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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청나라는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가 세운 나라인가?
별빛 추천 0 조회 207 15.06.04 10:50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청나라는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가 세운 나라인가?

 

  고려사절요 고려 예종 을미 10년(A.D.1115) 조에는,
  "생여진의 완안아골타가 황제라 칭하고, 이름을 민(旻)이라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그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살며, 문자가 없어 끈을 매어 의사소통을 했다. 
  그 지방에 돼지, 양, 소, 말이 많은데, 말은 준마가 많다.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며 어릴 때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기 때문에 장성하여 활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말달리는 전쟁연습을 해 경병이 되는데, 여러 부족이 제각각 우두머리라 하여 통일되지 못했다.
  그 땅의 서쪽이 바로 거란이고, 남쪽은 바로 우리나라(고려)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겼는데, 조회하러 올 때마다 부스러기 금과 담비가죽, 좋은 말을 바쳤다.
 우리(고려) 조정에서도 은과 폐백을 후하게 내려주었는데, 해마다 그렇게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앞서 예종 4년(A.D.1109)에 여진의 요불이 입조하여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쌓은 동북 9성을 돌려주기를 청원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우리 태사 영가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귀부해야 한다 하였고, 지금 태사 오사속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라고 했고, 금사 태조본기에는 시조 함보가 고려로부터 왔다고 기록하고 있어 금나라 왕실이 우리와 혈통이 닿아 있음을 알게 한다.

 

☆ 금나라는 서기 1115년에 건국되었고, 고려는 신라 54대 경명왕 2년인 918년에 건국된 나라인데, 홍호의 송막기문에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감복이고, 이가 금 태조의 9대조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금사에는 금나라 왕실의 세계를 시조 함보→오로→발해→수가→석로→오고내→핵리발→아골타로 기록하고 있어 시조 함보가 아골타의 7대조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함보가 여진으로 간 때는 금나라가 건국되기 200-250년 전으로서 고려가 건국되기 전이므로 신라인이라고 기록한 송막기문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우리 한민족을 통칭할 때 "고려인"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감안하면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에도 함보를 고려인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른 1616년에 이르러 누루하치(애신각라 노이합적)가 만주족(여진족)을 통합하고, 앞서 여진족이 세웠다가 원나라에 의해 소멸했던 금(金)나라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로 다시 금(후금)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이 후금이 곧 후일의 "청(淸)"나라이다.
  그런데 바로 이 청나라가 신라의 마지막 태자로서 신라가 멸망하자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지는 마의태자(이름은 김일이라 한다)의 후손이 세운 나라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청나라 황실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인데, 그 의미가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니 청나라 황제들이 정말로 신라 마의태자의 후손들이었다면 신라의 멸망을 안타까워했을 마의태자가 그 후손들에게 삼국통일을 이루었던 영광스런 신라를 잊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예 성씨를 애신각라라고 했을지도 모르는데, 청나라 황실에서는 자신들의 시조를 "애신각라 포고리옹순" 이라 했다.

 

☆ 애신각라(愛新覺羅)를 직역하면 "새로움을 사랑하고 널리 깨우치다"라는 의미로서 신라와 연관짓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앞서 서기 935년 가을 10월에 이르러 신라의 경순왕은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고 천년 사직을 문닫게 되는데, 이때 그에 반대했던 태자는 통곡을 하며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졌고, 사람들은 그가 삼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하여 마의태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금강산을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 달리 부른다.    
       
  그런데 신라 건국의 기본이 된 진한 6부가 한반도 경주 부근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만리장성이 시작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산해관 부근에 위치했다고 사서들이 말해주고 있으니 마의태자가 들어간 개골산도 한반도 강원도의 금강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는 수서나 북사, 당서 등에 한결같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중국 사서들은 낙랑군 수성현이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 갈석산은 중국 하북성 진황도 창려에 있는 산이고, 만리장성은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라고 하는 발해 해변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그 부근이 곧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이라는 말이 되고, 낙랑군 역시 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의 도읍 금성이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만리장성이 시작된 산해관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의태자가 세상을 등지고 들어가 살았다는 개골산(금강산)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삼국유사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를 보면 진한 6부의 위치와 촌장들의 이름 그리고 성씨를 밝히고 있는데, 그 중, 금산 가리촌을 설명하면서 그 위치를 지금의 금강산 백율사 북쪽 산이라 하고 있고, 촌장이 지타인데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으며 한기부 배씨의 조상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그곳이 금성의 동촌이라 설명하고 있어 금강산이 금성의 동쪽에 위치했던 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 삼국유사에는 금산 가리촌이 처음 자리잡은 곳이 명활산, 명활산 고야촌이 처음 자리잡은 곳이 금강산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금산 가리촌이 처음 자리잡은 곳이 금강산, 명활산 고야촌이 처음 자리잡은 곳이 명활산이어야 문맥이 통하므로 필자가 고쳐 해석한다.  

    

  따라서 마의태자가 금성을 떠나 들어갔다는 개골산은 곧 금강산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때 마의태자는 금성을 떠나 동쪽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된다.
  물론 마의태자가 전설대로 그곳 개골산에서 산나물을 뜯어먹으면서 일생을 마쳤는지,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가 보기 싫다하여 더 멀리 갔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금성에서 아주 가까운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더 멀리 떠나갔을 것이다.
  산해관 부근에서 동북쪽으로 향하면 요녕성 호로도, 금주를 지나 지금의 의무려산에 도착할 수 있는데, 그곳은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산이고, 곧 여진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만약 마의태자가 금성을 떠나 넓은 만주 벌판 가까운 의무려산에서 살았고, 1616년에 이르러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웠으며, 신라의 후예가 세웠던 금나라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로 후금이라 했다면 혹시 누루하치가 신라 마의태자의 먼 후예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들은 700년 가까운 기간동안 잃어버린 신라의 고토 회복을 지상 목표로 삼고 살다가 힘을 모아 나라를 세웠고, 결국 옛 대륙신라 땅 모두를 되찾았고, 더 나아가 중국 전체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추측일 뿐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신라의 후예가 세운 나라 임이 확실한 금나라, 청나라의 역사가 중국 역사일 수만은 없고, 당연히 우리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
  청나라의 역사가 우리 역사의 일부라면, 청나라가 차지했던 그 땅은 모두 우리의 옛 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만주 벌판이나 연해주, 간도 만이 아니라 중국 대륙 전체가 결국 우리의 옛 땅이라는 말이다.
  너무 심한 비약인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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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7.06 09:59

    첫댓글 아마도 그럴것입니다.

  • 15.08.03 13:19

    금나라가 마의태자 후예란 설 또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고, "애신각라'라는 청황실의 姓,박혁거세는 (고)조선의 후예로 신라의 이동경로를 요동-아리수(한강)-상주-서라벌(경주)로 추정되기도 하므로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안고 고향(?)을 찾아가 재건을 도모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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