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화가
살아갈수록 절실히 느껴지는 일!
세상일은 너무 호들갑스럽게 기뻐 할 일도, 그렇다고 너무 슬퍼 할 일도 없다는 사실이다.
“새옹지마”, 어쩜 그리도 딱 맞는 말인지.
밀린 숙제처럼 여겨졌던 일,
오랜 기억을 더듬어 그 곳을 찾아갔다.
‘분명히 길 가의 집이었던 것 같은데......’
장소에 대한 기억만큼은 내 짐작이 언제나 100% 꽝이어서 남편의 총기에 기대었다.
기성초등학교 가는 길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다.
내가 좋아하던 김유선선생님이 잠시 근무하셨던 곳이라서.
몇 번의 오르락내리락거림에도 결국 민이네 집을 찾질 못해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하지만 남편은 끈기 있게 결국 그 곳을 찾아냈다.
며칠 전에 거제를 한 바퀴 돌던 길에 남편이 내게 말했다.
“나는 민이엄마가 자꾸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휠체어를 타고 어린아이처럼 민이 아빠에게
칭얼대던 모습이!
남편도 못 알아보고 자꾸 아저씨, 아저씨, 라고 부르며 머리가 아파 죽겠다고 하던 말이
귀에 쟁쟁거린다.
거제를 오갈 때 마다 자꾸 민이엄마 생각이 난다.
이상하게 당신도 민이엄마처럼 늙으면 나를 못 알아보고, 아저씨라고 부르며 아기가 될 거
같아서 눈물이 난다.”
깜빡깜빡, 너무도 심한 내 건망증에 대한 일말의 불안,
나도 10년 전, 아줌마를 다시 만났을 때 그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수시로 깜빡거릴 때 마다
그런 불안이 있는데.
10년 전, 거제 아저씨댁에 20년 만에 찾아 뵀을 때 휠체어에 앉아있는 아내를 돌려 세우고
“여보, 당신이 좋아하던 우리 박선생님 왔네. 자 봐라. 당신은 언제나 박선생을 부를 땐
꼭 우리라는 말을 앞에 붙였잖아.”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이 남편을 보고 자꾸만 칭얼거리며
“아저씨, 아저씨, 머리가 아파 죽겠어요.”라는 말만 한다.
그러니까 간병인이 휠체어를 밀고 마당으로 바람을 쐬어 주러 나갔다.
아줌마는 그 옛날, 이화여대 약대를 나온 재원이셨다.
부산이 집이었던 아줌마는 추석명절에 친구들과 서면에 있는 극장에 영화를 보러 나갔다가
아저씨에게 납치 되었단다.
친정에서는 너무나 기우는 혼사여서 어떻게든 결혼을 막으려 했었단다.
하지만 사람의 인연은 운명 같은 거여서 결국 결혼을 하고 아들 둘, 딸 하나를 낳게 되었다.
직업이 없던 아저씨는 다행이 약사인 아내의 약국에서 일을 돕게 되었다.
아저씨는 대인관계가 원만해선지, 사업 운이 있어선지 도시개발이 이루어지는 시외버스 터미날
바로 옆의 위치에 땅을 사고, 빌딩을 짓고, 약국을 하게 되어 많은 부를 누렸다.
정치 바람을 타고 그쪽의 대표 일도 하셨다.
나는 항남동에 살던 어릴 부터 아저씨를 알았는데 유영에 발령을 받아 막내 민이의 담임이
되면서부터 학부형의 인연이 되게 되었다.
하지만 아줌마는 학부형이라기 보다는 이모처럼 나의 비빌 언덕이 되어 주셨다.
내가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할 때도 마치 손해보는 결혼을 하는 것 처럼 안타까워 죽을려고
하셨을 정도다.
어쩌다 약국이 쉬는 날이면 아줌마는 꼭 나를 불러 맛있는 걸 사 주고 싶어 하셨다.
그때만 해도 거제도는 개발이 덜 된 상태였지만 외국인의 출입이 잦았던 옥포는
괜찮은 음식점들이 있었다.
중국집이라면 짜장면, 탕수육, 라조기가 전부인 걸로 알던 내게 그렇게 세련되고
우아한 실내와 다양한 풀코스의 음식이 나오는 건 실로 주눅 드는 경험이었다.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 여러 가지 요리를 먹은 후, 식사를 시키는 즈음에서 아줌마는 내게
기스면을 권했다.
명주실처럼 곱고 차진 세면, 그 부드럽게 감칠맛 나는 기스면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식사가 마치면 차로 이곳저곳을 드라이브 시켜 주시며 나에겐 뭐든지 해 주고 싶어 하셨다.
아저씨는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아버지를 형님으로 불렀고, 항남동에 있는 여객선터미널 근처
서로 가까이 살았었기에 학부형이라기보다는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두 분은 마치 조카처럼 나를 친근하게 대해 주셨다.
아, 그런데 오늘 찾아가 동네 사람으로 부터 듣게 된 이야기!
아내의 병을 돌보던 아저씨가 간암에 걸려 아픈 아줌마보다 먼저 돌아가셨단다.
아저씨는 젊은 날의 방종과 폭력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게 한 아내가 너무 가여워
차마 눈을 감지 못하셨다고 한다.
그 후 아줌마가 돌아가시고, 민이도 늦은 결혼을 해서 거제를 떠나고,
남은 아들 둘이 그 많던 재산을 다 탕진하고 그 집마저 경매로 넘어갔단다.
한동안 그 집 아래에 방을 얻어 살았는데 방세도 못 낼 지경 까지 갈 정도로.
아저씨 아줌마를 뵈었던 10년 후 오늘,
아, 나는 일장춘몽 같은 인간의 영화를 덧없는 슬픔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