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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전역과 보급문제
Martin L. van Creveld
Professor,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정서] 신수기
ssn668@hitel.net
[교열] 채승병
webmaster@panzer.pe.kr
이 글은 Martin van Creveld 교수가 저술하고 1977년에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Supplying War: Logistics from Wallenstein to Patton"이라는 책의 제 7 장, War of the accountants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문서 정리에는 하이텔 군사동호회 및 2차대전사연구 작은모임 톰과제리(wwii) 등에서 활동 중이신 신수기 님께서 수고해주셨다. 신수기 님에 의하면 이 책은 우리나라 육군 병참학교 전투발전부에서 내부자료로 1982년에 번역-출간하였으며, 이 번역판본을 참고로 하여 번역상의 오류를 수정-정리하신 것이라고 한다. 수고해주신 신수기 님께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올리는 바이다.
여기서 파헤쳐보고자 하는 것은, 흔히들 막대한 공업력과 물량을 바탕으로 승리하였다는 영미연합군은 과연 어떤 보급노력을 기울이며 전쟁을 치뤘는가 하는 의문이다. 아무리 한 국가의 산업 생산력이 막강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생산된 물자를 야전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분배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후방에 무기와 탄약이 가득 쌓여있다고 한들, 정작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에 그러한 보급품이 적시에 추진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앞서도 종종 이야기를 했지만, 이러한 야전에서의 작전수행과 지원업무 사이의 관계에 있어 영미연합군과 독일군은 다소 상이한 접근방식을 가지고 군 조직을 발전시켜왔다. 예로부터 독일군은 효율적인 작전수행을 최우선시하여 전투근무지원업무가 여기에 종속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반면에 영미연합군은 방대한 군 행정조직에 의한 철저한 지원의 바탕이 수립된 이후에 그에 맞춰 작전수행을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전참모장교가 독일군에서는 제 1 참모장교인데 반하여, 미군에서는 인사, 정보 다음인 제 3 참모장교(G-3)라는 사실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이러한 특징은 제 2 차 세계대전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앞서 바바롯사 작전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보급전을 다룬 글에서 살펴봤듯이, 독일군은 작전 요구사항에 보급문제를 무리하게 끼워 맞추고 낙관적인 예상만으로 일을 벌이다 패배하였다. 반면 이제 살펴보겠지만 영미연합군은 너무 철저한 준비를 강조하다보니 종종 지나치게 소극적인 자세에 사로잡혀 돌발적인 상황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졌다는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노르망디 상륙 입안과 세세한 계획 수립에 무려 2년이라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에도 정작 실제 전투는 그런 계획과는 완전히 틀어져 영 예상을 빗나가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보통 영미연합군은 승자의 영광된 모습으로서만 기억되고 있기 때문에 막후에서 일어난 이러한 일들에 대해 세간의 인식이 부족한데, 이하에서 다룰 그 이면의 혼란상은 제 2 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측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독자 여러분들도 많이 느끼시겠지만, 현실에서도 항상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 철저한 계획과 조속한 실행에 각각 얼마만큼의 비중을 두고 적절한 선택을 하느냐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러한 선택에서 전쟁 수행에 있어 전자에 중점을 둔 영미연합군과 후자에 중점을 둔 독일군의 사례를 곱씹어 봄으로서, 그 사이에 적절한 접점을 찾는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그로 인한 장단점과 종국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참고로 2차대전사 부분 이외에도 이 책 전체는 상당히 재미있으며, 세간의 평가도 매우 좋다. (아마존에 가보시면 별 다섯 개의 평점을 얻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03년 현재에도 온라인 서점들에서 쉽게 영어판을 구할 수 있는만큼 관심있는 독자 분들은 구입해서 완독해보실 것을 아울러 권한다.
1. 계획의 함정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기동작전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들 작전 중 일부는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작전에 쏟은 준비의 정도와 그 작전의 성패간의 상관관계는 밝혀지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면 말버러(1st Duke of Marlborough)의 다뉴브 진격은 르브와(Louvois) 포위전에 비해 보급행정상의 문제점이 훨씬 적었다. 아마 그가 이 작전을 계획한 가장 우선적인 이유일 것이다. 나폴레옹의 작전 중 가장 성공한 두 가지 작전은 — 1805년, 1809년 — 거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작되었다. 이에 반하여 러시아 원정은 대규모로 그리고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준비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 없는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1870년 보불전쟁은 기습으로 시작하였지만 그 작전을 위한 준비는 사전에 몇 년 동안 준비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실제상황과 몰트케의 작전 계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1차대전 전 일단의 참모장교들은 조금도 지치지 않고 모든 시간을 할애하여 — 성탄절까지도 — 마지막 열차편까지도 다음의 전쟁을 위해 철저히 계획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고보니 전혀 예상 밖의 상황이 되어 정성을 다해 마련하였던 치밀한 계획도 패전을 갖고 온 것에 불과하였다. 25년 후 전 독일군에 의한 러시아진공(바바롯사 작전)은 준비 기간이 12개월 밖에 안되는 즉흥적인 계획에 불과했다(수량적 견지뿐만 아니라 기타의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롬멜의 아프리카 원정은 준비가 6주간도 되지 않았으며 사전경험이 없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눈부신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 작전으로 간주되고있다.
이들 작전이, 허용된 준비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제한된 보급으로써 전투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나폴레옹은 1805년 군대에 장비할 예정이었던 짐차의 반수도 획득할 수 없었다. 1914년 8월 제 1 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을 당시 독일 참모본부는 막대한 철도배치계획의 전면 수정을 포함한 대규모의 재편작업을 추진중에 있었다. 1940년 제 2 차 세계대전 발발시에는 독일 국방군의 무적전차군단은 대부분 1호 및 2호전차로 구성되어 있었다(이것은 훈련용 이외에는 사용할 계획이 없었던 소형전차였다). 독일군의 장비는 사막전을 예상하여 설계되지는 않았으나 그 대부분이 영국군 장비에 비하여 북아프리카전구에 적합한 장비였다. 이러한 전역(campaign)을 계획하고 수행했던 사람들도, 지금의 당국자들과 마찬가지로, 보급계획의 근본문제는 그 준비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의 신형장비를 설계하고 완성하려면 몇 년이 걸릴 것이며, 또한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장비를 대량생산하려면 몇 년이 걸릴 것이지만, 전술적 조건은 — 정치적 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 몇 주간 혹은 며칠 사이에도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역사상의 위대한 군인은 계획입안의 시간적 길이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군인은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지난날의 수많은 지휘관들이 정치적 상황의 변동과 전술적 조건의 변화로 인하여 필요한 모든 전쟁물자를 충분히 준비하면서 전쟁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모든 지휘관들이 어떤 유형의 개인적인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면 적응력, 지략, 즉흥적 대처능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단력이다. 이러한 자질이 없다면 아무리 분석적 사고와 명민함을 자랑하는 지휘관이라도 전자계산기만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휘관이 그러한 자질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융통성이 있는 참모와 비대해진 조직으로 인해 지휘체계가 경직화되지 않아야 한다.
