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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생애와 사상.(2)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포덕 152(2011)년 11월 25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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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의 내용을 장별로 나눈 구체적인 분석.
서문(preface):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Imagine with John Lennon, a world with no religion.를 번역자가 P. 7.에서 인용된 존 레논의 ‘Imagine’이라는 노래의 노랫말의 한 구절인 ‘종교도, 국가도 없는 세상을,’에서 임의로 뽑아 서문의 제목으로 인용하고 있다. ‘망상이란 모순되는 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믿음을 고집하는 것, 특히 정신 장애의 한 증상’(The dictionary supplied with Microsoft word defines a delusion as 'a persistent false belief held in the face of strong contradictory evidence, especially as a symptom of psychiatric disorder')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나는(리차드 도킨스) 무신론자의 자긍심을 일깨우고자 한다. 무신론은 마음의 건전한 독립성 즉, 건강한 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가장 명석한 사람들, 지혜와 덕을 겸비한 사람들 중에 종교적 회의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된다면, 세상은 경악할 것이다.’라고 말한 19세기의 존 스튜어트 밀의 무신론의 진실을 보강하려 했다.
註 01; Imagine- John Winston Ono Lennon(1940, 10, 9. -1980, 12, 8.)이 1970년에, "The Beatles"가 해체된 다음 해인, 1971년에 솔로로 발표된 곡이다. Lennon은 비틀즈의 창립 멤버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영국의 록 음악가, 가수, 작곡가이자 평화 또는 반전 운동가이다.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의 공동 작곡을 통해 “로큰롤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음악을 썼다”는 평가를 받으며 영국 싱글 차트에서 폴 매카트니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성공적인 작곡가로 올라있다.
레논은 음악과 영화, 책, 그리고 회견과 인터뷰를 통해 그의 반항적인 성질과 통렬한 재치를 드러냈고, 평화 운동과 화가로서의 작품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틀즈 해체이후에 레논은 “John Lennon/Plastic Ono Band”와 “Imagine” 등의 앨범과 “Imagine”, “Give Peace a Chance”, “Love” 같은 20세기 대중음악의 상징적인 곡을 통해 성공적인 솔로의 경력을 쌓았다. 아들의 육아를 위해 스스로 은퇴 선언을 한 1976년부터 1980년 이후, 그는 “Double Fantasy”라는 앨범을 들고 컴백하지만, 앨범 발매로부터 한 달도 안 되어 1980년 12월 18일 미국 뉴욕에서 과격 팬이던 마크 채프먼의 총에 암살당한다. 그의 마지막 앨범은 1981년 그래미상에서 올해의 앨범 상을 수상했다. 레논은 사후인 1987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1994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고. 2008년에는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을 묻는 BBC의 설문조사에서 8번째로 선정되었다. 《롤링 스톤》지는 2004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50인”(The Fifty Greatest Artists of All Time) 중에서 레논을 38위로 선정했고, 2008년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에 5위로 선정하였다. 다음은 “Imagine”의 원문(原文)과 의역(意譯)의 가사 내용이다.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이 세상에 천국이 없다고 상상을 해봐요, 그렇게 생각하려고만 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예요. 발밑에는 지옥이 없고, 머리 위에는 빈 하늘만 펼쳐 있다고 상상을 해봐요.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ahaa ---
모든 사람들이 오늘 밤을 위해 살아간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아하---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국가가 없다고 상상을 해봐요. 그다지 어렵진 않을 거예요. 신념을 위해 죽이지도 않고, 또 종교마저 없다고 상상을 해봐요.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생상을 해봐요. ---그대.
You may say I′m a dream but I′m not the only you,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one
나를 몽상가라 하겠지요, 하지만 나만 이런 꿈을 꾸는 게 아니랍니다. 그대 언젠가 나와 같은 꿈을 꾸며 우리와 함께 할 날이 있길 바랄게요, 그러면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 하나가 될 거예요.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n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그대가 할 수 있다면 놀랄 일이지만, 아무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상상을 해봐요. 욕심낼 필요나 배고픔도 없고, 오직 인간에 대한 사랑만 존재한다고 상상을 해봐요.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 you.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을 해봐요.---그대.
주(註) 02; “존 레논의 노랫말처럼 ‘상상해보라. 종교가 없는 세상을.’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 폭탄 테로도. 십자군도. 마녀사냥 -중략- 북 아일랜드의 분쟁도. 명예살인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입은 채, 텔레비전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전도사(신은 당신이 거덜 날 때까지 기부하기를 원합니다.)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고대 석상을 폭파하는 탈레반도. 신성 모독자(冒瀆者)에 대한 공개 처형도. 속살을 살짝 보였다는 죄로 여성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행위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내 동료 데즈먼드 모리스는, 미국에서 존 레논의 노래를 부를 때에는 ‘종교 없는’ 이라는 구절을 종종 빼고 부른다고 했다. 심지어는 ‘한 종교는 있는’이라고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PP.7-8./ 여기서 ‘한 종교는’ 기독교를 암시하고 있다.-오암.
