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매화도 大作전
김동원 시인
수묵은 무자기(毋自欺)의 예술이다. 먹은 정신의 색이자, 무채색이다. 천지의 낮과 밤은 화경(畫境)이다. 의경(意境) 은 화가와 사물이 한 몸 되어 새롭게 태어난 심미(審美) 의식이다. 화가는 붓을 들고 천지에 나와 ‘한 번 그음’으로써, 자신의 법을 만든다. 일찍이 백천은 ‘하늘이 그에게 준 소명을 받들어, 점(點)을 찍고 선(線)을 치다 죽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붓은 몸이다. 시대마다 다르게 쓰이는 법구(法具)다. 붓은 당대의 심안(心眼)이다. 현실을 뚫는 정신이다. 백천의 붓은 정격을 치고 나온 파격이다. 대상과 주체는 알레고리적이자 상징이다. 그에게 화(畵)는 해체이자 질문이며, 전시대의 반역이자 전복(顚覆)이다. 매전시회마다 백천이 보여준 놀라운 안목과 물성의 처리 방식, 압축과 대담한 생략, 장대한 스케일 등은 그의 예술의 요체이다. 대상을 겹쳐 바르는 한지의 적묵법을 취해, 윤곽의 생동성과 디테일을 화폭에 새긴다. 적묵(積墨)과 초묵(焦墨), 묵선과 여백의 미학적 공간 분할은 또 다른 미학의 세계로 이끈다. 하여, 백천의 수묵은 모방을 거부하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사이에 존재한다. 한지(韓紙) 위의 펼쳐진 매화도의 고격(古格)은 현대적 감각이다. 고정된 예술의 실체를 거부하며, 파묵(破墨)을 통해 창조로 직진한다. 대상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현대 수묵의 조형미를 추구한다. 서도(書道)로 연마한 그간의 필력(筆力)은, 백천 수묵의 농담과 선(線)의 예리를 중후하고 고졸하게 입힌다.
최근 한글 문자추상(文字抽象)은, 단순히 언어의 기능을 넘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조형성을 추구한다. 한글의 구성 원리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예술적 미학이다. 한글의 곡선과 직선의 조화로운 배치는, 동양 미술의 기본 원리인 간결함과 균형, 조화를 잘 반영한다. 한글 문자 추상은, 현대 미술가들에게 실험과 창의성의 무한한 상상을 제공한다. 이는 새로운 형식과 표현 방식을 탐구하게 하며, 회화, 조각, 설치 미술 등 여러 미술 장르로 확장되고 있다. 한글은 가획(加劃) 원리(예→ㄱ+ㅡ=ㅋ)를 근본으로 삼는다. 기본 자음인 5개로 나머지 자음 문자를 모두 만든다.(예→ㄱ(ㄲ, ㅋ), ㄴ(ㄷ, ㄹ, ㄸ, ㅌ), ㅁ(ㅂ, ㅃ, ㅍ), ㅅ(ㅈ, ㅆ, ㅉ, ㅊ), ㅇ(ㅎ)). 모음 역시 우주를 상징하는 둥근 점인 ‘·’(天)과 땅을 상징하는 ‘ㅡ’(地),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 우뚝 서 있는 ‘ㅣ’(人)의 천지인을 모델(예→ㅣ+·=ㅏ) 로, 모든 모음을 만든다. 세계 문자 역사상 한글처럼 과학적인 글자는 없다고 한다.
이번 백천 서상언의「한글, 매화도 大作전」은, 이런 한글의 사상적 원리를 바탕으로 작품화되었다. 작품의 스케일은 스펙터클 하다. 자음 14 작품(260×170cm. 한지. 먹. 혼합재료), 모음 10 작품(260×170cm. 한지. 먹. 혼합재료) 총 24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병풍 제작 시 높이 4m 길이 50m에 육박한다. 지금껏 매화도에서 시도된 바 없는, 이 장엄한 수묵 문자추상은 한글 자모(子母)의 붉은 화점(花點)이 절경이다. 포스터모던postmodern한 그의 화법(畫法)은, 한국 수묵의 정체성에 대한 강한 질문이다. 법고(法鼓)를 뒤집는 창신(昌新)의 필법은, 과거 · 현재 · 미래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열어젖혔다. 그의 문자 추상은, 문자의 형태와 의미를 기하학적 추상으로 표현한 예술 기법이다. 이는 문자가 단순한 언어의 도구를 넘어서, 독립적인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문자 추상을 통해 한글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한국어의 독창성을 시각적으로 구성한다. 특히, 매화의 화점(花點)은 공간의 긴장과 조화를 통해 여백미를 추구한다. 그에게 있어 여백은 정신의 아름다움이자, 꽉 찬 ‘빔’이다.「한글, 매화 大作전」은 내면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동양 예술의 정수를 상징한다.
화가는 자음과 모음을 번갈아 매화의 꽃점을 찍음으로써, 한글 문자 추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기상천외한 발상은, 법고의 아름다움과 창신의 새로움과 합치돼, 심플한 미감(美感)을 불러일으킨다. 표음 문자인 한글은 천지인 삼재(三才)를 점획의 근본으로 삼는다. 보이는 사물의 원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담는다. 한글 자음 14자와 모음 10자의 직선과 곡선 미학은 초성과 중성 획의 무궁무진한 운용의 묘를 낳았다.
