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 긴 추석 연휴의 중간쯤에 천관산을 찾았다. 내게 장흥은 청소년기에 꼭 뭔가가 있는 곳 같았다. 매 번 그 뭔가를 보기도 찾기도 전에 그 앞에서 우리의 행선지는 멈췄다. 하지만 버스는 우릴 두고 계속 그 뭔가 있을 곳 같은 거기를 향해 떠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강진 작천이었다. 거기가 우리의 본적지이고 할머니께서 사시는 곳이었다. 방학때 마다 거길 갔는데 차 타는 걸 좋아했던 난 한 달 보름 가까이 엄청 심심하고 지루한 방학기간의 조그마한 위안거리는 두 시간여 버스를 타는 그 이벤트였다. 그 때만해도 집 가까이 가는 버스 노선이 없어 장흥가는 버스를 타고 강진 병영에서 내려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할머니집으로 갔었다.
남평 나주 영산포 신북 영암을 거쳐 큰 저수지를 끼고 왼편으로 들어가 엄청 길고 높은 산 길을 버스를 타고 올라 보면 아찔하고 까마득한 천 길 낭떠러지 길을( 그 당시에는 비포장에 찻길도 넓지 않아 차가 교행 할 때면 조그만 가슴이 콩닥콩닥 했을만큼 어렸을 때니 그리 느꼈을게다) 꼬부랑꼬부랑 돌고 돌아 평지에 내려 와서 첫 정류장이 병영이었다. 그리고 버스는 최종 목적지인 장흥이나 회진으로 갔다. 어찌 됐든 장흥은 큰 동네였을것 같았다 항상 버스 앞에 노선푯말은 '광주 ㅡ>장흥' 이었으니까. 근데 항상 우린 그 '자흥' (이 곳 분들은 이렇게 발음한다)을 바로 코 앞에 둔 '벵영' (이하 같음)에서 내리니 차 타기 좋아하고 약간 역마살이 있었던 호기심 왕성한 어린 나이에 얼마나 그 장흥이 궁금했겠는가.
세월이 많이 흘러 장흥은 목적으로는 올 이유가 전혀 없는 곳인지라 여운만 약하게 꼭 가 볼 곳으로 남았었지 와 볼 기회가 없었다. 한데 산을 다니다보니 과문한 내게도 가을 천관산은 가을 전어만큼 산꾼들에게 회자 되는 산인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아니 올 수가 있겠는가. 궁금한 장흥도 구경삼아 벼르고 별렀는데 도통 기회가 닿지 않았다.
'1박2일'에서 봤던 그 아름다운 산을 애닯게 고대해봤지만 그 많은 산악회에서 인연이 안 닿았다. 그래 이 번 추석때 광주에 가면 내심 거길 들렀다 오려고 작정했다. 다만 하산해 대전까지 와야하는 거리가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라 주저주저했는데 아내가 대둔산과 천관산중 천관산을 바로 지목해 과감히 결행했다.
산행 시간만 다섯시간이 넘고 대전까지 차로 걸리는 시간이 네시간이 걸리니 11시 반부터는 산행을 시작해야 무사히 귀가하는데 탈이 없을 것 같았다. 또 저녁도 먹어야하기에.
12시가 되서야 주차장에 도착해 산을 바라보니 산마루에 첨봉이 여럿 뾰죽 머릴 내민 암봉의 산이었다. 높이는 732미터로 직전 산행지인 북한산 백운대와 100미터쯤 차이가난다. 게다가 이 곳 장흥은 서울에서 정남으로 내려 긋은 동경도 (같은 경도 즉, 같은 남북의 선)의 정남진이다.
