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걷고 있었다
나무들이 붉게 달아오른 잎사귀를 장전하고 있었다 나무들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나뭇잎은 천천히 허공을 회전하면서 빠져 나오다가 청춘 남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무 아래 과녁이 된 사람들이 서로의 품속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나도 어딘가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나를 받아낼 품이 없었으므로 죽고싶은 가을이었다
육교 중앙에 한참을 멈춰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육교 아래 끊임없이 자동차가 장전되고 있었다
울적했으므로 나를 육교 아래로 당기고 싶었지만 나는 누군가 쓰다버린 탄피였다 나는 여기저기에 버려져 있었다 뒹구는 낙엽들이 내가 쓰다버린 편지지 같아서 이 울화는,
아무리 쏘아대도 잘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소주병은 왜 던지기에 알맞은 손잡이를 가졌을까 나는 왜 비틀어 쥐기에 알맞은 목을 가졌을까
소주를 깠다 내 속에 털어넣고 나면 수시로 터지는 감정들이다
세상을 터뜨릴 듯 고함을 질렀지만, 터지는 것은 여전한 내 몸뿐이었다
택시를 탔다 총알택시였다 아, 나는 총알탄 사나이였다
나의 표적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곧,
집에 가 박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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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함
오래된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새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 속에 초등학교도 새로 들어섰다
아파트에 갓 입주한 엄마가 어린 아들의 주머니에
새 열쇠를 넣어주었다
바지 주머니에 열쇠가 박히자 아이가 덜커덩 열렸다
엄마가 아이 속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바닥으로 쏟아버렸다
아이는 금세 텅 비었다
엄마는 아이 속에 바뀐 호수며 집 전화번호 등을 새로 넣었다
아이는 다시 꽉 채워졌다
주머니 속에 꽂힌 새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아이들이 등교를 했다
교실마다 사물함들이 가득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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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들
바람이 옥상 밖으로 떨어진 옷을 입는다
옥상에 닿기까지 찢어지고 갈라진 이 바람은
수많은 대륙과 사막과 황야를 달랑 옷 한 벌로 지나왔다
옥상에 찾아와 새옷 한 벌 얻어 입으려는
이 노숙자의 고충을
빨래를 널고 있는 늙은 여자는,
이제 칠순의 나이로 짐작한다 그러므로
여자는 빨래를 널다가 상의 하나를 실수로
옥상 아래 떨어뜨린 것이 아니다
옥상 밖을 내다보는 여자의 주름 많은 몸이
수의처럼 흔들린다
자식들은 빨랫줄에 온몸이 따로따로 걸려서야
노모의 뒷모습을 조금 안다는 듯 젖어있다
빨랫줄에 걸린 낡은 작업복 상의 하나가
여자의 품 속으로 뛰어든다
양말은 차마 발조차 떨어지지 않는다
바지들은 노모 앞에 무릎을 꿇을 듯 힘이 없다
죄송한 표정을 젖은 모자들은 겨우 가리고 있다
세탁기 속에서 건져올린 자식들의
젖은 상체와 하체가 주렁주렁 매달린 옥상 위
빨래를 널던 옷이 아래를 내다보며 손 흔든다
대문을 빠져나가던 옷 한 벌이 돌아서서 손 흔든다
큰 소리로 부르지 않아도 옷들은
서로가 누구인지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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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廢家 1
감나무 가지에 홍시처럼 매달려 있는 그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우체부였다
감나무에는 우표가 무성했으므로 그의 혼은
무사히 하늘로 잘 배달되었으리라
감나무는 그의 육신을 양분으로 더욱 붉었지만
곧 지상으로 힘없이 난무했다
그에 대한 억척의 소문들도 모두 붉어갔다
경찰은 경찰답게 그의 주검에 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으로 귀납 추리했고
마을은 이웃답게 주검에 대한 연민을
혀 밑에 묻었다 담벼락 밖으로
뚝뚝 떨어진 소문일수록 바람에 실려가
산을 붉게 물들였다
철새들이 날아올라 서녘하늘에
단풍잎을 하나 둘 떨어뜨리고 지나갔다
집은 끝내 함구했다
그가 가꾸다만 황폐해진 가을 속으로
참새들이 하나둘 몰려들어 혀를 찼다
바람이 그가 매달려있던 가지를 세차게 흔들어놓았다
그가 신고 다닌 마당의 발자국 속으로
밤새 서리 내리고,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이
잡초 속에서 마지막으로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 해 겨울
