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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가 주최하고 대구불교방송이 주관하고 영남불교문화연구원이 진행한 승시재연을 위한 세미나 발표문입니다.
승시란 ?
매일신문 기사(2011.8.29)
응원 끝나면 무소유 축제…9월 1~5일 팔공산 동화사 승시(僧市) 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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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기를 더하는 가운데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는 또 하나의 화려한 축제가 펼쳐진다. 9월 1일부터 5일까지 닷새간 ‘팔공산 승시(僧市) 축제’가 열리는 것. 지난해 프리이벤트 성격으로 첫선을 보인 승시는 올해 육상대회를 맞아 다채로운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갖춰 시민들을 맞는다. 대구시와 동화사는 올해 승시를 대구 시민과 대구를 찾는 내외국인이 한데 어우러진 시민 축제로 만들어 대구를 전 세계적으로 알리겠다는 계획이다. ◆승시의 의미 승시(僧市)는 사원 소속 승려가 사원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사원에서 생산한 물자를 유통하는 장터다. 한마디로 승려들의 산중 장터인 것. 특히 역사적으로 볼 때 팔공산 주변에도 승시가 열렸다. 답사여행길잡이(돌베개 펴냄)에 따르면 부인사가 번창할 때 39개 암자를 거느리고 2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 살았는데 당시 규모가 큰 승시가 열렸다. 이번에 승시 축제가 열리는 동화사에서도 과거 승시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정시한(丁時翰`1625~1707)의 ‘산중일기’에는 지은이가 동화사 말사인 염불암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당시 주지가 담뱃대와 부채를 갖고 동화사로 내려가서 흑표지로 바꿔 왔다는 내용이 있다. 올해 두 번째를 맞는 승시는 대구의 전통문화콘텐츠를 세계인에게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다. 대구와 인근 경북 지역은 자고로 한국전통문화의 본향으로 다양한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특히 우리나라 최대의 불교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것. 더욱이 팔공산은 대구가 가진 최고의 문화관광 자원으로 연인원 최대 100만 명이 찾는 관광지다. 이 때문에 팔공산 동화사에서 행해지는 승시의 재현은 전통문화의 재발견과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현대적 감각의 문화로 창출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승시가 가지는 의미도 충분한 문화산업으로의 가치가 있다. 대구시에 승시 추진을 처음 제안한 영남불교문화연구원 김재원 원장은 “승시는 분업의 산물이다. 사찰이라고 해서 무조건 자급자족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분업화가 되었다는 점을 승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현대사회의 문화적 가치와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분업이 발달해 사찰마다 특화되어 있었는데 동화사는 조포(두부) 제조 허가권을 가지면서 전국적으로 조포로 유명한 사찰이었다. 동화사 승려들은 조포를 만들었는데 자신들이 먹기보다는 상품화해서 승시에서 대규모로 판매하기도 했다. 승시는 또 만남과 나눔이라는 의미가 있다. 승시에 가면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필요한 물건을 서로 주고받으며 때로는 사고팔기도 한 것. 이런 점에서 세계인의 만남과 화합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있는 육상선수권대회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승시, 시민들의 축제로 이번에 열리는 승시는 지난해 승시와 달리 규모 면에서 무척 커졌다. 무엇보다 육상선수권대회에 맞춰 대구 시민은 물론, 대구를 찾는 내외국인에게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대회 기간에 열린다. 기간도 지난해 3일에서 올해 5일로 대폭 늘렸다. 또 불교적 색채가 강한 승시를 모든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공연과 체험 행사를 상당히 강화했다. 1일 오후 6시 동화사 봉서루 앞 특설무대에서 개회식을 시작으로 시작되는 승시축제는 다양한 전통문화와 먹을거리, 볼거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승시마당, 문화마당, 공연마당 등 총 3개의 공간으로 나눠 펼쳐진다. 승시마당에는 단청, 선서, 탱화, 불화, 불복장, 경판 판각 등 불교미술 체험공간과 목탁, 양초, 비누, 염주 등 사찰 사용 물품을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공간, 차명상, 108배 호흡명상 등 스님들의 일상과 신도 신행체험공간, 와편각 탁본, 솟대, 민화부채, 장승조각, 도자기, 닥종이 인형, 짚불공예 등 전래 문화와 공예를 시연하고 체험하는 전통문화관, 두부, 콩요리, 버섯요리, 연잎밥 등 스님들의 음식문화 전시`체험공간, 한방 건강을 체험하는 웰빙체험관 등이 마련된다. 특히 승시마당에서는 ‘무소유’의 승가 전통을 되살리고 스님들의 물물교환이라는 승시의 본래 의미를 살리고자 전통장터도 재현된다. 스님들이 물품을 서로 교환하는 승시 물품장터을 비롯해 비로암에는 아름다운 가게 팔공산점을 임시 개설하고 설법전에는 다문화 가정돕기 큰스님 소장 물품 경매 행사도 진행되는 것. 문화마당에서는 전래의 부처님 사리 이운 행렬을 재현하고 통일대불전 특별전시실에서 20년 만에 일반인들에게 건봉사 부처님 치사리친견법회도 공개된다. 또 승시축제 기념 기획특별전 ‘세속에서 성의세계로’가 펼쳐지며 부인사에 봉안되었다 거란의 침입 때 소실된 초조대장경의 1차 복간본이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뜻깊은 행사도 열린다. 승시축제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염원을 모아 이 땅에 평화의 화엄장 세계를 구현하고자 매일 오후 9시에는 평화기원 탑돌이와 평화의 등빛터널 및 장엄등 전시회가 펼쳐진다. 특히 50여 개의 대형 전통 장엄등과 3천여 개의 전통등으로 꾸며진 연등터널과 동화사 전역을 1만 개의 등으로 화려한 야경을 연출,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공연마당도 5일 동안 각각 다른 주제로 다채롭게 펼쳐진다. 개막식과 더불어 불교TV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개막공연을 시작으로 첫째 날은 국악공연, 둘째 날은 7080 가수공연, 셋째 날은 록밴드공연, 넷째 날은 국악과 서양음악의 조화를 추구하는 풍류 21의 공연, 마지막 날은 장윤정, 박현빈 등이 출연하는 트로트 공연 등이 매일 저녁 7시 열린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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符仁寺의 역사적 변천
정 동 락(대가야박물관 학예사)
Ⅰ. 머리말
Ⅱ. 신라시대의 부인사
Ⅲ. 고려시대의 부인사
Ⅳ. 맺음말
Ⅰ. 머리말
符仁寺는 소위 ‘초조대장경’(이하 ‘부인사장’)의 봉안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대장경판은 1232년(고종 19) 몽고의 침략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에 ‘부인사장’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해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이하 ‘강화경판’)을 조성하였다. ‘강화경판’은 현재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표준 대장경’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반면, ‘부인사장’과 신라․고려시대의 ‘大伽藍’이었던 부인사는 조선시대 이후 寺勢가 위축되면서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신라는 지방통치의 거점지인 公山 지역에 부인사를 창건하였으며, 이후 부인사는 華嚴宗의 대표적인 사찰로 자리매김하였다. 나말의 격동기를 겪은 후 고려가 건국되지만 부인사는 계속 중시되었으며, 문명의 상징이자 ‘國之大寶’인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부인사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고승들이 머물면서 중요한 사회적 현안에 대해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최근 ‘강화경판’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부인사장’에 대한 이해의 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특히, ‘부인사장’의 인경본이 일본과 국내에서 다수 확인되면서 그 복원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나아가 다가오는 2011년은 ‘부인사장’을 조성하기 시작한 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이러한 사정에 따라 ‘부인사장’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고 연구도 활기를 띠고 있다.
