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갑상선 수술은 서기 500년에 바그다드의 이슬람 의사인 압둘 켈레비스에 의해 행해졌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환자는 대량 출혈로 인해 사경을 해매었지만 다행히 완쾌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갑상선 혹에 대한 치료는 외과적 절제수술 이외에 두꺼비 기름을 주사하거나 시체의 손으로 갑상선의 혹을 두드리는 것 등 이었습니다. 최초의 수술 기록이 중동에 있는 이유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축적된 해부학적 지식이 중세의 암흑 시대인 유럽에서는 단절되었지만 로마와 교류하였던 동방의 이슬람제국에서는 남아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인도의 의학자인 스시루타 사미타는 갑상선과 목소리를 조절하는 기관 근처의 구조물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당시에는 목소리의 조절이 갑상선 근처의 혈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서기 2세기 로마의 유명한 의학자인 갈레노스가 처음으로 갑상선 근처의 신경이 목소리를 조절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는 돼지를 이용해 실험을 하고 그 부분을 회귀후두신경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돼지의 회귀후두신경을 손으로 누르거나 칼로 잘랐을 때 돼지가 꿀꿀거리는 것을 멈추었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명성 때문에 이 발견은 쉽게 동료들에게 전파되었고, 뒤이은 6세기와 7세기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갑상선 수술 중 회귀후두신경의 손상이 목소리를 쉬가 만든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갑상선의 수술적인 치료가 일반적으로 행해진 것은 12세기와 13세기 이탈리아의 살레르노 의과대학 의사들에 의해서입니다. 물론 이 당시에는 갑상선의 해부학적 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갑상선을 정확히 제거하기보다는 피부에 구멍을 뚫고 손가락으로 혹의 내용물을 긁어내거나, 축 늘어지는 부분을 묶은 후 잘라내는 방법을 썼다고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많은 선각자들 덕분에 갑상선과 주변의 혈관들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면 서 보다 체계적인 갑상선 수술이 시작되었고, 1656년 토머스 워튼과 로마의 유스타기우스에 의해 갑상선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갑상선 수술은 위험한 수술이었습니다. 손가락이 아닌 수술용 칼을 이용해 최초로 갑상선 수술을 시도했던 빌헬름 파브리쿠스는 10세 여자 환자의 혹을 성공적으로 제거하였지만 출혈로 인해 환자가 사망하자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1850년대까지는 갑상선 수술의 사망률이 40%에 달했고, 대부분은 출혈과 감염에 의한 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의 저명한 외과의사였던 새뮤얼 그로스는 그의 저술에서 현명하고 정직한 외과의사라면 절대로 갑상선 수술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공언하였습니다.
때맞추어 스위스의 코앵데트는 요오드 결핍이 갑상선의 혹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요오드를 투여하여 혹의 크기를 줄이는데 성공합니다. 지금도 서양의 빵이나 소금에는 요오드가 포함되어 있어 갑상선 혹을 예방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요오드가 풍부하게 들어있는 음식(김이나 다시마 등의 해초류, 패류)을 일상적으로 섭취하는 우리나라에서 서양에 비해 갑상선 혹의 발생빈도가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까지는 이미 혹이 생긴 경우에는 위험한 수술밖에 치료방법이 없었습니다.
1812년 올리버 웬델 홈스에 의해 개발된 전신마취와 1876년 리스터에 의해 개발된 무균적 수술법은 이러한 상황을 빠르게 개선했습니다.
현대의 갑상선 수술은 독일의 빌로스에 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의사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곳은 알프스 산지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음식물 중 요오드기 부족하여 생기는 갑상선 혹이 아주 많은 나라였습니다. 그는 리스터의 무균수술법과 전신마취, 그리고 직접 개발한 지혈용 수술도구를 도입하여 갑상선 수술 후의 사망률을 8%까지 감소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갑상선 수술에 대한 그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현대 갑상선 수술의 아버지인 독일의 테오도르 코커를 교육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커는 1865년 스위스의 베른대학을 졸업한 후 유럽을 여행하면서 당시의 최신 의학기술을 섭렵하였습니다. 당시 그가 만나고 수학한 사람들 중에는 무균수술을 도입한 리스터나 루이 파스퇴르 같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취리히에서 빌로스의 수술을 견학하게 됩니다. 그가 일하던 베른 역시 요오드 결핍에 의한 갑상선 혹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코커의 보고에 의하면 베른의 초등학생 중 90%이상이 갑상선 혹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코커는 빠르게 갑상선 수술의 전문가가 되었고, 5000명 이상의 갑상선 환자를 수술하였습니다. 그는 주의 깊은 지혈 기술과 그가 고안해낸 많은 수술도구의 도움을 받아 갑상선 수술 후 사망률을 0.2%까지 낮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갑상선 수술 시 목을 절개하는 방법도 코커가 발명한 것으로, 코커의 이름을 따서 코커의 절개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08년 코커는 외과의사로는 유일하게 노벨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J. 리스터 T. 빌로스 T. 코커
하지만 아직도 문제는 남아 있었습니다. 1867년 코커는 마리 비셸이라는 10세 여자 환자의 갑상선을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수술 후 마리는 키가 크지 않고 살이 찌면서 지능이 떨어지는 전형적이 갑상선 기능저하증의 증세를 보이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세 때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보다도 키가 작았고 지능도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당시는 갑상선의 기능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때였고 코커의 수술은 갑상선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었으므로 필연적으로 수술한 환자들은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코커가 조사한 18명의 환자 중 16명이 동일한 증상을 보였고, 이에 실망한 코커는 갑상선 제거수술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이 문제는 미국의 켄덜이 해결하게 됩니다. 갑상선의 기능이 떨어지는 갑상선 기능저하증은 1870년대 영국에서 처음으로 알려졌습니다. 1889년 파리의 브라운 세카르는 몸의 기능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개나 모르모트의 생식기를 갈아서 환자들에게 먹이기 시작했는데 다른 질병에는 효과가 없었지만 갑상선 기능저하증 환자의 증상은 뚜렷하게 호전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사실 이러한 이론은 1500년대에 동양의학에서 주장되었습니다. 켄덜은 이러한 사실에 착안하여 갑상선에서 호르몬을 추출해내는 데 성공하였고, 1960년대 갑상선호르몬의 화학적인 합성에 성공함으로써 갑상선 기능저하증은 더 이상 두려운 질병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갑상선의 기능이 지나치게 발휘되는 갑상선 기능항진증은 1890년까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었습니다. 의학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갑상선 추출물을 지나치게 복용한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손발이 떨리고 열이 나면서 눈이 튀어나오고 갑상선이 커지는 증상들이 갑상선의 기능 활성화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상선 수술이 이러한 기능항진증의 치료에도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이후 방사성요오드와 약물치료가 1940년대에 차례차례 도입됩니다.
갑상선 수술의 역사는 현대 외과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합니다. 코커의 제자이자 미국 갑상선 외과를 소개한 윌리엄 홀스테드는 그 후 현대 종양외과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의 제자들은 현대 갑상선외과에 뚜렷한 업적을 남기면서 미국이 세계의학의 중심지가 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합니다.
이와 같이 갑상선 질환의 치료 역사는 현대 의학과 발전을 같이하며, 특히 외과 분야의 발전에 공헌한 바는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러한 선각자들의 노력에 의해 갑상선 수술은 가장 안전한 외과 수술 중 하나가 되었고, 수술 후 적절한 갑상선호르몬의 복용으로 수술하지 않은 사람들과 전혀 차이 없이 정상적인 생활은 물론 격렬한 운동들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갑상선암 100문 100답, 국립암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