답장처럼 눈이 내렸고
지붕은 상복을 입었다
상주처럼 쓸쓸하게 서 있던 감나무의 가지가
툭 꺾이고, 최후로 그가 벗어둔 장화 속으로
침묵이 고여들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그의 발자국이 하나 둘 새로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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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용지1
담배를 피듯 쓰다만 시를 꺼내 손에 든다
기분이 폐 속처럼 더러워진 날에는
시속 활자들이 모두 니코틴 같다
지울 수 없는 검은 활자들이 삶을 오염시킨다
다시는 오지 마라 친정으로 떠난 아내에게
재떨이 같은 아내의 부재 속에,
사나운 활자들을 털어 넣는다
가로수들이 말리다만 불량 잎담배들을
아무렇게나 도로 위에 던져 넣고 있을 무렵이었다
행복은 늘 결혼 액자 속에서 웃고 있었다
커튼을 들추고 거실로 가끔 햇빛들이
지저분하게 굴러다녔다
시간이 벽시계 속에서 수세기 쯤 박제된 느낌이다
창이 담뱃재를 털고 있었으므로 어느덧 밤이었고
하늘이 라이트를 켜놓고 있었으므로
여기저기 별빛들이 나타났다
몸에 쌓인 늦은 정적을 털며 거실로 걸어나오다가
별을 보며 문득 깨닫는다
오늘은 정말 삼십대의 마지막 생일 같은 밤이었고
원고지 위에도 쓸쓸하게 담뱃불이 타고 있었다고
마음속에 억지로 써넣는다
내 전부였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유리창 속에 갇힌 일그러진 얼굴 위에
화난 표정으로 눌러 붙어있었다
방바닥에 내팽개친 시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시를 빙자한 나는 날마다 이혼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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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용지 2
우유를 먹은 거실바닥이 미끈하다
하루는 젖병처럼 쓰러져 있고 아이는 흘러나와 거실바닥을 적시고 있다
도화지에는 아이가 그리다만 엄마 얼굴이,
창 밖에는 아이가 그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내리고,
잠든 아이를 토닥토닥 형광등이 불빛으로 잘 덮어주고 있다
굳게 닫힌 현관문을 따고 눈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눈을 털어 내자 눈사람은 키다리 아저씨로 변했다 근데,
동화 속에서 왜 자꾸 술 냄새가 나는 걸까
아이가 읽다만 동화 속으로 비틀거리며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술병이 잠든 아이를 걷어찼다
아이는 걷어차이면서 다시 첫 페이지로 휙 넘겨졌다
동화 속의 첫 페이지에는,
- 엄마가 도망가고,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면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친척들이 아이를 키우다가 입양시킨다. -
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까지만 아이의 내용과 일치했고,
정작 아이는 입양되지 않았다
엄마는 야근 중이고 실직한 아버지는 늑대였다
사내가 형광등 불빛을 확 걷어버리면서 꿈속에서 아이를 끄집어내자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온,
동화 속 주인공 같았다
아이에겐 모든 것이 마법 같았다 그러나
스토리는 아직 전개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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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신이 형
순신이 형, 형과의 거리가 창 밖 어둠만큼
캄캄하다는 걸 잘 알아 별빛이 칼날이 되어
그 거리조차 뭉텅뭉텅 잘라내는
8층 임대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접시형 안테나를 세우고 가난처럼 까마득한,
그리운 형에게 타전하고 싶었어
올해는 을유년이야. 그러나
우리에게 임진년 아닌 날 있었을까
산 속에서는 낙엽들이 고분처럼 쌓이고
오늘도 고이즈미는 신사참배를 했다는데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포화가 끊이질 않아
산 거북이를 방생하면 거북선이 되는 걸까?
우리의 왕과 신하들은 여전히 탁상 위에
아름다운 공론을 장식 중이었어
하늘에 떠 있는 저 보름달이
형이 준비한 화포라는 것을 잘 알아
달빛이 심지가 되어 타고 있는 하늘 아래
창문을 열어놓고 지구가 왜 하필이면
구체球體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어
지구는 여전히 목표지점을 향해
날고 있는, 형의 포탄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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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동호
-발췌독
늦은 밤, 창을 통해 읽을거리들을 찾는다
얼마나 많은 글씨들이 적혔기에
창 밖은 깜깜할까?