부인사에 대해서는 그간 寺址에 대한 현황조사와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1920년대부터 간헐적인 현황 조사가 이루어 졌으며, ‘부인사장’의 봉안과 관련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사지를 발굴조사 하였다. 또 팔공산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개략적으로 다루어 졌다. 주로 寺名에 대한 한자표기의 차이나, 부인사의 창건 시기 및 ‘부인사장’의 소실 과정에 대해 단편적으로 언급되었다. 중요성에 비해 부인사를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연구는 잘 찾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우리나라와 일본 京都 南禪寺에서 ‘부인사장’의 印本이 새롭게 발견되어 종합적으로 정리되었다. 이를 계기로 ‘부인사장’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여러 차례 학술대회가 개최되는 등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학술대회는 크게 불교사와 역사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와 한국중세사학회․부인사에서 개최한 학술대회는 역사적 관점에서 ‘부인사장’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더불어 부인사의 역사적 변천과 현실대응, 부인사와 관련된 문헌 및 고고자료가 종합적으로 정리되기도 하였다.
이상의 여러 연구를 통해 부인사의 寺名은 同音異字의 동일 사찰명이며, 대구 팔공산 부인사의 ‘부인사장’ 소장 사실에 대해서는 의견이 대체로 일치되고 있다. 하지만, 부인사의 창건시기, ‘부인사장’의 명칭문제, ‘부인사장’의 이운시기와 배경, ‘부인사장’의 소실 원인 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견이 노정되어 있는 상태이다.
여기서는 신라․고려시대의 역사적 흐름 속에 부인사가 어떠한 변천과정을 거치고 있었으며, 또 각 시기마다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지를 정리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부인사장’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고, 고려대장경 조성 천년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은 물론 세계의 대장경으로 승화될 수 있는 방향에 대해 새롭게 논의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Ⅱ. 신라시대의 부인사
1. 신라중대 부인사의 창건
부인사는 삼국통일 후 성립되는 五岳의 하나인 中岳 公山에 창건된 사원이었다. 중악은 국가제전인 中祀를 지낸 곳이며, 신문왕(689)대에는 達句伐(대구)로 천도를 시도했다. 대구 지역은 경주로부터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出路와 같은 곳이었다. 이 곳은 통일 전 낙동강을 경계로 대가야와 국경을 접하면서 군사적 중요성이 컸으며, 대가야 멸망 이후 백제와의 관계에서도 군사적 거점지였다. 신라하대에는 신무왕이 淸海鎭의 張保皐 군대를 이끌고 경주로 진군할 때 중앙군이 이곳에서 방어하였으며, 후삼국시대 공산전투에서 후백제군과 고려군이 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부인사는 국가적인 숭앙의 대상이었던 名山에 입지하면서, 전략적 요충지인 대구 지역에 위치고 있었다.
오악은 신라 중대 전제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성립되었으며, 특히 華嚴사상은 그 사상적 기반이 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중악에는 華嚴十刹인 美理寺를 비롯한 부인사․桐華寺 등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다. 이에 따라 華嚴宗(미리사, 부인사), 法相宗(동화사), 禪宗(三朗寺) 등 여러 사원들이 창건되면서, 종파간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부인사의 정확한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부인사를 한국 제1의 호국 대가람으로 644년(선덕여왕 13) 왕이 창건했으며, 세간에는 선덕과 음이 비슷한 성덕왕대로 와전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선덕여왕이 사찰을 창건하여 모후인 麻耶부인과 왕가의 願堂으로 삼았고, 여왕의 眞顚사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신라시대 왕경을 벗어난 지역에 사원이 건립되는 것은 7세기 후반 부석사를 제외하고는 사례가 없으므로, 부인사의 창건 상한은 8세기 중엽이라고 한다. 또, 이보다 시기를 더 늦추어 왕실․귀족의 원당 확산이라는 점에서 삼국시대보다는 통일 이후로, 중대보다는 하대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한편, 부인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3차) 건물지나 와편 등 유구 및 유물의 현황과 현존하는 3층 석탑 등을 통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특히 현존하는 3층석탑은 동화사의 민애왕 원탑(경문왕 3, 863)과 비슷한 시기인 9세기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인사의 창건에 대한 자료는 ≪梵宇考≫(1799), ≪慶尙道邑誌≫(1832)와 ≪嶺南邑誌≫(1895) 대구부 불우조 등이다.
가) 부인사는 부의 북쪽 50리 거리의 공산에 있다. 신라 성덕왕이 대가람을 창건하였다. 지금은 암자가 되었으며 屬庵으로 下仙庵이 있는데, 모두 동화사의 屬寺이다.
18~19세기 편찬된 寺誌 및 邑誌에 수록된 성덕왕대(702~737) 창건 기록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부인사 인근의 把溪寺는 715년(성덕왕 13)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부인사의 창건은 선덕여왕대(632~646)와 성덕왕대, 통일신라, 혹은 8세기 중엽, 신라하대 등 각각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이 중 선덕여왕대는 고고학적 조사와도 시차가 크며, 발굴조사도 사지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의 내용을 부정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가)를 신뢰하는 입장에서 부인사의 창건을 8세기 초인 성덕왕대로 파악코자 한다.