도킨스는 서문에서 ‘추측하건대 종교를 믿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종교에 불만을 갖거나, 믿지 않거나,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사악한 행위를 우려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부모의 종교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막연한 느낌과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종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당신이 그들 중 하나라면 이 책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이 책은 무신론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현실적인 열망이고, 용감한 행위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하여 이글을 썼다. 당신이 균형이 잡힌, 행복하고 도덕적이고 지적인 무신론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일깨우고자 하는 첫 번째 사실이다.(P.6.)' 라 하여 집필의 내용과 의도를 밝히고 있다. 도킨스는 독자들 중에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당신에게 일깨워주고 싶은 사실이 세 가지가 더 있다. 고 전제한 다음 계속해서 그 사유를 말하고 있다.
신이 존재한다는 가설이 우주에 관한 과학적 가설 중에 하나로서 다른 모든 가설들처럼 회의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역설한 2장을 읽고 불가지론과 무신론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마음을 바꾸라고 권하고 있는 도킨스는 신의 존재와 관련된 각종 논증들을 다룬 3장에 흥미를 가질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가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마치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온갖 다양한 종들을 자랑하는 생명은 또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겠는가?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4장을 읽고 깨달음을 얻기 바라며 생물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설계라는 환각은 설계자가 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통해 훨씬 더 경제적이고 우아하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두 번째로 일깨워주고 싶은 사실은 자연선택설과 같은 이론들이 지닌 힘이다.
어린 시절의 종교문제의 주제를 9장에서 다루고 있으며, 9장 속에는 내가 세 번째로 일깨워주고 싶은 사실이 들어 있다. 아이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정치문제는 물론이고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이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정중히 지적하기를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 아이들은 너무 어려서 자신이 가톨릭교도 아인인지 이슬람교도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이슬람교 아이 같은 것은 없다. 가톨릭 아이 같은 것은 없다. 종교화하지 않고도 현실세계의 장엄함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줄 한 가지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 이 책 전체의 의도이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영감을 주었던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다.
내가 네 번째로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은, 무신론자의 자긍심이다.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구차하게 변명해야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나서야 하는 일이다. 무신론은 거의 언제나 마음의 독립성 즉 건강한 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음 깊숙이에서는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알고 있지만 가족 또는 때에 따라서는 자기 자신에게까지 그 사실을 인정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어느 정도 ‘무신론자’라는 단어가 무시무시한 꼬리표를 인식하도록 꾸준한 노력이 진행된 결과이기도 하다. 라고 진단하고 있다. / 이상은 PP. 6-11.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 다음은 장별로 요약 기술한 내용이다.
Ⅰ. 대단히 종교적인 불신자.(A deeply religious non-believer); PP. 22-47.
/ 믿음을 '믿다'|종교가 모든 것을 이긴다.
‘나는 인격신을 상상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신은 우리의 불충분한 감각으로 세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경외심을 품게 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라고 말한 아인슈타인과 같은 생각에 대하여, 세상을 창조한 인격신을 믿는 일반적인 종교인은 종교와 자연의 경이로움을 찬양하면서 그런 기준으로 종교를 구분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 없이도 경이로움을 느끼고 감동하고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 믿음을 '믿다'.
우리가 무지개의 신비를 풀었다고 해도 그 경이감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우리 시대의 과학자들이 종교적인 말을 하는 듯이 보여도, 그들의 신념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대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들러난다.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은 분명히 그렇다. 아인슈타인의 “종교 없는 과학은 불구(흉기)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미신)이다”라는 말이 흔히 인용되고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 내 안에 종교적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 밝혀 낼 수 있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무한한 찬탄이다.” “나는 매우 종교적 불신자이다. 인격신이라는 개념은 내게 아주 이질적이며 심지어 소박하게 까지 보인다.”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견해는 유신론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유신론은 초자연적인 지성을 믿는 것이다. 그 지성은 우주를 창조했고 여전히 자신이 창조한 것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이신론(理神論)은 초자연적인 지성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만드는 일에만 관여할 뿐,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범신론은 초자연적인 신을 믿지는 않지만, 신이라는 단어를 우주나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이신론은 약한 유신론이고 범신론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에 선택을 했을까”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우주가 다른 식으로 시작될 수 있었을까 하는 범신론적인 것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의 배후에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숭고함이 간접적으로 그리고 희미하게만 우리에게 전해진다고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교적이다.” 라고 한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종교는 초자연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은 그런 상황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신이라는 말이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 법칙들을 의미한다면, 그런 의미의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 신은 정서적인 만족을 주지 않는다.--- 중력법칙을 향해 기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라고.
