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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9일. 서울의 하늘은 비나 눈이 올 듯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구본형 변화연구소 소장과 함께 떠나는 남도기행의 첫날.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버스는 교대를 경유해 봄이 가장 먼저 오는 남도를 향해 긴 시간 달렸다. 서울에서 남도는 여정을 즐기지 않는다면 힘든 노정이다. 첫날의 목적지를 떠올려본다. 낙안읍과 순천만. 적어도 7시간 이상은 버스에 있어야 한다.
8시가 넘은 이른 시각, 초대면이라 버스 안은 조용했다. 책을 읽는 사람, 일정표를 꼼꼼히 뜯어보는 사람, 좌석을 뒤로 젖히고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사람. 버스는 익숙한 서울 거리를 떠나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구본형 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는 구본형 소장과 함께 남도로 가고 있다. 『떠남과 만남』에서 그가 거쳐 갔던 남도에 가는 것이다.
“일정표를 봤는데, 이번 여행은 놀고먹는 여행인 듯 합니다.(웃음) 길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사연, 즐거움, 아픔, 외로움, 살기위한 발버둥을 보게 되겠지요. 이런 자취를 각자의 눈높이로 편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뭔가 배운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저 편한 마음으로 잘 시작하기 위해 떠난다고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2000년, 회사를 그만두고 배낭을 등에 지고 구본형 소장은 여행을 떠났다. 『떠남과 만남』에 이런 글귀가 있다.
「나는 '느림'을 찾아 떠났다. 고요한 한가로움. 내 마음의 변방과 오지를 찾아 천천히 걸었다. 그곳에 가면 어디엔가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걸었다. 아주 천천히, 달팽이처럼,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움직임의 궤적이 남는다. 온몸으로 걸어가기 때문이다.」
“제가 2000년에 여행을 떠났을 때는 뼛속까지 직장인이었어요. 조직을 떠나 혼자서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함께 있었죠.” 매일 20킬로미터를 걷고, 매일 짐을 챙기고, 매일 새로운 숙소를 찾았다. “한 달 반 후, 나는 바람처럼 자유로웠고,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여러분도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여행을 통해 자유로워지길 바랍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도 빨리 친해지세요.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이 친해지는 것만큼 좋은 게 없더군요.”
남도기행에는 뜻밖의 초대 손님이 있었다. 사진작가 윤광준 선생. 『떠남과 만남』의 사진을 맡은 인연으로 이 기행에 초대되었다. “윤광준 선생은 사진도 잘 찍으시고, 글도 잘 쓰시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무엇보다 잘 노는 분입니다.” 소장님의 소개가 끝나자 윤광준 선생이 쑥스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구 선생님 빽으로 이번 기행에 동참하게 된 윤광준입니다. 저는 구 선생님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읽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사람입니다. 이렇게 거의 10년 만에 선생님을 뵙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또, 제가 책에서 뵌 선생님의 모습과 현실의 선생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아 무척 좋습니다. 이번 여행 열심히 잘 놉시다.”
매화가 제일 일찍 피는 마을, 낙안읍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는 남도에도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낙안읍성에서 내리자, 텁텁한 먼지 섞인 바람이 칼칼하게 목과 코를 간지럽게 했다. 봄이 오는 첫 길목, 남도. 그러나 아직 봄은 일렀다. 나무줄기는 통통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싹은 아직 잠을 자고 있었고, 봄을 알리는 꽃들도 꽃봉오리들을 꽉 아문 채 먼데서 봄 찾아 온 손님들을 본체만체했다. 몇 그루의 매화들이 희고 단단한 광택을 뽐냈다.
낙안읍성에 도착한 것은 1시 반. 8시에 출발해 떡으로 요기를 한 게 전부니 모두들 허기가 졌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에 있는 식당에 둘러앉아 남도 한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남도 한정식답게 상은 그릇을 놓을 자리가 없을 만큼 반찬들로 가득했다. 뭘 먹어야 할지, 젓가락이 멀미를 일으킬 만도 한데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더 달라고 외친 음식이 있었다. 꼬막이었다.