성덕왕대에는 眞如院, 文殊寺, 寶川庵, 松花房, 林泉寺, 甘山寺, 法泉寺, 移車寺, 靈山寺, 奉德寺 등 10여개 정도의 사원이 창건되었다. 그 중 진여원(문수사, 보천암) 등은 오대산에, 법천사는 원주, 영산사는 전북 변산, 나머지는 모두 경주 지역에 위치해 있다. 특히, 오대산은 慈藏에 의해 문수보살의 眞身상주처로 인식된 후 문수․관음․무량수불․석가불 등 불보살이 상주한다는 보살주처신앙이 정착된 곳이었다.
705년(성덕왕) 진여원 창건 당시 왕이 직접 신료들과 함께 오대산에 행차한 후 문수대성의 소상을 만들어 안치했다. 그리고 화엄결사에 인근 주현으로부터 倉租를 공급토록 하고, 서쪽 6천보 떨어진 지역의 柴地와 栗枝, 坐位 등을 지급하고 莊舍까지 건립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성덕왕 때 純貞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行路에 水路부인이 동해의 海龍에게 끌려갔다가 海歌를 불러 구출했다는 설화가 주목된다. 신라 왕권의 대행자인 강릉태수의 부인을 납치하는 해룡은 중대 왕실의 권위, 대지방통치력이 위협받고 있음을 반증한다. 이처럼 진여원의 창건은 종교적인 목적 이외에 오대산 지역이 차지하는 국가적 중요성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문화를 매개로 지방통치를 실현했던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대산은 신라의 북쪽 변경을 鎭撫統制하기 위한 거점 지역에 해당하며, 중악은 경주에서 서쪽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요충지였다. 진여원은 명산과 요충지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부인사와 비슷한 입지조건을 가졌다. 따라서 성덕왕대 부인사 창건 동기를 진여원의 사례를 통해 간접적이 나마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689년(신문왕 9) 달구벌(대구) 지역으로 천도를 시도했던 사실을 참조할 수 있다.
나) 신문왕 9년 윤9월 26일 獐山城에 行幸하였다. … 왕이 達句伐로 移都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비록 성덕왕이 즉위하기 10여 년 전의 일이고, 천도가 실현되지 못했지만 신라중대 중악이 가지는 정치․사회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부인사도 진여원의 사례와 비슷하게 국가적 지원에 의해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부인사의 창건시기가 성덕왕대였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최근 부인사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에서도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즉, 부인사에서 출토된 ‘夫人寺 金堂’명 기와자료를 통해 본다면 부인사의 창건은 8세기 이후로 선덕여왕대 보다는 성덕왕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한다면 사지 및 읍지에 수록된 성덕왕대 창건설을 단순히 후대의 자료로 치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2. 후삼국 쟁패기 부인사의 향방
신라하대 선사상이 도입되면서 소위 九山禪門이 개창된다. 특히, 桐裏山門의 洞眞 慶甫(869~947)가 출가한 夫仁山寺는 공산의 부인사였다.
다) 이미 불교에 출가 수도하려는 뜻을 품고는 二親에 고하니 … 대사는 곧바로 夫仁山寺로 가서 삭발하고, 경전을 배우는 강원으로 들어가 교리를 배웠다. … “이곳은 心學者가 참선하는 곳이 아니다. 곧바로 떠나가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白鷄山으로 나아가 道乘和尙을 배알하였다.
경주에서 출생한 경보는 幼學의 시절인 10세 전후의 879년(헌강왕 5) 夫仁山寺에서 출가하였다. 출가 후 “경전을 배우는 강원으로 들어가 교리를 배웠다”거나, “이곳은 心學者가 참선하는 곳이 아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화엄종 계통의 사원으로 보인다. 그는 출가 후 先覺國師 道詵(827~898)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한편, 이보다 약간 앞선 시기 동화사에는 헌덕왕자 心地와 王建 先代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五冠山 瑞雲寺의 了悟선사 順之(832~896)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는 眞表-永深로 이어지는 참회와 실천을 중시했던 진표계의 미륵신앙(법상종)을 계승하였다. 그는 중악에서 俗離山의 영심을 찾아 果訂法會에 참여하고, 진표의 簡子를 받아 중악으로 올 때 중악 神을 만나서 계를 주고 간자를 모실 당을 지을 곳을 점쳤다. 이렇게 하여 832년(흥덕왕 7)경 동화사를 개창한 후, 863년(경문왕 3) 민애왕을 추복하기 위한 비로암 삼층석탑을 조성하였다. 이 탑의 건립은 경문왕 즉위 후 진골간의 화합 모색과 仁謙계와의 결속을 위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원성왕계 내 각 소가계의 분파의식을 없애고 범원성왕계의 회유와 연합을 통한 왕권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순지는 851년(문성왕 13) 20세에 五冠山에서 출가하고, 속리산에서 수계한 후, 公岳山에 머물다가 858년(헌안왕 2)에 입당했다. 그는 수계 후 입당하기 전까지 3~4년 정도를 공산에 머물렀는데, 855~858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런데 “속리산의 영심에게 간자를 얻어 중악으로 올 때 중악 神을 만나서 계를 주고 간자를 모실 당을 지을 곳을 점쳤다”는 심지와 “공산에서 神人을 만나 그의 청으로 머문 절의 모습이 兜率天과 같았다”는 순지의 행적이 비슷하다. 순지가 머문 공산의 사원은 동화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진표계 미륵신앙의 성격은 반신라적인 것으로 헌덕왕자였던 심지가 진표의 간자를 동화사로 가져온 것은 신라 변방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억제하려는 노력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반론도 있다. 반신라세력의 억제를 위해 왕자를 출가시켜 법을 이어 오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며, 또 심지나 동화사가 반신라적인 동향을 보이지도 않았다. 부인사․동화사는 신라하대에 들어와서도 지속적으로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후삼국 정립기인 10세기 초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崔致遠이 909년(효공왕 13) 찬한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는 공산 인근의 동향을 보여준다. 팔각등루를 세운 異才는 관등이 重閼飡인데 6두품 출신으로 보인다. 그는 898년(효공왕 2) 경부터 수창군에 護國城을 쌓고 일대를 다스렸다. 이재는 지방호족으로 성장한 인물로 파악되는데, 최치원이 그를 ‘奉國忠臣’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친신라적인 인물로 보인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900년에 甄萱이 후백제를, 901년에 弓裔가 후고구려를 건국하는 등 격변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908년(효공왕 12) 팔각등루는 세웠으며, 慶讚齋를 개최하는 자리에 公山 桐寺 즉 동화사의 弘順大德이 座主가 되고 興輪寺의 融善呪師를 비롯해 泰然대덕, 靈達禪大德, 景寂선대덕, 持念緣善대덕 등의 고승들이 참석하였다. 그 중 홍순, 태연, 영달, 경적 등은 동화사 출신의 승려였다.
