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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잠언서 강해(3)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축복"
+ 본 문 : 잠 언 2장 1절 - 9절 (구약성경 p.911)
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9. 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아멘!
+ 서로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
+ 찬양하겠습니다. /
오늘 읽은 말씀은 세 번째로 잠언이 우리에게 주시는 충고적인 말씀입니다.
첫 시간에는 ‘악한 자를 따르지 말라!’ 고 경고하였고,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라!‘ 고 충고하였습니다.
이 시간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그를 경외함에 있다.’ 는 충고입니다.
지난 번 1장에서는 여러 모양으로 지혜의 필요성과 가치를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어떻게 지혜를 찾으며, 얻을 것인가?' 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기 28장 12절, 20절에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딘고?' 하였습니다.
그 대답이 23절에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신다.' 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4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어맨!
우리는 여기서 지혜를 찾는 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은 우선 ‘나의 말을 받으며’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귀한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자유 의지입니다.
어떤 분이 묻기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는 무엇 때문에 만들어 놓으시고, 따먹지는 말라고 하시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 할 기회를 주셨을까요?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하여 타락하게 하고, 또 예수님을 보내서,
구원하신다고 애쓰시고, 뭐 그럴 필요가 있어요? 아, 그저 에덴동산에는,
생명과실만 열게 해서 그것 따먹으며 살고 아예 범죄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이런 복잡한 일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하고 따지듯이 항변하며 말합니다.
얼른 들을 때는 그럴 듯한 이론 같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이 잘문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말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왜 기계로,
만들지 않고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하는 말과 같습니다.
기계는 범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스위치를 누르면 움직이고,
끄면 서는 것뿐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는 결단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은 ‘내가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스스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적은 것이나 큰 것이나, 저와 여러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이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가 조금이라도 침해당하면, 생명 걸고 항거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미국의 패트릭 헨리라는 사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자유를 주시오’ 하고 말한 대로 자유는 생명을 주고 바꾸리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자유 없는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동물원에 갇혀 있는 짐승들이, 밖에 있는 다른 짐승보다 행복스러워 보입니다.
우선 먹을 걱정이 없습니다. 때를 따라서 영양을 고려해서 먹을 것을 줍니다.
거처의 불편도 없습니다. 마련된 집이 있어서 걱정 없이 서식할 수 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피해의 위험도 없습니다. 울타리가 있고, 사육사가 보호해 줍니다.
얼른 볼 때 얼마나 편해 보입니까? 그러나 짐승이 말을 못해서 그렇지,
만일에 말을 한다면 '너 동물원에서 살고 있으니 편하지?' 하고 물으면
'편한 게 뭡니까? 죽지 못해 삽니다. 이게 사는 겁니까?' 하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짐승도 갇혀서 사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사는 것을 원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북한의 경우를 보면, 인간의 기본권인 이 자유가 말살되고 있습니다.
물론 저들에게도 최소한 입은 옷이 있고, 먹을 것도 있고, 거처할 집도 있지만,
자유가 없습니다. 말하고 싶어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자나깨나 말조심!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라는 귀한 특권이 있는데,
이것이 조금이라도 침해를 당하면 못살 것처럼 여깁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홀만 헌트라는 사람이 그린 ‘문 두드리고 계시는 예수님’ 이라는 성화를,
다 보셨을 것입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이 안으로부터 단단히 잠근,
어떤 집 문 앞에 예수님께서 바싹 다가서서 계시는 모습은 마치 집 안의,
동정이라도 살피기 위해서 온 신경을 거기에 기울이고 계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굳게 닫혀 진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것도 조용히 두드리십니다. 그런데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끈기 있게 문을 열 것을 기다리시며 두드리십니다. 문을 자세히 보니,
밖에는 손잡이도 없습니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문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사실 이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친구의 간곡한 권면을 통해서,
때로는 우리의 힘든 환경이나, 내 몸의 질병을 통해서 두드리십니다.
때로는 신령한 찬송을 통해서, 또는 영감이 넘치는 예술작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무엇보다도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실 때에,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믿겠다고 생각이 들면, 즉시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의 말을 받으며’ 했는데, '받는다.' 는 말은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주님을 내 마음의 주빈으로 영접합니다.' 하는,
영접,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결단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마음 중심에 받아들였습니까?
삶의 지혜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먼저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하였습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 말씀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말씀하였습니다.
참된 삶의 지혜를 얻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지혜로운 학생은 배운 것을 연습하며,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노트를 잘 합니다. 그래서 잊어버리면, 노트를 펴보아서 지식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도 똑 그렇습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명을 저축하고, 모아두고, 정돈하고, 소화시켜 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감명 깊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얼마가지 아니해서 잊어버려,
결국 '한 귀로 들어와서 다른 귀로 흘러나가는 결과' 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2절에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말씀하셨고,
3절에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 곧 한편으로는,
지각을 불러 구하며, 한편으로는 긍휼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였습니다.
구하는 자가 얻을 것입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분들은 다 삶의 지혜를 얻어서,
산 사람들입니다. 지식 많은 사람, 권세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읍니다.
그러므로 학자는 그의 연구실에서, 상인은 그가 장사하는 장소에서,
군인은 그의 초소에서, 가정주부는 그의 가정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그가 집무하기 전에 두 시간씩 꼭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합니다. 다니엘이 그처럼 어려운 처지에서도 지혜 있게,
나라를 다스려 나아갈 수 있었고, 승리적인 생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도,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한 창을 열어 놓고, 기도한 때문이었습니다.
지혜를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 높여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부가 광석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찾고, 광맥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애씁니까?
은이나 금을 얻기 위해서도 이렇게 애쓰는데, 하물며 은이나 금으로 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일인데, 애쓰지 않고 거저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있다가 없어지고, 잡았다가 놓치고 마는,
그러면서도 참된 만족을 줄 수 없는, 세상의 물질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애씁니까?
그런데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신령한 것을 위하여 그만한 노력을 합니까?
저는 저 스스로를 가끔 반성해 보곤 합니다.
내가 주를 위해 책임 맡아 감당하는 것이 장사하는 사람만큼이나 한가?
사도 바울은 생명을 내걸고 사명을 감당하려고 나섰습니다(행 20:22).
이렇게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간직해서 그대로 살려 힘쓰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생명을 걸고 지혜를 찾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 5절에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하나님은 인격이시므로 배워서,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와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알게 되고,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요 17:3).
그러니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하나님은 또한 말씀대로 '완전한 지혜' 를 ‘구속하는 지혜’ 를 주시고,
건강과 행복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자에게,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의지하는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시편 18편 2절에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33편 20절 말씀에 "...여호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하였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방패가 되십니까? 이 하나님은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십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축복을 얻으시기를, 지혜를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