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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타야 ( 古陀耶 ) 원문보기 글쓴이: 처음처럼
세상사 모든일이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게 마련이다.
내가 근무하던 문화회관 에서 편집장을 맡은 김 복영 사진작가와 안동대학교 사학과 임 세권 교수와 셋이서 작당을 하듯 한 일년만 발행해 보고 그뒤는 그때 생각해 보기로 하고,
발행하기 시작한 < 안동 >이라는 잡지는 26 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고 이제 종간이라는 이름으로 마침표를, 아니 쉼표를 찍고 숨을 모두어 쉬기로 했다.
그동안 155 회, 격월간 발행의 잡지를 줄곧 한번의 결호도 없이 계속 한결같이 발행할수 있었던 것은 문화모임 사랑방이라는 안동사람들의 힘이었다.
사랑방이 옛 안동사람들의 삶의 중심이었듯 사랑방이란 문화모임 또한 오늘 안동의 두레였고 모둠잔치같은 문화패들의 결정체 였다.
문화모임에 모여든 많은 분들,
2,234 꼭지의 글을 원고료없이 묵묵히 써주었던 471명의 각계각층의 필자가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그 가운데는 우리잡지의 중심축인 < 이웃이야기 >를 16 년동안 96 회의 글을 취재하여 실어주었던 이 미홍 객원기자같은 분이나,
산촌기행을 73 회나 실어주었던 이 동백 시인, 안동의 종가를 56 회나 집필해 주었던 안동대학교 동양철학과 윤 천근교수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창간호 부터 윤 옥순, 천 남희, 김 영희, 권 영옥 임 종교, 김 선주, 그리고 마지막 백 소애 기자 같은 편집실무자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고마운분들은 문화모임의 회장과 운영위원장을 맡아주었던 윤 태권, 권 세홍, 김 재왕 원장같은 의사선생님들과 이 동규 변호사같은 봉사자가 있었기 긴 세월을 견뎌내었다.
그 밖에 이름을 다 적지못하는 안동사람들의 적지않은 많거나 적거나 아낌없이 도와주셨던 수십명의 운영위원과 349 명의 후원회원, 그리고 485 명의 사랑방 회원이 있었기에 안동사람 거의 모두가 힘을 합쳐 마련한 일이었다 할수 있다.
이제 그 많은 분들의 도움과 은혜를 뒤로하고 가쁜 숨을 잠시 쉬고 내일의 또다른 모둠 두레를 기대하며 오늘 드디어 종간에 이르게 되었다.
모두가 웃으며 2, 30 년전의 젊은 시절 추억사진앞에서 오늘의 백발을 견주어 인증 사진찍는 분들의 모습에서 살갑다느끼는 따사로운 정을 느낀다.
문화회관, 문화연구회, 이제 사랑방 잡지까지 누군가 있어 뒤를 따라다니며 지우개로 지우고 다니는 그림자 같은 존재가 있음을 느낀다. 언젠가는 나 까지 지우개로 지울것이다.
허나 안동사람들은 이렇게 아무런 조건과 대가없이 긴 세월동안 한결같이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모으고 공력을 함께 할수있는 모범을 남기고 있다.
내일 또다시 또다른 모습과 일로써 우리는 이런일 이런 두레로 다시 뭉치고 모일것이다.
조금 긴 거간의 일들을 대중없이 적어본다.
일은 쉼표를 찍었으나 문화모임으로 모인 사람은 남아있다.
내일도 화요일 점심에는 웅부공원옆 허름한 국수집에서 삼삼오오모여서 개똥철학 사설을 주고 받으며 따사로운 정들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문화모임 안동이라고 사랑방을 우리가 쓰기시작하니까 하도 유행이 되길래 그저 안동 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다시 새 이야기를 쓰고 있을 것이다.
축하 (?) 를 하러 멀리 도리원서 눈길 빙판을 무릅쓰고 오신 우리 모두가 보고싶어하는 두 봉 주교님이 외마디같이 부르짖으셨다.
< 안동을 사랑합니다 >
26년간 잡지 안동의 편집장이자 발행인이었던 김 복영 사랑방 안동의 방장이 종간에 부쳐 인사말을 하고 있다.
문화모임 안동의 대표인 윤 태권 회장이 종간사를 하고 있다.
잡지 안동의 지난 경과를 이야기 하는 임 재해 안동대학교 교수
< 안동사람 > 이라는 머릿말을 쓰시기도 하셨던 두 봉 주교님이 격려의 말씀을 하고 있다. 안동을 사랑한다고 말을 맺어 큰 호응을 끌어내었다.
이웃이야기의 단골 취재기자였던 이 미홍 객원기자가 16 년간, 96회의 취재기사를 잡지에 실어 이를 감사하고 수많은 글을 무료로 써주신 분들을 대표하여 기념품을 받고 있다.
종간에 부쳐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노래한 시인 이 동백 의 자작시 낭송
사랑방 안동잡지의 산실인 문화회관에 서실을 열고 공고동락했던 삼여제 김 태균서예가 선생
젊은 모습의 추억사진을 보며 세월을 이야기하는 화가 권 기윤 교수
안동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장 이 효걸 교수도 옛 추억의 사진앞에서 세월을 이야기 한다.
안동시 김 재교 문화관광과장이 자기 사진을 가르키며 큰 형님을 그대로 모셔온 사진이라고 한다.
창간호 표지인물이었던 당시 안동의 최고령 105 세 임동면 상박실 출생 김 봉이 할아버지
든든한 후견인이셨던 계 철순 초대 안동예술인총연합회장, 전, 경북대학교 총장, 변호사
안동을 대표할 선비라고 모셔서 10 여년동안 이 육사 기념사업회장으로 수고하셨던 김 종길 한국시인협회장 역임, 전 고려대학교 영문과 교수님 지금도 보내오는 안동 잡지를 모두 보관하고 계신다 하셨다.
뉴질랜드 총영사를 지내고 정년을 하고 안동으로 귀향하여 임하면 금소에서 엘리쟈 농원이라는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임 대용 대사는 귀향하는 고위직 인사의 표본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역사 바로세우기의 기념비적 인물인 백범 김 구선생 암살범 안 두희를 몽둥이로 응징하였던 권 중희 출향인사도 잡지에 소개 되었었다.
문화모임 안동의 사무실을 지금까지 무료로 제공해 주었던 권 세홍 방사선과 원장, 편집위원장. 새건물을 지어 한층을 아낌없이 제공해주어 편집실과 문화모임의 장소는 마음놓고 활동할수있는 최고의 집합소가 되었었다.
안동역 앞에서 라는 최고의 힛트송을 작사한 안동출신 김 병걸 출향인
안동출신이자 동기친구 조 수양사장의 동생인 만화가, 여행작가, 음식기행기작가로 유명한 조 주청 출향인
26 여년동안 안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셨던 안동인의 사진을 400여장으로 정리하였는데 우스개로 여기 소개되지 않은 이들은 안동에 살아도 헛살았다는 농을 나누었다.
통권 155 종간호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잡지 200 페이지가 넘는 이야기책을 만들었다.
그동안 글을 써주셨던 분 취재와 기사를 써 주셨던 객원 기자들 그리로 정말로 힘을 보태어 주셨던 운영위원과 후원위원, 구독회원들이 모두 한편씩의 마지막 송별글을 써 주셨다.
창간호와 종간호에 못난 사람의 글도 실려 추억을 남기는데 마치 나무의 꽃눈 새순에서부터 가을의 마지막 잎새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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