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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일들...그러나....
"사람들이 싫어하기에 사람들 사이, 심지어 교회마저 씁쓸히 지나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가진 것이 없고, 한 없이 외로움을 느끼며, 병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런 아픔과 결핍을 갖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임을 알게되고,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과 기대조차 없이 그저 다가오신 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주변을 돌아보게 됩니다."
서진교 목사님의 <작은 자의 하나님>을 읽고 난 후 얻게 된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전히 '작은 자'들을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 한다면, 그것은 우선 나에 대한 정확한 지각의 부족이라는 증거인 셈일까요? 자비란 자비를 받아 본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결핍을 채워 주었다고 생각할 때의 기쁨은 나의 부족과 결핍에 대한 조건없는 도움을 받았을 때의 기쁨과 정확이 같다는 걸 배웁니다.
서진교 목사님의 고백을 북콘서트와 책을 통해 접하면서, 자비로운 행동이 무엇인가 조금은 알게 됩니다. 노숙자, 알콜 중독자, 장애를 갖고 사는 사람들, 사모님의 스카프, 이름을 정확히 밝히기 어려운 청년.... 그리고 용서가 우선되어야 하는 덮어주어야 할 허물들이 많은 사람들.... 저자는 자신과 같이 아프고,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채워주는 것을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고백하십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교회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곳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위치한 카를교회입니다. 14세기에 페스트의 공격으로 유럽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였고, 그 후 400여 년 동안 페스트는 끊임없이 유럽인들을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페스트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의 경우 1712년에 비로소 페스트의 공포로 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이 무서운 질병을 몰아낼 수 있음을 감사하여 교회를 지어 감사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카를 6세는 자신의 이름과 같은 치료와 봉사의 성인 카를 보로메오에게 성전을 봉헌하기로 하고 교회의 이름을 카를 교회라고 했습니다.
오스트리아를 여행해보신 분들은 수도 빈에 위치한 부르크 성이나 쉘부른 궁, 슈테판 대성당..등을 빠짐없이 둘러보지만, 상대적으로 카를 교회를 찾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빈에 갈 때마다 카를 교회를 가장 먼저 찾습니다. 왜 그런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교회의 분위기와 조각, 특히 내부의 프레스코화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잘못했을 경우 매도 빨리 맞는 게 마음이 편해서일까요.. 분주하게 세상을 살면서 오염된 나의 정신과 마음을 정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삼각형 안에 '야훼'라는 히브리어가 천장의 돔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을 내려다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라고 하지만, 사실 '섭리의 눈(Eye of Providence)이 제작자의 의도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경과 조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이 하나님의 세심하고도 실수 없는 보호와 관찰 그리고 계획 안에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뱀이 감겨 있는 십자가를 든 천사상도,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조각상들도 신비감을 더해 주지만, 채광창을 향해 들어오는 미묘한 빛들이 밝혀주는 천장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현실과는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 묘한 기분이 온 몸을 감쌉니다.
요한 미하엘 로트마이어의 작품으로 알려진 이 천장화는 사실 성부와 성자, 성령을 나타내는 비둘기의 모습이 아름답기 보다는...낮고 작은 자리에 있는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인의 모습과 이 기도를 돕는 마리아와 천사들의 모습이 압권입니다.
페스트를 물리치는 천사장 미카엘 옆에 있는 '자비로운 7가지 일들'이라는 그림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자에게 마실것을, 나그네를 대접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병든 사람을 돌보며, 감옥에 갇힌 자들을 찾아주고, 세상을 떠난 사람을 장사지내주는 행위가 바로 이런한 자비로운 일이며, 섭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복된 의무라는 겁니다.
그러나 특히 나의 발길을 오래 붙잡는 그림은 천사들이 마르틴 루터의 책을 불태우고 무서운 얼굴로 공격하는 그림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적대감을 보는 듯한 섬뜩하고도 불쾌한 기분이 듭니다.
한없이 자비로운 얼굴로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인의 모습, 따뜻한 미소와 눈길을 주고 받는 천사들, 그리고 낮고 작은 자들을 돌보는 자비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과 달리, 자신들의 권위와 독단을 감추기 위해 판단하고 정죄하며 사납게 공격하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며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의 다양한 감정을 가진 군상의 존재를 느껴며 흠칫 놀라게 됩니다.
서진교 목사님의 <작은 자의 하나님>을 읽고난 잔상이 오스트리아의 카를 교회에서 느꼈던 감정과 섞입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회옆의 한 카페에서 아내를 기다립니다. 연말이라 장학위원회 회의가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심심해하던 차에 낯익은 분들이 카페로 몰려들어옵니다. 삼삼오오 몰려다니면서 큰 소리로 경쟁하듯 떠드는 (대부분 일관된 자랑과 비난..) 분들... 얼굴을 마주칠까봐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닙니다. 케잌은 왜 저리 많이 쳐드시는지....
문득 허물을 덮지 못하고,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 카를 교회의 천정화와 작은 자에게 다가가며 그들과 함께 행복함을 누리는 서진교 목사님 생각이 떠올라 마음 속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낀 것만으로도 <작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과 함께....
장로나 권사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목사 아들'이라는 태생적인 운명의 결과이니 이해를 바랍니다. 이해가 안 되시면 할 수 없고.....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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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태복음 25: 3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