 놀으셨다는 만월대가 있다. 달을 보았으면 나중에는
놓아 버리라는 만월대,계속 하나의 상에 걸려있으면 더 이상 공부가 진전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한
해 덩어리는 거의 몇 달을 저녁에 길을 걸어가는 중에도 조그만 모습으로 늘 내 곁에 따라 다녔다. 해 덩어리를 경험한 체험은 나의 신행 생활에
커다란 믿음으로 자리를 잡으며 출가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이 시작 되었다. 그리고 불교현실을 생각하며 재가불교 운동의 절실함을 느끼고 어떠한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재가 불교 운동을 위하여 한 생을 바치리라 다짐 하였다.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및 자료"금강원" 개원하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확실한 믿음과 더불어 증득된 지혜가 있어야 막힘 없는 불법을 전하고 또 불연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입장에서 나름대로
몇가지 수행을 하여보니 定적인 면과 動적인 면이 함께 있는 나에게는 염불법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염불 잘 하는 염불 수행자가 되어 보겠다고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한 마음으로 친견하신 스님이 청화 큰 스님이셨다. 일단
천수다라니10만 독을 5년을 목표로 회향하고자 하였다.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우리나라의 휼륭하신 스님들이 많이 수행하셨고 근래의 스님들도
많이 수행하시는 부분으로 실로 신기하고 묘한 커다란 불보살의 가피와 힘이 담겨진 비밀 스러운 자연의 소리음 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많이 독송하면 식이 맑아져서 전생을 알수 있는 숙명통이 저절로 열린다 하며 송광사의 구산 큰스님도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하시니
많으실 때는 마음으로 관하시어 하루에 1만독도 하셨다 한다.
그리고
불광사의 광덕 큰스님은 하루에 4천 독을 독송하셨으며, 경허 스님의 큰 법제자인 수월 스님은 7일간 신묘장구대다라니 대비주를 독송하여 천수삼매를
얻으시고 '잠을 쫓았다' 는 말씀대로 일평생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자비보살이요,숨은 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수월스님은 천수대비주
기도에서 비롯 되었다고 한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루에 100독 씩 꾸준히 5년동안 하는 사이 많은 가피와 힘을 얻었다. 그러다 더욱 불교적인
삶을 지내기 위하여 불교용품점을 개설하여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향으로
내려가 매형께 불교 용품점에 대한 매력을 피력하고서 사업 계획서를 매형께 보여 드리니 같이 운영 하자고 하셨다. 그러자 개인 택시업을 하시는
고향의 큰 형님의 친구 분을 만나 우연히 도움을 얻고 "금강원"이란 상호로 불교 전문 서적및 용품점을 개설하였다. 보문사 나한 석굴전에서 기도
가피,다시 금강원 활동 우리나라의 불교권의 부처님 기도 가피력의 영험이 있다는 몇 군데의 기도처에서 기도를 드리면 꼭 한가지는 소원은
이루워진다고 구전되는 곳은 강화도 보문사의 화강암으로 이루워진 석굴 "나한전"과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즉 대구
"갓바위 미륵부처님(관봉석조여래좌상 보물 제 431 호)", 그리고 서울의 우이동 도선사의 "석불전"을 꼽는다. 그때의 심정으로는 불보살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불보살님께
오로지 의지하는 마음으로 강화도 보문사에 도착하여 3일간 보문사 석굴전의 나한님 들에게 우치한 중생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다시 "금강원"을
열게 할수있는 가피의 지혜를 주십사 3,000배를 하며 참회에 참회를 하고 목포의 집에 도착하니 예전에 가게의 주인이신 큰 형님의 친구 어머님이
가게를 다시 하고 싶으면 다시 하라고 전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예전 "금강원"을 하던 자리에 다음에 입주한 사람이 광고업을 하게 되었는데
사업이 아주 잘 되어 몇달 만에 큰 돈을 얻어 나가게 되었다며 가게가 비워 있다는 것이다. 가게의 주인 내외분에게 가게를 얻을 돈이 없다고 하니
주변의 포목상을 하시는 불교 신자분을 직접 소개를 해주시고 포목상을 하시는 분도 나를 신임하셨는지 흔쾌히 가게 전세금을 빌려주셨다. 그리하여
다시 "금강원"을 개원하게 되였다.
