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향토 작가하면 대개 소설 '갯마을' 작가 오영수를 먼저 떠올린다. 영화나 TV 문학관을 통해 소개된 작품이다 보니 전국적 인지도가 꽤 높은 편이라 그리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 완성도나 주제 의식에서 더 도드라진 작가는 김정한이다. 물론 내 개인적 취향이 스며든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 약자였던 민중을 향한 따스한 시선이나 권력자들에 대한 한결 같은 비판 의식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잘 담아 낸 '사하촌'이나 '모래톱 아이들'같은 작품들은 향토성 짙다고 평가 받는 갯마을이 비할 바가 못된다.
위 두 작품에 비해 덜 알려진 '뒷기미나루'의 실제 무대였던 삼랑진을 밟아 보기로 했다.삼랑진이란 이름에서 보듯 이 곳은 과거 교통의 요충지였다.어릴 적 서울을 가려면 반드시 여기서 환승해야 했던 곳이라 이름자가 익숙한 곳이었다.
통일호 완행 시대 이어 새마을 열차 시대가 열리면서 정차하는 횟수가 대폭 줄어들면서 이 곳은 우리 기억 속 깊은 곳으로 서서히 침잠해 든 곳이다.
기차에서 내려서야 우리 어린 시절 4~5월 노지 딸기밭이 지천으로 널렸던 곳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른들 손에 작품들은 원두막에서 갓 딴 딸기를 베어 물었던 기억이 아슴슴하게 떠올랐다. 당시 어른들은 4월 벚꽃 향락철이 지고나면 삼랑진 딸기밭으로 몰려 유희를 즐겼던 가 보았다.
특히 이곳은 낙동강 본류와 밀양천 지류가 만나는 곳으로 지대 낮고 물공급이 수월하니 노지 딸기 재배가 잘 되었던가 보았다.
그러나 시대따라 그 농사도 어느 사이 파했는지 끝없이 늘어선 미류 나무 곁 딸기밭도 원두막도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하기야 벌써 그 세월이 반백년이 더 지났으니 강산도 몇 번 바뀐 그 시절 기억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으랴!!
공연히 강가만 기웃대다 역 앞으로 오는 길에 김범우 묘지 팻말을 본 것은 의외의 소득이었다
조선 말 정조 시대 천주교 이승훈의 최초 신도가 되었던 그가 서울 명례방 그의 집에서 예배를 열었다 발각돼 양반들은 면피하고 중인 신분으로 투옥되었다 유배길에 순교한 그가 삼랑진 만어터에 묻혀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밀양 도서관을 지나 밀양 초등 말양 종고를 거쳐 오솔길 따라 다다른 동네 높으막한 자리한 터만 멀찌감치 바라만 보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인데 크리스천들의 성지가 된 것은 아닌 듯 주변이 허술했다.순교의 시점이 어디서부터인지 궁금해졌다. 변변한 목회자도 성당도 없던 시절 유교 사회 칼날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만큼 그가 지키고 싶었던 종교적 가치가 그리 대단했었던 것인지 묻고 싶어졌다.
훗날 첫 예배당 명례방 자기집이 지금의 명동성당이 되었다는 것을 그는 흐뭇하게 보고 있을까. 무교도인 나는 속물음만 하다 기차시간에 떠밀려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