잠시 이 곳 선전을 하자면 일단 호남의 5대산중 하나란다. 지리 월출 내장 내변산과 함께말이다. 하지만 무등이 빠졌고 덕유가 누락되었으니 신빙이 떨어진다. 도립공원으로 영화와 드라마촬영지로도 여러 번 찾은 곳이다. 충분히 그럴만 했다. 그리고 1박2일은 그 중 제일 임팩트있었던 홍보였다. 그래서 산행루트도 아예 강호동,이수근길의 제3코스와 이승기길의 제1코스를 이름처럼 활용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다.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3코스로 올라 1코스로 내려오는게 좋다고 한다. 그래서 종봉과 금강굴로 올라 구정봉에서 환희대로 다시 연대봉을 거쳐 양근암을 보고 장안사로 내려오는 일정을 잡았다.
도화교와 장천재 체육공원 등은 산을 오르기 전 웜업구간이다. 경사도 심하지 않고 잘 정비돼있다. 계곡을 오른쪽에 둬서 시원한 물소리가 발걸음에 박자를 맞춘다. 남도가 틀림없는 것은 좌우로 동백이 수령이 오래 된 굵은 나무의 매끈한 동백잎에 햇살이 반사하듯 새파란게 눈이 시리다. 게다가 편백나무숲을 조성해 그늘에 공기까지 신선하다. 대나무도 있고 작은 조릿대가 길과 숲을 구분해주고 있다.
체육공원을 지나 작은 계곡의 다리를 건너자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며 헐떡일 정도로 꽤나 가파르다. 732미터는 사실 산 높이론 중간이하다. 하지만 이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왜 오르내림이 힘든지 알 수있다. 해발을 거의 온전히 다 소용한 것이다. 그래서 금강굴까지 바짝 버겁다. 금강굴은 큰 기대를 안했더니 얘기거리는 되겠다싶다. 엊그제 비가 와서인지 동굴이 물로 가득 차있다.
조금 더 오르면 석선이 있는데 말 그대로 돌 배를 뜻한다. 묘하게 이 곳과 멀지 않은 해남의 달마산 미황사의 설화가 연상되었다. 산정에서 보면 해남 달마산 강진 주작과 덕룡산등이 바로 지척에 있고 왼편으로는 고흥 팔영산과 연륙교가 보이니 바로 옆동네다. 그러니 미황사의 건립설화가 더 사실감이 더해진다. 해남 앞바다에 석선이 오랜동안 지을 절을 찾아 금강을 찾아 왔다 이 근방에서 (미황사)절 지을 곳을 점지하셨다는 내용이다.
이 곳에서 산정에는 아래서 보았던 첨봉이 웅장하고도 장엄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데 이 산이 바위산인줄 착각하게 한다 제 2막이 열린 느낌이다. 아래 등산 안내도엔 분명 구정봉이라 되어있는데 그 어디도 그 근사한 말 한마디 없고 대세봉이라 적은 푯말만 있다. 여기서 부터는 정상능선이다. 아쉬웁게도 그 뾰족한 석병 (돌병풍)을 오를 수는 없다. 이 산의 이름이 천관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천제의 면류관을 누가 감히 오를 수 있겠는가. 고개들어 보는 것만해도 감지덕지다. 옛 이름은 천풍산 혹은 지제산이었다는데 이름 한 번 잘 바꿨다.
여기가 정상은 아니지만 이 곳의 풍경 부터 환희대를 거쳐 연대봉까지가 이 산의 하일라이트라는 건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옛말에 인걸은 지세에 따른다하니 이런 지세에 영걸이 안나올 수가 없다. 헌데 환희대부터는 완전히 다른 산에 온 것 같다 제 3막을 열었나 보다. 길은 평탄하고 너른 안부라 가을의 대명사 억새가 만발해 있다 최고 절정은 일주일 정도 뒤가 될 듯하다 억새제 축제가 15일 알요일11시에 연대봉에서 벌어진단다. 이 산의 이런 형상이 이 곳 장흥의 인물들이 유순한 문필가 화가 시인 등의 길로 영향을 주었나보다. 이청준,한승원,김영남등이 다 그런 분들이다.