군대의 사령부가 그 부대의 구조와 비교하여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어야하는가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규모와 전장에서의 승리 사이에는 명확한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에도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 황제의 사령부는 끝없이 팽창하여 결국에는 1만 명이나 되는 대부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무용지물이었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은 항상 자기가 모든 일을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몰트케에 의해 만들어진 편성은 장교 2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둔 여러 실적이 있다. 슐리펜 지휘하의 총참모부(Great General Staff)는 인간이 만든 조직중에서는 가장 완벽한 조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참모부에서 세운 전략은 의문점이 많았고 그 보급지원은 그 전략이상으로 나빴다. 1941년 독일군은 70개 사단을 거리낌 없이 단일 집단군의 지휘하에 두었으나, 사령부는 800~900명을 거느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군이 일련의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롬멜은 종종 거의 사령부 없이도 무선장비를 갖춘 "매머드(Mamut)" 트럭을 타고 전장을 돌아다니거나 Fi 156 피즐러 슈토르히(Fiesler Storch) 정찰기를 타고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지휘를 하고는 했다.
이상과 같이 부대는 사전준비도 없이 급히 편성되었고 보유장비들은 전투에 부적합한 것뿐이었으며 그리고 작전 명령도 즉흥적으로 내려진 불확실했던 전쟁들에 비해, 1944년 6월 프랑스에 진격한 연합군은 통찰력과 조직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이 군대는 전투개시 일시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었고, 모든 행동은 2년에 걸쳐 상세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또한 당면한 임무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어떠한 장비라도 선택하고 설계, 개발, 시험, 제조할 수 있는 군대였다. 더우기 전사상 가장 큰 상륙작전을 앞둔 지휘관은 제리캔(5갤런짜리 통)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적재와 적하의 준비를 요구하였다. 한마디로, 역사상 어떤 군대도 작전의 입안과 실행을 준비하는 데에 이처럼 치밀한 계획에 의지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 부대의 지휘구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44년 6월 연합국의 프랑스원정군이 편성되었을 때, 연합군은 47개 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3개의 집단군(미국 2개, 영국 1개)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 밑에 6개의 야전군이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의 총지휘권은 연합국원정군 최고사령부(SHAEF)의 수중에 있었다. 이 사령부는 미-영 연합 조직이었고 그 자체가 대규모의 전방작전사령부(ADSEC)와 그보다 더 큰 규모의 후방작전사령부(COMZ)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들 본부 사이뿐만 아니라 본부와 미-영 양국의 부대간의 조정은 수많은 위원회, 사무국, 연락장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1943년 11월에는 미군의 보급 업무에 전념하는 데만도 562명이나 되는 장병이 계획입안에 참여했다. 이들 장병은 90마일 떨어져 있는 후방과 전방사령부(각각 COMZ, ADSEC으로 불렸다)에 배속되어 상호연락을 도모하기 위하여 긴급연락관제도(Rapid Courier Service)를 두고 있었다. 사령부를 둘로 분리하는 제도는 원래 영국해협 양측에서 나뉘어 보급선이 운용되는 어려움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전원이 유럽대륙으로 건너가고 나서도, 그리고 ADSEC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려 하면서 두 사령부간에 마찰이 생긴 뒤에도 오랫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게다가 COMZ와 ADSEC은 대등한 SHAEF 직속기구였다. 그 결과 프랑스에 원정중인 미군 지상군의 최고사령관(The Senior American Ground Commander in France) 브래들리(O. N. Bradley) 대장은 보급물자를 그의 휘하의 부대에 분배할 것을 요구할 수는 있었으나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요컨대 1944년의 연합군은 공룡 브론토사우르스와 비슷하였다. 다만 브론토사우르스는 신체에 비해 뇌가 너무 작았으나 연합군은 그렇지 않았다.
조직과는 별도로, 수뇌부의 사고방식도 평가해볼 가치가 있다. 이것은 국민성과 같은 막연한 잣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명령서에 의해 만들어진 여러 기록에 근거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연구할 수가 있다. 1944년 당시의 SHAEF는 "위대한 군사적 자질은 문제에 포함되어 있는 제요인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바위같이 굳은 결단에 도달하는 재능"이라고 정의를 내린 장군(아이젠하워 대장)에 의하여 통솔되고 있었으나 동시에 "우선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 감행한다(Erst wegen, dann wagen)"고 하는 몰트케의 슬로건도 채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SHAEF는 생각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과의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취할 것인가는 알지 못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모든 결정(종종 매우 작은 문제에 관한)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우선, 어떤 문제(예를 들면, 어떤 항구에서 식량 혹은 유류를 취급할 것인지 아닌지에 관해)를 해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면 그 책임은 지휘계통을 통해 하부제대에 전달되고, 필연적으로 일선의 최종실무자에게 하달된다. 그리고 나서 문제의 항구에 대한 정찰이 행하여지고, 모든 의문사항에 대한 보고서가 쓰여지며, 그 다음에 이 보고서는 지휘계통을 따라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이 사이에 모든 관계기관이 토의를 계속하여 폭넓은 견해를 반영시켜 최후로 최종결정권자에게 도달케 된다. 이리하여 수집된 모든 정보에 근거를 두고 그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 과정은 조직적이고 민활하고 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얼마나 능률적이었나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장의 목적이다.