이처럼 신라하대 공산 지역을 둘러 싼 정치 세력의 동향을 동화사를 통해 정리할 수 있다. 동화사는 9세기 전반 심지가 창건한 이후 9세기 후반 민애왕 원탑이 세워지면서 신라왕실의 원당이 되었다. 10세기 초에는 신라의 호국충신을 표방한 이재와 연결되기도 했다.
그런데 동화사를 비롯한 공산 지역의 사원들은 후삼국의 쟁패가 격화되면서 신라로부터 이탈해 나갔다.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합천 海印寺가 참고 된다. 해인사는 802년(애장왕 3) 신라 왕실의 지원으로 창건된 후, 885년(헌강왕 11) 이전까지는 北宮海印藪, 890년(진성여왕 4) 이후부터는 惠成大王(魏弘)원당이라고 하였다. 9세기말에는 최치원과 그의 母兄인 승 賢俊과 定玄 등이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10세기 초 해인사는 후백제 견훤의 福田인 觀惠의 南岳파와 고려 왕건의 복전인 希朗의 北岳파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남북악의 대립은 사상적인 차이에서 기인한 바 크겠지만, 정치적인 노선에 따라 더욱 증폭되었다. <海印寺古蹟>에는 “희랑이 태조 왕건이 백제 왕자 月光과 싸울 때 神兵을 보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월광은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로 전해지므로 <해인사고적>을 그대로 신빙하기 어렵지만, 해인사를 둘러싼 후백제와 고려의 충돌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후 10세기 전반에 조성된 목조희랑조사상이 봉안되고, 희랑이 태조를 도와 월광을 물리쳤다는 것으로 보아 고려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즉, 해인사는 9세기 말까지 신라 왕실의 원당이었으나, 10세기에 접어들면서 후백제와 고려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가 후삼국이 통일되는 즈음에는 고려를 지지했던 것이다.
동화사의 경우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통해 910경까지는 친신라적 성향을 지니다가, 경상도 권역을 둘러싼 후백제와 고려의 쟁패가 격화되면서 해인사와 비슷한 상황을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왕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고려와 후백제를 선택적으로 지지하는 노선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920년대가 되면 친후백제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전하는 것이 927년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 벌어진 公山전투이다.
대구 지역은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신라의 경주로 통하는 大路에 해당하며 군사 작전시 반드시 경유해야하는 거점지였다. 후백제 역시 전라도에서 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합천—고령—대구로 연결되는 연결로를 통해야 했다. 이 때문에 후백제의 견훤군이 高鬱府(영천)를 공략한 후 경주를 함락했을 때, 이를 구원하기 위해 거병한 고려군과의 전투가 공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다. 공산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곳은 현재 申崇謙을 기리는 殉節壇(表忠壇)이 건립된 智妙寺(미리사)터 부근이었다. 부인사와 동화사의 계천이 합류하여 금호강으로 유입되는 합류지점인 살내(箭灘)를 사이에 두고 양측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 (927년) 9월에 甄萱이 …신라의 高鬱府를 습격하여 교외에까지 핍박하니 신라왕이 連式을 보내어 급히 고하였다. 왕(태조)이 … 公萱 등을 보내어 병사 1만으로 가게 하였는데 이르기도 전에 견훤이 갑자기 신라의 도성에 들어갔다. … 견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로 하여금 왕을 찾게 하여 군중에 두고서 핍박하여 자진케 하였다. … 왕(태조)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弔祭하고 친히 精騎 5천을 거느리고 견훤을 公山桐藪에서 맞이하여 크게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왕을 포위함이 매우 급하여 大將 申崇謙과 金樂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하고 왕은 겨우 단신으로 모면하였다.
견훤의 경주 침공과 경애왕의 시해에 격노해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출동한 왕건은 공산 지역에서 후백제 견훤군과 조우하게 된다. 고려군은 도착 직후 동화사의 병력을 제압한 후 영천 방향으로 진격하다가 銀海寺 부근의 太祖旨에서 패하고, 후퇴하여 미리사 앞에서 참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공산전투에서 동화사 등의 사원세력은 후백제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삼국사기≫ 견훤전에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國書 중 “桐藪望旗而潰散”이라고 하여 “동화사가 고려의 깃발을 보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였다”고 한다. 고려군이 공산에 도착한 후 처음 전투를 벌인 곳이 공산 동수였으며, 동화사는 고려군에 의해 궤산하였던 것이다. 당시 동화사는 정예의 고려군과 전투를 벌일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동화사의 隨院僧徒 또는 인근의 지역민들로 구성되었으며, 후백제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고려군에 대항했던 것이다. 동화사와 같이 격전지 인근에 위치했던 부인사 등도 후백제를 지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경주를 함락하고 경애왕을 시해한 후백제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 일대의 사원들은 고려군과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삼국 쟁패과정에서 인근의 지리적 환경에 익숙하고 지역민의 신앙 중심처였던 사원세력의 지지 협찬을 이끌어 냄으로써, 승리한 사례는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고려 태조와 후백제 견훤의 충돌지역이었던 경상도 권역에 위치한 예천의 龍門寺, 김천의 直指寺, 청도의 雲門寺, 밀양의 奉聖寺 등이 그 예이다.
