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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선생은 스스로를 세 가지 복을 타고난 사람이라 자랑하셨다.
'글복(文福)' '술복(酒福)' '제자복(第子福)'이 그것이다.
선생은 평생을 학자로서, 문필가로서, 교육자로서 지내셨으니
글복을 타고났다고 자랑할 만도 하였다. 학자로서는
우리나라 제일의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유명 대학의 교수로서
명성을 떨쳤고 많은 학술적 업적으로 문학박사가 되었다.
문필가로는 시조문학의 제일인자로서 영예를 누렸으니 이것만으로도
문복이 넘친다 할 만하다.
평생 교단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 제자의 수를 헤아릴 수 없고
무수한 인재들을 길러내어 학문의 진흥에 기여했으니
이것이 제자복이 아니겠는가. 어느 대학에서나 선생의 명강의는
수강생으로 교실이 넘쳐났다.....(생략)
선생의 술복에는 사모님의 정성이 뒷받침이 되어 있다고 들었다.
모과주 따위는 더러 듣던 술 이름이지만
두견주니 석류주 따위는 사모님에게서나 처음으로 듣던 이름이었다.
- 장순하 가람기념사업회장 발간사 <가람 선생에 대한 추억 세 토막>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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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銅鏡) 혹은 미륵사지 사리장엄/ 구애영
기억이 고여 있네 감람빛으로 스민 거울
풀 나비 발자국 같은 문양 어린 면벽을 향해
왕궁리* 사리장엄이
월훈(月暈)처럼 다가오네
육탈된 언어들이 알이 되고 무덤이 되고
닿을 수 없는 시간도 가득할수록 경전 같네
제 안에 사려 안은 숨결,
모란 움을 끌어당기네
손톱만한 그 진경의 몸, 잠든 나를 흔들어
생을 넘은 사유마저 무심히 풀어낼 듯
몸 낮춘 아득한 중심
천년 밖, 그 길이었네
*왕궁리: 익산, 사적 제408호 백제 30대 무왕(600~641)이 천도하여 건립한 왕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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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塔)/ 김교한
높아만 보인 탑이 서둘러 미소 짓고
외로운 길섶에서 한 시대를 굽어보며
숨 쉬는 역사로 살아 우리들의 가슴을 친다.
어느 날 너로 하여 변혁의 파도 되고
겨레의 빈 가슴에 한 가닥 불을 지펴
자유의 샘물이 넘칠 침묵으로 설렌다.
영원히 지키려는 다짐으로 메운 그대
의롭게 절규하는 메아리로 되돌아와
탑 위에 탑으로 솟는 뜨거운 김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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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달/ 김복근
부서지는 물소리 그리운 바람이네
젊은 날의 뜨건 피는 저 달의 먹을 갈아
반백년 굴곡진 행적 붓끝을 곧추잡네
연면한 산봉우리 꼬인 길 슬몃 펴면
오십견 앓던 봉분 담묵처럼 물러서고
세석은 지리산 사초(史草) 천중월을 띄운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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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전야/ 김영재
싸대는 바람소리 닭살 돋게 불어온다
건천이 범람하는 저녁이 닥쳐오리
강둑의 어두운 시간 풀들이 눕고 있다
강물이 넘친다고 산 하나 없어지랴
올곧은 나무는 가지 몇 개 버릴거고
비구름 하늘 저쪽에 꿈꾸는 세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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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에 대하여/ 김제현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안다하네
하지만 인생이란 나이만큼밖에 모르는 것
나도 뭘 좀 알아 가는지
글귀가 어두워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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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의 4월/ 노창수
마을도 꿇앉혔다 지엄한 그 분부로
샛강을 가두었다 그리운 호명으로
그러자 초록 불 번져 큰 산 하나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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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문복선
돌아보면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 없고
다시 봐도 그 누가
부르는 이 하나 없어
가을 밤
지나는 바람도
맘 둘 곳이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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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에게/ 민병도
뽑으면 뽑는 대로
뿌리째 들려나가
혀가 말라 뒤틀린 채
너는 왜 지기만 하나
무저항
평화주의자처럼
지고도 자꾸
이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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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 박권숙
나무들이 고요히
고개를 숙이고
검은 뼈 앙상한
발등 위로 물끄러미
찬란한
이슬방울을