그러나 이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적어도 역사가로서의 견지에서 볼 때, SHAEF의 문서를 마구 뒤지는 것은 무가치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는 유익한 점이 있었다. 두툼하게 철해놓은 서류 속의 정보량은 막대한 것이며 그래프, 표, 통계수치 등은 다른 현대의 군대(예를 들면 1941년 독일 국방군)의 문서중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더구나 그 이전의 군대는 비교할 여지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대량의 자료를 모두 걸러내어 소화시킨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분석해볼 때, 가치있는 정보는 실로 조금밖에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를 말하는 것은 이 연구가 끝난 후에야 겨우 가능할 것이다. 한편 이 책에서 연구한 작전 중 1944년~45년에 연합군에 의하여 이루어진 작전만이(병력의 우세라는 면에서) 낙승이었나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시켰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문제에 답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지만, 그러한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2. 노르망디에서 센 강까지
나폴레옹은 보로디노(Borodino)전투 전날 밤 깊은 명상 끝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전쟁은 결정적인 지점에 최대수의 부대를 집중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가 이긴다." 결정적인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한사람의 판단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그 판단은 천재성의 산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우연에 의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 지점이 확인되면 그 곳에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는 것은 보급기지, 병참선, 수송수단, 편성, 요컨대 보급상의 영역이다.
오버로드(Overlord) 작전을 계획한 사람들은 연합군에 의한 유럽진공이 최종적으로 성공할지의 여부는 적보다 빠른 속도로 병력과 물자를 투입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 자체는 원칙적으로 예로부터 지휘관들이 직면한 것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이에 대한 연합국의 접근방법은 독특했다. 상륙하기 약 18개월 전부터 시작하여 수 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모델이 점차 만들어졌다. 이것을 만든 목적은 병력과 물자의 투입에 영향을 줄 모든 요인에 관해 포괄적인 전망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 모델의 완성을 위해 몇 개월을 소비한 후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D-day에 사용할 상륙용주정, 연안운반선, 병력수송선, 화물선, 유조선, 거룻배의 수. 이들은 일정시간내에 상륙가능한 병력과 장비의 최대량을 결정한다. 더욱이 그 배들은 화물을 싣기 위해 기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돌아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기지는 가능한 한 가까이 있어야 한다.
해변의 넓이와 수, 그 경사도(만약 모든 유형의 배가 가능한 한 작업 진척에 방해가 되는 복잡한 이동작업을 생략하고자 한다면 해안에 최대한 접근해야 하며 이때에 해안지형은 매우 중요하다). 그뿐 아니라 해류, 바람, 파도의 일반적 상태, 해변에서 내륙으로의 도로도 중요했다. 해변은 아무리 잘 선택한다 하더라도 모든 조건을 장기간에 걸쳐 충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해변을 보완하기 위하여 2개의 거대한 인공부두를 영국해협을 건너 운반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더 지형 및 기상상의 조건을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
해변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상당한 능력을 갖춘 정박지가 있을 것(그것 자체가 상호관련된 일련의 요인에 의존하고 있으나). 이와 같은 항만이 있어야 비로소 연합군의 대륙거점을 장기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특히 상륙용주정 및 인공부두는 겨울이 되어 사용불가능할 때까지의 일시적 해결책에 불과하다고 간주되었다.
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 연합군이 적의 작전을 방해하고 적의 증원군 도착을 방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것 여하에 달려 있었다.
이 모델을 완성시킨 후 SHAEF 부참모장 모건(F. E. Morgan) 중장 지휘하의 계획담당자들은 지도를 보고 이런 조건들이 충족될 수 있는 유럽내의 장소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모델 중에 설정된 조건이 종종 서로 모순되어 "이상적인" 상륙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발견하였다. 예를 들면 경사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상적이라고 생각된 해안(파 드 칼레 해안의 몇몇 장소와 같은)은 높고 큰 모래언덕이 많았기 때문에 내륙으로 바로 진격할 수가 없었다. 비스케(Biscay) 만 지역에는 좋은 항구가 많이 있었으나 전투기의 지원거리 밖에 있었다. 만약 2개의 기본적인 조건이 설정되지 않았더라면, 3천 마일에 걸친 독일군 점령하의 해안선을 조사하고 모든 요인들이 가장 잘 조합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모건의 부하들은 영원히 후보지를 찾아헤맸을지도 모른다. 그 첫째는 상륙용주정와 기타 선박이 바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상륙지는 영국에 있는 연합군 주요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조건에 의하여 자연히 지중해와 노르웨이가 배제되고, 프랑스 서해안만이 남았다. 둘째로 상륙지는 영국에서 출격하는 영국 공군의 스피트파이어(Spitfire) 전투기의 행동반경내에 있어야만 했다. 이들 2개의 조건을 종합하면 선택의 범위는 약 90% 정도 줄어들어 결국 프랑스 북서부의 파 드 칼레 아니면 노르망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되었다.
전략적인 면에서 파 드 칼레는 독일에 가장 가깝고 가장 직접적인 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파리와 그 너머를 향하여 과감하게 동진하면 센 강 남쪽에 있는 모든 독일군을 고립시킬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곳은 방어가 가장 견고한 지역이기도 하였으며, 좋은 도로와 발달된 철도망을 이용하여 바로 증원할 수가 있었다. 결국 노르망디를 선택하였지만, 대서양을 향하여 서쪽으로 돌출한 반도라는 지형으로 인해 프랑스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격리되기 쉬운 지역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건 자체도 교두보를 장악한 후 내륙으로 진격하게 되면 연합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았다.