서울에서도 쉽게 먹는 꼬막이지만 이곳에서 먹은 꼬막의 맛은 각별했다. 일단 살집이 두툼했다. 양념을 얹은 것도 맛있었지만 역시 제 맛을 보려면 양념 없이 삶은 꼬막 그 자체를 먹어야 한다. 꼬막은 껍질을 까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두 손에 찝찔한 소금물이 흐르고, 운이 없으면 뻘이 가득한 꼬막을 집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고만큼 맛만은 정말 최고. 두툼하고 쫄깃한 살을 씹으면 희미한 소금맛과 꼬막 특유의 비릿하면서도 개운한 맛이 배어난다. 그 맛의 각별함은 앞으로 남도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꼬막의 맛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
묵묵히 꼬막 껍질을 벗기던 윤광준 선생이 툭 말을 던졌다. “꼬막 캐는 거 본 적 있어요?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갯벌에서 하루 종일 허리를 숙이고 꼬막을 캐는데, 그 수고에 비하면 꼬막 값이 너무 싼 것 같아요. 도시 사람들은 이런 거 돈 주면 금방 사먹을 수 있으니까 가치를 잘 모르지요.”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낙안읍성 민속마을을 돌아보았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낙안읍성이 감싸고 있는 성안 마을을 예전 그대로 복원한 곳으로, 조선 시대의 관아와 객사, 민가 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고, 또 옛날 집들을 지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대장금>을 비롯해 <불멸의 이순신> <다모> 등 수많은 역사드라마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동헌과 객사를 둘러보고, 마을길을 걸었다. 어른 키만 한 돌담은 다정하다. 다가오지 말라고 위협하는 도시의 담과는 달리, 이곳의 담은 가리개에 불과하다. 돌담 위에는 조개껍질과 조약돌로 맵시 있게 장식을 해 두었다. 소박한 꾸밈이다. 까치발을 하면 그 안이 들여다보였다. 집은 옛날식이지만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대인이기에 세탁기와 수도꼭지, 가스렌지가 보이는 것이 재미있었다. 개방된 집이 아닌, 일반인들의 집에는 ‘들어오지 마세요’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관광지인 탓인지, 고양이들이 애교 있게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고양이들이다. 애교 있게 가르랑거리며 꼬리를 흔들고, 쓰다듬어 주어도 가만히 있다. 집토끼가 골목길을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강아지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있다. 집 뒤 텃밭에는 축축한 검은 흙을 뚫고 푸른 파가 삐죽삐죽 자라고, 연둣빛 이파리와 흰 속대를 훤히 보여주는 봄동은 꽃처럼 피어 있다. 주름 깊은 할머니가 허리를 굽혀 봄나물을 캐고 있고, 무심히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는 관광객들을 구경한다. 뭐가 신기하다고 사람들이 이곳에 우르르 몰려왔는지, 호기심에 찬 시선이다. 그에겐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이나 평범한 풍경일 테니.
마을을 한바퀴 크게 돌아 낙안읍성에 올라갔다. 성벽 안쪽은 초가지붕에 기와집, 돌담, 좁다란 골목길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평화로운 옛 마을이고, 성벽 밖에는 벽돌로 지은 교회의 십자가, 털털거리는 경운기, 반듯하게 정리된 논과 밭, 알록달록한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다. 읍성을 사이에 두고 몇 백 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 성은 과거에 탐욕스러운 적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왔다. 그리고 지금은 성이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바다와 산, 갈대가 만드는 수묵화, 순천만 갈대밭
다시 버스에 몸을 싣고 순천만 대대포구로 향했다. 순천만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국내 최대의 갈대밭과 겨울철새의 낙원으로, 그리고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저 멀리 산이 있는 곳까지 이어진 갈대밭을 걷고, 탐조선을 타고 순천만을 한바퀴 돌았다.
순천만은 파도가 일지 않는 호수처럼 고요한 바다다. 눈을 감고 있으면 갈대들이 바람에 제 몸들을 비벼 파도소리를 흉내 낸다. 타악기로만 이루어진 오케스트라가 즉흥 재즈 연주를 한다.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으면 아주 먼 곳에 홀로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 멀리 바다에는 엄지손톱만한 빨간 태양이 산속으로 숨으려 하고 있었다. 산은 먹물이 물에 퍼지는 듯한 검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바다는 붉은 빛으로 일렁거린다.
