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백의총(七百義塚)
충남 금산군 금성면(錦城面) 의총리에 있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 조헌(趙憲)과
승병장(僧兵將) 영규대사(靈圭大師) 등 700 의사(義士)의 유골을 안치한 묘소이다.
이 묘소(墓所)를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하는데 총(塚)이란 많은 사람의 시신을 한꺼번에 묻어놓은 무덤을 총(塚)이라고 부른다.
금성면(錦城面)의 칠백의총(七百義塚)은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만인의총(萬人義塚)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의 대표적인 의총(義塚)이다. 만인의총(萬人義塚)은 1592년(선조 25)부터1596년까지 임진왜란이후 다시 1597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인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오만육천의 왜적을 맞아 남원성을 지키려 싸우다가 순국한 민관군(民官軍)의 합장한 무덤이다.
그 유명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10만 양병론(養兵論)도 이 정유재란을 예상한 주장이다.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는 이총(耳塚)이란 무덤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조선인 12만6000명의 귀와 코18만개를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부하들이 전공(戰功)을 인정받기 위해 그들이 죽인 조선사람들의 귀와 코를 베어내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가져 갔다한다. 이총(耳塚)이 일본 교토에 있는 것을 죄수들의 아버지와 사형수들의 아버지라는 는 별명을 듣던 박삼중스님이 일본을 방문중 알게 되어 1990년에 그 이총의 흙을 얻어와 선진리에 귀무덤 이총(耳塚)을 만든 것이다.
역시 선진리에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중 사천 선진리성에서 전사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朝明聯合軍)7000여명의 집단무덤인 조명군총(朝明軍塚) 이 있다.
또한 전남 영암군에서 목포로 가는 길목에 6.25 전쟁때 북한군에 집단으로 살해된 한마을 주민을 묘 하나에 매장한 묘가 있다. 이것도 일종의 총(塚)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우리나라 곳곳에는 나라를 위해 희생된 영령들을 한곳에 묻은 이름없는 의총들이 있을 것이다.
칠백의총에 묻힌 영규대사(靈圭大師)는 휴정대사(休靜大師)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고 이어 금산(錦山)에 이르러 일본군과 격전 끝에 조헌 등 700의사(義士)와 함께 순국한 승장(僧將)이다.
또 금산전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로는 호남의 명문(名門)으로
조선조에 의병대장을 많이 배출한 창평(昌平) 고(高)씨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 ~1592)을 들수 있다.
고경명(高敬命)은 호남고전 음악의 중심지이자, 풍류선비들의 살롱이며 호남정서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소쇄원(瀟灑園)의 단골멤버이기도 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은 임진왜란이 나자 60살의 나이로 의병들을 이끌고 금산전투에서 전사한다. 이때 고경명이 의병을 소집하기 위해 외친 마상격문(馬上檄文)은 명문장으로 유명하다. 이 전투에서 고경명의 둘째 아들인 고인후도 아버지와 같이 전사한다.
큰아들인 고종후도 전투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너는 살아서 집안을 이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만류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1년 뒤 진주성 2차 싸움에 참가하여 숙부인 고경형과 함께 전사하였다. 전사한 두 아들은 모두 대과에 급제한 수재들이었다.
이처럼 창평(昌平) 고(高)씨는 호남 최고의 명문으로 지금도 호남에서 가장 혼인을 하고 싶은 성씨로 高 奇 朴씨 중의 한 명문이다.
칠백백의총에는 종용사(從容祠)를 건립하여 700의사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그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이 사당을 파괴한 것을 1963년에 정화작업을 하고 종용사(從容祠) 다시 재건 하였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