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판사 서평 “류영모의 사상은 홀로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獨立不懼). 류영모의 생애는 세상에 숨어 시름이 없었다(遯世無悶). 독립불구의 독창적인 사상이라 알아주는 이가 적었고, 둔세무민의 생애라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가 평생을 바쳐 다석 사상을 연구하고 알리게 된 숨은 동기가 여기에 있다.” 박영호, 머리말에서 일평생 진리를 좇아 큰 깨달음에 이른 대사상가, 기독교,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에 두루 통달하여 동서회통의 구경각을 이룬 다석 류영모의 삶과 사상
2008년 7월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린 ‘세계철학대회’에서 함석헌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소개된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류영모는 동서 사상과 천문 지리에 능통한 대석학이었고, 우리 말과 글로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큰 깨달음에 이른 대자유인이었다. 젊어서 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뒷날 《반야심경》을 때마다 외울 정도로 불교의 가르침에 심취했고, 어려서 《맹자》를 읽고 각성한 뒤로 유학과 노장을 깊이 탐구하여 동양 사상의 대가로 통하였다. 특히 《중용》을 좋아하여 직접 우리말로 옮기고 후학들에게 여러 차례 강의했다. 일생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읽었으며, 예수를 삶의 모범으로 삼아 진리에 헌신했다. 그는 동서 사상을 회통시켜 대통합을 이룬 구경각의 대사상가였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15살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1910년 20살 때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이때 기독교를 전파하여 일제 강점기에 오산학교가 기독교 운동의 중요한 인물들을 길러내는 계기를 이루었으나 정작 류영모는 이 무렵에 톨스토이를 읽으며 정통 기독교 신앙에 의심을 품었다. 또한 불경과 《노자》를 접하면서 성경만을 진리로 받들고 예수를 절대화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191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1년 만에 돌아왔다. 농사지으며 살고자 하였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1년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학생들에게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철학 강의를 하였다. 이때 졸업반이었던 함석헌을 만났다. 함석헌은 이때 받은 충격을 “나의 일생 동안 정신적으로 단층을 이루며 비약한 때가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가 류영모 선생을 만났을 때”라고 표현했다. 종교, 철학 분야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보여준 류영모는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 문일평 등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1928년부터 35년 동안 YMCA 연경반에서 동서 사상을 강의했다. 김교신, 함석헌, 류달영, 김흥호 같은 이들은 다석을 스승으로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다.
단순하고 소박한 금욕의 삶을 살고자 했던 류영모는 50살 무렵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항상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얇은 잣나무판 위에서 생활하고 잠도 그 위에서 잤다. 새벽 3시면 일어나 명상을 한 후 일기를 썼다. 그 일기를 모은 《다석일지》는 그가 쓴 유일한 저술로 남았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늘 “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라고 말했으며, 45살 때 북한산 밑으로 이사하여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았다. 나이를 햇수로 세지 않고 날수로 하루하루 세었는데, 33,200일을 살았다.
류영모의 직제자 박영호의 땀과 혼이 밴, 단 하나의 다석 전기
《다석 전기》는 류영모의 직제자인 박영호가 스승의 생전에 구술을 받고,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남긴 《다석 일지》를 필사하고, 여러 지인을 만나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펴낸 유일한 다석 전기이다. 1985년에 초판이 출간된 이래로 두 차례의 개정판이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세 번째 개정판인 이 책은 그동안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을 더하고, 잘못된 기록들을 바로잡았으며, 옛말 투의 문장과 한자말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듬었다.