그렇게
가게의 주인되시는 분들이 적극적으로 다시 가게를 알선하여 주신 것은 부처님의 가피라 아니 할 수 없다. 그 분의 말씀에 의하면 가게가 빈 몇일
사이 즉 내가 강화도에서 오로지 부처님께 의지하여 기도를 드리던 날즈음 새벽 예불 시간만되면 빈 가게의 공간에서 몇일 동안 목탁 소리를 들렸다는
것이다. 그 분들은 내가 강화도에서 기도를 많이 하여서 그런것 같다면서 모두 부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나에게 다시 연락을 하셨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여도 참으로 불보살님의 가피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여 같은 자리에서 "금강원"을 다시 하게 되니 얼마
후에는 "금강원"의 공간을 반으로 나누어 가게와 부처님을 모시는 포교당을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젊음 불자들 위주로 하여 주변에 인연되는 젊으신 학인 스님분 들도 만나 뵙고 "금강원" 자체적인 불교 수행 모임인 "관음회"를
만들게 되었다. 관음회의 구성원 중에는 운전하시는 분,아마추어 권투 아시안 게임 금매달 리스트 출신의 동생들도 함께하는 등 멀리 떨어진 사찰의
공간 보다 "금강원"에서 자연스럽게 불심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금강원"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위하여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관음회"는
매일 예불과 더불에 일주일에 1~2번의 교리 공부와 순례법회 그리고 초청법회 등을 통하여 신심을 견고히 하였다. 그 당시에 초청 법사님으로 오신
분 중에는 현재 명성여고 교법사님으로 계시는 김형중 교법사님 강의해주시고 한의사로 계시는 포교사님은 직접 목포에 오시어 인연 되시는 분들을
무료로 한방 치료해 드리기도 하였다. 그 당시 법회에 참석하신 분들이 많아 "금강원" 밖도로에서도 법문을 들어야 했고 그리고 "금강원"이 시내
버스가 다니는 도로에 있는 관계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법문을 듣곤 하였다. 국전 작가 출신으로 일중 선생님의 제자이시고 목포의 서예가이신
중당(김숙현)선생님을 모시고 서예도 함께 배웠다.
그러한
가운데 시인이시며 茶에 남다른 세계를 가지고 계시는 석성우 스님이 전화를 주시어 "월간" 다담지의 광주 전남 지사장을 소개 함께 인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오신날 행사등에는 "금강원"의 프랑카드를 도로의 중요한 공간에 설치도 하여 불교를 간접적으로 알리기도 하였으며, 법당에
사용할 연등을 미처 만들지 못한 사찰에는 관음회에서 직접 늦은 시간까지 회원들이 연등을 제작하여 사찰에 납품도 하기도 하였다.
수계
법회는 그당시에 곡성 성륜사에 계시는 청화 스님를 친견하고서 3,000배를 회원들과 법당에서 하고서 15명 가량이 단체로 법명을 받기도 하였다.
관음회를 통하여 같은 회원간에 2쌍이 결혼을 하기도 하였고 두분은 출가의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던 차에 좀 더 큰 공간으로 포교당을
알아보는 마당에 미국에 있던 친구가 자기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귀국을 하였다. 친구 아버님 산소에 가게 되었는데 산소 위에는 사람이 약 20명
가량 들어갈수 있는 석굴을 발견했다.그 석굴을 보는 순간 이석굴을 석굴 법당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그 석굴의 공간은 목포의 남농
기념관과 향토 문화관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직선 거리상으로는 약 50M 가량되고 석굴의 벽의 바위와 천장에 있는 바위가 분리된 상태로 되여
있으며 들어갈수록 석굴 천장이 넒어지면서 높아지는 형태를 갖추웠다.
그리고
방향도 바다를 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석굴을 개발하여 안쪽에 부처님을 조성하여 석굴 도량으로 만들어 볼려고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김영만(甫剛) 님은 현재 서울경기 대학청년팀장,서울지하철법우회 자문위원,종교평화위원회
집행위원, 대불청 서울지구 지도위원 활동하고 게시며 공로패(지하철법우회,조계종 포교원장,종단협회장) 수상했다.삼천배
11번,다라니100만독수행중(다라니10만독회향)이며 금강연화원(http://cafe.daum.net/mindbuddhatemple),
서울지하철법우회(/ssbwh), 인터넷불교연대(/ibr108),포교사단(/pogyosadanorg),대한불교청년회(/kybaorg),
금강연화선원(/kkyhd), 아미타불염불회(/amtbybh)등 카페운영과 생활연꽃 연구 보급하고 있다.
미주현대불교제공
첫댓글 훌륭하신 분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이쁘게 보아주시어 감사합니다.더욱 정진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