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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구속사적 의미
*강의 설교 : 리덜보스 바울신학 236-282쪽 요약.
롬 7:9-10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율법에는 다양한 용도가 있는데, 이것을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이다. 신학에서도 어렵다. 이에 대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매우 피상적으로 알고 있으므로, 그만큼 우리 신앙생활과 신학도 피상적이다. 나는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이것의 중요성과, 또한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연구하기 시작해서 수십 년간 이 문제를 붙들고 있다.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연구할 때마다 항상 새롭게 느껴지고 새롭게 배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한국에서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된 것 같다. 독보적이란 “잘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외롭게 혼자 걷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 분야에서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하나의 큰 문제는 독일 사람은 신앙적, 문화적 전통으로 복음을 훨씬 쉽게 이해하지만, 한국인에게는 복음 이해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경건한 독일 신자는 말씀대로 산다. 처음에 이것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도전이 되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들은 위선자와 율법주의자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들을 거부하다가 서서히 이들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이 차이점은 한국인이 율법의 용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율법의 용도를 모르면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이번 설교에서는 율법에는 “구속사적 의미”가 있음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것은 리덜보스 바울신학의 “C. 죄와 율법”(21-25장) 단락의 요약이다. 그는 종교개혁자들과같이 율법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46장에서는 “율법의 제3사용”에 대해 설명했다.
율법의 구속사적 용도란, 죄에 빠져 들어가 깊이 타락한 인간에게 율법이 순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여 그리스도께 이끌어 그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교회사적으로는 “율법의 정죄 용도”라고 하는데, 마틴 루터는 이 율법의 정죄 용도를 가장 중요한 율법의 기능으로 봄으로써 칭의 가르침을 펼쳤다. 리덜보스도 지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선포에서 하나의 중심을 이루고, 또한 그의 선포의 특징적인 면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바울이 이곳에서 보이고자 한 것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처하게 된 사망 상태에서는 율법이 어떠한 탈출구도 제공하지도 않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인간을 율법을 통해 오히려 죄와 죄의 부패의 수렁으로 더 깊이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매우 부정적인 관점은, 특히 유대교 진영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야기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울은 실제로 너무나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대인의 율법관/ 구원관을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그들의 생각 속에 갇혀서 좀처럼 나오지 않기 때문이고,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과거의 율법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해 교회에서 해를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갈 4:24에서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산, 약속과 언약의 산, 하나님께서 율법을 내려주신 시내산을 종 하갈이라고 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참을 수 없는 모독인데, 이로써 그는 율법의 구속사적 의미를 극도로 선명하게 드러내려고 했다. 유대인은 율법의 의미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충격 요법을 사용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면 먼저 우리는 그의 율법관과 유대교의 율법관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살펴본다.
1. 유대교의 구속론(율법의 관점에서)
유대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후, 성전에서 예배를 못 드리게 되자, 이방 각처에 회당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곳을 유대인 삶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신학이 생기게 되었고, 이 유대교는 구약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오셨을 때 바로 이러한 사람들과 부딪히셨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유대교가 구약성경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유대인은 구약과 전혀 다른 신학을 발전시켰다. 리덜보스는 이들의 구속론을 고대 회당의 구속론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에 대한 유대교 교리의 본질은, 사람에게 들어 있는 선한 욕구와 악한 욕구(예체르: jezer)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두 가지 욕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본성에 속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선한 욕구에 따라, 그리고 율법의 도움을 받아 악한 욕구를 극복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인 부르심이다.
그런데 성경과 바울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가르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악한 욕구를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하나 안에 모두“라는 집단적인 개념(모두 아담 안에 있다)이 그에게는 이러한 것보다도 훨씬 중요하다. 이러한 차이가 율법이 죄에 눌린 인간의 상황에서 이떠한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판단에서 바울과 유대교는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유대교에서는 바로 율법이 죄의 위협과 능력에 맞서는 주된 무기이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공로와 상과 의를 얻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악한 성향을 억제하고 선한 욕구가 승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율법은 유대인에게 최고의 구원 수단, 아니 진정한 생명의 본질이다. 유대교에게는 율법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많은 계명들은 공로를 쌓기 위한 수단이다. 율법에서 구체적으로 정해 놓은 계명을 그대로 행한다는 의미에서 율법을 성취할 때마다 매번 공로는 쌓이고, 반대로 그 계명을 어길 때마다 공로는 줄어들어서 영생을 얻지 못할 위험성에 빠진다.