진리를 찾는 젊은이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4살 때 천자문을 떼었고, 6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며 《자치통감》을 배웠다. 10살부터는 소학교에 다녔는데, 훗날 류영모는 서당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산수를 배우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고 추억했다. 1902년부터 다시 서당에 다니기 시작한 류영모는 서당에서 《맹자》를 배웠다. 류영모는 《맹자》를 좋아하였으며, 좋아한 만큼 깊이 영향을 받았다. 류영모는 《다석일지》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나의 정신은 모세와 예수, 그리고 공자와 맹자로 영향된 것입니다.”(61쪽)
1905년, 15살이던 류영모는 YMCA 초대 총무였던 김정식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선교사 게일이 운영하던 경신학교에 다녔다. 그 무렵 교육으로 조국을 구하자는 안창호의 주장에 감화되어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은 경신학교 교장 밀러에게 오산학교에서 근무할 과학 교사를 구해달라고 청하였다. 류영모가 경신학교 학생일 때 직접 과학을 가르쳤던 밀러는 단번에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은 류영모를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1910년, 20살이던 류영모는 오산학교에 선생으로 가게 되었다. 류영모는 약 2년 동안 오산학교에서 과학 교사로 지내면서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남강 이승훈에게 기독교 사상이 없었다면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독교를 대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산학교에 기독교 사상이 없었다면 주기철, 김주항, 한경직, 함석헌과 같은 종교인들을 배출할 수 없었을뿐더러 오늘 우리가 아는 오산학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910년에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한 류영모의 공로는 지대하다.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그리하여 안창호가 점화한 오산학교의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은 예수의 진리 정신과 사랑 정신으로 승화되어 더욱 빛났다. ― 3장 ‘오산학교 교사’․129쪽에서
오산학교에서 동료 교사로 만난 이광수와는 후에 이웃사촌이 되어 만년에도 사귐을 계속하였다. 류영모는 이광수를 통해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과 인연을 맺었고, 최남선이 발행한 잡지 〈소년〉에 글을 싣기도 하였다. 류영모는 민족 사학자 호암 문일평과도 교유하였는데, 류영모와 문일평이 만난 것은 최남선이 세운 출판사 신문관에서였다. 당시 신문관에는 이 나라 최고 지성과 수재들이 모여들어 수준 높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고 유·불·선에 능통했던 문일평은, 비록 2살 아래이지만 기독교는 물론이고 유·불·선에 통달한 류영모의 넓은 학식을 일찍이 알아보고 마음으로 경외하였다.
1912년, 오산학교 과학 교사를 그만둔 류영모는 일본 도쿄에 유학을 가서 대학교 예비 과정인 동경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6월까지 공부했다. 당시 일본에서 재일본 YMCA 총무를 맡고 있던 김정식은 한국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할 때 우치무라 간조를 강사로 자주 초빙하였다. 우치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를 주창했으며, 함석헌, 김교신 등에게 영향을 끼친 기독교 사상가이다. 류영모도 여러 번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을 들었으나 그때는 이미 정통 신앙을 떠났던 터라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유학한 지 채 1년이 안 되어 더 공부하기를 포기하고 돌연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류영모가 대학에 가지 않은 이유를 그의 말로 짐작해본다.
대학, 대학 하면서 대학에 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같이 생각하는데 대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대학 때문에 사회악이 더 조장되지 않아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의 범죄가 더 심해지고 사회악이 더 눈에 띄지 않아요? ……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박사 논문을 쓴다는 것은 빌어먹을 짓입니다. 나는 대학을 반대합니다. 출세하여 대학 교수가 되려고 하는 것은 일하기 싫어서 그러는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에도 교만한 자는 일하지 않고 밥 먹으려 한다고 말했어요. 개인의 편한 것을 생각하면서 나라 생각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지식을 취하려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양반 사상・관존민비 사상입니다. ― 4장 ‘도쿄 유학’․147쪽 다석의 말에서
농부를 꿈꾸다 도쿄에서 돌아온 류영모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직접 농사를 지어서 제가 먹을 것은 제 손으로 만들어 먹는 농부의 삶을 꿈꾸었다.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일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일이 나 살 것을 도와줍니다. 자기가 들어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머무를 곳을 정하게 되면 그것을 복거(卜居)라 합니다. 도심(道心)이 이롭다는 것을 알고 땀 흘리며 일하여 생활을 규정지어주는 것이 되어 복거하니, 이 이상 즐거운 호강이 어디 있겠습니까? 권력과 금력으로 호강하겠다는 것은 제가 땀 흘릴 것을 남에게 대신 흘리게 해서 호강하자는 것이니 그 죄악은 여간한 것이 아닙니다. ― 9장 ‘농사짓는 은둔자’․301쪽 다석의 말에서
류영모의 아버지 류명근은 일본에 유학 보낸 아들이 대학 공부는 하지 않고 도중에 돌아와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겠다고 하니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류영모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피혁 상점에서 상업용 서신 거래를 맡아보았다. 아버지의 피혁 상점과 아우의 금은방 점포를 봐주며 지내다가 1928년에는 아버지 류명근이 차려준 솜 공장(경성제면소)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7년 동안 솜 공장을 경영하던 류영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45살에 드디어 북한산 기슭으로 이사하였다. 23년간 품고 있던 간절한 꿈을 이룬 것이다.
