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부터 초장왕의 눈부신 활약이 시작된다. 그해에 용을 멸하고, 6년에는 송을 쳐서 병거 500대를 탈취하고, 8년에는 육혼의 오랑캐 융을 쳤다. 융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초장왕은 주나라 경계에서 대군을 사열하며 초나라의 무력을 과시했다.
수대에 걸쳐 왕호를 사용하고 있지만 중원의 입장에서 초는 무도하게 왕호를 참칭하는 남쪽 오랑캐의 나라일 뿐이었다. 국력으로 따지면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주나라였지만 수 백 년 전통에 대한 열등감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당시 주나라는 주광왕이 왕위 6년에 죽고 주정왕이 왕위를 계승한 원년이었다. 초장왕이 주의 영토에서 무력을 과시하자 주정왕이 왕손 만을 파견했다. 만을 만난 초장왕은 주나라 권위의 상징인 구정(九鼎)의 크기와 무게에 대해 물었다.
구정은 하나라 시조 우왕이 만들었다는 아홉 개의 가마솥으로 중국 아홉 개 주의 수장들이 보낸 금속으로 주조했다고 한다. 하나라가 망하자 이 구정은 상에 전해졌고 다시 상이 망하자 주에 전해져 주가 천하의 주인임을 상징하고 있었다. 초장왕이 구정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주가 가진 권위에 대한 관심이었고 초가 주의 권위를 대신하겠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러나 무늬만 천자인 주였지만 수 백 년 전통에서 나오는 권위는 초나라가 힘으로 어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정의 크기와 무게는 덕(德)에 있지 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이 대답하자 초장왕이 호기를 부리며 말했다. “덕 같은 건 모르오. 다만 초나라의 부러진 창끝만 모아도 구정 따윈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말이오.” 만이 다시 대답했다.
“하나라 걸왕이 무도하자 구정은 상나라로 옮겨졌고, 상나라 주왕이 무도하자 구정은 다시 주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천자가 덕이 있으면 그 정은 작아도 무거우며, 천자가 덕을 잃으면 그 정이 아무리 커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모든 것이 천명에 의해 이루어지 것이지 구정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왕께서 구정의 크기와 무게를 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의 답변에 뻘쭘해진 초장왕은 군사를 거두어 초나라로 돌아갔다.
이것이 문정경중(問鼎輕重), 즉 ‘정의 경중을 묻다’라는 고사이다. 오늘날에는 누군가가 상대의 실력이나 속마음을 떠보아 약점을 잡으려고 할 때 이를 비난하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승승장구하던 초장왕에게 시련이 다가왔다. 초장왕의 등장으로 독점하고 있던 권력을 나누어야 했던 영윤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투씨 일족이 대부분 이에 가담했다. 반란을 예감했던 초장왕은 위가를 도성에 남겨두어 이들을 견제하게 했으나 반란군은 위가부터 공격하여 죽여 버렸다. 반란군을 이끈 투월초는 장서라는 곳에서 육혼의 융을 치고 돌아오는 초장왕의 군사와 대치했다.
전력은 투월초 쪽이 훨씬 우세했다. 더구나 초장왕 쪽은 오랜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이라 지쳐있었다. 첫 싸움에서 왕군이 패했다. 전면전으로 반란군을 제압할 가능성이 없어진 왕군은 상황을 반전시킬 무언가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많은 전쟁을 경험한 초장왕이지만 그간의 전쟁이라는 게 초나라와는 전력의 차이가 많은 나라를 대상으로 하는 싸움이었다. 결국 이겨야 하는 전쟁에서 이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더구나 타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 다음 기회가 있었지만 내부의 반란군과 대치한 지금은 한번 싸움에 모든 명운이 걸려 있었다. 패배는 곧 죽음이었다. 모든 것이 불리했던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초장왕의 전략이었고 그의 군사적인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싸움이기도 했다.
전략을 바꾼 초장왕은 후퇴를 시작했다.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하루에 200리를 후퇴했다고 하니 이는 후퇴라기보다는 전력을 다한 도망이었다. 속히 초장왕을 죽이고 반란을 혁명으로 마무리하고자 했던 투월초도 도망가는 왕군을 ?아갔다. 그러나 잃어버린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이 그의 전략적 사고를 무디게 만들었다. 아무 준비 없이 추격하던 반군이 굶주림 때문에 먼저 지쳐버렸다. 전세가 역전되어 왕군이 반란군을 몰아세웠고 양유기가 화살로 투월초를 죽이자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춘추 제일의 명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양유기의 극적인 등장이기도 했다.
도성인 영도로 돌아온 초장왕은 살아남은 투씨 일족을 주멸했다. 이때 투씨 일족인 투극황은 사신으로 외국에 갔다가 귀국 중에 있었다. 투극황의 조부는 바로 초성왕 때의 명재상인 자문(투곡오도)이었다. 자문이 살아 있을 때 투월초를 보고는 반역의 상이니 반드시 투씨 일족을 멸문으로 이끌 것이라고 예언한 일이 있었다. 주위에서 투극황에게 망명을 권했으나 왕을 거역할 수 없다며 끝내 귀국했다. 초장왕은 투극황을 살려주고 자문의 제사를 받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왕명을 이행한 충신이라 하여 원래의 벼슬을 다시 주고 투생이라는 새로운 이름도 하사했다. |
출처: 춘추의 창으로 세상을 읽다 원문보기 글쓴이: 풀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