그러므로 율법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의 원천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율법의 목적에 관한 유대교의 가르침과 죄와 율법 사이의 내적 관계를 본질에서 부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율법 안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받았다는 바로 그것이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특권이었다. 이스라엘이 소유하고 있는 토라는 악한 욕구의 능력을 막아주는 보호제, 치료제이다. 율법은 사람에게 생명을 선사해 줄 수 있고, 율법의 행위를 통해 공로가 쌓이면, 그것이 심판대에서 죄의 고소를 압도한다(죄의 고소가 들리지 않도록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말하는 곳에서도 율법 외에는 더 나은 구원의 방도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율법이 자기들을 정죄하여 그리스도께로 끌고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사람은 거듭나야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이들에게 십자가 복음은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시자 꾸짖으신 것은, 이러한 복음 내용이 이미 구약에 잘 계시가 되어 있으므로 누구든지 성경을 잘 연구하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바울의 주장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율법의 구속적 의미(율법이 구원을 이루는 방편이다는 것)를 반박하면서, 그의 죄론을 펼친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그 내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7:12에서 단호하게 선언한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렇다! 율법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해야 하고(7:10) 신령한 것이다. 또한 갈 3:21에서도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규범이자 영생으로 가는 인도자라는 의미에서의 율법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고 완벽하게 신뢰할 만하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유대인의 특권이라는 것(롬 9:4), 그 율법을 토대로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할“ 수 있고(롬 2: 2:18), 율법 안에서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롬 2:20)을 부인하지 않는다.
바울이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을 거부한 이유는 단지 하나의 이유 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안에서 더 좋은 구원의 길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깨달은 것이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저주하여 십자가에서 죽였으나 그분은 부활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단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그때까지 걸어 온 율법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 옛 길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고, 또한 율법이 구원의 길로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바울과 유대교와의 대립은 바울이 단지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선포한 것에만 있지 않고, 율법은 죄악된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해주고 생명을 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부정의 논증“을 통해 복음의 필요성을 증명하고자 한 것에도 있었다. 바울의 죄론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과 구조를 부여한 것은 바로 이 후자의 관점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율법을 폄하한 것처럼 보인다.
3. 율법의 길이 죄인을 의롭게 만들지 못하는 이유
바울은 율법이 구원의 수단으로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율법은 그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과, 율법은 죄의 능력에 대항하는 참다운 무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1) 율법은 그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수단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대당 알고 있으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바울은 율법을 진정으로 지키는 기준은 하나님께 회심하는 것이며,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따라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에 있다고 한다(롬 2:4, 29).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것과 같이 죄에 대해 급진적인 관점을 근거로 구원의 길로서의 율법을 거부했다.
2) 율법의 길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오만하게 한다
율법의 길의 치명적인 문제는, 자기가 공적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청구권이 있음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즉, 심판대 앞에서 자기 행위와 공적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펴고 생명과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율법으로 맘미암아 오만해져서 하나님께 대항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유익으로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해“와 „오물“이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 없는 바울과 다른 모든 사람의 삶에 비추어진 빛과 같이 새롭게 임한 지식이었다.
3) 유대인들의 자랑
바울에게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개념이 바울과 유대교와의 대립이 얼마나 큰지를 더욱 분명히 해준다. 이것은 자랑과 걸림돌이다.
„자랑“과 „자랑하다“는 유대인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자기들의 특권을 신뢰한다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이다(롬 2:17). 이것은 이들이 율법을 소유하고, 율법에 대한 지식이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롬 3:27).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의 특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롬 3:1 이하에서 그것을 분명히 인정한다. 단지 그는 인간이 자기 행위를 신뢰하므로, 자기 행위로 의를 얻으려고 하므로(빌 3:3),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인정하신다고 생각하므로(롬 10:3), 율법과 율법의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4. 육신으로 말미암아 무력한 율법 – 율법의 종살이
앞에서 율법의 길이 죄인을 의롭게 하는데 실패한 이유를 몇가지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나온다. 이것은 육신이 너무 연약하여 율법이 죄를 이길 능력을 줄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죄를 일깨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인간에게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의를 제공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죄의 능력을 부수고 육을 이겨서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없다. 롬 7:1 이하에서는 죄와의 투쟁에서 율법에 의지하는 사람의 파산을 명확하고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곳에서 율법의 부족함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특이한 점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율법이 죄인에게서 죄를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드러나게 하는 세력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깨운다. 율법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시킨다(롬 5:20). 7장 도입부(5절)에서 정욕이 율법의 저항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것이 사람 안에서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한다.