기독교 밖의 기독교인 15살부터 정통 기독교 신앙을 믿었던 류영모는 오산학교에서 과학 교사로 지내는 동안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신앙에 의심이 일었다. 그 무렵 오산학교에 머물던 독립운동가 여준과 신채호의 영향으로 불경과 《노자》를 접한 일도 그의 생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성경만을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석가, 노자, 공자, 맹자 등 다양한 경전을 공부하였다. 예수를 좋아하듯 노자, 장자를 좋아했고, 공자, 맹자를 좋아했다.
류영모의 종교관은 일원다교(一元多敎), 즉 ‘가르침은 여럿이지만 진리는 하나’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류영모는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 유교, 노장 사상 등 동서양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하나의 진리를 보았다. 다만, 하느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을 공자는 덕(德)이라 하고, 석가는 법(法)이라 하고 노자는 도(道)라 하고, 예수는 얼[靈]이라고 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름만 다를 뿐 실체는 똑같다고 보았다. “얼의 나로는 너와 나가 없다. 그러므로 얼로는 예수, 석가, 공자, 노자의 구별이 없다.”(450쪽) 류영모는 바로 이것이 예수와 석가, 공자, 노자가 인류에게 가르쳐주려 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예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예수를 바로 알려면 다른 그이(君子)도 알아야 합니다.” “성경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도 구약 대접은 하여야 합니다. 맹자와 장자가 바이블이 못 될 것도 없습니다.” “공자의 자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맹자와 장자도 성령 받을 것은 다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인성을 그렇게 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와 석가는 비슷합니다. 매우 가깝습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이 대단히 적은 것 같습니다. 석가를 아는 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와 석가가 죽은 뒤에 향불 피워놓고 촛불 켜놓고 해서 불교도 기독교도 없어졌습니다.” ― 9장 ‘농사짓는 은둔자’․328쪽 다석의 말에서
류영모는 여러 종교의 경전을 두루 읽었을 뿐 아니라 중요한 경전은 우리말로 옮겼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나침반이 되는 경전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우리말과 글로 옮겨야 한다고 말하였다. 류영모는 1959년에 《노자》를 우리말로 옮겼으며, 1968년에는 《중용》을 옮겼다. 그밖에 《장자》 《논어》 《맹자》 《주역》 《서경》 등도 부분적으로 우리말로 번역하였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결별의 기도’도 새로 번역하였다. “류영모의 《노자》 우리말 옮김을 보면 눈이 번쩍 뜨이면서 이렇게도 옮길 수 있구나 하고 놀라게 된다. 《노자》 번역을 보면 한 글자도 군더더기가 없다. 정곡을 찌르는 올바른 뜻풀이로 빈틈이 없다. 순우리말만 써서 한자 낱말은 거의 없다.”(501쪽)
대가들의 스승 1928년에 류영모는 종로YMCA 간사였던 현동완이 간청하여 YMCA 연경반 강의를 맡게 되었다. 류영모의 연경반 강의에는 함석헌, 김흥호, 김교신 같은 우리나라 종교계의 큰 스승들을 비롯한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해 가르침을 받았다. 류영모는 성경뿐 아니라 직접 번역한 불교, 유교 경전과 자작 시편들도 풀이하였는데, 35년 동안 이어진 강의에서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독특한 사유 세계를 펼쳤다.
함석헌을 통해 류영모를 알게 된 한국 무교회 운동의 제창자 김교신은 정통 신앙인이었으나 류영모의 영감 넘치고 창조적인 성경 풀이에 감탄해 비정통 신앙인이었던 류영모를 스승으로 모셨다. 류영모는 김교신이 발행하던 신앙 잡지 〈성서조선〉에 11차례나 글을 기고하였다. 1942년, 일본 경찰은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쓴 권두문 ‘조와’를 트집 잡아 정기 구독자 300여 명을 잡아들인 일이 있었는데, 이때 류영모도 연행되어 심문을 받았다. 신앙 생활을 가장하여 김교신, 함석헌 등과 지하 조직을 만든 것 아니냐는 혐의였다. 그리하여 서대문 형무소 미결수 감방에서 57일간 감옥살이를 했다.(‘성서조선 사건’)
류영모가 31살에 오산학교에 교장으로 갔을 때 졸업반 학생이었던 함석헌은 연경반 강의에 빠지지 않고 나와 스승의 강의를 들었다. 함석헌은 자신이 이 나라의 종교 사상가로, 민주 투사로, 인권 운동가로 명성을 떨칠 때에도 다름이 없었다. 함석헌은 류영모를 처음 만난 때부터 40여 년 동안 류영모를 하늘 같은 스승으로 섬겼고, 류영모는 그런 그를 ‘정신의 아들’로서 목숨처럼 아꼈다. 함석헌은 “나의 일생동안 정신적으로 단층(斷層)을 이루며 비약한 때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류영모 선생을 만났을 때”(222쪽)라고 할 정도 다석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류영모를 닮으려 애썼다.
