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올해 우리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카자흐스탄 고고학연구소 아스타나 지소와 함께 신라 돌무지덧널무덤과 돌을 쌓아 만든 중앙아시아 초원 적석계(積石系) 무덤 사이의 관련성을 찾기 위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를 했다. 올해는 카자흐스탄 남동부 '카타르 토베 고분군'에 있는 고분 2기를 발굴했으며 내년에는 카타르 토베 고분군에 대한 제2차 발굴조사와 몽골 알타이 지방의 파지릭 무덤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바로 그 파지릭 무덤에서 발굴된 말, 그 말은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스키타이식 무덤에서 나왔다. 이 말은 12살에서 15살 먹은 평균키의 암말로 약 13 hands(=52인치) 정도 크기였다. 이 말은 짙은 갈색이며, 현대의 투르크멘종의 대표적인 빨간색을 띄고, 화려하게 장식된 뼈, 나무, 가죽, 펠트로 안장을 얹었고 뼈로 장식한 스태그 마스크와 말꼬리를 묶는 긴 줄이 있었다. 말의 키를 제외하고 이말은 현대의 Akhal-Teke(투르크멘종)으로 알려진)와 아주 흡사하였다. Akhal-Teke, 이 말이 무슨 말인줄 아시는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스키타이 시대 이미 이런 말을 다루고 말도구를 갖추었다니. 그들이 세계를 어느 시대 지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말을 지배한다는 것은 속도를 활용해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했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말을 지배한 나라는 늘 주변 국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중 말을 하겠지만 중국은 흉노족 등 유목 민족을 두려워했고, 그들에게 왕조를 빼앗기고 되찾는 과정을 겪었다. 우리가 삼국지를 통해 잘 아는 말들, 초한지의 주인공 항우의 '오추마', 삼국지에서 여포가 타던 '적토마'가 대표적이다. 적토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고 해서 '천리마'라는 명칭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말은 그 누가 뭐라 해도 '한혈마(汗血馬)'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붉은 피땀을 흘린다는 전설의 말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유명한 말이 아닌가.
나중 또 말을 하겠지만 평소 말을 좋아했던 한(漢) 무제(武帝)는 한혈마를 얻기 위해 서역 정벌에 나섰다. 2차 정벌에서 겨우 그는 서역의 대완(페르가나)으로부터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양마(良馬) 수 십 마리, 중마(中馬) 3,000마리를 얻어 개선을 했다.이 양마가 바로 한혈마라고 사서에 기록돼 있다. 말을 좋아하는 무제는 한혈마를 서극천마(西極天馬)라 일컬으며 노래를 지어 칭송했을 정도다.바로 그 헌혈마가 오늘날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이 원산지인 '아칼테케(Akhal Teke)' 혈통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칼테케는 3,000년 전부터 북이란에서 카스피해 동쪽까지 펼쳐진 투르크메니스탄의 사막 오아시스 지역에서 사육됐다. 투르크인들은 아라비안이나 페르시안 혈통의 말을 기르고 싶었지만 지역의 고립된 특성으로 아칼테케는 다른 승용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부영향을 받지 않았다. 전 세계에 3,500두 정도 남아있는데, 투르크메니스탄 국기에 그려져 있을 정도로 상징적이고 신성시되는 동물이다. 속도가 빠르고 지구력이 강해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 능력이 우수해 실제로 전속력으로 뛰고 나면 붉은 색의 땀을 흘린다고 한다.
1935년 55마리의 아칼테케가 투르크메니스탄 수도 아슈하바트에서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2,580마일(4,152㎞)을 84일 만에 완주하고, 특히 360㎞에 달하는 카라쿰 사막을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3일 만에 횡단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아칼테케의 털은 선명하고 광택이 있으며 흉곽이 얇아 허리가 빈약하지만 균형 잡힌 체형으로 세상에서 가장 예쁜 말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런데 한혈마인 아칼테케가 한국에 유입됐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대왕실록에는 1276년 고려 충렬왕 원나라에서 한혈마가 들어왔다고 기록돼 있다. "한혈마는 명마 중의 명마로 얼굴이 정말 작고 목이 길고, 가슴은 좁다. 제비를 밟고 달릴 만큼 빠르다 해서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조대왕실록에 묘사된 한혈마와 아칼테케의 외형이 비슷한 대목이다.
말은 인류 문명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만약 말이 없었다면 문명은 지금과 같이 발달하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참고로 말을 하자면 말과 관련한 인류 100대 발명품으로 꼽히는 등자(발걸이)는 인류 문명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종종 사극이나 서부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등자에 발을 걸고 안장에 오르는 장면을 보곤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말을 타면 당연히 등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등자의 역사는 이외로 짧다.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등자의 유물은 삼국지 이야기가 끝날 무렵인 3세기 후반 발명된 것이다.
유럽에는 8세기가 돼서야 일반에 보급됐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믿기 어렵겠지만 삼국지 영웅들을 비롯해 그리스, 로마의 기병들은 말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말갈기를 꼭 붙잡고 두 다리와 허벅지로 말 등을 힘껏 조이고 있어야 했다. 이를 놓고 보았을 때 당시 말을 자유자재로 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인마일체(人馬一體)의 모습을 보이며 전쟁터를 누비는 유목민족은 농경민족의 보병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비육지탄(髀肉之嘆)'이란 사자성어도 이때 나온 것이다.