5.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훈육 교사로서의 율법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율법을 주셨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이것은 바울이 이미 갈 3:19(„그런즉 율법이 무엇이냐“)에서 질문한 것이다. 율법이 구원을 가져다 줄 수도 없고, 인간에게 공적이나 의도 줄 수 없고, 죄의 권능도 이기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율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인간과 세상을 위해서 하시는 구원사역이라는 커다란 연관성 속에서(구속사 속에서) 율법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율법은 바로 그의 부정적인 사역에서, 즉 죄인에게 구원의 길을 가로막고, 이렇게 해서 반드시 믿음의 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이 율법의 구속사적 의미이다. 그러므로 율법설교 이면에는 반드시 구속의 길을 제시하는 복음설교가 있기 마련이다.
갈 3:14-25의 논증과정에서 바로 이러한(위에서 언급한) 사고가 특징적으로 잘 설명이 된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훨씬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을 대비시킨다. 이를 통해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약속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려고 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약속은 조건이 없고 인간의 공적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인간이 나중에 들어 올 율법을 완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은혜의 선포가 주어진지 430년후에 온 율법은, 그에게 이미 주어진 약속을 폐하거나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목적으로 율법을 추가하셨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율법은 범법(파라바시스) 때문에 들어온 것이다(갈 3:19). 우리는 이 말을 인간이 범죄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범법 때문에“라는 말은 단지 범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범죄를 명백하게 드러나게 하고 생산해내기 위함이다.
롬 5:20과 같은 구절들이 이러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율법이 들어 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죄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율법이 그것을 금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짓는 죄가 불법 임을 가르쳐 줄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죄를 더 짓게 만든다.
그러므로 율법의 목적에 대해서, 롬 7:5, 7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율법은 죄를 죄로서, 율법을 위반하고 저촉하는 것을 드러내고, 금지를 통해 정욕을 자극하고 악이 깨어나게 하고, 율법 때문에 자기가(악이) 제한을 받고 있음을 느낀다면 활동하게 한다(„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7:8). 그러므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게 되었다는 구절인 롬 3:20과 7:7의 그 유명한 선언들은 인식론적일뿐만 아니라, 경험적이고 실존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참조: 고후 5:21).
즉, 바울은 이 사실을 단지 이해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을 통해서도 통렬하게 느낀 것이다. 율법이 자기 의를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이와는 정반대로 자기 죄를 극대화시키기 의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서만 죄인은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하며, 또한 크고 귀한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범죄가 증가하게 된 것은 단지 율법이 들어온 결과일뿐만 아니라, 율법이 들어온 목적이기도 한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고 적발할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죄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종으로 삼고 죽이는 율법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서 약속, 믿음,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실 길을 열어 준다. 이것은 한걸음씩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구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부정의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원을 가리키는 것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훈육교사이며, 부정적이며 준비를 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보지 못하면, 즉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을 갈망하지 못하면, 그의 종착역은 죽음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의 요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충족하지 못하므로, 율법을 지키려고 진정으로 애쓰는 사람은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을 통한 죄 사함과 구원의 빛을 보게 되어 이것을 영접하고 구원받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인이 되어 많은 특권을 누린다.
6. 성령님에 의해 성취되는 율법
우리가 율법의 정죄를 통해 그리스도께가서 죄 사함을 얻음으로써 율법의 역할을 끝났는가?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율법을 폐기해도 좋은가? 아니면 율법을 가이드라인 정도로 여기고 사용하면 되는가? 아니면 율법이 다시 우리를 정죄하는가? 이러한 질문을 두고 수많은 이단이 생기고 불건전한 신앙 흐름이 생겨 오늘날 교회는 상당히 피폐되었다. 교회는 종교개혁 시대부터 „율법과 복음“, „율법과 은혜“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이 문제는 항상 뜨거운 이슈가 되어야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이것이 별로 이슈가 되지 않는 것이 비극이다.
리덜보스는 „바울 신학“에서 이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답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리덜보스는 „그리스도가 빠진 율법과 성령님에 따라 성취되는 율법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바울이 항상 논쟁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 율법은, 바울이 반대하는 회당신학의 구속론에서 큰 역할을 하는 그 율법은,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가 빠진 율법이다. 그가 율법의 기능을 은혜와 믿음의 빛 안에서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롬 8:4 이하에서 성령님으로 맘미암는 삶을 다시 율법과 결부하는 곳에서도 나타난다:
o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o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다시 말하면, 성령님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의 요구, 하나님 말씀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리덜보스는 성령님을 따라 사는 것과 말씀 대로 사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통해 중생된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말씀의 요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율법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며, 이것을 행할 능력도 준다. 이것이 율법의 구속사적 의미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계속 다룰 것이다. (*)
*설교자 : 송다니엘목사
*본 글은 2024. 8. 25. 주일예배 설교로, 헤르만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236-282쪽을 요약 해설한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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