갈대밭과 갯벌에는 아직도 날아가지 않은 새들이 부지런히 먹이를 찾고 있다. 갯벌에서 생업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관조의 대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존이고 생활이다. 이곳에서 생업을 하는 사람들과 겨울을 나는 철새들도 이방에서 온 우리들만큼 이곳을 아름답다고 여길까? 아닐 것이다. 풍경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맛볼 수 있는 건, 언제나 먼 곳에서 힘들여 찾아온 이들이다.
재능보다 성실과 지속의 힘을 믿어라
순천만을 한바퀴 돌자 사방이 어둑어둑해졌다. 저녁을 먹을 때다. 근처의 식당에서 모두 둘러앉아 이 고장의 별미라는 짱뚱어탕과 민물장어구이를 먹었다. 커다란 뚝배기에 담겨져 나온 짱뚱어탕은 추어탕과 비슷한 맛. 눈이 툭 튀어나온 짱뚱어는 망둥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갯벌 위를 팔딱팔딱 뛰어다닌다. 얼마나 예민하고 재빠른지 바늘이 떨어지는 작은 소리에도 도망쳐버린다. 숙련된 낚시꾼들이나 긴 낚싯줄을 이용해 짱뚱어를 잡는다.
점심을 먹을 때 자기소개를 했지만 여전히 서먹한 구석이 있다. 자리를 편하게 하는 데에는 역시 술이 최고. 폭탄주가 한바퀴 돌고,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실없는 농담이 웃음을 자아냈다. 사람들은 음식으로 배를 채웠고, 이야기로 마음속을 비워냈다.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이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까지, 여전히 가고 있는 길에 대한 불안이 있었고, 어떻게 해야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도 뭐 하나 정해진 것이 없고 허공에 발을 딛고 사는 느낌, 그런 자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두 분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먼저 윤 선생.
“산다는 것은 어쩌면 매일 죽는 것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죽음을 먹으며 생을 유지하니까. 남의 생명을 먹고 사는데 어떻게 생이 치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살다 보면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 같은 순간이 있고,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도 있지만 자기 길을 찾는 노력은 계속해야 합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면 반드시 무엇은 버려야 합니다. 즉, 리스크를 져야 할 가치가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자기 길이라고 생각하면 눈 딱 감고 10년을 투자하세요. 난 ‘좋아하는 것을 못 찾았다, 지금 가는 길이 내 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끈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왜 10년이냐, 10년은 해야 그 일에 충분히 깊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죠. 이 10년 동안 하는 일에 대한 고통도, 즐거움도 넘어서게 되는 겁니다. 마치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과 비슷해요.”
그 다음은 구 소장이 말을 이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죠. 하다가 정이 든 사람이 대다수예요. 처음엔 ‘이 일을 하면서 살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느 순간 하기 싫고 그만두고 싶은 고비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언덕 어딘가에서 그치면 자기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좋아하는 일에도 고통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넘어서면 ‘뽕맛’을 알게 됩니다. 내게는 글쓰기가 그랬어요. 정말 쓰기 싫은 날도 있지만, 내게는 글쓰기가 최고입니다.”
물론 ‘재능’의 양은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큰 재능을 가졌다고 그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들 중에서도 재능이 있는데 노력하지 않아서 실망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에 비해 처음엔 별 볼일이 없었는데 활동을 하면서 성장의 폭이 큰 사람도 있습니다. 성실함은 미련하게 보일지 몰라도, 난 그게 좋아요. 나이가 먹고, 사람들을 많이 접할수록 재능이 아닌 ‘지속’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윤광준 선생도 말을 보탰다. “팔방미인이 밥 굶는다는 말이 틀리지 않아요. 재능이 많은 사람은 넘칠 만큼 많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제대로 발전시키는 것은 드물어요. 어느 순간 스러져 버리죠. 오히려 굼벵이들이 큰 성과를 내고, 오래 살아남습니다. 지속에는 재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분명 있습니다. 여러분도 열심히 자기 일을 하다 보면 지속의 힘이 인간에게 더 중요하다고 깨닫게 되는 지점이 있을 겁니다. 재능보다는 지향의 목표가 있는 이들이 더 나은 결과를 보여줍니다. 여기저기 눈 돌리지 말고 목표는 하나로만 잡으세요. 욕망을 단순화시킬수록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니까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의미나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마세요. 그저 그 일이 좋다는 맹목적인 이유로 덤벼들어 10년만 파고들면 멋진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첫날이 끝났다.