삼국지 영웅 중 하나인 유비가 형주의 유표에게 더부살이하던 중 "전쟁터에 오래 나가지 않았더니 허벅지에 살이 붙었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것에서 유래했다. 당시 등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이 말을 이해하기도 힘들다. 즉 등자가 없어 말 등에서는 항상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는데, 허벅지에 살이 붙을 시간이 없었던 것을 말하고 있다. 등자는 말을 잘 다루던 유목민족이 처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개량하고 실용화시킨 것은 한(漢)족이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은 안장 한쪽 끝에 가죽 끈 고리를 달아 말 등에 오를 때 보조기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가죽 끈 고리는 말을 타는 중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러다보니 말에서 떨어졌을 경우 가죽 끈에 휘감긴 발을 빼지 못해 끌려가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에 한족은 금속으로 등자를 만들어 안전하고 쉽게 말을 타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등자가 된 것이다. 등자는 유럽에도 전파되었지만 당시 유럽의 야금기술이 떨어져 주철을 대량 생산할 수 없는 까닭에 나무로 등자를 만들어 사용했다.그런데 등자에는 과학적인 사실이 숨겨져 있다. 바로 무게중심이다. 등자 없이 말을 타는 경우 발을 받칠 곳이 없어 기승자는 내내 허벅지로 말 등을 단단히 조여야 했다. 이것은 불편할 뿐 아니라 무게중심이 허벅지 아래로 내려갈 수 없어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등자에 발을 걸고 탈 경우 발에 힘을 주면 체중을 두 발에 실을 수 있어 무게중심이 발로 내려가고 힘을 분산시킬 수 있다. 무게중심이 아래로 내려가면 좌우에서 미는 힘에도 훨씬 잘 견딜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단지 말을 더 잘 탈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말을 탄 채 칼이나 창을 들고 격렬한 싸움을 해도 견뎌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대 말의 종자는 중형의 크기로 평균키가 14.3에서 16 hands(56.3인치에서 64인치)인 파지리크 말로 대표되는 고대의 종자보다는 크지만 당시 아칼테케 말은 페르시아 기병대의 표준형 말이었을 것이다.
사이즈가 중형이고 운동능력이 있으며, 참을성이 있는 이말은 페르시아 기병대를 보충하는 일반 용도로서 아주 이상적이었다. 페르시아 기병대의 다른 중요한 말은 페르시아 엘리트들의 말로서 고대의 작가들에 의해 언급되는 니사에안(Nisaean) 타입이다. 헤로도토스는 ‘니사에안이라 불리는 신성하고 우아하게 성장한 말’을 언급하고 있다. (지금은 이 말들을 니사에안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모두 미디아의 광활한 니사에안 평원 출신으로 모두 비범한 크기로 생산된다.) “그는 이 종류를 그리스를 침공하던 시절에 크세르크세스의 전차를 끌던 말이며, 플라타에아(Plataea)에서 페르시아 기병대 사령관이었던 마시스티우스(Masistius)가 타던 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황금빛 재갈을 한 니사에안 군마, 다른 말로는 화려하게 성장한 군마라고 표현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니사에안(Nisaean)의 전투마에 대해 나오는 것은 훗날 미리오케팔론 전투(미리오케팔룸 Myriocephalu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1176년 9월 17일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가 프리기아(Phrygia)에서 벌인 전투에서다. 이 전투는 비잔틴 제국군의 치명적인 실패였으며,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아나톨리아의 영토를 회복하려던 비잔틴 제국의 성공하지 못한 마지막 시도이기도 했다. 양측은 확실하게 그 피해 정도를 파악하기 힘들기는 해도 일단 많은 피해를 입었다.
비잔틴 군이 전투 후에 퇴각할 때, 그들은 머리와 성기 부분이 잘린 시체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할례를 한 룸 셀주크 군대와 할례를 안 한 비잔틴 군대를 비교할 수 없도록 룸 셀주크 군대가 사용한 방법으로 양측 모두 많은 병사들이 쓰러졌기 때문에, 어느 쪽이 승리를 했는가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비잔틴군의 중요한 공성기들은 탈취당하거나 파괴당했다. 룸 셀주크의 수도 이코니움에 대한 공략을 시도도 못한 비잔틴군은 전역을 계속할 수 없었다.
또 셀주크 술탄 역시 병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빠른 평화를 원하고 있었기에, 아르슬란은 가브라스(gabras)라는 이름의 사자에게 니사에안(Nisaean)의 전투마와 검을 지참하여 마누엘에게 보내 평화조약 협상을 하게 하였다. 협상의 결과로 비잔틴군은 방해를 받지 않고 퇴각할 수 있었고, 마누엘 황제는 요새를 파괴하고, 비잔틴과 룸 셀주크의 국경에 있는 도릴라리움(Dorylaeum)과 수블라에움(Sublaeum)의 요새의 수비병들을 철수시켰다. 그러니까 천년이 넘도록 니사에안 전투마는 아주 호전적으로 위용을 자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