이응과 히읗의 곡선미는 문자추상의 절경을 이룬다. 한글 운필의 방향은 고정된 틀이 없다.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왼쪽과 오른쪽, 오른쪽과 왼쪽, 모든 필획은 공간 활용이 가능하다. 24작품의 매화도가 모두 나름의 의미를 갖고 태어났지만, 특히 모음 대작「ㅎ」(260×170cm. 한지. 먹. 혼합재료) 앞에 서면 황홀경에 빠진다. 수묵화의 놀라운 현대적 이미지의 구도를 갖는다. 상하좌우 여백미를 주면서 공간 분할한 ‘ㅎ’(히읗)의 배치는 황금분할이다. ‘ㅇ(이응)’ 속에 부감법으로 그려 넣은 여덟 그루의 매화의 곡선미와 한글 자모의 꽃점 처리는 압권이다. 예술의 현대성은 언제나 우리의 내부를 꿈틀거리게 한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과거이자, 동시에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 화가 백천은 수 천 년 내림하는 법고 위에, ‘오늘, 지금’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먹칠한다. 예술 작품은 기존 작법을 무너뜨릴 때 ‘미완성의 완성’이 된다. 수묵의 묘는 여백미와 선(線)의 기운생동에 있다. 파격의 예술은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과정에 비견된다. 화폭 중앙에 ‘ㅇ(이응)’을 두고, 그 원 속에 한 줄기 쭉 뻗은 매화를 심은 뜻은, 묵매도야 말로 천하제일경임을 표상하는 듯하다. ‘ㅇ(이응)’은 모든 모음의 초성에 모셔져, 어미인 땅을 상징함과 동시에 불교의 공(空) 사상을 내포한다. 하여, 백천은 “ㅇ(이응)이야말로, 직선과 곡선의 수묵 미학”을 품은 한글 추상의 묘처임을 갈파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ㅇ(이응)은 우주를 먹여 살리는 화엄의 상징이자 원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구불구불 뒤틀린 노매(老梅)의 풍상은, 매화를 그리는 다섯 가지 묘법인 화매오요(畵梅五要)가 다 들었다. 춤추는 듯, 아리따운 한글 자모의 꽃점은 가지마다 피어 기가 막힌다. 위쪽 상단 ‘ㅗ’에 뿌리박은 매화 역시 탐매선경(探梅仙境)이 따로 없다. 휘굽어 뻗은 앙징은, 능숙한 먹짓의 신령스런 필력이다. 화폭을 양분한 구도의 멋과 아래쪽에 작게 찍은 붉은 낙관은, 여백미와 함께 절묘하다.
특히,「한글, 매화 大作전」에서 주목되는 자음 대작「ㅅ」(260×170cm. 한지. 먹. 혼합재료) 은, 사람 인(人)의 출발점이다. 성리학을 건국의 기초 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근본이념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세종이 끝까지 추구한 사상 역시 덕을 바탕으로 한 백성의 사랑에 있다. 매화도 ‘ㅅ’은, 하늘 위에서 내려보는 부감의 시선과 땅 아래에서 올려다본 고원법을 통해 사람인의 구도로 그렸다. 현대 수묵화의 전대미문의 사건인 이 작품은, 파격과 심미안이 돋보인다. 대담한 스케일과 구성, 지칠 줄 모르는 아이디어는, 한지 초묵의 신비로운 흑색의 세계로 이끈다. 백천의 예술은 바야흐로, 그림이 시가 되는 화중유시(畵中有詩)의 경계에 서 있다.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않는, 동양 예술의 최고봉인 허정(虛靜)의 경지에 다가가고 있다. 이번「한글, 매화도 大作전」은, 백천 서상언의 한글 조형성을 세계에 알리는 변곡점이 될 것이다. 글로벌시대에 걸맞는 그의 문자 추상 수묵은, 한국 미술에 전무후무한 독보적 화경으로 규정된다.
백천 서상언 약력
- 독일. 한국 묵향 초대전(Berlin)
- 주 폴란드 한국문화원 개원1주년 기념 초대전(주 폴란드 문화원)
- 제4회 북경국제서법비엔날레전(베이징 노동인민문화관(태묘) 전시관)
- 주 터키문화원 초대전(터키문화원)
-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출품(한국소리문화의 전당2012~2023)
2023~2024문자문명전(창원성산아트홀)
- 대한민국서예대전 우수상. 초대작가. 심사
- 대한민국문인화대전 초대작가. 심사. 운영
- 대구광역시서예대전 초대작가
- 대한민국영남서예대전 초대작가
- (사)한국서예협회대구지회 고문
- (사)한국서예협회대구지회장 역임
- (사)한국문인화협회 이사
- (사)한국서예정예작가협회 회원
- 한국문인화연구회 회원
- (사)한국미술협회 회원
- 백천서화연구실 운영
- 개인전 1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