나에게는 아주 커다란 결점이 있습니다. 의지가 약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존경하는 선생님(류영모)에게조차 한 번도 질문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후회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스스로 나는 이때까지 인생을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살이 되도록 인생이란 문제를 생각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숨’이니 ‘참’이니 하는 낱말을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겨우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와서 생각하노라면 그때에 모든 문제를 좀 더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한(恨)합니다. ― 6장 ‘오산학교 교장’․221쪽 함석헌의 말에서
일본에 가기 전 오산학교에 있을 무렵부터 나는 사물을 생각하는 눈이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류영모 선생의 영향입니다. 선생은 깊이 사색하는 분입니다. 선생의 대표적인 말씀은 ‘진실’입니다만 생명을 강조하여 그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도 늦게나마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 13장 ‘스승과 제자’․445~446쪽 함석헌의 말에서
김흥호는 류영모의 연경반 강의는 물론이고 류영모의 집에서 진행했던 일요 모임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스승의 강의를 속기하여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여, 기록이라고는 자신의 일기만을 남기고 간 류영모의 귀한 말씀을 접할 수 있게 한 장본인이다. 다석은 평생동안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동완이 다석을 YMCA 연경반 강의에 초빙하지 않았다면 류영모가 깨달은 진리는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채로 시공에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말과 글로 철학하다 한학(漢學)의 대가였던 류영모는 한자 한 글자에 철학 개론 한 권이 들어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파자(破字)’를 하여 한자 생성 원리를 밝혀 거기서 철학을 캐냈다. 그러나 류영모는 한자에만 심취한 것이 아니라 한글에 하늘의 뜻이 들어 있다 하여 한글을 더 사랑했다. 한자와 마찬가지로 한글의 생성 원리를 밝혀 우리말로 철학하고자 하였다.
모두가 한자는 뜻글자이지만 한글은 소리글자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류영모는 한글도 한자와 다름없는 뜻글자의 구실을 한다고 말하였다. 세종 임금이 한글을 지을 때 자연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모음과 자음이 그 나름대로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한글의 자음은 입(목구멍ㆍ입천장ㆍ혀ㆍ입술ㆍ이)의 모양을 본떠 만들고 음의 강도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누었다. 한글의 모음은 ㆍ(天), ㅡ(地), ㅣ(人)를 으뜸으로 하여 만들었다. 류영모는 한글 모음의 으뜸 모음인 ㆍ (아래 아)를 안 쓰게 된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 14장 ‘우리 말글 속의 하느님’․484쪽에서
류영모는 한글은 씨알(백성)을 위한 글씨라고 하였다. 양반을 위한 한자가 아니라 오로지 씨알들이 쉬 배워 잘 쓰라는 씨알 글씨였다. 그래서 류영모는 한글보다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씨알 가르칠(訓民) 바른 소리(正音)”라고 순우리말로 풀이하여 쓰기를 즐겨하였다. 하늘의 뜻이 담긴 씨알의 소리로 경전을 쓰고 철학을 쓰고 문학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광주를 가리키는 ‘빛고을’이라는 말을 맨 처음 쓴 사람도 류영모이다. “빛고을이라고 하면 넓고을 경기도 광주(廣州)와 혼동도 되지 않고 좋다. 또 마을 이름을 비단고을(羅州)ㆍ온고을(全州)이라는 순우리말로 부르면 훨씬 정감이 가고 듣기에도 아름답다.”(607쪽) 그 외에도 ‘제나’, ‘얼나’, ‘씨알’ 같은 말 역시 우리 말과 글 안에 숨은 놀라운 의미와 이치를 찾아내고 밝히기를 즐겼던 류영모가 만들어 쓴 말이다. 류영모는 한글을 가지고 여러 가지 변형된 글씨를 만들어 한글의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며 아울러 깊은 사유를 통해 참된 뜻을 심화시켰다.