둘째 날, 나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날은 아름다운 풍경 사이를 여행했다면 둘째 날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한 날이었다. 하루를 같이 지내고,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친밀감은 자란다.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보다 버스를 타고, 밥을 먹고, 배를 타고, 술을 마시고, 산을 오르며 함께했던 사람들의 표정과 말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북엇국으로 아침을 먹고, 땅끝 해남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 버스를 탔다. 버스가 순천 시내를 빠져나가자 윤광준 선생이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냈어요.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지요. ‘지금까지는 내가 당신을 먹여 살렸으니까 앞으로는 당신이 나를 십 년 정도 먹여 살려 달라’고. 십 년 후에는 막연히 뭔가 될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그가 무엇을 했느냐. 놀았다. 그것도 정말 신나게. 하루 24시간이 놀기에도 바빠 잠을 줄여가면서 놀았다.
“나는 정말 혼자서 잘 놀아요. 나는 잠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그 시간에 놀아야 하니까. 뭐 하고 노느냐, 나는 음악하고 오디오랑 놀아요.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과 존재의 시간으로 나눌 수 있어요. 물리적인 시간은 말 그대로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존재의 시간은 의미의 시간이죠. 자기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시간이에요. 이 존재의 시간이 인간의 질적 행복을 결정하는데, 놀이가 바로 존재의 시간, 의미의 시간이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10년을 놀다 보니 세상에 무서울 것이 별로 없다. 10년 동안 하나의 대상을 정해놓고 재미나게 놀다 보니, 놀이와 세상에 연결되는 지점이 생기고, 놀아주길 바라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제는 놀이로 밥을 먹고사는 경지로, 전문가의 경지가 됐죠.” 그러면서 인생을 이상의 관점에서 볼 것을 권했다. “세상에서 실용이 차지하는 공간은 생각만큼 크지 않습니다. 이상의 관점을 쫓는 쪽이 훨씬 더 부가가치가 크지요.”
그 말을 구본형 선생님이 받았다. “무용의 유익함을 잊기 쉽죠. 밥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서 계속 말리고, 포기한 후에도 계속 끌리는 게 있죠. 그건 결국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거예요. 어느 책이고 철학의 기원을 그리스의 이오니아학파를 듭니다. 이 사람들은 ‘만물의 기원’을 연구한 사람들인데 이들이 위대한 것은 그들의 질문 때문입니다. 근원에 대한 질문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어요. 즉, 철학이 없으면 실용도 없는 겁니다. 여러분도 스스로에게 질문해 봐야 합니다. 내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거기에 시간과 노력을 투여하면 성과가 드러납니다. 자기 근본에 대해 알지 못하면 타인의 기준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아파트 평수나 차의 종류, 직장에서의 직급, 아이들의 성적…… 이런 것은 다 가질 수도 없고, 설사 다 가져도 삶의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나에 대해 무용한 질문을 던져 봅시다. 그러면 나를 살리고 나를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땅끝에서 보길도로
땅끝은 생각보다 시시하다. 땅끝만 본다면 말이다. 변변한 표지판도 없고,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는 전망대 정도가 전부. 세상의 끝도 아니고, 겨우 한반도의 끝인데, 무슨 별난 구경거리가 있겠는가. 항구 주변에는 작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고, 윤활유 드럼통과 그물들, 스티로폼 박스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고, 어느 항구도시에서 볼 수 있는 횟집들이 줄지어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숨어버린 듯했고 항구에는 배를 기다리는 낯선 사람들만이 있었다.
땅끝의 바다는 탁 트인 맛이 없다.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아담한 섬들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뒤를 돌아보면 산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고, 앞을 바라보면 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땅을 논과 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짓는 것처럼,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농사를 짓는다. 가까운 바다 이곳저곳에 양식장들이 마치 논밭처럼 펼쳐져 있었다.
갈두 여객터미널에 노화도로 가는 배가 들어오자 사람과 차들이 줄지어 배에 올랐다. 우리는 맥주 캔과 안줏거리를 손에 들고 바닷바람을 마시며 여행자 기분을 냈다.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바다다. 벽옥 빛깔의 바다는 잔잔했다. 듬성듬성 바둑판 모양의 전복 양식장, 미역을 채취하는 조그만 크레인이 달린 배들을 지나 배는 저 멀리 섬들만이 아른아른 펼쳐지는 바다를 향해 갔다. 태양빛은 따사로웠지만 바람은 거셌다. 선실에서는 배의 기우뚱거림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보길도와 노화도 사이에 보길대교가 놓이면서 보길도로 가는 시간이 단축됐다. 노화도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보길도로 들어섰다. 보길도에서의 일정은, 윤선도가 짓고 기거했던 세연정과 예송리 해변을 보기로 했지만, 갑작스럽게 계획은 변경됐다. 세연정을 돌아본 후, 뾰족산(보죽산)을 등반하기로 한 것.