상륙지점을 선택한 후 최초 90일간을 위한 세밀한 병참계획이 작성되었다. 상륙하는 병력의 수, 장소, 일시, 순서 등이 명확하게 결정되었다. 기타 해안의 장애물 제거와 작전순서뿐만 아니라 폐기물의 처리장, 어떤 상륙방식에서 다른 상륙방식으로의 전환장소(예를 들면 해안선에서 행동하는 상륙용주정이나 수륙양용차에서 영국에서 온 리버티형 수송선이나 미국에서 직접 온 수송선으로 이동), 혹은 어떤 포장방식에서 다른 포장방식으로 바꾸는 시기까지도(예를 들면, D+15일에는 제리캔을 드럼통으로 바꾼다) 결정되었다. 수많은 품목을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로 상륙시키기 위하여 엄격한 우선순위가 정해졌다. 그에 따라 문자 그대로 모든 품목에 관해 저장, 청구, 포장, 인도, 분배의 상세한 순서가 결정되었다. 연합군의 병력과 물자를 상륙시키는 데 사용할 계획으로, 10여 개의 항만을 복구시킬 계획 — 하루에 수백 톤밖에 취급할 수 없는 항구까지 포함하여 — 이 강구되었다. 이것은 어떤 물자가 어디에 얼마만큼 필요한가를 미리 결정하는 작업이었다. 이 계획은 매우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계획완성까지 거의 2년이 걸렸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계획이 유례없이 규모가 컸고 또한 내용이 철저하였으므로 작전의 승리가 대부분 계획이 잘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상륙 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큰 파도와 특히 미군 지역내에서의 맹렬한 적의 저항으로 인해 계획된 상륙은 실패로 돌아갔다. 항로를 착각하여 상륙은 틀린 장소에 틀린 순서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공병대가 공격부대보다 먼저 해안에 도착하여 매우 적은 수의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 공격부대의 엄호 없이 작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D데이 후 며칠간은 해안의 장애물 제거가 늦어지고 또한 내륙으로 진출할 출구도 충분히 열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전지역이 절망에 가까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만약 독일공군이 공격한다면 매우 좋은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차량은 방수가 불충분하여 많은 양이 손실되었다. 파도치는 바다를 10에서 12마일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이미 과적재한 수륙양용차량은 연료가 떨어져 침몰하였고, 트럭이 부족하여 수륙양용차량이 본래 임무 이상으로 내륙으로 진입하여 귀환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조작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악조건하에서 최초 1주 동안 해안에 상륙한 보급물자의 양은 계획상의 반에 불과했다. 보급부족, 특히 탄약부족이 곧 나타나 사용량을 할당제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위에 거론된 문제의 대부분은 전투시의 마찰요인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일부는 계획 자체의 결점도 작용했다. 보급 시스템의 모든 요소가 서로 완전히 조화되기를 바란 나머지 계획이 너무 치밀하게 세분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하루에 불과 100톤의 물자 — D+12일에 상륙될 보급물자의 1%도 안되는 — 가 비상용으로 준비되었을 뿐이었다. 비행기로 하루 6000파운드의 긴급 물자를 보낼 준비는 되어 있었으나 요구된 후 48시간 내에 보급물자를 보낼 방법은 없었다. 예상한 대로 보급물자상륙의 순서를 엄격히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커다란 혼란과 지체가 계속 발생하였다. 병사들은 나룻배를 타고 이 배에서 저 배로 오가며 화물이 무엇인가를 확인하였다. 영국으로 돌아가 화물을 다시 싣기 위한 시간표가 너무나 빡빡하여 수송선과 상륙용주정의 작업지연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구는 혼잡하여 긴급수단을 써서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사이에 많은 물품이 흩어지기도 하고 손실되기도 하였다. 항만의 혼잡은 하역, 트럭, 기타운송수단에 관련된 3개의 조직(MOVCO, TURCO, EMBARCO)이 하역 작업 관련 책임을 분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심해졌다. 계획상의 최대결점은 전쟁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마찰요인에 대해 충분한 고려와 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낭비를 줄이는 데 집착한 나머지 계획이 인색하게 짜여졌으며, 이로 인하여 또다시 마찰을 유발시키게 되었다. 왜냐하면 파이프 라인 끝에서 발생한 혼란이 곧바로 파이프 라인 전체로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D+1일부터 2개의 인공부두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이 설비는 매우 복잡하여 이것을 건조하는 비용과 영국해협을 건너는 데 많은 비용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특히 영국군의 인공부두는 구조물의 40%를 바다에서 손실하고서야 겨우 노르망디에 도착되었다. 그 때문에 그 기능은 훨씬 못미쳤다. 미군의 인공부두는 제법 온전하게 도착하였지만, 가동을 시작하자마자 태풍으로 침몰되고 바람에 날려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결과적으로 상륙을 돕는 데 가장 도움이 된 것은 폐색선(blockship)이라는 재래식 수단이었다. 인공부두라고 하는 복잡하고 값비싼 설비의 대부분(그 일부는 전혀 별개의 작전을 위해 설계되었으나 응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가져왔다)은 상륙지점에 그 잔해를 흩뜨려 항해에 위험이 될 뿐이었다. 다른 작전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오버로드작전의 입안자들은 힌덴부르크의 격언, 즉 전쟁에서는 단순한 것만이 승리한다는 말을 어겼음에 틀림없다.
작전의 초기 단계에서 보급지원을 수행하는 데는 해변과 인공부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작전의 최종적 승리는 수심이 깊은 항구를 점령하고, 그것을 수리하여 사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상륙후의 전술적 전개가 예상보다 늦어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러한 기대는 좌절되었다. 예를 들면 셰르부르(Cherbourg) — 노르망디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 가 운용되기 시작한 것은 예정보다 6주일 늦어졌고, 하루 6천 톤이라는 목표치에 도달한 것은 다시 수 주일이 지난 뒤였다. D+9일에는 함락되리라고 예상하였던 생 로(Saint Lo)는 D+48일에 함락되었다. 그랑비유(Granville)와 생 말로(Saint Malo)는 D+27일 경에는 운용되기 시작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D+50일까지 독일군 수중에 있었다. 노르망디라는 상륙지점은 브르타뉴(Brittany) 반도의 여러 항구들 특히 브레스트 항구에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 오버로드 작전에서 선택된 주된 이유였다. 결국 이들 항구는 예정보다 수 개월 늦어서야 겨우 점령되었으나, 그때는 전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랑샴(Granchamp)과 이시니(Isigny) 같은 항구들은 제때에 점령되었으나 너무 소규모라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모든 원인 때문에 6월 중 상륙된 미군의 보급물자의 양은 계획상의 70%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일련의 작전 — "Axehead", "Lucky Strike", "Beneficiary", "Hands Up", "Sword Hilt" — 이 검토되었지만 순전히 보급상의 이유로 거부됐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대프랑스 작전이 붕괴되지 않았다는 것은, 인공부두가 제 기능을 못하긴 했어도, 해안에서 계획을 훨씬 상회한 보급물자를 상륙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계획을 무시한 덕분에 실행될 수 있었다. 최초의 적 전선돌파는 D+2일에 있었는데 그 때는 이미 결정된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모든 물자를 닥치는 대로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해군은 여러 달에 걸쳐 썰물 때에 배를 상륙시키는 것에 반대했으나(이것이 작전의 일시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갑자기 그러한 방법도 실행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애를 써서 모은 많은 보트, 부교, 주교 등을 사용하여 화물을 직접 해변에 하역하고 또한 분배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하역작업은 계획에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무계획상황에서 진행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역행하여 진행되었다. 이것은 계획입안자들이 복잡하고 인위적인 준비를 과대평가했다는 점이라든가 현장에서의 상식 또는 즉결처리능력의 효율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한다. 한 가지 더 보급 계획의 결점이 노출되는 것을 방지한 요인은 소비량의 과대평가였다. 이것은 전술적 전개가 예상보다 훨씬 늦어졌다는 사실에 일부의 원인이 있었다. D+19일까지 점령된 연합군의 거점은 계획의 10%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보급품의 수송거리는 수십 마일밖에 되지 않았으며 차량들은 할당된 연료의 일부를 사용했을 뿐이었다. 계획입안자들이 얼마나 부정확했던가는 상륙지점에 대한 물자하역이 계획보다 약간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D+24일부터 계획보다 앞서서 증원 사단을 보낼 수가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되었다.