글씨 속에 들어앉아 함출을 밝힌
저 숱한 집들 읽는다
세상의 모든 불빛들은 부드럽고 아름답다?
이건 오독誤讀이다
아직 불 꺼진 창들도 많다
늦은 시간, 막차인 듯한 불빛이
불빛을 돌아서, 불빛을 오른다
다시 불빛을 지나고, 불빛을 꺾어 멈춘다
불빛이 내리고, 잠시 후면
십이층 달동네의 창들이 환해질 것이다
돈 없어 오갈 데 없는 서너 평 판잣집들고
재개발을 한답시고 마구 들어선
빌라들도 돌아와서 이제 읽을 수 있는 불빛들이다
고층 아파트가 십자가처럼 머리 위에
떠 있는 둥 마는 둥 집들은 제각기
사람들을 전구처럼 방 안에
갈아 끼운다
<이동호 시집 '조용한 가족' 中 / 2007 문학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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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의 '세상을 읽기'는 어둠이 있어 가능하다. 창 밖에 보이는 세상의 어둠은 그에게 거대한 책이다. 어둠의 텍스트에는 수많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그는 마치 시를 읽듯 어둠 속에서 "함축을 밝힌/숱한 집들 읽는다". 어둠에 감추어졌던 있던 집들은 하나 둘 불빛의 문자가 된다. 그가 바라보는 불빛은 인간이 지나가는 흔적들이다. "늦은 시간, 막차인 듯한 불빛이/불빛을 돌아서, 불빛을 오른다/다시 불빛을 지나고, 불빛을 꺾어 멈춘다/불빛이 내리고, 잠시 후면/십이 층 달동네의 창들이 환해 질 것이다"라는 말처럼 그의 불빛 읽기는 인간의 온기가 번져 가는 흔적을 따라 이동한다.
그는 비록 "관"에 있듯 고독한 죽음의 공간인 '방 안'에 있지만, 그의 시선은 "관 뚜껑을 열 듯 창문"을 향해 집중된다. 창 밖의 세상은 " '낯선 세상' "이자 동시에 "낡은 생애를 속삭"이는 익숙한 세상이기도 하다. 창 밖의 풍경과 방 안의 세상은 일치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단절과 고립된 자신의 방에서 밖을 향한 '창'을 열어둠으로써 유폐된 자의 공포로부터 일탈하고자 시도한다. 그가 관찰하고 있는 세상의 풍경은 때로는 "가로등이 만들어놓은 담벼락 그림자"로, 때로는 "밤하늘에 별들을 하나 둘 박아놓고 지나"가는 "언덕 너머 오래된 아파트"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가난한 거리의 풍경 속에는 비루하지만 아름다운 삶의 그림자가 놓여져 있다. 거기에서 그는 잃어버린 순수와 동경을 다시 찾아낸다. 비록 "분수에 빠진 백 동화 같은 자신의 불운"을 다시 읽을지나도 그는 창 밖의 세상 읽기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이동호 시집 조용한 가족 해설, 죽음 속에 은폐된 생명의 의지 中/강경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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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동호
- 긴 직유直喩로 읽는 풍경
오늘밤은 우물 속만큼 고요하다
나는 책상 위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은 창 밖 세상을 읽는다
관 뚜껑을 열 듯 창문을 쬐끔 열어두었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나서 오랜만에 바라보는
'낯선 세상에서'라고 발문해도 좋을 어둠 속에는
가로등이 하나 둘 외로움을 써놓고 있다
낙엽들은 공중을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가로등이 만들어놓은 담벼락 그림자 위에 걸터앉아
바스락바스락 낡은 생애를 속삭인다
나는 단풍잎처럼 창을 붉힌다
차 불빛이 빠르게 언덕을 날아올라
밤하늘에 별들을 하나 둘 박아놓고 지나갈 때에는
언덕 너머 오래된 아파트를 읽을 수 있다
아파트는 아랫동네를 공부하듯 펼쳐놓고
또박또박 발음하는 중이다
아랫마을은 교회 첨탑 군불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십자가에 젖은 눈을 말리고 있다
사람들은 우물 속 누군가가 빠뜨리고 간 낯선 표정으로
공원의 아기천사가 안고 있는 항아리에서 빗나가
분수에 빠진 백 동화 같은 자신의 불운을
부끄럽게 읽히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야경을 주렁주렁 매달고 뻗은 비포장 길을 읽는다
길은 좁은 골목 사이로 늘어선 집들의 아킬레스건을
요철요철 건드리며 다음 페이지 같은
가풀막을 숨가쁘게 넘는다
<이동호 시집 '조용한 가족' 중 / 2007 문학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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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의 '세상을 읽기'는 어둠이 있어 가능하다. 창 밖에 보이는 세상의 어둠은 그에게 거대한 책이다. 어둠의 텍스트에는 수많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그는 마치 시를 읽듯 어둠 속에서 "함축을 밝힌/숱한 집들 읽는다". 어둠에 감추어졌던 있던 집들은 하나 둘 불빛의 문자가 된다. 그가 바라보는 불빛은 인간이 지나가는 흔적들이다. "늦은 시간, 막차인 듯한 불빛이/불빛을 돌아서, 불빛을 오른다/다시 불빛을 지나고, 불빛을 꺾어 멈춘다/불빛이 내리고, 잠시 후면/십이 층 달동네의 창들이 환해 질 것이다"라는 말처럼 그의 불빛 읽기는 인간의 온기가 번져 가는 흔적을 따라 이동한다.