그러나 나는 물리학자들이 비유적인 의미로 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았으면 한다. 물리학자들의 비유적 또는 범신론적 신은 성서에 나오는 그리고 사제와 이맘과 랍비가 말하는 신 즉 인간사에 간섭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우리의 생각을 읽고 죄를 벌하고 기도에 답하는 신과 아득히 멀다. 둘을 일부러 혼동시키는 것은 지적 반역행위다.
▶ 종교가 모든 것을 이긴다.
성(性)이나 번식에 관한 윤리가 논쟁거리가 될 때마다 몇몇 종교집단의 대표들이 주요 패널로 참석하고는 한다. 왜 우리 사회는 그들이 철학자나 의사나 변호사에 필적하는 전문지식을 지닌 것처럼 그런 논쟁거리가 생길 때 마다 그들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것일까? 미국에서는 의료용으로 대마초를 사용하는 환자는 연방법으로 기소대상이지만 ‘통일된 영혼’이라는 교파의 신자들은 환각제를 함유한 차를 마셔야 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하기 때문에, 환각제를 사용을 금지하는 법률에 저촉을 받지 않는다. 우리가 인종 차별 등의 편견을 주장하면, 의례 그 편견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하지만 종교인에게 신앙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면, 당신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꼴이 된다.
2005년 9월 덴마크의 신문에 마호메트를 묘사한 12컷 짜리 만화가 실렸다. 이슬람 세계에서 수많은 성토대회가 열렸고,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상처를 입었다고 흥분하였지만 이들은 아랍 언론에 실리는 판에 박힌 유대인 비방 만화들은 문제 삼지 않는 극명히 상반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극히 세속적인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걸맞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Ⅱ. 신 가설(神 假說; The God Hypothesis); PP. 50-119.
/ 신은 망상?|다신교|일신교|세속주의: 미국의 국부들과 종교|불가지론자, 불신자의 또 다른 이름?|과학 너머에 종교가 있다?|기도의 힘|"적의 적은 우리의 친구"|외계인과 신.
"세상을 창조한 인격신이 존재한다." 라는 믿음을 과학적 가설로 취급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신의 존재"가 명확히 입증되거나 반증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개연성(확률)을 따져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신은 망상?
구약성서의 신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자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어린 자식들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로 나온다. 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더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기독교를 잘 알고 있었던,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도 “기독교의 신은 잔인하고 복수심 많고, 변덕스럽고, 불공평한, 끔찍한 성격을 지닌 존재다”라고 하였을 정도이다.
이 책은 ‘우주를 설계한 초자연적 지성이 있다.’ 는 가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견해를 지지한다. 무엇인가를 설계할 정도로 복잡성을 지닌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 과정의 최종 산물로 출현하는 것이다.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나중에 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신은 착각이다. 그리고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유해(有害)한 착각이다.
▶ 다신교
다신교에서 일신교로의 진보? 그러면 일신교에서 신이 하나 더 삭제되면 무신론이 될 것이다 ./ 이븐 와락크(Ibn Warraq). 힌두교는 사실 다신교가 아니라, 위장된 일신교이다. 창조자인 브라흐마를 비롯하여 많은 신이 있지만, 수 백 명의 신들은 모두 한 신의 다른 모습이거나 화신이기 때문이다. 다른 학문과는 달리 신학은, 1800년 동안 발전이 없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이에 대해 말했다. “이해 불가능한 명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조롱이다. 이성이 작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개념이 명확해야 한다. 교인들 누구도 명확한 삼위일체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칭 예수의 사제라는 협잡꾼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종교인들이 어떤 증거도 없을뿐더러 증거가 있을 수 없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지나치게 확신을 가지고 단언한다는 것이다. 아마 삼위일체설이라는 분야가 그렇듯이, 그저 조금 다를 뿐인 견해들에 대해서는 유독 심한 적대감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신학적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신론을 붙들고 집적거리다가 오히려 다신교가 되어 버린 것은, 로마 가톨릭이다. 우선 삼위일체에 거의 이름뿐인 마리아가 합류해 있다. 마리아는 거의 신에 버금가는 기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 만신전(萬神殿)은 가톨릭 공동체의 포럼에서 5,120명의 성인들의 목록과 그들의 전문분야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여 합류하면서 더 확대된다. 그리고 네 무리의 천사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전통들과 세계관을 풍분 다양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부터 파스칼 보이어의 “설명된 종교”나 스콧 애트런의 “우리가 믿는 신들”에 이르기까지 인류학적으로 해박한 저서들은 미신과 종교의식이라는 기이한 현상학을 흥미롭게 상세히 기술한다. 그런 책들을 읽어보라. 그러면 인간이 얼마나 잘 속는지 놀랄 것이다. 나는 어느 특정한 형태의 유일신이나 여러 신을 공ㄴ격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디에선가 날조(捏造)되었거나 언젠가는 날조될 초자연적인 모든 것, 모든 신을 공격한다.