전술적 전개가 늦어짐에 따라 일부 보급물자의 소비량이 줄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분야에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노르망디 보까즈(bocage) 지대에서의 탄약소비량 특히 소화기/수류탄/박격포탄은 병기의 손실과 더불어 예상보다 많았다. 물자저장을 위한 공터를 확보하기가 어려워 위장이나 산개를 할 수가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종심이 얕은 진지에서 많은 차량이 통행했기 때문에, 혼잡이 생겨 몇 개 안되는 도로의 교통상태가 악화되었다. 노르망디의 철도는 점령되기는 하였지만 거의 파괴되지 않은 절도도 그 주행거리가 짧았기 때문에 예상보다 비경제적이었다. 전선이 해안에서 불과 20마일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후방작전사령부(COMZ)와 야전부대간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각군은 당연히 후방작전사령부를 위해 보급물자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방작전사령부와 전방작전사령부(ADSEC) 사이에도 분쟁이 생겼다. 그 때문에 후방사령부의 프랑스로의 이동은 예정보다 빨라졌다.
이와 같이 1944년 6월 및 7월에 전술적 전개가 늦어짐에 따라 보급상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두보를 병력과 보급물자로 채울 수가 있었다. 아브랑쉬(Avranches)의 포위돌파를 노린 코브라(Cobra) 작전의 전날 밤에 1,570 평방 마일의 지역에 19개 미군 사단(미군사단만으로 하루 평균 2만 2천톤이라고 하는 보급물자가 소요됨)과 17개 영국군 사단 도합 약 150만 명의 병력이 보급물자와 함께 갇혀 있었다. 이 보급물자 중 거의 90%는 여전히 해변에 하역되고 있었으나, 셰르부르가 일단 개항되면 최초에 계획했던 물량 이상으로 보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행거리가 짧았기 때문에 연료의 확보물량은 예상외로 높은 수준에 달하였고, 한편 탄약의 보급상황은 포위돌파전에 전투가 소강상태에 놓여 있을 무렵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물자가 풍부한 상황에 있으면서도, 연합군의 병참장교는 가을(이때에는 기후악화로 해변에 보급물자를 하역하기가 불가능해질 것이다)에 구체화될 것으로 생각되는 물자부족을 심각히 걱정하기도 하고 혹은 브르타뉴 반도의 여러 항구를 점령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후방작전사령부의 리(J. C. H. Lee) 장군은 노르망디의 보급상황에 불안을 느끼고 프랑스에서의 작전지속을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처음부터 오버로드작전의 보급계획은, 독일군이 조직적인 방어작전을 전개하여 점차적으로 강을 따라 저항선을 만들 것이라는 가정하에 작성되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전진은 1918년과 마찬가지로 완만하고 신중한 것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 전진을 위한 보급지원은 주로 트럭수송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겠지만(프랑스의 철도망은 독일군의 파괴와 연합군의 항공기공격에 의해서 70%까지는 운행불능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트럭수송의 비율은 하나의 강에서다른 강으로 전진하기에는 너무나 적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보급물자는 순서대로 해변(혹은 인공부두)에서 철도역보급소로, 또 철도역보급소에서 도로변보급소로 그리고 물자분배소로 전진해 갈 예정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D+90일까지 센 강에, D+360일까지는 독일국경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전술적 전개는 매우 다른 형태를 취했다. 7월 25일(D+49일)에는 연합군은 D+15일까지 도달할 예정이었던 선을 아직 일부밖에 점령하지 못했다. 만약 센 강에 예정대로 도착해야 했다면, 센 강과 D+15일째의 선 사이의 지역을 제압하는 데는 계획된 75일이 아니라 41일만에 진격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단축이 가능한가를 밝히기 위한 참모연구가 연합국 원정군 최고사령부 G-4(보급장교)인 크로포드(Crawford) 소장에 의해 지시되었으나 결론은 실행불가능이었다. 왜냐하면 D+90일에는 보급부대의 트럭중대(GTR)가 127개가 부족하게 될 것으로 여겨졌고, 빠르면 D+80일째에도 중대한 보급상의 곤란이 야기될 것으로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급능력에 관해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연합군에 다행스러운 일은 결단력 있는 패튼 장군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즉 그는 대부분의 동료 사령관과는 달리 보급상의 수치에 구속되기를 거부하였다. 실제로 패튼 장군의 보급현황에 대한 무관심은 극심하여 1944~45년의 작전기간을 통하여 그가 자신의 사령부 휘하의 G-4를 본 것은 두 번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지휘권을 인수하기 전이었고 두 번째는 전쟁의 최종단계일 때였다. 패튼의 제 3 군은 8월 1일에 작전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이틀 후에는 돌진을 개시했다. 그때 모든 계획을 무시하고 아브랑쉬(Avranches)와 퐁또블(Pontaubault) 사이의 협로를 이용하여 72시간내에 6개나 되는 사단의 보급지원을 달성했다. 제 3 군은 퐁또블에서 부채꼴로 산개하여 동쪽과 동남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에 대한 보급의 동맥역할을 한 유일한 도로는 여전히 적의 반격을 받고 있었다. 8월 16일 제 3 군은 라발(Laval)과 르망(Le mans)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8월 16일에는 오를레앙(Orleans)에 진입하고 그 3일 후에는 뜨로와(Troyes)에서 센 강에 이르렀다. 게다가 패튼의 전진에 의해 연합군의 거점을 노르망디로 몰아넣고 고립화하려고 한 독일군은 측면을 포위당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독일군은 모르탱(Mortain)에서 반격에 실패하자 급히 후퇴하였으며 나머지 연합군, 하지스(Hodges) 장군의 미 육군 제 1 군과 몽고메리 장군의 제 21 집단군이 적진을 돌파하여 센 강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센 강의 서안은 8월 24일 — 계획보다 11일 빨리 — 에 마침내 확보되었는데 병참전문가에 의하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병참장교들은 계속 패튼과 하지스가 하고 있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계속 주장했다.