그는 비록 "관"에 있듯 고독한 죽음의 공간인 '방 안'에 있지만, 그의 시선은 "관 뚜껑을 열 듯 창문"을 향해 집중된다. 창 밖의 세상은 " '낯선 세상' "이자 동시에 "낡은 생애를 속삭"이는 익숙한 세상이기도 하다. 창 밖의 풍경과 방 안의 세상은 일치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단절과 고립된 자신의 방에서 밖을 향한 '창'을 열어둠으로써 유폐된 자의 공포로부터 일탈하고자 시도한다. 그가 관찰하고 있는 세상의 풍경은 때로는 "가로등이 만들어놓은 담벼락 그림자"로, 때로는 "밤하늘에 별들을 하나 둘 박아놓고 지나"가는 "언덕 너머 오래된 아파트"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가난한 거리의 풍경 속에는 비루하지만 아름다운 삶의 그림자가 놓여져 있다. 거기에서 그는 잃어버린 순수와 동경을 다시 찾아낸다. 비록 "분수에 빠진 백 동화 같은 자신의 불운"을 다시 읽을지나도 그는 창 밖의 세상 읽기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시집 조용한 가족 해설, 죽음 속에 은폐된 생명의 의지 中 / 강경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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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아이가 선풍기의 버튼을 꾹 누른다 고체처럼 굳은 공기가 흔들린다 흔들리면서, 선풍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선풍기를 완전히 빠져 나오기까지, 공기는, 날개의 회전력에 이끌려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날 것이고, 옷을 한 벌 해 입어도 될 만큼 가늘어질 것이다.
선풍기 날개는 실타래처럼 공기를 돌돌 말았다가 반대편으로 한꺼번에 풀어놓는다. 공기는 훨씬 부드러워져서 천 조각처럼 하늘거리리라 공기는 소년에게 감기면 그대로 옷이 되고, 땀에 젖은 옷을 벗었던 아이는, 새 옷을 입은 것처럼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선풍기 앞에서 이렇게 소리 칠 것이다.
아아아-, 아이의 몸을 터져 나온 소리가 선풍기 회전을 역으로 통과하면서 흩날리고, 흩날린 공기는 다시 원래의 공기로 돌아가고, 공기는 늘 아이의 주변을 채우고 있다가 아이가 선풍기를 틀 때마다 옷 한 벌이 된다.
봉제공장 탁아소에 앉아 아이가 선풍기를 꾹꾹 눌러대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이가 실밥처럼 날리고 있다 아이 엄마는 재봉틀에 앉아, 아아아-, 안타까워져서, 낡은 작업복 터진 실밥을 꾹꾹 눌러대며, 아이 생각으로, 빙빙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부산시인] 200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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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부산일보 신춘문예 - 동시] 기차가 떠나신다 /이동호
기차가 떠나신다 /이동호
야근 갔다 늦게 돌아오신
엄마 코 고는 소리가
부산역을 떠나는 기차소리 같다
피곤하신 몸으로 꿈속에서조차
또 어디 먼 길 가시는지
밤새 엄마 기다리며 울던
세 살 내 동생을 따뜻한 품에 태워
칙,칙,폭,폭
기차가 떠나신다
대전쯤 갔을까?
천안쯤 갔을까?
