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송은석(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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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현풍관아 부속건물 원호루와 현풍군수 홍필주
프롤로그
지금의 현풍·유가·논공 일원은 신라시대에 추량화현 또는 삼량화현으로, 구지 일원은 구지산 부곡으로 불렸다. 이 네 지역은 고려시대에 현풍현이 되어 조선시대 내내 현풍현으로 불리다가, 조선말인 1896년(고종 33) 대구부 현풍군이 됐다. 현풍현의 중심은 지금의 현풍읍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군·읍의 주요관청 자리는 상당수가 조선시대 때 그 지역 관아가 있었던 자리다. 지금도 주요 관청 주변에 초등학교·향교·비림(碑林)·누정 등이 많은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이는 현풍도 마찬가지다. 현풍읍 행정복지센터 주변에 현풍초등학교·현풍향교·사직단·석빙고·원호루 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달성군민체육관 옆에 있었던 비림은 과거 인근 구쌍산과 비석걸이 등에 있던 송덕비 38기를 한자리에 모아 둔 것이었는데, 2016년 지금의 달성군청 뜰로 옮겼다. 현풍초등·현풍향교·사직단·석빙고에 대해서는 이미 본 지면에서 다룬바가 있다. 이번에는 과거 현풍관아 부속건물이었던 원호루(遠湖樓)에 대해 알아보자.
현풍읍지에 나타난 현풍관아 부속건물과 누정
1786년 발간된 현풍현읍지 궁실조에는 객사건물로 현도관·조양각·응향각과 관아 건물로는 태고헌·근민당·몽서각·향사당·현사훈련당·관덕당·안목당·상정청·호적고·사창·외창·진휼청·대동고가 등재되어 있다. 누정조에는 앙풍루·사겸루·대양정·관수정·창주정·일사정·관송정이 나타난다. 한편 1899년 발간된 현풍군읍지에는 궁실조에 봉의관·태고헌·정화당·원호루·향사당·현사·장관청·군관청·외청·전부소·호적고 등이 있으며, 누정조에 앙풍루·사겸루·영파정·대양정·창주정·학부정·대암정·관수정·낙고정사 등이 등재되어 있다.
이 많은 조선시대 현풍관아 부속건물과 누정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대양정·관수정·원호루·낙고정사 정도다. 이 중 대양정·관수정·낙고정사는 특정 문중과 관련 있는 건물이고, 원호루는 현풍관아 부속건물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지역에 남아 있는 과거 현풍관아 부속건물은 원호루가 유일하다.
현존 유일 조선시대 현풍관아 부속건물, 원호루
현풍 읍동산으로 불리는 인봉(印峯) 정상부에 주요 유적 2곳 있다. 현풍 사직단과 원호루다. 원호루는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인 1879년(고종 34), 지금의 자리가 아닌 당시 현풍관아 후원에 처음 세워졌다. 창건주는 현풍군수 홍필주[洪弼周·1857-1917]. 홍 군수는 인근 고을수령이나 선비들과 함께 정사를 논하거나 풍류를 즐기기 위해 원호루를 세웠다. 처음에는 아담한 규모의 2층 누각이었는데, 1957년 중건할 때 기단부를 높이고 건물 전체에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이후 1989년 현풍면사무소를 증축할 때 해체, 1997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했다.
지금의 원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2층 누마루는 우물마루 양식이며,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둘렀고, 누마루 아래에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목재 계단을 설치했다. 2층 누마루에는 원호루 창건 당시 현풍군수 홍필주가 지은 ‘원호루상량문’과 달성문화원장을 지낸 채수목 선생이 짓고 조양제 선생이 쓴 ‘원호루이건기문’이 걸려 있다.
항일애국운동가 초대 현풍군수 홍필주
현풍현은 조선 말기인 1896년(고종 33) 대구부 현풍군이 됐다. 현에서 군으로 승격됨에 따라 고을수령 역시 종6품 현감에서 종4품 군수가 됐다. 초대 현풍군수는 현풍이 군으로 승격하는 해인 1896년에 부임한 홍필주다. 그는 우리나라 근대 역사상 최대 격변기라고 할 수 있는 조선말과 대한제국시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항일애국운동가였다. 그런데 불과 100여 년 전에 우리 고을 수령을 지냈던 홍필주 군수가 항일애국운동가였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현풍군수 홍필주의 약력을 한 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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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필주의 본관은 풍산, 자는 사량(士良), 호는 자은(紫隱), 충남 아산 사람이다. 그는 안동군수·안동부사·안동부 참서관·안동 재판소 검사를 지냈다. 1896년 현풍군수로 부임한 그는 농업·양잠·치수에 큰 성과가 있어, 그해 8월 현풍군민들이 만인산(萬人傘)을 올려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898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1900년 대구군수를 역임했으며, 이후 중추원 칙임 참의관 등을 역임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나철·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신사소청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고 규탄 선언서를 발표했으며,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 평의원, 1907년 2월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발기인 및 평의원을 지냈으며, 항일계몽단체인 자신회를 결성해 매국노 처단에도 앞장섰다. 하지만 을사오적 암살 계획에 실패해 진도로 유배를 갔다. 1908년 사립초등교육기관인 훈도학교를 설립하고, 1910년 국채보상금 처리회 대총회에 충남대표로 참여했으며, 대한협회에서 설립한 기호흥학원[현 중앙고등학교] 초대 학무부장을 지냈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문집으로 자은선생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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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수는 군수 재임 시에 현풍군민들로부터 ‘만인산’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2년 뒤 정3품 통정대부에 오르고 또 2년 뒤 대구군수에 제수됐다. 만인산은 19세기에 유행한 우리나라의 독특한 전통문화다. 고을 백성들이 비단으로 일산[양산] 모양을 만들어 일산 표면 또는 가장자리에 늘어뜨린 비단조각에 고을민들의 이름을 적은 물건을 말한다. 이는 고을수령의 선정에 대한 고을민의 감사를 담은 물건이다. 그런데 홍 군수의 만인산은 좀 달랐다. 아래는 「독립신문」 1899년 9월 11일자에 실린 ‘현풍 만인산’이란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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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군수 홍필주씨는 얼마나 고을민을 잘 다스렸는지 그 군민들이 만인산을 만들어 서울까지 올라와 여러 곳에다 세워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돌려 보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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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만인산은 송덕비와 의미가 유사하다. 현 달성군청 비림에는 모두 42기의 송덕비가 모여 있는데 이중에는 현풍군수 홍필주의 송덕비도 2기가 있다. 이중 ‘군수 홍필주 청덕선정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한 번 음미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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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해진 끝에 우리 군수 부임하시니 추위 가고 봄이 왔네. 촉군처럼 문치를 이루었고 무성처럼 현가가 울렸네.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고 힘을 다해 보와 방죽을 만들었네. 흉년에 궁핍함을 구제해준 사람 4백 명이나 되었다네. 빠진 것을 보충하여 빛을 드러냈지만 백성의 비용은 쓰지 않았네. 향교 성전을 고치는데 박봉 내어 도왔네. 강릉에 불이나자 관고에서 돈을 냈네. 재해 입은 전결엔 고루 은혜 베풀었고 백성들 혼례 권장했네. 마음가짐은 청백리라 금을 자갈처럼 여겼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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