공산전투에서 대패한 후 왕건은 이 지역 사원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영심—심지로 이어진 진표의 袈裟와 戒簡子가 신라말 왕건에게 전해진 사실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마) 또 살펴보면 本朝의 문인 金寬毅가 찬한 ≪王代宗錄≫ 2권에 말하기를 신라 말 신라의 大德 釋冲이 고려 태조에게 진표율사의 袈裟 1벌과 戒簡子 189매를 바쳤다고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동화사에 전해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신라말 신라의 大德인 釋冲은 심지가 이어온 진표의 가사와 계간자를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 一然은 이것이 동화사의 것과 동일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 동일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석충이 진표의 간자를 왕건에게 바쳤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왕건이 석충의 뒤를 이어 진표의 적통을 계승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석충은 진표의 법은 이은 領首 중의 한사람으로 山門의 개조가 되었다는 釋忠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그는 신라 말의 승려로 진표-영심의 법을 이은 심지를 계승했다. 그가 고려 태조에게 진표의 가사와 계간자를 전한 시기는 ‘신라 말’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후삼국 시기’인 것은 분명하다. 그 구체적인 시기는 왕건이 정권을 잡기 전 궁예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때로 보기도 하지만,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와 공산전투의 상황을 볼 때 공산전투 이후가 아닐까 싶다. 석충이 간자를 왕건에게 전한 것은 동화사가 고려를 지지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후삼국 쟁패기를 전후하여 부인사는 어떤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였을까. 구체적인 자료가 전하지 않아 그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부인사 역시 동화사와 비슷한 입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선, 공산전투가 벌어진 곳이 부인사와 동화사 인근에 위치했으므로 이들 사원들이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후술하는 바와 같이 최씨무인정권기 동화사와 부인사가 사원간의 연합을 통해 무인정권에 대한 항쟁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은 후삼국 쟁패 당시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즉, 공산전투 당시 지리적 조건과 최씨무인정권기 양 사원의 행보를 통해 후삼국 시기 부인사가 동화사와 비슷한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부인사는 신라 국가(또는 왕실)에서 창건한 사원이었으나, 후삼국 쟁패기가 되면서 신라에서 벗어나 후백제와 고려의 어느 한 국가를 지지해야만 하는 정치적인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에 따라 920년대 후반이 되면 동화사 등과 함께 후백제를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공산전투에 참여했던 듯하다. 하지만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가까워지면서 태조 왕건을 지지하는 것으로 정치적 향방이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부인사는 고려초 사원 정책의 추진과정에서 사격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Ⅲ. 고려시대의 부인사
1. 고려중기 ‘부인사장’의 봉안
신라에서 고려로의 변화 과정 속에 공산 지역의 불교계도 큰 변화를 겪었지만 부인사나 동화사 등은 사격을 유지하거나 더욱 확장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신라 이래의 명산과 지리적 요충지에 해당하는 입지조건의 중요성이 감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부인사는 국가적으로 공인된 비보사원으로 사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부인사의 위상은 현종대 조성한 ‘부인사장’이 봉안되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부인사장’은 1011년(현종 2)경부터 시작하여 20년 후인 1031년 일단락되었고, 다시 문종 초(1046~1083)에 시작하여 1087(선종 4)에 마쳤다고 한다. 이에 대해 ‘부인사장’ 조성연대의 하한을 1087년으로 볼 수 없으며, 그 후에도 예․인종시기까지 지속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大覺國師 義天(1055~1101)의 ‘續藏經’을 이해해야 한다고도 한다. 여하튼 ‘부인사장’은 예종대가 되면 공역이 완료된 것으로 보여 진다.
‘부인사장’은 조성이 일단락되는 예종대 이후 소실되는 1232년 이전에 개경에서 부인사로 옮겨졌을 것이다. 이운 경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강화경판’이 海路를 통해 낙동강을 따라 고령 開經浦를 거쳐서 海印寺로 옮겨진 점을 참조할 수 있다. ‘부인사장’은 개경에서 해로를 통해 낙동강―금호강―부인사로 이운되었을 듯하다.
한편, 현재 경북대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부인사지 비편은 井間이 있고 경직된 九陽詢体에 변화가 일어난 고려중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특히 둘째 행은 ‘覺□如無㝵智’로 판독되었으며, 최근 소개된 張脩(1079~1156)의 묘지명에는 그가 무애지국사의 비명을 썼다고 전한다. 부인사 비편은 장수가 1149년(의종 3)에 쓴 무애지국사의 비였을 가능성이 높다.
바) 皇統 9년(1149)에 致仕한 후 왕의 명을 받들어 太白山寺 無㝵智國師의 비명을 썼는데, 비록 老筆이나 (결락) 서체가 勁正하여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무애지국사 戒膺(繼膺)은 大覺國師 義天(1055~1101)의 嫡嗣로 예종․인종대에 활동한 화엄종의 고승이었다. 의천이 그를 法器라고 생각하여 출가시켰으며, 예종의 존숭을 받았다. 그는 1108년(예종 3) 般若寺의 元景왕사 樂眞(1048~1117)이 興王寺에서 활동하다가 지방으로 퇴거한 후 뒤를 이어 흥왕사의 주지를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태백산으로 복거하여 覺華寺를 창건하였는데 사방의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이 때문에 그를 太白山人으로, 각화사를 法海龍門이라 불렀다. 超悟僧統 敎雄(1077~1153)도 계응과 함께 태백산에 머물렀다. 1134년(인종 12)에는 왕이 그를 불러 ≪화엄경≫을 講하도록 했는데, 교웅의 묘지명에도 이 사실이 전한다.
계응은 의천의 嫡嗣로 흥왕사에서 활동하면서 예종(1106~1122)의 경앙을 받았으나, 태백산으로 들어가 각화사를 창건하였다. 인종대(1123~1146)에 잠시 개경에 상경하였고, 인종 말년에 입적하자 국사로 追贈되었으며, 의종초에 비가 건립되었다. 만약 그의 비가 각화사(태백산사)가 아닌 부인사에 건립되었다면, 계응이 말년에 부인사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元景왕사 樂眞(1045~1114)은 대각국사 의천과 사형제간이었다. 그는 의천을 수행하여 宋에 다녀왔고, 의천 사후 유업으로 남겨진 ‘續藏經’을 완성하였다. 의천의 적사였던 계응과 낙진의 교류는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 속장경의 간행을 추진했던 의천과 낙진, ‘부인사장’이 봉안된 부인사에 계응이 머물렀고 그의 비가 건립되었던 사실은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현재, ‘부인사장’이 이운되는 구체적 시기는 인종대 혹은 고종대인 1220년 경으로 보기도 한다. 만약 계응이 말년에 부인사에 머물렀다는 추정이 사실이라면, 계응과 그의 문도들이 의천의 교장 사업과 함께 ‘부인사장’의 이운을 주도하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부인사장’은 아무래도 고종대보다는 인종대에 이운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싶다.