▶ 일신교.
우리 문화의 중심부에는 일신교라는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거대한 악이 자리하고 있다. “구약성서”라는 야만적인 청동기 시대의 문헌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3가지의 반인간적인 종교가 나왔다. / 고어 바이델. 유대교는 원래 사막부족의 배타성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유독 사나운 신을 섬기는 한 부족의 신앙이었다. 바울은 이 보다는 덜 무자비하며 덜 배타적인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기독교를 창시하였다. 몇 세기 뒤 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유대교 본연의 비타협적인 일신교로 회귀하여 이슬람을 창시하고, 유대교와 기독교 경전을 차용하여 코란을 만들고, 군사 정복을 통해 신앙을 전파한다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덧붙였다.
기독교의 사법제도는, 15세기 동안 재판에 적용되어 왔다. 어디에서든 성직자들은 오만함과 나태함을, 평신도들은 무지와 굴종(屈從)을 보여 왔다. 그리고 모두 미신, 편협한 신앙, 종교 박해를 가져 왔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등대가 교회보다 유용하다.”고 했고 존 애덤스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상의 것은 종교가 없는 세계일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뒤 섞이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부른 종교를 만들어 냈다.” 그는 제퍼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인류의 역사에 기록된, 슬픔을 악용한 사례들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이지요. 그 슬픔이 나은 재앙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 세속주의: 미국의 국부들과 종교.
로버트 셔먼(Robert Sherman)이라는 기자가 아버지 부시에게 무신론자인 미국인들도 동등한 시민권과 애국심을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는 지를 물었을 때에 어떤 답을 했는지 읽었다면 대경실색(大驚失色)했을 것이다. “아니요. 나는 무신론자들을 시민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들을 애국자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곳은 신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셔먼의 기사가 정당하다고 가정하고 ‘무신론자’들 대신 ‘유대인들’이나 ‘이슬람교도들’ ‘흑인들’ 이라는 말을 넣어 보자. 그러면 오늘날 미국의 무신론자들이 견뎌야 하는 편견과 차별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나탈리 앤지어가 뉴욕타임TM에 쓴 “한 외로운 무신론자의 고백”이라는 글은 오늘날 미국에서 무신론자로서 겪는 고립감을 서글프면서도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미국의 하원은 435명, 상원은 100명이다. 이들이 다민족 다문화 국가인 집단 전체를 대표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면, 통계적으로 그들의 상당수는 무신론자이어야 한다. 세속적인 인도를 꿈꾸었던 간디는 스스로 “나는 힌두교도이며, 이슬람교도이며 기독교이며 불교도다”라고 하였다. 이어 네루는 “많은 신앙과 종교를 지닌 인도 같은 국가에서는 세속주의를 토대로 하지 않으면 진정한 민족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 不可知論者(Agnosticism), 불신자의 또 다른 이름? 생략
▶ 과학 너머에 종교가 있다?
우리가 과학자로서 신에 관한 논평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창조적인 관리자가 있는 우주는 그것이 없는 우주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왜 그것이 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천문학자인 마틴 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도대체 왜 무엇인가가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방정식들에 생명을 불어 넣고 그것들을 현실 우주로 구현시킨 것이 무엇일까? 그러나 그런 질문들은 과학 너머에 있다. 그것은 철학자나 신학자의 영역이다.” 신학자들이 어떤 전문지식이 있기에 과학자들이 할 수 없는 심오한 우주론적 질문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인가? 왜 과학자들은 자신들 보다 신학자들이 그런 질문에 대답할 자격을 더 많이 갖춘 것도 아닌데, 비겁할 정도로 공손하게 신학자들에게 그런 질문을 떠넘기는 것인가? 과학은 ‘어떻게’ 라는 질문에만 관심이 있고, 신학은 ‘왜’라는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있다는 말은 이제 지겹도록 진부하다. ‘왜’로 시작되는 모든 문장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 추상은 무슨 색깔일까? 희망은 무슨 냄새일까? 설령 그 질문이 진정한 것이라 해도 과학이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종교가 답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아직까지 신학이 하나의 학문이라고 가정할 타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종교가 인간의 지혜에 기여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그렇다. 게다가 어느 종교에게 그런 권리를 넘겨주겠다는 것인가? 나는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기적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물론 기적은 과학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조건으로서 기적의 이행을 요구한다. 고인이 된 벨기에의 국왕은 낙태에 반대 했다는 이유로 성인 후보자에 올라 있다. 현재 그의 사후에 그에게 기도한 사람들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났는지를 놓고, 집중적인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농담이 아니다. 종교가 과학의 영토에 발을 들여 놓고 현실 세계에 관여하는 순간,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기적이 없는 종교는 대다수의 유신론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임을 유념하자. 기적도 없고 기도자에게 응답도 하지 않는 신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기도하다’ 라는 동사에 대한 앰브로즈 비어스의 재치 있는 정의가 있다.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 우주의 법칙을 무효화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 기도의 힘.