안전한 길을 택했다가 실패하는 쪽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바람직할지 모르나, 이 경우에 예상과 실제와의 차이가 너무 커서 설명이 필요하게 된다. 계획입안자들이 사용가능한 수단에 대해 얼마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는가를 보면 설명은 간단해진다. 예를 들면 트럭중대는 하루에 50마일밖에 수송할 수 없다(즉 24시간내에 주행할 총거리는 100마일을 초과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전제되었지만, 실제 성과는 30% 더 높았다.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보급계획에는 프랑스의 도로상태 때문에 자동차수송에의한 보급은 철도역보급소로부터 75마일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것은 너무나 과소평가된 것이며 실제로는 적어도 3~4배 이상이었다. 각 사단의 소비량은 5월 1일 650톤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추격전을 수행한 부대에 필요했던 것은 이 양의 일부, 아마도 300톤 아니면 350톤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 원인을 고려사항에 포함시킨다고 하더라도 연합군의 병참계획입안자들의 비관론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풍부한 실행수단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모순된 것 같다. 1944년 8월말 프랑스에서는 22개의 미군 사단이 있었다. 이 중 16개 사단은 셰르부르에서 약 250마일 떨어져 센 강의 강변 혹은 그 근처에서 작전중이었고 나머지 사단은 아직도 노르망디에서 상륙중이거나 브르타뉴에서 동진하고 있었다. 이상의 항만에서 모든 사단의 평균거리를 200마일로 하고 실제 소비량이 규정대로 650톤에 달한다고 한다면, 22×200×650=286만 톤이 하루에 수송해야 할 양이 되었다. 이 당시 정확히 얼마만큼의 수송능력을 가졌는가 하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6월 25일 당시에 보급부대 예하의 트럭중대 227개가 있었고, 게다가 108개 중대분의 능력을 가진 철도가 있었다. 전체적인 수송능력을 규정대로 계산해도, 하루에 335만 톤에 달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추가로 증원된 트럭중대가 8월 중에 줄곧 도착하였다는 걸 고려에 넣지 않고 있으며, 각 사단내에도 충분한 수송중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고려에 넣지 않았다.
각 사단은 그 후 일어난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보급물자의 대부분을 상부조직인 군단의 후방에서 몇 백 마일에 걸쳐 수송해올 수 있었다. 증거가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 앞에 기술한 사실에 의하여 노르망디에서 센 강까지의 연합군의 진격이 전술적으로 성공했고 경이적이라고 하더라도 보급면에서는 근대전쟁사상 유례 없을 정도로 소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전에서의 조건을 이 책에서 이미 연구한 다른 작전의 조건과 비교하면 한층 놀랄 만한 것이다. 연합군은 다른 군대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많은 트럭수송대를 가지기만 한 것이 아니다. 기후가 좋은 여름철에 작전을 전개하였고 세계에서 가장 정비가 잘 된 많은 도로망 위에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 항공기의 활동은 거의 없었고 우호적인 주민은 파괴활동보다 오히려 많은 협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공세는 항상 병참전문가로부터 반대를 받고 있었다. 유명한 인용구를 빌면, 보급이라고 하는 왕국에서 뭔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3. '넓은 정면(broad front)'이냐 '예리한 돌파(knifelike thrust)'이냐?
1944~45년 북서유럽에서 있었던 연합군의 작전에서 제기된 문제 중에서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벨기에에서 독일의 루르지방에 신속한 돌진을 감행하였을 때 전쟁을 빨리 종식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관한 문헌은 막대한 것으로 지금도 여전히 늘어나고 있다. 여기서는 중요한 견해를 짧게 요약하는 데서 끝마치기로 하자. 이들은 다음과 같아 보인다:
체스터 윌모트와 몽고메리 원수의 견해. 두 사람은 1944년 9월에 전략적 기회가 생겼다고 논했다. SHAEF 최고사령관(아이젠하워 대장)이 우선순위결정을 위한 결단과 적극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영국 제 2 군과 미군 제 1 군은 루르지방을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베를린조차도 점령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뎀프시(영국군 제 2 군)와 하지스(미군 제 1 군)에게 보급을 집중하는 것을 거부했다. 특히 그는 위의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패튼 제 3 군의 진격을 정지시키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 때문에 1944년에 전쟁을 종결시킬 기회가 사라졌다.
몽고메리의 비난에 대하여 아이젠하워는 전략적 이유에 근거를 두고 자신의 결정을 변호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독일 심장부에 군대를 돌진시키는 것은 너무 위험하며 파멸 이외의 어떤 것에도 도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후 평론가들은 아이젠하워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논의를 많이 전개하여왔다. 그 논의 중에서는 패튼의 진격을 정지시킴으로써 생기게 될 연합국(즉 미국) 여론의 분노를 피할 필요성, 프랑스에서의 지휘계통의 다름, 그리고 최후로 하나 더 중요한 것으로서 보급이 있다.