그러면 ‘부인사장’이 보관된 경판고는 어디에 위치했을까? 부인사지 1차 발굴조사단(대구대학교 박물관)은 부인사 남쪽 축대로부터 6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동서 17m, 남북 12.5m,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이곳이 경판을 보관했던 經板庫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건물지가 경판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경판의 흔적이나 불에 탄 소토나 목탄 등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향후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부인사장’이 보관되던 시기 부인사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사) 명종 10년(1180) 6월 을유에 큰 비가 왔다. 東京 符仁寺의 北山에 갑자기 홍수가 나 寺屋 80여 칸을 무너뜨리니 익사자가 9명이었다.
사)는 1180년(명종 10) 부인사가 홍수 피해를 입은 사실을 전하는데, 그 규모가 최소한 80여 칸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수로 인해 사원의 모든 건물이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경판고를 비롯해 수백칸의 규모였을 것이다. 당시 부인사는 현재 해인사와 비슷한 法寶사찰로서의 사격과 위상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2. 무인정권기 부인사 승도의 항쟁
부인사는 최씨무인정권기가 되면 사원승도들에 의한 항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아)-① 신종 5년(1202) 10월 慶州別抄軍과 永州가 평소에 틈이 있었는데 이달 雲門賊과 符仁寺 및 桐華寺 양사의 僧徒들이 영주를 공격하였다. 영주인 李克仁, 堅守 등이 정예를 거느리고 갑자기 성에서 나와 싸우니 경주인이 패하여 도망하였다. 崔忠獻이 이를 듣고 宰相과 여러 장군들을 大觀殿에 모아 놓고 의논하기를 “경주인들이 함부로 의롭지 못한 행동을 자행하여 왔고, 지금 또 무리를 모아 이웃 고을을 공격하였으니 마땅히 군대를 내어 토벌하겠다”고 하였다.
아)-② 신종 6년(1203) 9월에 崔匡義가 급히 아뢰기를, “興州의 浮石寺와 符仁寺, 松生縣의 雙岩寺 僧徒들이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 한다”고 하므로 병마사에게 명하여 추국하고 섬으로 귀양 보냈다.
아)-①은 1202년(신종 5) 慶州別抄軍이 雲門賊과 부인사․동화사의 僧徒를 이끌고 永州를 공격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경주와 영주의 갈등에 대해 梨旨銀所의 소유권을 둘러싼 이해관계에서 기인한 것으로, 부인사 등의 사원이 참여한 것은 경주토호들의 영향권 내에 있어 그들의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부인사와 동화사는 崔忠獻(1149~1219) 정권의 교종사원 탄압정책에 대한 반발, 주변 토호들의 가담 권유, 원칙적으로 일반 백성들과 같은 피지배층인 승도들의 불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경주지역 세력들과 연합하여 항쟁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주는 1018년(현종 9) 경주의 속현이었다가 1172년(명종 2)에 監務를 파견한 곳이었다. 양 지역이 틈이 있었다는 것은 영주가 감무 파견으로 경주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던 데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무인정권기 지역간의 갈등은 成州人이 三登縣을 멸망시키고자 한 것에서도 보인다. 삼등현은 成州에 소속된 部曲을 합쳐서 현으로 승격된 지역이었다. 이 역시 속읍지역의 승격에 따른 대립으로 파악된다. 속읍에서 주읍으로의 승격은 읍격 뿐 아니라 속읍이 가지는 貢賦의 부담이 축소되었음을 의미하며, 해당지역 제세력들의 관계도 변화하였다. 경주 지역으로서는 영주의 분리․독립은 자신들의 기반 축소를 의미하며, 이 때문에 양 지역 간의 갈등․대립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러한 지역 간의 대립에 부인사․동화사의 승도가 참여한 것은 이들 사원이 경주 지역 재향세력과 이해관계를 같이하였음을 보여준다. ‘東京 符仁寺’라고 언급한 사)에서 보다시피, 경주와 그 속읍이었던 대구, 경주에서 독립한 영주의 대립에 부인사 등 공산 일대의 사원이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는 경주 지역 재향세력의 가담권유가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主屬관계의 변화에 따른 직접적인 사원 승도의 피해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쩌면 부인사에 봉안하고 있던 대장경판의 관리와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영주 지역에서 부담하였는데, 영주의 분리․독립으로 부인사․동화사의 승도나 공산 일대 지역민들에게 그 부담이 전가된 것은 아닐까 억측해 본다. 경주별초군과 부인사 등의 항쟁에 대해 무인집정자인 최충헌은 중앙군의 동원을 통해서 토벌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 항쟁은 근본적으로는 최씨무인정권에 대한 항쟁의 성격이 짙었음을 의미한다.
아)-②는 전 해의 항쟁과 연속선상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전자는 재향세력과 사원 승도세력의 연합이었다면, 후자는 부석사․부인사․쌍암사 등 지역과 종파를 달리한 사원 승도들이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다소간 차이가 있다.
부석사와 부인사는 경상도 지역 화엄종단의 대표적인 사원들이었다. 송생현의 쌍암사는 어떤 사원일까. 송생현은 원래 禮州의 속현이었다가, 1143년(인종 21) 감무가 파견된 곳이었다. 쌍암이라는 寺名은 인근에 있는 두 바위틈으로 샘이 흘러나오는 것에서 연유했다거나, 이 절의 승려가 戒定雙를 모두 수행하여 부처와 버금가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구나 무인정권기 쌍암사의 住老는 僧統 守其․大禪師 志素․선사 湛其 등과 비견될 정도의 고승이었다. 조선 초기 사원의 정비과정에 여러 고을의 資福寺를 대체할 때 쌍암사는 양산의 통도사에 버금가는 명찰로서 조계종 소속 사원이었다. 1203년(신종 6) 부인사 등 사원 승도들의 항쟁에는 화엄종과 조계종에 속한 경상도 지역의 대표적인 지방사원 승도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승도는 隨院僧徒 또는 隨院僧俗, 在家和尙 등으로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고려시대 각 지방의 사원에 긴박된 佃戶들로 降魔軍으로 편성되어 戰場에 직접 참여키도 하고, 사원주변 혹은 원격지에서 사원전을 경작하면서 촌락을 형성하기도 했던 존재들이었다. 부인사의 승도들도 평소 사원전을 경작하던 존재들로 무인정권기 사원승도의 항쟁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부인사는 교종사원들이 대체적으로 견지하고 있던 반무인정권의 입장을 표방하면서 직접 항쟁을 전개한 화엄종 사원이었다.
