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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1777년 4월 23일 독익의 브룬스빅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계산의 천재였으며 여느 수학 천재와 마찬가지로 수학공부를 늘 즐겨하였다. 가우스의 혈통을 살펴보면 그가 두각을 나타내게 된 배경을 발견할 수는 없다. 가우스의 아버지는 벽돌공인 노동자였으며 고지식하고 난폭했다. 아들을 거칠게 대했고 가우스가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대도 오늘날의 가우스가 있기에는 어머니의 힘이 컸다. 그이 어머니는 곧은 성품에 가하고 지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어렸을때부터 신동이었던 아들이 총명함을 잃지 않고 자랄 수 있도록 평범한 일꾼으로 만들려는 무지막지한 남편과 싸워가며 가우스를 지켜냈다. 그녀에게는 가우스가 늘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가우스가 세 살 때의 일이다. 그이 아버지가 부기장부에 있는 긴 계산을 마쳤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그 계산은 틀려요. 이것이 맞아요' 하고 답을 고쳐주었고, 아버지가 깜짝 놀라 다시 계산해 보니 아들의 계산이 맞았다는 일화가 있다 가우스에게느 복잡한 계산을 해내는 천재적인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가우스는 가난하나 집안의 아들이었으므로 유년 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을 졸라 알파벳의 발음을 익혀 혼자서 읽는 법을 터득했으며 닥치는 대로 모든 책을 가져다가 혼자서 공부했다. 소학교 때에는 뛰어난 성적을 인정받아 카타리나 중학교 2학년으로 월반해서 입학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도 그는 고전어 수업에서 놀랄만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 어린 학생의 우수한 재능이 브룬즈빅의 영주 칼 빌헬름 페르디난트 공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그는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14살의 어린 소년에게 매료되었다. 이때부터 공작은 가우스의 계속적인 교육에 필요한 모든 것을 후원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이듬해, 가우스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부터 가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남길만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소수 분포, 기하학의 기본정리, 최소자승법 등의 독자적인 연구에 착수하였다. 언어학과 수학에 동시에 재능을 보였던 가우스는 잠시 어느 길을 택할 지에 대해 망설였으나 언어학은 취미로만 남긴 채, 본격적인 수학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공작의 후원 아래 괴팅겐 대학에 진학하였다.
과학 일기를 쓰기 시작하며 괴팅겐 대학에서 연구한 기간은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다산한 시기였다. 가우스는 대학에 입학하여서도 수하과 교양, 고전물 등에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하였고, 1796년에는 「학예신문」 이라는 창간호에 '새로운 발견'이라는 글을 쓰면서 정17각형이 작도 가능함을 예견했다. 이로부터 5년 후 「정수론연구」의 마지막 장에서 원을 분할하는 이론을 전개하면서 정17각형의 작도를 실제로 다루었다. 이 작도의 발견은 가우스를 수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하게 만들었으며 가우스 자신도 이 발견을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자신의 묘비에 정17각형을 새기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소중히 여겼다. 또한 정17각형의 작도를 발견한 그 날부터 그는 일생에 많은 업적을 남길 자료가 될 「과학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4×6판 19페이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발견이나 계산의 결과에 관한 146개의 사항이 지극히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었는데, 1814년 7월 9일자로 끝난다. 이 일기를 보면 가우스가 이룩한 수학적 발견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모두 146가지의 발견에 대한 아주 짦은 증명, 수치계산의 결과, 수학적 정리의 단순한 주장 등이 담겨 있다. 그는 과학일기에 쓴 내용들을 자신이 직접 발표한 적이 없고 이 일기는 수십 년이나 잠자고 있다가 그의 사후에 발표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엄격주의자였던 가우스 가우스는 무의식적으로 수학적 관념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청년시절에도 가우스는 자주 수학에 사로잡혔다. 친구와 얘기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누를 수 없는 생각에 휘말려 침묵해 버리고 주위를 잊고서 어딘가를 멍청하게 쳐다보곤 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의식적으로 모든 정신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으며, 일단 손에 잡은 문제는 해결할 때까지 결코 놓지 않았고 여러 개의 문제가 동시에 주어질 때에는 차례로 하나씩 해결해 갔다. 