윤선도의 흥과 멋이 남아있는 세연정
보길도를 위에서 바라보면 꽃처럼 보인다. 섬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꽃심을 둘러싼 꽃잎 같다. 반쯤 봉오리를 오므린 꽃 같은 섬. 윤선도는 제주도로 향하다가 보길도의 아름다움에 취해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섬이다. 보길도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보길도의 산과 들, 바다에 윤선도가 있다. 보길도는 윤선도의 빛나는 언어에 의해 재탄생한 곳이다.
이곳에서 고산은 그가 「어부사시사」에서 읊었던 것처럼 배를 타고 나가 술에 취하고 풍류에 취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한 계절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빼어난 보길도의 아름다움이 고산이란 시대를 풍미한 문인을 만나 국문학사의 최고 작품 「어부사시사」를 남겼으리라. 현실에서 절망한 그는 보길도의 자연에서 위안을 얻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그는 제일 먼저 좌절을 씹었으리라.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 보길도의 바다와 산과 동백꽃들을 바라보면서 과거의 기억을 잊고 현재에 충실했으리라.
보길도는 지난 기억을 모두 잊을 만큼 아름답다. 누구보다 자신의 재예에 자신만만했던 그, 세상 모두가 그 앞에 무릎 꿇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가 유배와 비난 상소, 병자호란의 치욕으로 점철된 날을 보내고도 여든다섯까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을 등진 그날부터 과거를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동백나무로 둘러싼 정원에는 연못이 두 개가 있고, 그 두 연못 사이에 세연정이 서 있다. 연못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이리저리 놓여있었고, 정자 위에서 바라보자 연못은 세상을 축소해 놓은 듯 보였다. 기녀들과 한량들과 소리와 시를 즐기던 윤선도는 이제 이곳에 없다. 세연정은 아담하지만 주인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취향이 반영된 곳. 세상을 등진 사람치고는 참으로 호화롭게도 은둔했구나 하는 ‘삐딱한’ 생각도 들었다.
여행의 절정, 뾰족산에 오르다
세연정에서 버스를 타고 보길도 서남쪽으로 향했다. 즉흥적으로 결정된 뾰족산에 가기 위해서다.
보길도 서쪽에 툭 튀어나온 산인 보죽산의 별명은 뾰족산이다. 산의 모양이 뾰족하게 생겨서이기도 하고, 섬에서 뾰족 튀어나와서 뾰족산이라고 부른다. 보죽산이라는 이름은 고산 윤선도가 지었다고 알려졌다. 맑은 날에는 제주도와 추자도를 볼 수 있다. 뾰족산은 아는 사람만 가는 보길도의 명소.
버스에서 내려 뾰족산을 바라보는 순간 한눈에 봐도 만만치 않은 덩치의 산이 앞을 가리고 있었다. 근육을 뽐내는 보디빌더 같은 산. 푸른 동백나무가 끝나는 산의 8부 높이부터는 가파른 바위가 이어졌다. 정말 25분에 올라갈 수 있을까, 막막한 심정으로 산길을 올라갔다.
산길은 동백나무의 터널. 빽빽한 동백나무의 가지와 몸통은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지팡이 삼아 쥐었는지 표면이 반들반들했다. 푸른 그늘이 몸을 감싼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터널이 끝나자 바다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정상을 바라보니 백여 걸음 정도. 운동부족이라 다리는 후들거리고 ‘허억허억’ 천식환자처럼 숨소리가 거칠었다. 하지만 정상이 보이니 힘이 났다. 바위 부분의 경사는 아래보다 더 가파르다. 까마득한 높이. 저 멀리 공룡알 해변과 전복 양식장이 보인다. 로프를 잡고 천천히 꼭대기를 향해 다가갔다.