최씨무인정권은 부인사․동화사 등 승도들의 항쟁을 진압하고 지역 민심을 회유 포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라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東京招討兵馬使 田元均의 휘하로 출전했던 李奎報(1168~1241)가 지은 33차례의 각종 제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개경에서 출발하여 황지—영주—풍기—선산—상주—대구—경주로 이어지는 진압군의 도정에 太祖眞殿, 용왕, 부처, 산신, 천신, 太一 등을 대상으로 반군의 진압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 중 부석사의 장육존상, 공산의 공산대왕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인사, 동화사, 부석사의 승도들이 항쟁에 참여한 사실이 고려되었던 것이다. 특히, 대구 지역에는 <天皇前別醮文>(1202년 12월)을 비롯해 <祭公山大王文>(1202년 12월), <獻馬公山大王文>(1203년 3월), 난을 토벌한 후에는 <公山大王謝祭文>(1204년 2월)을 지어 토벌에 대해 감사의 祭를 올리고 있었다. 정부군의 입장에서는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신라부흥운동의 진압을 위해 이 지역의 민심수습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3. 반몽항쟁기 부인사의 동향
부인사는 1232년(고종 19) 몽고의 침입으로 ‘부인사장’이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부인사장’이 소실되는 상황은 1237년(고종 24)에 이규보가 찬술한 <大藏刻板君臣祈告文>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몽고의 2차 침입은 水州의 處仁城 전투에서 僧將 金允侯에 의해 살리타이(撒禮塔)가 전사함으로써 소백산맥 선을 넘지 못하였으므로, 몽고군이 아니라 고려 사람에 의해 방화․소실되었다.”고 한다. 반면 “撒禮塔의 남진 이전에 별동대가 남하하여 본토에서 가혹한 군사 활동을 한 것”으로 파악키도 한다. 즉 ‘부인사장’의 소실 원인과 주체를 ‘고려인’, 혹은 ‘몽고군’으로 서로 달리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몽고의 주력부대는 소백산맥을 넘지 못했지만, 별동부대에 의해 ‘부인사장’이 소실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 점은 몽고의 3차 침입 기간 중인 1238년(고종 25)에 몽고병이 경주에 이르러 皇龍寺의 탑과 장육불상, 전우 등을 불태웠다는 사실과 비견된다. ‘부인사장’은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고려인들의 자부심의 상징이자 반몽항전의 구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몽고군으로서는 이러한 ‘國之大寶’를 파괴함으로써 고려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항전의지를 꺾고자 했던 것이다.
자) 江華城의 서문 밖에 있는 大藏經板堂에 행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분향례을 행하였다. 현종 때 판본이 임진년(1232, 고종 19) 몽고 군사의 침입 때 불타버렸다. 임금과 군신은 다시 발원하여 都監을 설립하여 16년 만에 공역을 끝마쳤다.
1251년(고종 38) ‘강화경판’의 공역을 일단락하고 난 후 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강화성 서문밖에 있는 대장경 板堂에서 사업 완료를 고하는 분향례를 올렸다. 여기서도 ‘부인사장’이 1232년 몽고군에 의해 불타 다시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몽고군에 의해 ‘부인사장’이 소실된 사건은 전 고려인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고, 부인사의 입장에서도 큰 타격이었다. 경판을 보관하던 경판고 뿐 아니라 여타의 寺屋들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인사장’의 소실 이후 부인사 승려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특히, 반몽항쟁의 일환으로 조성되는 ‘강화경판’ 각성과정에 부인사의 승려들이 참여하지는 않았을까. 현재, 해인사 東西齋에는 ‘강화경판’의 조성을 전후한 시기에 판각된 寺刊板들이 다수 보관되고 있다. 이 경판을 판각한 승려층 중에는 ‘강화경판’의 각성활동에 참여한 이들도 확인된다.
차) 上祝 : 황제의 수명은 만세토록 무궁하시고, 國泰民安하며, 병란은 그치고 해마다 풍년이 들며, 법의 바퀴는 常轉하며, 돌아가신 부모․자매․자녀와 법계의 살아있고 죽은 모든 것들이 함께 서방정토에 태어나길 기원하면서 특별히 금강반야경을 조조하고 간행하여 널리 유포코자 합니다. 貞祐 2년 甲戌 10월일 / 道人 迅機 誌 / 無求居士 周通富 書 / 群生寺住持 重大師 探古 / 符仁寺 大師 淸守, 孝如 刻
차)는 貞祐 2년(1214, 고종 1) 간행된 사간판인 ≪金剛般若波羅密經≫의 상축문인데, 부인사의 大師인 淸守와 孝如 각수로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효여는 1214년 ≪금강반야바라밀경≫을 간행한 지 20여년이 지난 후인 1237년(고종 24)과 1238년의 2년 동안 ‘강화경판’의 각성사업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1237년 大藏都監에서 ≪放光般若波羅蜜經≫ 권19의 제25‧28장을, 이듬해에는 ≪法鏡經≫ 권1의 제9‧10장 등 2년 동안 모두 4장의 경판을 판각하였다. 그가 ‘강화경판’이 산출되는 초기의 2년 동안만 참여한 것은 노년기에 해당하여 더 이상 각성활동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면 효여는 1202년과 1203년 부인사 승도의 항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뒤, 1214년에 부인사의 대사로 ≪금강반야바라밀경≫ 판각에 각수로 참여하였다. 1232년 몽고군에 의해 ‘부인사장’이 소실되는 것을 목격하였고, 1237~38년에 ‘강화경판’의 각성사업에 참여하였다. 물론 그가 1202년부터 1214년을 거쳐 1232년까지 계속 부인사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214년에 僧階가 대사였으므로 그 이전인 1202년에는 승도로 부인사의 항쟁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또, ‘부인사장’의 소실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효여가 ‘강화경판’의 각성사업에 참여한 것은 그것을 ‘반몽항쟁’과 동일한 의미로 파악한 현실인식의 발로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4. 고려말․조선시대의 부인사
반몽항쟁기 이후 부인사의 모습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眞覺國師 千凞(1307~1382)의 행적에서이다. 천희는 공민왕 16년(1367) 辛旽의 추천에 의해 국사로 책봉된 후 신돈이 실각한 동왕 20년(1371) 圓證국사 普愚(1301~1381)가 국사로 책봉되기까지 국사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14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승려로 고려후기 화엄종단에서는 유일하게 국사에 책봉된 승려였다.