가우스는 모든 일에 엄격했으며 특히 수학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엄밀히 따지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는 아마도 천재로서의 역할과 진지한 성격 때문인 듯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그에게도 볼프강 볼리아이라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수학 교수인 그는 헝가리의 귀족으로 가우스처럼 수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둘은 50년 이상 편지를 주고 받으며 그 안에서 수학 연구에 대한 토론과 우정을 키워가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볼프강 볼리아이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요한 볼리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비유클리드 기하학 당시 유클리드의 「원론」은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여기에 유명한 다섯 번째의 마지막 공리인 평행선 공리가 있다. 「주어진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서 주어진 직선에 평행인 직선은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그러나 무한히 연장한 직선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공리의 경험적인 기반을 알 수가 없었고, 그 후에 여러 수학자들이 평행선 공리의 잘못된 점을 찾기 위해 애를 써왔다. 평행선 공리를 하나의 정리로서 증명하려는 노력들이 수 세기동안 이루어졌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을 수 없었고 마침내는 평행선 공리를 다른 공리로 대체한다는 - 물론 이는 유클리드적 성질을 보증하는 상식과 뉴턴 및 칸트의 엄청난 권위에 위배되는 당시에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 생각이 바로 가우스에 의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평행선 공리를 「주어진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서 주어진 만나지 않는 직선은 두 개 이상이다.」라는 공리로 바꾸었다. 이 공리는 평면상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보다 작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것이 바로 쌍곡 기하학의 되었다. 그러나 가우스는 다른 수학자들의 비평을 두려워했으므로 이것을 발표하지 않았다. 한편 볼프강 볼리아이의 아들인 요한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그 문제를 소개받고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결과 가우스와 같은 내용의 쌍곡 기하학을 발견하였다. 요한은 그의 이론을 발표하기 전에 아버지 저서의 부록에 이론의 내용을 소개만 하고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가우스에게 평가를 요청했다. 가우스의 답장에는 자신이 이미 예전에 연구했던 결과로 발표하지 않은 내용이라는 점과 자신을 능가한 친구의 아들에 대한 칭찬의 말이 담겨져 있었다. 이 답장을 받고 요한은 자신이 독창적으로 발견한 연구 결과가 이미 가우스가 발견한 결과라는 말에 실망하였다. 가수스는 개인적으로 친구 아들이 우수성을 인정했지만 친한 친구의 아들과 발견의 선후 논쟁에 휘말리기를 원치 않았기에 어느 것도 발표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독자적으로 로바체프스키가 쌍곡 기하학을 연구하여 발표하였고 요한 볼리아이는 이를 비통해 하다가 죽은 후에나 평성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날 비유클리드의 창시자 하면 요한 볼리아이와 로바체프스키르 말한다. 그러나 쌍곡 기하학의 공헌자를 엄밀히 말하자면, 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가우스가 요한 볼리아이의 연구를 발표했더라면 요한이 좀더 일찍 유명해졌을 것이고 그의 원망을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가우스가 처음 이론을 발견한 직후에 곧바로 발표했더라면 비유클리드의 기하학의 발전이 훨씬 더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 뒤로 오랫동안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 하면 단지 쌍곡 기하학만을 의미했었는데, 평행선 공리에서 「주어진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서 주어진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신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느 가정을 하고 리만이 또 다른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발표하였다. 이를 타원 기하학이라 부른다. 이로써 우리는 일반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에 속하는 서로 다른 모텔들을 통하여 쌍곡 기하학과 타원 기하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수론 대수 "수학은 과학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는 말은 가우스가남긴 유명한 말이다. 가우스의 저서 중에서 「정수론」은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가우스가 연구한 결과는 거의가 일류 수준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수론이었다. 「수론대수」는 정수론을 단숨에 기초가 튼튼하고 논리가 정연한 수학의 분야로 만든 가우스가 대작이다.「수론대수」의 내용은 총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장에서 가우스는 정수의 나누어 떨어지는 개념의 처리를 단순화시킨 새로운 수학 기호인 '합동'을 소개했다. '두 정수 a.b의 차 a-b가 m으로 나누어 떨어진다면 a와 b는 법 m에 관하여 합동'이라고 하며, 'a≡b(mod m)'이라고 읽는다. 합동을 나타내는 기호인 '≡'는 상동 '='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합동은 상동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상동은 0을 법으로 하는 합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3장과 4장에서는 고차 합동식을 고찰하였고 5에서는 이차형식을 다루었으며 마지막 7장에서는 원의 분할에 관한 문제와 연관하여 정17각형의 작도법을 설명하였다.