마지막으로 리델-하트의 견해가 있다. 그에 의하면 루르지방으로 진격할 호기는 분명히 존재하였으나 그것을 이용하는 데 실패한 것은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몽고메리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때에 1,400대의 영국제 트럭이 엔진에 결함을 나타낸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이젠하워는 거의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패튼의 제 3 군은 이미 보급을 조금밖에 받고 있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패튼이 진격을 멈추더라도 몽고메리에게 루르를 점령할 정도의 충분한 수송력을 제공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44년 9월 초 연합군이 직면하고 있던 상황은 결론과 세부 내용에 있어서 설명상의 상이한 점이 있으나, 9월 이후의 작전이 사상 가장 눈부신 것 중의 하나였다는 것에는 거의 의심할 바가 없다. 패튼의 제 3 군은 8월 20일 선봉이 센 강 건너편으로 도하한 후 12일 만에 근 200마일을 전진하여 메츠(Metz)의 정면에서 정지하였다. 하지스의 제 1 군은 제 3 군의 좌측에 위치하였으며 제 3 군보다 더욱 멀리 진격함으로써 9월 6일 벨기에 동부의 알베르(Albert) 운하에 도달하였다. 몽고메리의 제 21 집단군은 그때까지는 미군보다 전진속도가 훨씬 느렸으나 이제 미군의 전진속도를 능가하여 북부 프랑스를 횡단하고 이어서 벨기에에 진입하였다. 9월 5일에는 앤트워프(Antwerp) — 항구에도 별 피해없이 — 를 점령하고 그 4일 후 뫼즈(Meuse)-에스코(Escaut) 운하에서 정지했다. 이 작전은 전격전의 창시자라 해도 감탄할 정도의 큰 성과였으며 이는 연합군 자신도 예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전의 사례로서 예측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들 작전은 이미 유럽원정군 최고사령부의 병참관계자의 의견을 물리치고 행하여졌다. 그들은 이러한 작전은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있었다. 6월의 상황판단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8월 11일 다시 실행가능한 방안을 연구하였다. 그 내용에 의하면 만약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면, 9월 7일에는 미군 4개 사단에 의한 센 강 도하작전을 위한 병참지원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론조차도 조건이 따르는 것이었다. 즉, 영불해협의 여러 항구를 공격하기 위하여 센 강 남쪽 하안지역에서의 모든 작전을 일시정지할 것, 그리고 파리 해방은 노르망디 지역에서의 철도선이 보급물자를 운반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선되는 10월말까지 연기할 것 등이었다. 그런데 파리는 8월 25일에 해방되고 말았다. 목표일로 설정된 7일까지 패튼과 하지스는 이미 센 강을 지나 200마일까지 전진해 있었다. 그 1주 후에는 아르덴느(Ardennes)의 양측 독일국경 근처에서 미군 16개 사단이 불충분하기는 해도 보급지원을 받고 있었다. 한편 수 개의 사단이 브르타뉴반도에서 활발히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 모든 작전은 8월 22일의 참모판단에서 가정되었던 조건들이 일부밖에 충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취되었던 것이다. 참모장교에 의한 예상이 이렇게도 빗나간 것도 드문 일이다.
병참선이 급속히 신장되었기 때문에 미군지역의 병참선은 200~250마일에서 400마일 이상으로, 영국군지역의 병참선은 80마일에서 300마일 가까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병참지원은 보통의 일상적인 방법을 버리고 긴급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투부대는 가솔린과 식량을 최대한 휴대하고 전진하였지만 조직적인 저항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뜻대로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후방작전사령부(COMZ)는 그렇지 않았다. 급속히 전진해가는 전선에 맞추어 보급창의 위치를 선정하자마자 그곳은 금방 후방으로 뒤쳐지게 되었다. COMZ는 몇 번이나 보급창설치를 시도해보았으나(전선을 지원할 수송력의 일부를 희생해야만 하는), 끝내는 이를 포기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때로는 300마일이나 떨어진 기지로부터 긴요한 품목을 직접 운송하여 왔다. 이와 같은 장거리를 운행할 수송부대는 중포대, 대공포대, 공병대, 화학부대등에서 차출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이 부대들은 차량을 빼앗기고, 때로는 식량마저 줄어들고 이동을 할 수도 없는 상태로 방치되었다. 예를 들면 새로 프랑스에 도착한 3개 사단이 그러하였다. 이들 사단의 트럭들은 병참부대의 직할중대로 편입되었다. 식량, 연료 및 탄약이 전방으로 수송되어 왔으나 피복 및 공병대 자재를 포함한 기타의 모든 보급품은 늦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공수는 대규모로 운용되었지만 하루 평균 1,000톤 이상은 수송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전선 근처에 비행장이 없었으며, (계획만 세워놓고 실행되지도 않은) 공수부대 강하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비행기를 대기시켰기 때문이다. 전선에 보급물자를 보내기 위한 방편 중 가장 효율적인 것은 Red Ball Express였는데, 그것은 보급운송만을 위한 일방통행의 환상(고리모양) 고속도로였으며 그 위를 수천 대의 트럭이 주야로 소음을 내며 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비상수단에도 불구하고 전선에 도착하는 보급품의 흐름은 점차 줄어들어, 드디어 9월 2일에 제 3 군의 전진이 중지되었다. 제 1 군은 며칠 더 전진하였으나 역시 정지하고 말았다. 8월 둘째 주에는 양군에 대해 하루 1만 9천 톤이 수송되었던 것에 비해, 8월 말에는 COMZ는 단지 7천 톤밖에 보장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 이 수치가 실제로 지원되었는지도 의문스럽다. 전방부대들의 비축물자는 놀라운 속도로 감소되었다. 예를 들자면 8월 5일 제 1 군의 연료비축량은 10.5일분이었으나 9월 20일에는 0.3일분, 그리고 1주 후에는 영(Zero)으로 감소되었다. 한편 노르망디에 쌓여있는 물자는, 전선으로 수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증가된 셈이었다. 탄약의 소비량은 7월에 비해 30~90%가 감소되었으나 수요량에 비하여 공급량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어떤 군단(제 20 군단)의 보급요구량은 군단이 속해 있는 제 3 군 전체에의 할당량을 초과할 정도였다. 탄약집적소는 설치하자마자 곧 뒤에 쳐졌기 때문에 제 1 군과 제 3 군은 트럭을 활용한 이동탄약창고(Rolling magazines)를 설치하기로 하였는데, 그 방법은 적어도 보급을 항상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점에서는 효과적이기는 하였으나 트럭수송능력의 낭비를 초래하였다.