엄마와 내 동생이
꿈나라 역에서 우리집역으로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나는 밀린 숙제도 하고,
방청소도 하고,
언니는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하고,
<당선소감>
어둠의 무게가 조금 무거워졌는데도, 아이들은 아직 잠들지 않았다. '이놈들!' 잘 시간이 넘어 이제 그만 자라는 아빠의 호된 호통소리에도 이불 속에 숨어 원숭이처럼 킥킥거린다. 그런 모습을 보다 보면, 화를 내다가도 어느새 아빠 얼굴이 뽀얀 달님처럼 웃고 만다.
아내는 뒤늦게 가구동호회 회원이 되어 거실 다탁과 내 책상 하나를 근사하게 만들어내더니, 이제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책상이며, 장롱을 만들겠다고 가구동호회 사무실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철야작업 중이다. 돈주고 사는 것보다는 아이를 위해 손수 원목으로 가구를 만들어주겠다는 그녀의 신념을 꺾을 수 없어 다섯 살 예나, 세 살 주형, 우리 천진난잡(?)한 두 아이와 요즘은 평소보다 더 밀착해서 지내는 중이다.
오늘 큰애의 눈을 통해 동화 속 아름다운 세상 일곱 권을 읽었고, 큰애가 글자쓰기 공부를 하는 동안 둘째의 눈으로 창밖 세상을 읽었다. 꽃봉오리처럼 피어있는 가로등과 벌레처럼 도로를 기어다니는 차량들 불빛을 보며, 요즘 키높이가 부쩍 낮아진 나를 느낀다. 아이들 키높이까지 낮아져 시를 쓰고 싶다.
며칠 전 당선 통보를 받았다. 아이들과 요즘 아이들처럼 행동하는 남편을 두루 키운다고 고생하는 아내와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신 어머니 여해영 여사와 장모님 이무순 여사께 이 영광을 돌린다. 아울러 내 시의 독자가 되어주신 신라중학교 전연희 교장선생님과 사랑하는 난시동인, 시산맥의 시우들, 다 밝힐 수 없는 고마운 분들을 비롯하여 선뜻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큰 감사를 올린다.
이 동 호
◇1966년 경북 김천 출생. 대구대 대학원 국문과 수료. 성균관대 교육대학원 국교과 휴학 중. 200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부산 신라중학교 교사.
<심사평>
단란한 가정 참신한 비유 돋봬
전국에서 보내온 많은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동시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확인할 수 있어 흐뭇했다. 전반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나 시적 표현에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작품들이 많았다. 작품 경향은 자연을 소재로 하거나 가족을 중심으로 한 생활 속의 작은 이야기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쓴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대체로 작품 수준은 높은 편이었지만 소재와 발상이 엇비슷한 작품이 많았고, 동심과 시적 표현이 조화를 이룬 참신한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아 아쉬웠다.
최종심에 오른 사람은 윤영숙, 이순, 귄재은, 이영미, 최경실, 이동호였다. 윤영숙, 이순, 권재은, 이영미는 애석하게 탈락하긴 했지만 앞으로 좋은 동시를 쓸 사람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겨룬 작품은 최경실의 '어미 개'와 이동호의 '기차가 떠나신다'였다. '어미 개'는 어미 개의 모정을 꾸미지 않은 질박한 표현 속에 잔잔한 감동으로 녹여낸 가작이었으나 시적인 표현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다. 당선작으로 뽑힌 '기차가 떠나신다'는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참신한 비유와 따스한 시선으로 잘 그려냈다. 동심과 시적 표현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시상의 전개나 표현이 무리가 없이 자연스러운 것도 미덕이었다.