정상에선 모두들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 밑에서 사서 들고 온 막걸리를 일회용 사발에 담아 한 잔씩 마시면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막걸리는 쌉쌀하고 시큼했고, 찬 바람은 더운 몸을 식혔다. 밑을 바라보았다. 이 높이를 순전히 다리 힘만으로 올라 왔구나. 처음에는 올라갈 수 있을까 의심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오다 보니 어느 새 정상이다.
“올라오니까 좋죠?” “네!” “낮은 산이라도 정상을 정복했다는 만족함은 대단해요. 이렇게 살면서 작은 성취를 맞봐야 큰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게 힘이 돼주는 거예요. 그런 느낌도 없이 끝도 없이 계속 노력만 해야 한다면 어떻겠어요? 중간에 포기하기 마련이죠. 동백나무 터널을 나오니까 기분이 어때요? 정상이 보이니까 더 힘이 나죠? 인생의 목표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작은 일을 하나씩 하나씩 성취하면서 좀 더 큰 목표로 나아가는 겁니다.”
굳이 일정을 바꿔 등산을 했는지 어쩐지 이해가 될 듯했다. 말과 글의 힘은 약하다. 사람들이 작심삼일인 것은 배운 것이 육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으로 배운 가르침은 잊혀지지 않는다. 구본형 소장은 ‘변화’하고 싶은 우리들에게 ‘성취의 즐거움’과 ‘작은 노력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를 조금이나마 맛보게 해 주었다. 25분의 짧은 등산, 단순하게 발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렇게 산 정상에 서 있다. 산 정상이 끝이 아니다. 정상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있고, 그곳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산이 있다. 여기에 오르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산이다.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내려가면 서운하잖아요. 근처에 있는 돌들을 모아 탑을 쌓고 거기에 자기 소망을 적어 넣으면 어떨까요?”
편편한 돌들을 찾아 작은 탑을 쌓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진지하게 자기 소망을 적어 내려갔다. 쪽지가 하나씩 탑 안에 들어갔다. 어떤 소망을 적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윤광준 선생의 전복요리를 맛보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동백나무 터널이 시작하는 곳에서 윤광준 선생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에 올라가기 전, 먹을 것을 살 때 윤 선생은 대파를 사오라고 부탁했다. 산에 올라가는 데 웬 대파? 궁금증이 풀어졌다. 남도의 특산물인 전복을 먹기 위해서였다. 선생님은 산에서 내려온 우리들을 위해 전복을 손질하고 계셨다. 전복 내장이 터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껍질을 벗기고, 얇고 길쭉한 모양을 썰었다. 자른 전복은 껍질에 담고, 파는 하얀 부분만 얇게 썰어 둔다.
먼저 전복을(초고추장을 찍어 먹어도 좋지만, 그냥 먹는 편이 더 맛있다) 먹고 나서 파를 먹는다. 미끄덩하면서도 쫀득쫀득한 전복살을 씹으면 희미한 소금맛과 함께 감칠맛이 배어나온다. 그리고 파를 먹으면 달큰하고 산뜻하다. 파 특유의 아리고 매운 맛이 전혀 없다. 특히, 전복 내장의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맛은 모두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 먹는 장소도 좋았다. 이런 절경에서 전복을 먹을 일이 과연 앞으로 몇 번이나 있을까? 눈도 입도 호사하는 순간이다. 여행에 참가한 모든 사람에게 잊지 못한 추억으로 남았고, 사람들은 윤광준 선생에게 ‘전복 윤광준’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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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 선생 | | 윤광준 선생의 전복 때문에 그날 저녁으로 나온 전복 회가 부당하게 낮은 평가를 받아야 했던 것 또한 이번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다.
서로가 행복해지는 감동을 주는 삶을 살자
공룡알 해변을 거쳐 저녁을 먹고 숙소인 예송정에 도착했다. 공룡알 해변은 해변에 있는 돌들이 공룡알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파도에 마모되어 표면이 매끄럽고 부드러운 광택이 나는 돌들이 해변을 채우고 있다. 기념 삼아 한두 개 가져가고 싶었지만 ‘벌금 300만원’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돌을 가져가는 사람이 워낙 많았나 보다.