최근 종교인이며 저명한 물리학자인 러셀 스태너드가 템플턴 재단의 후원(240만 달러)으로 환자들을 위한 기도가 회복을 돕는다는 주장을 실험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1,802명의 심장병 환자를 세 무리로 나누고 첫 번째 집단은 기도를 받았으나 그 사실을 모르게 했고, 두 번째 집단은 기도를 안 받았고 그 사실도 모르게 했고, 세 번째 집단은 기도를 받았으며 그 사실을 알게 했다. 2006년 4월 미국 심장학회지에 발표된 연구 결과는 명쾌했다. 기도를 받은 환자들과 안 받은 환자들 간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한편 자신이 기도를 받았다는 것을 안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심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이 연구가 실패로 끝나자 옥스포드 대학의 신학자인 리처드 스윈번은 신은 선한 이유로 한 기도에만 응답한다면서 그 연구에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아무튼 신의 존재 증거는 너무 많으며, 너무 많다는 것은 우리에게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 적의 적은 우리의 친구. 는 생략.
▶ 외계인과 신. 은 생략.
Ⅲ.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 (Arguments for God's existence); PP. 122-172.
/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존재론적 논증과 연역적 논증들|아름다움 논증|개인적 '경험' 논증|성서 논증|독실한 과학자 논증|파스칼의 내기|베이스 논증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 등을 포함하여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대표적 논증들을 비판함으로써 신 존재의 개연성을 낮추는 시도를 하고 있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
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신에 대한 막연한 정의를 내렸을 뿐이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그 외에 아무런 증거도 없는 말장난일 뿐이다. 논리학자들은 전능(全能)과 전지(全知)가 상호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신이 전지하다면, 그는 자신의 전능을 발휘하여 우주 역사의 경로에 미리 개입하여 어떻게 바꿀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개입하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가 전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즉, 신은 역사에 개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존재론적 논증과 연역적 논증들. 생략
▶ 아름다움 논증. 생략
▶ 개인적 경험 논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눈으로 신이나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신을 믿는다. 혹은 신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말을 걸기도 한다. 요크셔의 살인마 피터 섯클리프는 여자들을 죽이라는 예수의 목소리를 또렷이 들었다고 한다. 조지 W. 부시는 신으로부터 이라크를 침공하라는 말을 들렀다고 한다. (딱하게도 신은 거기에 대량살상 무기가 없다는 계시를 내려 주지는 않았다). 샘 해리스가 <신앙의 종말>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에게는 합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갖가지 믿음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그들의 믿음이 대단히 흔할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종교적’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미친’, ‘정신병적’, ‘망상’이라고 부를 가능성이 높다. 수가 많으면 분명 제정신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우주의 창조자가 당신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그가 모르스 부호처럼 빗방울로 창문을 두드려 당신에게 이야기 한다는 믿음은 정신병이라고 보는 것은 역사적인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종교인은 일반적으로 미치지 않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절대적으로 미친 짓이다”.
2001년 9월 11일 독실한 신자들은 뉴욕 쌍둥이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속에서 사탄의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 유포된 한 장의 사진이 그 미신을 뒷받침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는 증거는 없다. 인간의 뇌는 모형 구축에 탁월하다. 잠을 잘 때에는 그것을 꿈이라고 한다. 깨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상상이라고 하지만 유독 생생할 때에는 환각이라고 한다.
▶ 성서 논증.
19세기 이래로 신학자들은 기독교 복음서들이 현실세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믿을 만한 문헌들이 아니라는 압도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 쓰여 진 것들이다. 심지어 예수의 삶에 대해 거의 언급을 하지 않은 사도 바울의 서간들 보다 한참 뒤에 쓰여 진 것들이다. 그 뒤로 모든 복음서들은 종교적 의도를 지닌 오류에 빠지기 쉬운 필경사들을 통해 복사되고 또 복사되었다.