류영모의 한글 철학이 담긴 류영모의 친필. ― 14장 ‘우리 말글 속의 하느님’․490쪽에서
우리 말글에 애정이 깊었던 류영모는 국어학자 이정호, 서상덕과 교유하며 한글을 연구하였다. 이정호가 류영모의 집으로 찾아가 ‘훈민정음제자해(訓民正音制字解)’의 강해(講解)를 청하여 서로 마주 앉아 훈민정음제자해를 풀이하였다. 류영모는 우리말과 글을 연구한 재야의 한글학자 서상덕을 높이 평가하여 서상덕이 오랫동안 해 온 한글 연구를 책으로 펴내는 데 출판 비용을 대주었다. 그리하여 서상덕의 《국문철자법》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죽음의 종이 되지 마라 이 세상 사람들이 음식, 여색, 도박, 술, 담배 등 온갖 맛을 찾아 헤맬 때, 류영모는 죽음 맛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어릴 때부터 형제의 죽음을 여러 번 겪었던 류영모는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 류영모가 염세주의자들처럼 삶을 싫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삶을 싫어하지도 않았고, 삶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느님의 뜻대로, 순리대로 하루하루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삶이었다. 류영모는 “이 세상에서 바로 살 줄 알고 말씀을 아는 사람은,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리고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잘 모르고 삽니다. 살려준다고 해서 좋아할 것도 없고, 죽이겠다고 해서 흔들릴 것 없습니다. 죽는 것이야말로 축하할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삽니다.”(564쪽)라고 하였다. 류영모에게 살고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입니다. 죽음의 연습은 영원한 얼생명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고 정신이 사는 것입니다. ― 4장 ‘도쿄 유학’․144~145쪽 다석의 말에서
사람은 누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류영모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일찍부터 할수록 좋다고 하였다. 류영모는 관 바닥에 까는 칠성판을 떠올리는 잣나무 널판을 안방에다 들여놓고 40년 동안 그 위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였는데, 이는 매일 죽음을 맛보며 죽음과 친해지려는 이유에서였다. 보통 사람들은 몸의 삶에 얽매어 탐욕·진에(성냄)·치정의 삼독에 끌려 다닐 뿐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마주하면 두려워하여 도망치려고만 한다.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언제나 죽음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 여느 이들이 걷는 고달픈 삶의 길이다.
나는 죽음 맛을 좀 보고 싶어 그러는데 그 죽음 맛을 보기 싫다는 게 무엇입니까? 이 몸은 내던지고 얼을 높이 받들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온 얼은 들리어 하늘에 올리우고 땅에서 온 몸은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죽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없습니다. 이 껍데기 몸이 죽는 거지 죽는 게 아닙니다. 죽음을 무서워하고 싫어할 까닭이 없습니다. 보통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껍데기 몸이 퍽 쓰러져서 못 일어나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이 껍데기 몸이 그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진리의 생명인 얼나는 영원합니다. ― 16장 ‘죽음 연습’․565쪽 다석의 말에서
금욕의 삶을 살다 류영모는 몸이 건강을 유지할 만큼 아주 적은 물자를 써야 하며, 필요 이상의 재물을 쓰거나 가지는 것은 도둑질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류영모에게 개인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일은 하느님에 대한 불경(不敬)이요, 죄악이었다. 이 세상에서는 오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뿐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 : 15)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단순하고 소박한 금욕의 삶을 살고자 하였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더 바라지 않는 마음의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몸이 성하면 그만입니다. 몸이 성하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놓아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하느님의 성령인 진리를 담기 위하여 비우는 것입니다. 몸살림은 겨우겨우 사는 것이 가장 잘사는 것입니다. ― 8장 ‘죽음 앞의 묵상’․269쪽 다석의 말에서