심사위원: 이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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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에 갇히다
창가에 서서 비의 창살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든다
방은 감방이었고 나는 수감 중이다
언제부터 빗소리에 취조 당하고 있었던가
나도 모르게 기밀들을 발설하지는 않았는지
비는 더 알아야할 것이 있다는 듯 그치지 않고
더 젖을 것도 없는 나는 창가에 서서 불안하다
빗소리에 젖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는 있는가
호출신호처럼 천둥이 울리면 각오할 수밖에 없다
남은 것은 전기 의자뿐이라는 듯
하늘은 연신 전원을 올리고 있다
탈출을 감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독방수감중이다
우산 속에 갇힌 사람의 뒷모습과
이역의 대문 앞에서나 처마 밑에서
홀로 발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쓸쓸하다
비의 제국주의도 이쯤 되면 폭동이 있을 법한데
잠잠하다 비의 강점기, 비의 탄압은 완벽하기에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창가에 불빛이 아른거린다
불빛은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몰래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기도하는 모습이 되어
창가에서 타올랐지만
여전히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
비는 한층 더 큰 소리로 어디론가
모르스 신호를 타전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고 나는
비의 창살이라도 끊을 것처럼
날카롭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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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천문대에서
어느 우주의 여름 중간쯤, 나는
신화의 긴 역사만큼 자란 별자리 아래쪽
어둠의 깊은 가랑이 속에서 잉태되어
칠 년이 칠 억 번 흐르는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별자리 저 편에서 좌표를 잃은 늙은 행성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잔재가 이쪽으로 밀려오고
부서진 조각들이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별들로 재 융합하고
별의 빛 입자 속에서 또 다시
숱한 별의 유전자들이 진화했을 지도 모른다
나를 깨운 것은 우주였을 것이다
늦은 밤, 별의 궤도를 천천히 주시하며
수수께끼 속에서 막 걸어나왔을 때
앞을 막고선 가냘픈 풀잎에 매달린
투명한 물방울들로 인하여 숱한 상상이
내 껍질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내 본체를
올림푸스 산의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을 거라 믿었다 저 먼 진리의 지평
상상의 꼭지점에 매달린 우주
빛의 열매 하나 향긋하게 걸린
성스러운 어둠 속에서
나는 서둘러 인간을 벗고 싶었다
어느 누가 이곳에서 인간을 말할 수 있을까
속세의 언어가 화석이 되어버린 어두운 산비탈에서
환하게 걸린 우주와 별자리와
신이 되기 위해 끝도 없이 고행한
행성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초목과
바람과
산새들의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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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옷/이동호
응급실 침대 위에 누군가 걸쳐놓은 저 몸은,
애초 옷이었다
다시 껴입기가 불편할 것이고 볼썽사나울 것이고
자기 옷 아닌 것처럼 어색할 것이다
몸도 오래되어 낡고 해지면 그만 벗어두어야 한다
새 몸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어울리지 않는 몸 한 벌 벗어두고 그대
여벌의 허공을 입는다
그대가 벗어둔 몸은 누군가 단정하게 개어
상자 속에 오래오래 잘
보관해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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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나무와 불은 벽난로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채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창의 안과 밖은 서로를 침범하기 위해
세차게 흔들렸고
술잔 속에서는 포도주가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음악 소리는 사내의 품속에 꼭 안겨있었다
사내는 두 손으로 음악을 부드럽게 쓸고 있었다
그의 오늘은 알몸이었다
음악도 레코드를 벗고 알몸이었다
그가 삶을 훌훌 벗어 던지기는 참 오랜 만이었다
말은 없었지만
둘은 이미 많은 관계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의 움직임은 쉽게 일치했으며
격정은 사내의 속눈썹 가까이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사내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삶은 쫄티 같아서 계획도 없이 떠나오지 않으면
잘 벗겨지지 않았다
그가 사직서를 던지듯 알몸이었을 때
그와 끝까지 함께 해준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헤드폰 속에 있었다 곳곳에
빈자리들이 앉아 있었고
불빛만이 머리 위에서 둘의 사랑을 지켜볼 뿐이었다
둘은 꼭 붙어있어서 연인이었고
삶을 벗어 던져서 오랜만에 서로가 나누는,
은밀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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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공원의 벤치에 누워있던 사내가
마침내 일어나서 시계탑을 바라본다
그는 태초부터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으리라
이제 때가 가까웠으니
그가 서둘러 땅 속으로 내려간다
그는 지하철 계단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비로소 맨 몸이었다
사내가 계단 중앙에 묻혀 씨앗처럼 몸을 웅크렸다
웅크린 몸이 흔들릴 때마다
계단이 잔뿌리처럼 땅 속으로 뻗어 내렸다.
발을 헛디디면
사내 속으로 깊게 빨려들 것만 같아
땅속을 내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몹시 조심스러운데,
사람들이 그의 옆을 지나갈 때마다
사내의 몸에서 조금씩 팔이 자라났다
지상에서 연이은 경적음이 터져 나왔다
지상의 한 지점으로 어둠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지만
어둠이 사내를 침범하진 못했다
가로등이 사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의 손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