들여다보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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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올라카마/ 박기섭
여그 이짝 구무티서 저그 저짝 모티꺼정
가을이 올라카마 한목에 칵 와뿌리지
그카노? 오줌 쨀기드키 여그 찔끔 저그 찔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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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직 인사/ 박남식
듣기만을 작정한 듯 점점 말을 아끼더니
길가에 지천인 작은 꽃도 눈에 담고
늘 푸른 소나무 향기 마음 깊이 담는다
웃자란 억새에 어린 서늘한 가을그림자
기운 다한 오이넝쿨 그 노동의 경건함도
말랑한 바람 한 줌도 가슴 깊이 담는다
연못에 잠긴 하늘도 가볍게 건져내며
터지는 낮은 탄성 문득 가을을 돌아본다
'참 좋다' 혼신을 다한 이승 사랑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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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박시교
오대산 월정사에 들렀던 오래 전에
팔각의 소슬한 그 탑 아래 섰을 때
불현듯 주체할 수 없는 도심(盜心)이 일었지
그 여러 층 가운데 한 층을 슬쩍해서
보료로 삼아서 깔고 앉아 지내왔는데
탑 위에 떠 있는 기분 그렇게 살았지
호사도 오래되면 싫증나는 이치 따라
이제 그만 제자리로 돌려주려 하는데
지금의 내 힘으로는 옮길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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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 박종대
여행은 왕복이래
가는 것만이 아니래
갔다가 돌아오고
왔다가 돌아가고
인생도
여행이라는데
그렇다는데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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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목장갑/ 백점례
누가 여기 붉은 손을 버리고 사라졌나
지문 닳은 손가락이 풀잎에 놓인 길가
소음 속 땀 젖은 날이 천천히 식고 있다
복종에 길들여져 밀고 끌던 양손의 무게
그 손목 내던지고 현장에서 탈출한 후
숨겼던 날개를 펴고 날아갔나, 그의 몸은
세포마다 엉킨 설움 드물게 스민 웃음
얼룩의 서사시가 올올이 박혀있는
한 남자 뜨거운 두 손, 바탕이 꽃잎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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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인디안풍으로/ 서숙희
연둣빛 생각 한 잎
오소소 추운 달
일찍 나온 어린 햇살
낯가림 하는 달
서투른 앞으로나란히
너무 멀어 아련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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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당신의 늑골/ 서연정
당신의 늑골에 나의 늑골을 대면
더욱 달던 까닭이 궁금해지는 거다
보물섬 고지도(古地圖) 같은 연분홍 인체해부도
납월에도 피는 꽃 향기로운 심장을
뼈바구니는 담담히 품고 있을 뿐
스스로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지 않는다
아픈 나를 안고 늑골이 되어주던
아름다운 당신의 늑골을 만져본다
금이 간 꿈을 버티나 땀을 뻘뻘 흘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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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활짝 피는 생존/ 서연정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짭짭거린다
침방울에 섞여 튀는 식욕의 바이러스
들이댄 카메라 렌즈를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한식대첩 냉장고를부탁해 삼시세끼 오늘뭐먹지
출몰하는 멧돼지처럼 번지는 전염병균처럼
유행을 만들어 가는 먹방 또는 백주부라는 말
부끄러움을 모르고 쩌억쩌억 입 벌린다
피었다가 지지만 다시 피는 꽃처럼
화들짝 벌어진 입속에 생존이 드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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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꽃- 남해 시편/ 송선영
겨울 꽃 피다말고 저 수평선 여겨보는
겨울 꽃 지다말고 저 수평선 지워보는
그 어름,
은발의 고뿔이여
적소 길, 볼수록 붉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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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작지붕/ 신현배
궁궐 마당을 지키는
전각 팔작지붕이
금방 날아오를 듯
날갯짓 시늉하자
화들짝 놀란 하늘이
"어? 어? 어?"
뒷걸음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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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두메- 이산가족/ 염창권
그리움은 세월을 당겨놓은 주름이었다
그 마음에 기대면 두메처럼 그늘졌다
상봉의 탁자에 앉으니 몸에 뜨는 노을이다.
모두들 울음의 강 하나씩 끌고 와서 먼 기억의 손 붙들고 물살처럼 굽이친다,
마음의 평생을 쏟아낸 이박삼일,
꿈이었나.