종교적 의도가 스며든 사례로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당시의 전설과 헤롯왕이 유아들을 대량 학살한 당시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예수의 사후 복음서가 쓰일 당시에는 예수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예언에 따라 (미가서 5장 2절)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추종자들이 놀랐다고 언급하고 있다. 누가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가 과세 목적으로, 모든 유대인들을 ‘자신의 동네’로 돌아가라는 포고령을 내렸다고 말한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으므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다윗이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마리아와 요셉보다 거의 1,000년 전의 인물이다. 도대체 로마인이 요셉에게 1,000년 전에 먼 조상이 살았던 동네로 가라고 할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실제로 인구조사가 있었지만 이것은 헤롯왕이 사망한 후인 서기 6년의 일이었다. 폭스는 ‘누가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며 모순투성이다.’라고 결론을 지으면서도 미가서의 예언을 충족시키려 한 누가의 욕망에 공감을 표한다. 로버트 질룰리(Robert Gillooly)는, 동쪽의 별, 처녀 출산, 왕들의 아기 숭배, 기적, 처형과 부활, 승천 등의 예수의 전설을 구성하는 내용들이 모두 지중해와 근동지역에 이미 존재했던 다른 종교들로부터 빌려온 것들임을 보여준다.
성직자들이 공인되지 않은 복음서들을 제외시킨 것은 아마 그것들이 네 개의 정전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예로 <도마서>에는 예수가 아이였을 때에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친구를 염소로 변하게 하고, 진흙을 참새로 바꾸고 나무토막을 길어지게 하여 아버지의 목수 일을 도왔다는 등의 마법의 능력을 남용하였다는 일화들이 실려 있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 The Da Vinci Code>와 복음서들의 유일한 차이점은 복음서들이 오래된 소설인 반면, <다빈치 코드>는 현대 소설이라는 것뿐이다.
▶ 독실한 과학자 논증.
지적으로 저명한 인물들중 대다수는 기독교를 불신하지만, 그들은 대중에게 그 사실을 숨긴다. 혹시 수입원을 잃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 버트런드 러셀.
1998년 Nature지에 실린 글에는 미국국립 과학 아카데미에 선출된 저명한 미국 과학자들 중 인격신을 믿는 사람은 7%에 불과하다고 나와 있다. 이 보다 덜 유명한 과학자들 중에는 약 40%가 인격신을 믿는다고 한다. 일반국민의 신앙심과 지적인 엘리트의 무신론이 비율상 정반대라는 것이다.
▶ 파스칼의 내기.
수학자 파스칼은 신이 존재할 확률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잘못 추정하였을 때에 닥칠 대가가 더 크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신을 믿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옳다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이고, 당신이 틀리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테니까. 반면에 당신이 신을 믿지 않았을 때 ,당신이 틀리다면 영원한 천벌을 받을 것이고, 옳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신을 믿어라.” 하지만 내가 믿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도 나로 하여금 실제로 믿게 할 수는 없다. 파스칼의 내기는 신을 믿는 척하는 것에 관한 논증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당신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신은 전지한 신이 아닌 편이 더 낫다. 그렇지 않다면 사기(詐欺)를 꿰뚫어볼 테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신을 기쁘게 하고 싶을 때에 해야 하는 일들 중의 하나가 그를 믿는 것이라는 개념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걸고 그를 숭배하고 그에게 헌신하고 그를 위해 싸우고 죽는 일에 당신의 고귀한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에 건다면 더 낫고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 베이스 논증. 생략.
Ⅳ. 신이 없는 것이 확실한 이유 (Why there almost certainly is no God); PP. 174-246.
/ 보잉 747과 고물 야적장|각성제로서의 자연선택|환원 불가능한 복잡성|틈새 숭배|인본 원리: 행성편|인본 원리: 우주편|케임브리지의 막간극.
인본 원리,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등 두 가지 도구를 이용하여, 신이 존재를 옹호하기 위해서 제시되는 유신론자들의 설득력 있는 대중적인 논증으로 사용되는 "설계자 논증"의 위장형태인 비개연성(improbability)이라는 대규모 논증을 비판하고, 역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음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적 증명을 "궁극적 보잉 747 논증"이라 부르며 논증을 펼치고 있다. 3장과 4장을 합치면 "신이 있다는 논증은 모두 틀렸고(3장), 신이 없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4장)"로 요약할 수 있다.
▶ Boeing 747과 고물 야적장.