케레스 소행성의 궤도 측정 가우스는 천문학, 측지학, 전기학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고, 케레스 소행성을 궤도 측정은 그를 전세계적으로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미 이전에 오일러, 람베르트, 라그랑즈, 라플라스 등에 의하여 궤도 측정의 계산이 시도되었으나 모두 완전한 계산을 해내지 못하였다. 천체역학의 대가 라플라스조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가우스는 자신의 뛰어난 계산 능력과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서 당시 막 발견된 케레스 소행성의 정확한 궤도의 계산 방법을 발견하였고 이듬해에는 팰러스 소행성의 궤도를 계산하는 등 새로운 행성이 발견되는 대로 궤도를 계산하였다. 가우스는 한 혜성의 궤도를 한 시간 이내로 계산하였는데 이를 오일러의 고전적인 방법으로 계산하였을 때는 3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 복잡한 계산이 오일러의 한 쪽 눈을 멀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결혼과 은인의 죽음 1802년 가우스는 서 케테르부르크 과학원의 객원 연구원으로 선발되면서 다시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가우스는 조한나 오스토프라는 처를 1년 동안 쫓아다니며 구애한 후 1805년에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한 후 그는 오랜만에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가우스는 평생의 은인이었던 공작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동안 가우스는 페르디난트 공의 계속적인 후원으로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공작이야말로 그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었다. 가우스가 괴팅겐을 떠난 후에도 연구를 하다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때면 공작은 나타나서 그이 연구가 계속될 수 있도록 후원해 주곤 하였다. 가우스는 공작에게 바치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는 다른 모든 책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고 이처럼 나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셨나이다' 영주의 죽음은 가우스에겐 충격이었고 그는 심각한 우울증 증세에 빠지게 되었다. 곧이어 큰 아들 조셉을 낳은 후 가족으로부터 위안을 찾았으나 그것도 잠시 뿐, 아내는 두 번째 아이인 딸 빌헬미나를 낳고 나서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막내 루드비히를 낳고 결국에는 세상을 떠났고 6개월 뒤에는 루드비히까지 갑자기 죽고 말았다. 잠시의 행복도 접어둔 채 아내의 죽음으로 인하여 가우스는 또 다시 실의에 잠기고 우울증이 재발하였으나 그는 재혼을 결심하고 전처의 절친한 친구 민나 발덱에게 청혼하여 그녀와 결혼하였다. 전처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었지만 가우스는 민나 발덱과 결혼한 후 그녀의 정성어린 내조의 의하여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여기서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또 낳았다. 그의 후원자가 죽었기에 가우tm는 이제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생계수단을 찾아야만 했다. 이미 가우스의 명성이 널리 퍼져 있던지라 페테르스부르크 학사원은 오일러가 죽은 뒤 적당한 후계자가 없어 비워둔 자리에 그를 임명했다. 1807년에 천문대장 겸 수학 교수직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가우스는 연구에 방해받지 않으려고 천문대를 선택했지만 사실 보통의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가우스에겐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재능있는 학생들은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는 때때로 주어지는 약간의 암시만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우스에게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수학에 관심도 능력도 별로 없는 학생들이었다. 그는 이들에게 강의하는 것을 정말 끔찍하게 생각했고 귀중한 시간만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가우스의 사고 방식이 그랬던지라 그는 학생들에게 예습을 요구했다. 그 결과 다른 교수에게는 수강학생이 100명이나 되었지만 가우스에게는 고상함만을 드높인 결과 수강 학생이 5명에서 10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가우스의 말년 청년 시절의 외국어 습득에서 나타낸 솜씨는 평생 가우스를 떠나지 않았다. 외국어느 그에게 있어 단순한 오락 정도였고, 노경에 들어서는 자기 정신의 탄력성을 시험하기 위해 새로운 외국어를 정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62세 때 독학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2년 후 러시아어로 된 글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가우스의 말년이 명예로 장식되어 있었다 해도 그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의 왕성한 발명적 재능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했고 병상이 허용하는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1855년 2월 23일 이른 아침에 78세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 -수학사랑에서 발췌- 참고문헌 [1] 김용운, 김용국, 지성의 비극, 일지사 [2] 김용운, 김용국, 수학의 흐름, 전파과학사 [3] Howard Eves, 이우영, 신항균 옮김, 수학사, 경문사 [4] Tord Hall, 이우영, 신하균, 이홍렬 옮김, 수학의 황제 가우스, 경문사 [5] E.T벨, 안재구 옮김, 수학을 만든 사람들,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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