상별의 손바닥이 유리창에 차게 닿자
그 사이로 실금 같은 선로가 끊어졌다
이랑진 손바닥의 길
또 건너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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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꿩/ 오승철
대놓고 대명천지에
고백 한 번 해본다
오름만 한 고백을 오름에서 해본다
갓 쪄낸 쇠머리떡에
콩 박히듯 꿩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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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상(兼床)/ 유재영
받아 든
닳은 시간
묵묵히
바라보면
수묵빛
산그늘이
서늘하게
고여 있다
적막과
마주한 겸상
얼핏,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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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바람, 강바람에 14/ 윤금초
으악새 길 닿게 욱어 칼질하는 뚝방 너머
자고 이는 마파람결 물너울 되우 되작이고
벼린 칼 으악새 숲은, 그예 엉켜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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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 이송희
당신의 어금니에 납작하게 씹히던 몸
단물 쓴물 다 빼먹고 버려진 이 바닥에 질기디질긴 연(緣)이
시커멓게 들러붙네 오래오래 씹었건만 너는 나를 모른다 하네 족보의
이름들을 질겅질겅 씹고 뱉던 왕자들의 검은 혀와 검은 손의 지문들
기름진 빵 속에 앙금만 깊어지나 황금의 빈 가지마다 매달린 사람들
주렁주렁 열린 입들이 눈칫밥을 먹고 있네
수많은 이빨자국들이 건물마다 새겨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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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퍼즐/ 이승현
오래전 고이 숨겨놓은 그 꽃 찾아왔다나
벌들도 그냥 가는 잎 다 진 꽃자리에
초서체 바람길 따라 호랑나비 날아든다
이 자리가 맞는 건가 저 자리가 아닐까
미로처럼 꼬인 퍼즐 어찌 할 줄을 몰라
희미한 옛 향기 찾아 더듬대는 더듬이
바람과 천둥소리 엮어놓은 길 위에서
어쨌든 맞춰야할 필연의 시간 속에서
우연히 앉은 자리가 내 꽃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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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 이우걸
겉으로 태평스런 나무의 속살에도
지나간 시간들이 파편처럼 박혀있다
공으로 건너갈 길이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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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직지(直指)/ 이원식
그 길 아직
빗소리
적멸보궁*
적멸보궁
온밤 가득
꽃 피워낼
구절초
하얀 눈물
아마도
빈 가로등 속
섶이 붉은
귀뚜라미
*적멸보궁(寂滅寶宮): 불상 대신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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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풀/ 이정환
먼 하늘 우러르다
눈물 고이 맺힐 때
가장 가을스럽다
은빛
저
억새풀
쓸쓸함
물리치기에
마냥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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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종문
내 키가 쑥쑥 크면
내 발목이 잘릴 줄을
나도 물론 알고 있다
그런데도 쑥쑥 큰다
발목을 머리로 삼아
다시 크면 된다, 된다
나의 피, 나의 살이
정구지 김치 되고
그 뜨거운 철판 위에
휘영청 달이 뜰 때
신명난 젓가락 소리,
그 소리 참 너무 좋다
자 이제 내 발목을
삭둑삭둑 잘라다오
자르면 자를수록
내 목숨은 더 푸르고
이 세상 신명나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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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여자 2/ 이지엽
참깨
배롱꽃의 눈썰미, 짜글짜글 귄 있는 여자
가지 끝 죄 울리며 애기 하나 갖자는 여자
귀와 눈 맑히는 여자
바람결 훅, 옷 벗는 여자
식초
휘어지는 휘파람 허릿결 상큼한 여자
짜릿한 속살의 눈짓 보리순 같은 여자
간이역, 기적(汽笛) 같은 여자
말간 소주 같은 여자
식용유
잘 닦인 책 속으로 사라지는 길 같은 여자
끊임없이 향기 울려나는 백향목 숲 같은 여자
유리창 햇살 같은 여자
화선지 같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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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생가/ 이택회
용화산 앞자락에 둥지 같은 초가 몇 칸,
가마솥은 곡기를 끊은 지 오래되고,
네댓 개 빛바랜 주련 주린 배를 움켜쥔다.
넘치지 말자 하던 정자*는 떠나가고,
어리석게 살겠다던 대를 이은 다짐만
사랑채 한 가운데서 나그네를 가르친다.
대문 앞에서 마중하던 백련은 전설 되고,
구름에 오르지 못한 승운정* 홀로 앉아
세월을 되새김질한다, 술 향기를 맡는다.
*계일정(誡溢亭): 생가 앞에 있던 정자.
*승운정(勝雲亭): 생가 앞에 있는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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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 이한성
허연 돌꽃 가득 핀 내 몸에 손대지 말라
목 없이 살아 온 고행길이 너무 길다
부처가 열어 놓은 길, 화엄만리 뻗어 있는
물길 잡혀 오르는 목어 한 마리 없어도
팽이처럼 돌다 보면 원 속에도 길이 열려
죄 값을 반만 덜어도 극락이 보이느니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국보 11호
반전한 옥개석이 삐걱여도 염불 되는
그것은 부처의 마음 헐지 마라 돌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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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天葬)/ 장수현
뉴타운 개발지구
허물린 건물 더미에서
쇠망치 든 사내가
철근을 캐고 있다
앙상한 집의 육신을
텅 텅 텅 비워내고 있다
죽은 이의 영혼을
되돌려 보내기 위해
살점을 발라내고
뼈를 부수어주는
고원의 천장터처럼
빈 집들 가벼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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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 뒤풀이 2/ 장순하
오곡백과 풍성하고
휘영청 달 밝으니
한가위만 같으란 말
그 말 좋다 하였더니
소매끝
스미는 바람
소름 돋는 찬바람.