‘보잉 747과 고물 야적장’이란 명칭을 사용했다고 알려진 호일은 ‘생명이 지구에 출현할 확률은, 고물 야적장을 휩쓰는 태풍이 운 좋게 보잉 747을 조립해 낼 확률과 별 반 다를 바가 없다. 고 말했다. 다윈주의를 깊이 이해하면 설계가 우연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손쉬운 가정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하며 서서히 복잡성이 증가해가는 계단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윈 이전에도 흄 같은 철학자들은 생명의 비개연성이 반드시 생명이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며, 그저 대안을 떠올릴 수 없다는 의미임을 간파했다. 다윈이후 우리 모두는 설계라는 개념자체가 의심스럽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설계라는 환각은 이전부터 우리를 사로잡아 온 함정이며, 이런 사실을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서 우리를 깨웠으니 우리는 거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고 설득시키고 있다.
▶ 각성제로서의 자연선택. 생략.
▶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란 어떤 것의 부분 중에서 단 하나라도 빠지면 모든 기능이 정지되는 경우를 말한다. 창조론자 베헤(Michael J. Behe)가 1996년에 창안한 개념(단어)이다. 창조론자들은 모든 생명체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가졌으므로 신이 창조했다는 주장을 한다. 비개연성 논증을 전개하고자 하는 창조론자들은 언제나 생물학적 적응이 ‘대박’ 아니면 ‘쪽박’의 문제라고 가정한다. ‘대박’ 아니면 ‘쪽박’의 오류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 IC)'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진정으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면 다윈의 이론이 파탄날 수 있다는 창조론자들의 생각은 옳을 수 있다. 다윈 자신도 이런 문제에 대하여 ‘무수하게 연속된 미미한 변형을 거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없는 복잡한 기관을 보여줄 수 있다면, 내 이론은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례를 전혀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다윈이후 필사적인 노력으로 끈질기게 노력했지만, 다윈이 지적한 그런 사례를 찾아내지 못했다.
아무튼 진정으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 발견된다면 다윈의 이론은 무너지겠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이 지적 설계론도 무너뜨리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것은 이미 지적 설계론을 붕괴시켰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말해 왔고 앞으로도 말하겠지만 우리가 신에 관해 아는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신이 환원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리라는 것이다.
▶ 틈새 숭배.
창조론자들은 현재의 지식이나 이해에 나 있는 틈새를 열심히 찾아다닌다. 틈새가 발견되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신이 채워야 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틈새의 신’(God of Gaps)을 비판한 신학자 본회퍼 같은 사려 깊은 신학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과학이 발전할수록 틈새가 줄어들며, 결국 할 일이 전혀 없고 숨을 곳도 없어짐으로써 신이 위태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다르다. 무지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 무지를 앞으로 정복할 과제로 보고 기뻐하는 것이 본질적인 한 부분이다.’ 라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수수께끼에 기뻐하며 그것이 신비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과학자들은 다른 이유로 수수께끼에 기뻐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할 일을 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창조론자들은 보이는 화석 기록상의 틈새에 애착은 그들의 틈새 신학 전체를 상징한다. 진화에서든 뭐든, 다른 과학 분야들에서든, 어떤 이야기의 모든 단계들이 하나하나 완벽한 증거자료를 갖추어야 한다는 요구는 지극히 비논리적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범죄자임을 입증하려면, 살인자가 범죄를 저지르기까지의 그 모든 단계가 완전한 비디오 기록처럼 한 장면도 빠뜨리지 말고 기록되어야 한다는 논리와도 같다. 사체들 중 화석으로 남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일부 중간 단계의 화석이 없더라도 분자유전학과 지리적 분포같은 다른 원천들로부터 얻은 압도적일 정도로 강력한 증거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진화론은 하나의 화석이 엉뚱한 지층에서 발견된다면 그 이론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어떤 창조론자는 이런 말을 했다. 고 한다. 열성적인 폰회퍼주의자들로부터 진화를 어떻게 반증할 수 있는지 말해보라는 도전장을 받은 J. B. S 할데인은 “선캄브리아대의 토끼 화석이면 돼.” 그런 시대가 어긋난 화석이 진짜로 발견된 일은 없다. 비록 창조론자들이 석탄기 단층에서 인간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다거나 인간의 발자국이 공룡의 발자국에 사이에 섞여 있었다는 등의 근거 없는 전설을 제시하곤 한다고 내뱉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니케아 공회의 조정자, 고백록의 저자, AD 353-430)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더욱 위험이 큰 또 하나의 유혹이 있다. 바로 호기심이라는 병이다. 자연의 비밀들,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며,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고, 어느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비밀들을 탐구하여 규명하라고 우리들을 충동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윈주의는 다른 식으로 우리의 의식을 일깨운다. 진화한 기관들은 뛰어나고 효율적이지만 종종 결함도 보인다. 그것은 그 기관들이 진화된 것일 경우 예상되는 일이며, 설계된 것일 경우에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다른 책에서 그런 사례를 다른 적이 있다. 쓸데없이 목적지까지 멀리 우회함으로써 진화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되돌이 후두신경’이 한 예다. 요통, 탈장, 자궁 탈출증, 굴염에 이르기 까지 인간의 질병 중 많은 것이 네 발로 걷도록 다듬어진 몸을 그대로 지닌 채 두발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물들이다. 포식자들은 먹이를 잡기 위해 아름답게 설계된 듯하며, 먹이 감들은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설계된 듯하다. 신은 도대체 누구 편일까?
