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니는 1931년 4월23일 미국 뉴지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부터 돈을 벌기 위해 성탄절 카드를 판매했고 대학생 때는
센드위치 장사를 했다 29세 때 동업자와 함께 홍콩에서 거대한 소매업체인
dfs 그룹을 공동 설립했다 1년 뒤 화와이 호놀룰루 국제공항에
미국 최초의 면세점을 열었다. 그의 사업은 승승 장구하여 1970년대 후반 부터는
직원수 5000여명에 이르렀고 연간 30억 달러(한화 약 3조9822억원)
의 매출을 올렸다. 그는 근검절약 모드였다. 본인 명의의 집도 없고
자동차도 없었다 직원들에게는 이면지를 쓰라고 조언했고 경제인 모임에서는
계산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리를 읽찍 뜨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그를 돈많고 욕심 많은 구두쇠라 불렀다
1997년 dfs의 지분을 루이비 통모에헤네시(lvmh)에 매각하면서
그는 법정 분쟁에 휘말렸다 이때 그의 회계 장부가 언론에 공개되며
미국의 전역은 충격에 빠젔다
15년간 40억달러(5조3128억원)를 2900 차레 지출했다.
많은 이들은 그가 재산을 빼돌렸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이는 오해였다
피니는 1982년 비밀리에 애틀랜틱 재단을 설립 했다.
이후로 애틀랜틱 박애재단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는 자신의 재산 99%를 이 재단으로
옮긴 뒤 자선활동을 해 왔다 피니는 2000년 중반 부터 2020년 까지 베트남과 남아공 등
세계 곳곳의 교육 과학 의료 인권을 위해 매일 100만달러(약11억원)를
기부했습니다
"그 누구도 한꺼번에 두컬레의 신발을 신을 수 없다
받는이의 부담을 덜어 주려거던 자랑 하지 마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실천했다
"살아 있을 때 기부하자 "그는 자신의 좌우명에 따라 전 세계의 자선단체 대학등에
끊임없이 기부했다. 자신과 아내의 노후를 위한 200만 달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남을 위해 남김없이 기부하고 재단을 해채했다.
"빈 털털이가 됐지만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
생전에 목표를 이루게 돼 정말 만족스럽고 좋다"
내가 진짜 살아 있는 동안 전 재산을 기부할지 궁금했던 사람들에게
"해 봐라 정말 좋다"고 말했다
.
"부유한 죽음은 불명예다" 그가 남긴 명언이다
강연남 강연 읽어 주는 남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