소매끝 찬바람은
옷으로도 막으련만
그리워 찬 가슴은
불로도 못 덥힌다
마음 문
열어 주는 이
만나기가 쉽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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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댁의 새벽 행차/ 정수자
완도산 미역처럼 거뭇걱실한 완도댁 부스럭에
왜 그러세요 할머니, 오줌 좀 누려고 끙, 금방 잠든 딸 깨우기 미안타고
디스크환자 손을 빌려 무거운 몸을 드는데, 한 발 끄응 내리고 또 한 발 끄응
내릴 때 8인실의 침상들도 부스럭 궁시렁 뒤척이다 뒤집어쓰다 결국은 다 일어나
보는데, 싸알싸알 좀 혀소잉, 휠체어에 겨우 앉은 새벽 4시 완도댁의 기나긴 오줌
행차가 눈빛 호위 받으며 어기영차 나서는데
황황히 뒤쫓는 딸 어깨 너머
먼동이 먼저 용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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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 정용국
불볕에 달구어진
헤진* 삶을 내려놓고
달디단 처서 바람
앙큼도 마다한 채
꽃단장
흰 등을 매단
절 이마가 벙그네
*헤진: 옮기면서- 혹시 '해진'은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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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행/ 정희경
저녁답 산책길에 웃음이 눈부시다
모양도 색깔도 같은 세쌍둥이 유모차 곁
할머니 빈 유모차들이 가던 길을 멈춘다
'아이고 귀여워라 어미가 고생하것다'
빈 유모차 한가득 금빛 노을 얹어두고
느리게 흐르는 시간 바람 따라 휙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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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바위/ 조주환
'세상 사는 일이 눈물을 쏟는 거'라며
가끔은 너무 아파 산도 더러 숨어 운다.
슬픔이 가슴을 적시는
경주 남산
바윗돌
푸드득 하늘을 날다 부러지고 찢긴 상흔
남산 틈수골 시퍼렇게 멍든 허공
숨죽여 속울음 울어
번져가는
그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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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자반 한 손/ 진복희
내장은 다 비운 채
포개어진 두 낱의 몸.
삶의 끝자락을 딛고
마실 가는 양주(兩主)처럼,
이제는
간간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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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편지/ 하순희
각중에 오지 말고 미리 기별 주시이소
주변도 정리하고 이별 인사도 해야지예
시간이 다 돼 간다고 귀띰을 해줘야지예
꽃피는 거 잎지는 거 계절이 바뀌는 거
지인들이 떠났다는 뜬금없는 부고장
수시로 보낸 편지를 받고도 모르냐고예?
워쩐대유? 일이 그렇게 돼 남유?
꽃 져야 잎이 피고 열매 맺는다고유?
철철이 일러 주어도
깜깜 청맹과니였구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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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아니다/ 한분순
거울 앞 웅크리고
메이크업
한시름
불 닮은 립스틱,
숲 빛깔 아이섀도에
슬픔이
내 얼굴 못 알아보고
그냥 비껴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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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을/ 홍성란
장맛비 지나간 저녁
북두칠성 나왔다고
반가워 가리키는 손, 누가 힐끗 스쳐간다
어두워
다행이라고 풀 향기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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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 어디 없을까/ 홍성운
정말이지 시란 막걸리 아닌가 싶어
한두 잔 들이키면 그냥 포만하고
적당히 취기가 올라
갈증을 풀어주는
그런 시 어디 없을까 콩나물 해장국 같은
간밤의 쓰린 속을 시원히 달래주고
매콤한 그 맛 하나로
다시 또 찾게 되는
그런 시 어디 없을까 수박화채 같은 시
한여름 읊조리면 얼음이 동동 뜨고
팽팽한 세간의 틈에
계류를 흘려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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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홍오선
바람이 운다고요? 천만의 말씀이죠
누웠다 일어섰다 제 사는 법 익히느라
들풀과 몸싸움하는
치열한 목숨인 걸.
네가 올 것 같은 날엔 쪽문을 열어두고
눈썹달 지쳐가는 그믐 밤 자시경에
그 문 뒤 그림자로 깔린
네 모습 지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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