류영모는 한복의 불편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무명 한복만을 입었다. 비단옷을 입거나 신사복에 넥타이를 맨 적이 없다.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었으니 굶고 산 것이나 같다. 하루에 소찬의 저녁 한 끼니만 먹었다. 일생 보신을 하거나 보약을 먹은 일이 없고 약국이나 병원에 드나들기를 싫어하였다. 집은 남이 살던 낡은 한옥 기와집을 개조하여 살았다. 집에 호화로운 가구란 없었으며 집에서 직접 만든 낮은 책상을 썼다. 천 가방을 들고 다니고 가죽 가방을 산 적도 없다. 혼인 때 예물로 받은 시계만 차고 그 뒤로는 손목시계를 갖지 않았다. 머리는 집에서 삭발하여 이발소를 몰랐고, 냉수 마찰을 하니 목욕탕을 몰랐다. 류영모는 하인들에게 잔심부름 시키는 양반들을 언짢게 생각해 남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고 손수 하였다. 외출을 하여도 시내는 물론 웬만한 먼 곳도 늘 걸어 다녔다. 자녀의 혼인 예식도 집안에서 간소하게 했으며 생일 잔치, 환갑 잔치는 안 했다. 언제나 국산을 쓰고 수입품을 쓰지 않았다. ― 15장 ‘동족상잔의 포화 속에서’․532쪽에서
류영모는 “짐승을 길들일 때는 적당하게 굶기고 먹여야 한다. 우리의 몸도 짐승이다. 몸이 제멋대로 설치지 않게 하려면 몸을 알맞게 절제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은 단식을 하고 단색(斷色)을 하여야 한다.”(349쪽)라고 하였다. 또한 몸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에서 벗어버릴 옷에 불과하지만, 인생의 목적인 하느님의 얼을 기르기 위한 한도 안에서 몸을 건강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탐욕의 뿌리인 식욕을 버리기 위하여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치정의 뿌리인 애증을 넘기 위하여 해혼(解婚)하여 부부가 남매처럼 지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냉수 마찰을 하고, 오산학교 초대 교장이던 백이행에게 배운 실내 요가 체조를 날마다 했으며 항상 걸어서 다녔다. 앉을 때는 언제나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죽는 날까지 그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류영모는 몸의 살림살이를 이렇게 말하였다. “짐승을 기를 때는 우리가 쓸 만큼만 사랑하고 길러야지 그 이상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위해 내 몸뚱이를 길러야지 짐승인 이 몸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여기에다 전(全)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얼이 어째서 이런 짐승 속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얼을 기르기 위한 한도 안에서 몸을 건강하게 해야지 몸을 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적당히 쓰기 위해서 적당히 길러야 합니다. 그리하여 잡을 때 짐승을 잡아야 합니다. 항상 영원한 생명인 얼은 위에서 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15장 ‘동족상잔의 포화 속에서’․531쪽에서
제자들이 기억하는 다석 류영모
“류영모 선생은 스스로 말하기를 신사복을 입은 귀족 차림으로는 밖에 나갈 수 없다 하였다. 여름에는 베나 모시로 된 바지저고리를 입고 흰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가을과 봄에는 광목 바지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었다. 겨울에는 솜 바지저고리에 단추를 단 두루마기를 걸치고 구두를 신었다. 몹시 추울 때만 털모자를 썼다. 그리고 집에서 만든 천 가방을 늘 들고 다녔다. 가방 속에는 교재로 쓸 모조지와 《성경》, 그리고 일기를 쓴 노트를 넣고 다녔다. 《성경》 외에 다른 책은 가지고 온 적이 거의 없었다. (강의) 시작하는 시간을 어긴 법이 없었으나, 마치는 시간은 예정한 두 시간을 지킨 적이 거의 없었다.” - 박영호
“다석 선생은 그저 한번 척 보아서도 마음이 가라앉은 분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언제나 꼭 지키고 있는 분이란 것이 몸매에나 말씨에나 걸음걸이에나 늘 나타나 있었습니다. 빈틈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도 마음을 헤쳐 놓음(放心)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좀 가까이하기가 어렵고 잘못 아는 어떤 이들은 아주 차다고도 합니다만 그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결코 차신 분은 아닙니다. 무슨 일에나 누구에게나 그저 예사로 대하시는 일이 없으신데 차다는 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찬 것이 아니라, 참입니다.” _ 함석헌
“다석 류영모 선생을 어떤 사람은 기인(奇人) 또는 괴짜라고 말한다. 그의 생활이 보통 사람과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진인(眞人) 또는 성자(聖者)라 추앙한다. 그의 인격이 참되고 거룩하였기 때문이다. 다석 선생을 공자 못지않게 어진 분이라고 말한다 해도 선생의 인품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는 거부감 없이 수긍하게 될 것이다.” _ 류달영
“류영모 선생은 숫자의 신비를 느끼고 살았다. 매일매일 자기가 산 날짜를 세면서 살아갔다. 영원을 영원에서 찾지 말고 찰나에서 찾으라고 하였다. 영원한 생명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되게 사는 것이요, 하느님을 아는 것이 참을 알고 사는 것이요, 참을 알고 참되게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선생은 언제나 영원을 하루 속에서 살았다.” _ 김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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