경상도 흥해군 출신인 천희는 13세(1319, 충숙왕 6)에 화엄종의 盤龍社에서 출가한 후, 19세(1325)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그 후 金生寺, 德泉寺, 符仁寺, 開泰寺 등 10곳의 사원과 소백산, 오대산, 금강산 등을 순력했다. 1364년(공민왕 13) 원으로 유학하여 杭州에서 蒙山화상의 眞堂이 있는 休休庵을 참배한 후, 임제종의 萬峯 時蔚의 법을 전해 받고 1366년(공민왕 15) 귀국한다. 같은 해 7월에 왕을 만난 후 雉岳山을 거쳐 洛山寺에서 관음보살이 放光하는 瑞氣를 경험하기도 했다. 동왕 16년 국사에 책봉되고, 1370년(공민왕 19) 廣明寺에서 오교양종의 工夫選을 실시 할 때 證明으로 참석한다. 이듬해 신돈이 실각한 후 잠시 치악산으로 들어갔다가, 1372년(공민왕 21) 부석사로 옮겨 전각을 크게 중수하는 등 화엄종의 종세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1382년(우왕 8) 수원 彰聖寺에서 입적하였다.
그는 의상 계통의 화엄을 계승하면서 낙산사 관음보살이 방광하는 서기를 보는 등 신비적인 신앙요소들이 두드러지기도 했다. 더불어 원에 유학하여 몽산과 만봉의 법을 잇기도 해, 선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가 유력했던 부인사․개태사․경천사․부석사․낙산사 등은 모두 화엄종의 대표적인 사원들이다. 특히, 부인사는 당시 부석사, 반룡사 등과 함께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사원이었다.
14세기 부인사의 위상은 三峰 鄭道傳(1342~1398)의 <送華嚴宗師友雲詩序>에서 확인되는데, 정도전은 ‘巨刹’이라고 특기하였다. 화엄종의 고승이었던 友雲은 언양 김씨로 시중 竹軒 金倫(1277~1348)의 아들이자, 息齋公 金敬直의 아우였다. 그는 원에 유학하였다가 귀국한 후 공민왕의 귀의를 받기도 했다. 말년에는 부인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다가, 개경의 法王寺에서 교종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제자들을 지도했다. 牧隱 李穡(1328~1396)과 정도전 등과 교류하였으며, 문인으로는 義砧이 있었다. 원 유학기간 중 선승들과도 깊이 교류하여 ‘以心傳心한 偈’가 행장에 가득했다고 한다.
이처럼 부인사는 고려말 대표적인 화엄종 승려였던 진각국사 천희․우운 등이 머물렀으며, 당대의 巨刹로 인식되었다. 이들은 화엄종 승려들이었지만 원나라에 유학하여 臨濟宗의 선풍도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가 개창 후 태종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원 정비작업이 진행되었다. 1406년(태종 6) 고려 이래의 12종파를 2‧3개로 묶어 모두 7개로 통합하고 242개사의 승려․토지․노비수를 제한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그 중 88개의 사원을 대체하였으며, 1424년(세종 6)에는 이전의 7개 종파에서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僧錄司를 혁거하는 대신 전국에 36개 사원만을 두어 양종에 소속시켜 사원수 등을 재정리하였다.
이러한 대대적인 사원 정비 속에서 부인사는 1406년의 242개 사원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에 이를 대체한 88개의 사원에 포함되지 않았고, 1530년 경 편찬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불우조에 동화사 등과 함께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고려말 거찰로 인식되었던 부인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사세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후 1660년(현종 1)에는 ≪禪門祖師禮懺文≫을 開板하였으며, 1679년(숙종 5)에는 부인사의 불상이 땀을 흘렸다고 전한다. 1788년(정조 12)에는 주지 性贊의 주도로 冥府殿을 이건하였다. ‘이건기’에 나타난 18세기의 가람배치를 보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정면에 쌍탑이 위치하고 좌우측에 각각 미타전과 명부전 등 여러 전각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후 19세기에는 사세가 쇠락해지면서 동화사 소속의 암자가 되었으며, 근래에 다수의 전각들이 신축되고 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符仁寺의 역사적 변천과 현실 대응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함으로써 맺음말로 삼기로 한다.
부인사는 신라․고려시대 국가적인 숭앙의 대상이었던 名山인 公山에 입지하면서, 전략적 요충에 해당하는 대구 지역에 위치고 있다. 이러한 조건은 부인사가 위상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부인사는 8세기 초 성덕왕대(702~737) 창건된 華嚴宗 사원이었다. 879년(헌강왕 5)에는 洞眞 慶甫(869~947)가 출가하였다. 부인사는 10세기 초까지는 친신라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후삼국의 쟁패가 격화되면서 신라왕실로부터 이탈해나갔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가 벌인 公山전투에서는 후백제를 지원하였으나, 후삼국 통일 즈음에는 태조 王建을 지지했던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고려시대의 부인사는 국가적으로 공인된 裨補寺院으로 사격을 유지하였다. 특히, ‘符仁寺藏(초조대장경)’이 봉안되면서 法寶사찰로서의 위상을 자랑하였다. 당시 부인사에는 經板庫를 비롯해 수백칸의 寺屋이 건립되어 있었다. ‘부인사장’은 예종~인종대에 활동한 無㝵智國師 戒膺과 관련하여 인종대(1123~1146)에 海路를 통해 낙동강을 따라 移運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씨무인정권기인 1202년(신종 5)과 1203년에는 부인사 僧徒들이 반무인정권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몽고의 2차 침략기인 1232년(고종 19) 몽고의 별동부대에 의해 ‘부인사장’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시기 부인사의 大師 孝如는 ‘부인사장’의 소실을 겪은 후 반몽항쟁의 일환으로 추진된 ‘江華京板 高麗大藏經(재조대장경)’의 조성사업에 刻手로 참여하기도 했다. 14세기에 들어 고려후기 화엄종에서 유일하게 배출한 국사인 眞覺國師 千凞(1307~1382)와 友雲과 같은 고승들이 住持하는 ‘巨刹’이었다.
이상에서 신라․고려시대 공산 지역을 대표하는 사원이었던 부인사의 역사적 변천과정과 현실대응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논리적 비약이 심하였다. 부족한 부분은 보완해 나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