▶ 인본 원리: 행성 편.
인간 원리, 혹은 인본 원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만약 세계에 수많은 우주가 존재하고, 수많은 자연 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인간은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된 세계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보는 자연 법칙이란 인간이 나타날 수 있는 법칙을 가진 우주의 것만 보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만약 우리에게 있어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태양과 같은 항성의 주위에는 골디락스 영역(Goldilocks zone)이 있다.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는 그런 영역에 있는 행성에는 물이 있을 수 있다. 골디락스 영역에서처럼 설계가설의 대안인 인본 가설은 통계적이다. 과학자들은 많은 수에 호소한다. 우리 은하에는 10억~300억 개의 행성들이 있고 우주에는 약 1,000억 개의 은하가 있다고 추정되어 왔다. 이제 생명의 기원 즉, DNA에 상응하는 무엇인가가 자발적으로 출현이 진정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이었다고 가정해보자. 행성 10억 개 중 하나에서만 일어날 정도로 개연성이 없는 사건이라고 가정하자. 10억 분의 1일이라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낮은 확률일지라도 생명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행성은 10억 개는 족히 된다. 물론 지구도 그 중 하나다.
주(註) 00; 골디락스 존(Goldilocks zone)/ 태양과 같이 어떤 항성은, 항성 주위에 있는, 토성 주위를 감싸고 있는 둥근 원과 같은, 황금빛의 띠로 된 구역으로,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그러한 영역에 있는 행성에는 물이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 얇은 띠 모양의 궤도대(軌道帶)보다 더 멀어지면 물이 얼어붙고, 더 가까우면 물이 끓는다고 한다. 또 생명 친화적인 궤도는, 반드시 원형이어야 한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 인본 원리: 우주 편. 생략.
▶ 케임브리지의 막간극.
최근에 과학과 종교에 관한 케임브리지의 한 학회에서 궁극적인 747 논증을 전개한 것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신의 단순성 문제에 관해 생각의 접점을 찾으려다가 그 노력이 헛수고처럼 되어버렸지만 그런 경험은 많은 것을 시사(示唆)하는 바가 있었다. 이 행사를 취재하던 호건은, 이 행사가 의도한 바와는 좀 다르게 온라인 ‘과학 살롱’이라 불리어지는, 존 브록만의 웹사이트인 에지(Edge)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신앙인들과 대화를 나눌수록 왜 일부 지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종교를 받아들이는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중략- 내 확신은 변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변했다. 한 동료는 도킨스의 종교분석을 듣고 나서 자신의 신앙이 흔들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템플턴 재단이 그렇게 내세관을 종교가 없는 쪽으로 미미하게나마 한 걸음 내딛게 했다면 그것이 어떻게 나쁘다고 하겠는가? 이 기사가 발표되자 각양각색의 반응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는 이론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의 견해도 있었다. 다이슨이 템플턴 재단으로부터 템플턴 상을 수락 연설문에서 말한
‘나는 삼위일체 교리나 복음서의 역사적 진실 여부에 별로 개의치 않는 많은 기독교들 가운데 하나로 만족한다.’ 말을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물리학자 중 한 명이 종교를 인정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다이슨이 말한 것을 인용하여 맞대응을 했다. 그가 기독교인처럼 말하고 싶었다면, 왜 불가지론자 과학자가 할 법한 말을 한 것인가? 나는 다이슨이 수락하는 연설문에서 문장들을 인용하여 템플턴 재단 임원에게 문답형 형식의 대화법으로 꾸며 빈정거리듯이 질문한 적이 있다.
오 당신도 좀 더 심오한 것을 원한다는 건가요? 어떻습니까?
“나는 마음과 신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우리의 이해범위를 넘어섰을 때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할 이야기는 충분히 했으니, 물리학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이런, 충분하지 않다고요. 그럼 이런 말은 어떻습니까?
“20세기의 암울한 역사 속에서도 나는 종교에서 진보의 증거를 봅니다. 우리 세기의 악을 대변하는 두 사람, 히틀러와 스탈린은 둘 다 공공연한 무신론자였습니다.”
이제 물리학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라고.
리처드 도킨스의 생애와 사상.(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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