참 묘한게 바닷가 근방 남해의 서쪽부터 진도 동석산 해남 달마산 강진 주작산과 덕룡산 그리고 이 곳 구정봉 대세봉 진주봉등은 거대 암봉과 기암괴석들로 이뤄진 산 들인데 여기서 부터는 육산에 가깝다. 팔영산은 약간 애매하지만....
환희대에서 꼭 놓쳐서는 안 되는 곳이 구룡암까지 갔다 오는 것이다 오른쪽편으로 안부하나 다음에 새 대가리처럼 다시 암봉이 하나 있는데 시간은 왕복50여분 걸리지만 정상에서 먼 남해의 서쪽이 온통 눈에 차니 가슴이 뻥 뚫린다.
환희대에서 이 산의 정상인 연대봉까지 너른 평상을 곳곳에 설치에 휴식과 식사에 편안함을 제공하니 좋다. 해가 어느덧 기울어 햇살의 부담이 없는데다 사람도 안보이니 벌러덩 드러누워 막간의 휴식도 취해본다.
연대봉은 이름에서 벌써 봉수대를 의미한다.해남 달마산 통영미륵도 대전 만인산등처럼 여기에 딱 있을만한 자리다. 지금으로 치면 무등산 모악산 가야산 (예산) 식장산 관악산 계룡산등등 주변에서 가장 높은 도시와 인접한 산정엔 꼭 있는 송수신안테나 첨탑이 있는 것처럼 봉수대가 있어야만 하는 자리다.
앞바다엔 남도의 특징처럼 수 많은 섬들이 점점이 파란 바다에 바둑 돌처럼 놓여져 있고 고흥의 큰 연륙교가 왼편으로 눈에 띈다. 하지만 시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 굉장히 아쉽다. 맑고 화창한 비 온 다음날 여기서는 제주 한라산도 보인다니 언제 그 행운을 가질 기회가 또 있을까 싶다.
이 곳에서 통영이 떠올랐다. 여러모로 통영과 비교가 된다. 미륵도와 벽방산보다 산도 높고 바위도 장하다. 조망도 뛰어나고 장관이다. 다만 바다의 컨텐츠가 약하고(항구와 시장등) 케이블카의 편의는 아예 없으니 인구와 교통이 늘어나고 지자체의 재정이 뒷받침된다면 틀림없이 더 화려한 곳으로 사랑 받을 것이리라.
내려 가는 길이 계속 바다를 보며 능선을 타고 내려간다. 왼편의 곡창지역의 잘 정리된 논들이 바둑판처럼 펼쳐졌는데 멀리서 보니 황금색 잔디처럼 색이 곱다. 바위나 자갈이 해풍에 닳아선지 산 위에 모래가 부드러운 밟힘이 신기하다. 한참 내려가니 양근암이 있다. 양물 혹은 남근 바로 남자의 성기를 지칭하는 그 모양의 바위가 하늘을 향해 불뚝 치켜세우고 있다. 굵기에 비해 짧음이 짠하다.
내려가는 길은 엄청 지루하다. 제법 오랜 시간을 탄 산행이여선지 다리도 묵직하고 걸음이 터덕거린다. 장안사는 가 보지도 않고 바로 내려왔다. 벌써 여섯시가 다 돼 살짝 해거름의 어둑어둑함이 주위를 감싼다.
오늘 산행은 조금만 더 맑았더라면 시계가 선연했더라면 하는 것 빼곤 모자람이 없었던 즐거운 산의 하루였다. 산도 좋고 경치도 훌륭하고 적당히 몸도 고달프고 추석의 음식들로 입도 배도 만족했으니 더 이상 좋을 수 없었다 전어는 가을만 맛있는지 몰라도 천관은 사계가 다 어울릴 것 같다. 봄부터 겨울 어느 계절 가리지 않고. 다만 가을에 여길 왔으니 현재까지는 가을 천관이 최고라고 적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