‘숙소체험 극과 극’이라고 할까. 어제는 욕조와 침대, 평면 텔레비전이 있는 고급 호텔에서 묵었다면 오늘은 운치 있는 한옥 민박집이다. 텔레비전은 지직거리고, 더운 물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장점이 있었으니, 동백나무 숲과 해변이 마당처럼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다. 몽돌(검고 동글동글한 돌멩이)들이 모래 대신 깔려있는 예송리 해변에서는 차르륵차르륵 경쾌한 소리가 난다.
예송정에서 짐을 풀고 다들 마당으로 모였다. 두 번째 밤이자 마지막 밤이다. 드럼통에 불을 피워 삼겹살을 굽고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당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방으로 자리를 옮겨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자리가 파한 것은 새벽 세 시. 흐릿한 밤하늘에는 부연 그믐달이 떠있었다. 칠판에 난 분필자국 같은 그믐달.
기억에 남는 것은, 윤광준 선생의 ‘서로가 행복해지는 삶,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라’는 말. 삶은 약간 위험해야 재미있고, 살다 보면 악보 없는 연주를 해야 할 순간이 온다. 애드리브가 필요한 순간이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것입니다. 나침반을 보세요. 정확한 방향을 잡기 위해 계속 움직이잖아요?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을 겁내지 말고, 자기가 뭘 할 때 가장 행복한지를 안다면 그 길을 가세요.”
해남에서 윤광준 선생님과 이별하다
새벽 여섯 시 즈음,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깼다. 석석, 슥슥, 무엇인가를 썰고 있는 소리.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이 들었다. 해가 떴고,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예송정의 명물, 전복죽 냄새다. 방 안에 들어온 상을 보고, 새벽에 들었던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하얀 무나물. 채칼로 무를 썰었던 거다.
심심한 무나물과 묵은지를 반찬 삼아 전복죽을 비웠다. 전복이 많이 나는 동네답게 죽 속에는 커다란 전복 살점이 듬뿍 들어있었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세 끼 내내 전복을 먹은 셈인데, 질리지가 않았다. 여행 내내 보양식(짱뚱어, 장어, 전복)을 먹으며 다녀서 그런지 피곤함이 덜했다.
예송리 해수욕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셋째 날의 유일한 일정인 운주사로 향했다. 보길도에서 서울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린다. 둘째 날의 길을 되짚어 나왔다. 보길도에서 버스를 타고 노화도로, 노화도에서 배를 타고 해남으로, 해남에서 버스를 타고 운주사로.
윤광준 선생님은 해남에서 일 때문에 내려야 했다. 내리기 전 인사를 하면서 선생님은 ‘정들자 이별이라니, 정말 기분이 더럽다’고 말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쉰 살이 되던 날, 마음이 착잡했어요. 인생의 나머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요. 이제 내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은 10년 정도 밖에 없어요.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죠. 이제는 살 걱정만큼이나 죽을 걱정을 해야 하는 나이예요. 이게 인생의 비애인데, 시간이 많을 때는 시간의 가치를 모르고, 시간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열심히 놀려고 합니다. 기왕이면 여러분과 같이 놀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했던 ‘10년설’은 꼭 맞으니까, 여러분도 좋아하는 분야에서 10년만 꾸준하게 노력하세요. 어느 단계가 되면 좋아하는 분야로 밥 먹고 사는 일, 남을 도와주는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를 대면하는 곳, 운주사
도선이 세웠다는 설이 있는 화순 운주사는 천불천탑과 와불로 유명하고,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미륵정토가 구현되는 배경지이기도 하다. 운주사는 우리나라에 있는 어느 절과도 닮지 않은, 특색 있는 사찰로, 93개의 석불과 21기의 석탑이 한 절에 있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석불과 석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석불의 표정은 부처라기보다는 평범한 중생에 가까운,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
“왜 여행지에 화순 운주사를 넣었냐 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운주사에 가면 수많은 석불들이 있는데, 참 못생겼어요. 그것이 지금 ‘나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 나를 갈고 닦으면 대웅전에 있는 잘생긴 부처님처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득도하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게 미륵신앙입니다. 누구나 변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두 번째는 와불입니다. 와불의 편안한 표정을 보면서 휴식을 취했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이 오면 또 바쁘게 살아야 하니까요.”
운주사에 들어서서 여기저기 흩어진 불상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오랜 시간 방치된 탓인지 여기저기 부서진 석불도 많았고, 대충 조각하다 만 것 같은 석불도 있었다.
석불과 함께 석탑을 봤다. 유물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편편한 돌들로 무너지기 직전까지 쌓아 놓은 돌탑들이다. 무슨 소망을 빌며, 탑의 주인은 조심스럽게 돌들을 쌓았을까? 간절한 만큼은 저 높은 탑들에게 지지 않을 것이다. 어제 뾰족산에서 만들었던, 소망을 적은 쪽지를 부처님 사리처럼 봉인한 작은 돌탑을 떠올랐다. 지금 나의 모습과 되고 싶은 나의 모습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행복한가?
인간을 길을 만들고, 길은 인간을 떠나게 한다
운주사를 마지막으로 ‘구본형 소장과 함께 떠나는 남도기행’이 끝났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긴 시간만이 남았을 뿐이다.
운주사를 나오면서 눈에 띈 것은 나무로 지어진 ‘해우소(解憂所)’였다. 해우소의 뜻을 새기며 여행이라는 것은 일종의 해우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낯선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피곤한 몸으로 이곳저곳 움직이다 보면 현실의 고민은 옅어진다. 여행을 하면서 한결같이 무엇을 생각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여행은 ‘고상한 고민’보다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잘 것인가와 같은, 평소에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을 낯설게 생각해야 한다. 쓰지 않은 근육을 움직이면 피곤함은 두 배가 된다. 몸이 피곤하면 정신은 쉽게 몸의 편을 든다. 쓸데없는 고민들은 홍차에 넣은 각설탕처럼 녹아버린다. 노폐물을 후련하게 버리는 해우소처럼, 여행도 쓸데없는 고민들을 버리게 한다. 변비환자가 쾌변을 보는 듯한, 그런 후련함이 여행의 끝에 있다.
분명 이틀 전의 자신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인간은 그리 쉽게 변하는 동물이 아니니까. 인간은 충분히 고통스럽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 약은 존재다. 그래도, 우리가 걸었던 길에는 분명히 많은 것들이 버려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비어있는 자신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생각한다.
인간은 길을 만들고, 길은 인간을 떠나게 한다. 길에서 인간은 자기가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걸어가지만 결국은 자신이 뿌리박은 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모든 길은 미지의 세계가 아닌 일상의 세계로 통하는 법이다. 길에서 우리는 인간을 느낀다. 누군가 이 길을 만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갔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을 느낀다. 길을 걷고 있는 한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떠남과 만남』에 이런 글이 있다. 「우리는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고 버린 후에 되돌아오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없다. 오직 버리기 위해 떠난다. 소유한 것이 많으면 자유로울 수 없다. 매일 걸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배낭 하나도 무거운 짐이다. 무엇을 더 담아 올 수 있겠는가.」
그렇게 우리들은 길에서 자신을 비워냈다. 이제는 새로운 것을 채워 넣어야 할 때다.
* 감사의 말
여행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구본형 소장님, 재미있게 놀아주시고 잊을 수 없는 추억까지 선사해 준 윤광준 선생님, 자비로 포카리스웨트를 사서 ‘물보다 흡수가 빠른’ 칵테일을 만들어 주신 뿅가리 님, '풍경보다 사람이 좋고, 나이가 들수록 할 말이 없어진다'고 말한 왕언니, 동방신기의 멤버를 닮아 여행 내내 그렇게 불린 시아준수 님, 와인 테이스팅만큼 오묘한, 100년 묵은 빈티지 잉크 이야기로 모두를 웃게 했던 만년필 님, 소주와 맥주를 절묘한 비율로 섞은 폭탄주로 모두를 하나 되게 한 제조상궁 님, 입을 가리고 수줍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예뻤던 계란 한판 님, 딱 부러진 말투와 당당한 태도가 멋진 회계 언니, 감기로 여행 내내 고생했던 금돌 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공무원 준비 님, 기타 연주로 여행을 더욱 근사하게 해 준 아우성 님, 솔직하고 재주 많으신 IBM 님, 2박 3일 동안 누구보다 고생했던 을유출판사의 권오상 님, 윤석진 님, 최원준 님, 늦게 합류해 아쉬웠던 YES24의 미녀삼총사 최세라 님, 이수림 님, 김기옥 님, 여행 내내 세심하게 보살펴주신 투어매니저 이현석 님, 안전을 책임지신 김유복 기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동행이 있어 즐겁고 행복했던 2박 3일이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