보급품이 부족할 때면 항상 일어나는 것처럼 전방부대와 후방의 지원근무대 사이에 마찰과 긴장까지도 일어났다. 특히 제 3 군은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편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제 3 군의 징발대는 다른 부대원의 신분을 사칭했으며, 열차와 수송대의 행선지를 변경/약탈하기도 하였다. 병참부대소속 트럭중대는 돌아가는 데 필요한 연료를 도난당하여 연료야적장을 찾기 위해 정찰기가 후방으로 수백 마일까지 파견되었다. 병참지대(Zone of Communication) 자체 내에서는, 24시간 작업에 의한 긴장으로 피로, 사고, 꾀병 및 때로는 태업이 발생하였다. 차량들은 정비하지 않은 채 사용하여 고장이나 수리소요가 급속히 늘었다. 항상 연합군 병참의 약점이 되어왔던 보급품의 기록이 부실하다는 문제는 8월의 진격기간 중 훨씬 약화되어 그 결과 현 상태로도 부족한 수송대의 일부는 전투 부대가 요청하지도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았던 물자수송에 쓸모없이 사용되었다. 때로는 그보다 더한 낭비의 사례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2천 2백만 개의 제리캔 중 반 이상이 8월 말까지 손실되었다. 그 결과 이 하찮은 품목의 부족으로 인해 전 보급 시스템이 제약을 받았다. 보급군기 특히 제 3 군의 군기는 엉망이었으며 거대한 양의 장비, 특히 피복이 후방에 방치되었기 때문에 구난중대는 작업이 바빠 정신을 못차렸다. 패튼의 병사들은 또 프랑스 기관차와 화차들을 포획하는 대신에 일부러 부숴버렸다.
벨기에에서 작전중인 영국군의 보급상황도 역시 긴박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미군의 제 1 군/제 3 군 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벨기에에서는 수송거리가 짧았고 도로가 로렌지방보다 더 많았다. 8월 30일 하지스와 패튼은 연료가 다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 2 군 사령관 뎀프시는 유럽원정군 최고사령부에 보급상황이 매우 좋다고 보고하였다. 그 다음 주에는 병참선의 길이가 거의 300마일로 늘어났으나, 영국군은 항만에서의 하역량을 하루 1만 7천 톤에서 6천 톤으로 줄이고, 이리하여 트럭중대의 업무량을 줄였다. 제 8 군단을 포함한 많은 부대들의 이동을 정지시킴으로써 이에 대처하였다. 진격속도가 너무나 빨랐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좋은 벨기에의 철도망은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로 점령되었다. 그러나 그 철도는 미군이 예정대로 화차를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시에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브래들리 휘하의 미군 부대와 비교할 때 몽고메리의 부대는 진격속도가 느렸으며 보급항에서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였다. 반면에 몽고메리는 영불해협 연안의 르 아브르, 디에프, 불로뉴, 칼레, 뎅케르크 등 모든 항구들을 점령하게 되었고 항구를 통한 하역능력은 훨씬 더 좋아질 것이 확실시 되었다.
한편, 독일군은 어떠하였는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이후 서부전선의 독일군의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즉 40만 명의 병력, 1천 8백 대의 전차와 1천 5백 대의 각종 야포 및 2만 대의 각종 차량을 잃었다. 잔존부대들은 연합군 비행기 및 지상부대에 의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타당하였고, 팔레즈와 몽스 포켓에 있던 부대들은 전투대형조차 유지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로 철수해야 했다. 예를 들면, 무장친위대 제 1 사단은 불과 40대의 전차와 1천 명의 인원을 거느리고 센 강을 건너 도주하였다. 제 84 보병사단은 3천 명의 병력 뿐이었으며, 제 2 기갑사단은 겨우 2천 명의 병력과 5대의 전차만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 2 공수군단은 그 명성에 반하여 거의 모든 경화기마저 잃어버린 채 약 4천 명의 병력 — 증강된 1개 여단에 불과하다 — 만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독일군의 추정에 의하면, 독일군은 전 전선에서, 전차는 10대1, 야포는 3대1(이러한 장비의 심한 열세 이상으로 독일군은 탄약의 부족에 더욱 고전하였다), 그리고 비행기에 있어서는 거의 무한정한 열세에 놓여있었다. 더욱이 히틀러는 패튼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병력의 대부분을 모젤 강에 집중시켰다. 그 때문에, 아이젠하워의 설명에 의하면, 아르덴느 북쪽의 독일군 전력이라고는 "뿔뿔이 흩어져 퇴각하여 어떠한 저지력도 발휘할 수 없는" 전력이 감소된 2개 기갑사단과 9개의 보병사단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상태는 아이젠하워의 참모 중 한 사람(아마도 참모장 베델 스미스 중장일 것이다)이 "이 지역내의 연합군 병력을 3개 사단 감축시켜도 전진에 지장은 커녕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요컨대, 독일의 산업 중심지인 루르로 가는 통로는 넓게 열려 있었다. 리델-하트가 말한 바와 같이 전쟁에 있어서 이와 같은 절호의 기회가 생기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어떤 연유로 이와 같은 기회를 놓쳤는지를 이해하려면 대륙작전을 위한 연합군의 기본전략이 수립되었던 1944년 봄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5월 3일자의 한 비망록에는 베를린이 연합군의 최종적인 목표이기는 하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독일에서의 제 1의 목표는 루르이어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루르로 가는 가장 쉽고 직접적인 통로가 리에쥬와 액스-라-샤펠(Aix-la-Chapelle)을 통과하여 아르덴느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은 인식되었으나, 독일군의 자원을 분산시키고 독일군이 연합군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르(Saar)지방을 관통하는 제 2의 공격이 있어야 한다는 사항이 결정되었다. 이 비망록에서 공식화된 원칙은 5월 27일 아이젠하워의 서명과 동시에 작전명령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독일이 내선작전을 펼 소지를 주는 연합군 전력의 양분이, 압도적인 양적 우위를 자랑하는 연합군 전력을 가장 적절하게 운용하는 것인지의 여부는 여기서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노르망디의 전투가 예상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전개되었다는 것만을 말해 두기로 하자. 처음에는 전진속도가 느렸지만 일단 적진돌파가 실현되자 그 결과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것을 보고 몽고메리 원수는 연합군의 전략에 관해 다른 의견을 가지기 시작하여, 8월 14일에 자신의 구상을 미국의 장군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3일 후 그의 생각을 굳혀 브래들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센 강을 건넌 후 제 12, 제 21 집단군은 40개 사단으로 된 강력한 밀집대형으로 협력해야만 하며, 이 대형은 "우측을 아르넨느에 두고 북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몽고메리가 아이젠하워를 만난 것은 8월 23일이 되고 난 후였으며 그때는 이미 그의 의견은 달라져 있었다. 몽고메리는 미국 제 12 집단군 전부를 벨기에에 위치한 자군의 우측을 방어하도록 요구하는 대신에 이 임무는 하지스의 제 1 군의 9개 사단만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제 12 집단군의 다른 야전군 — 즉 패튼의 제 3 군 — 은 현재위치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연합군은 전군이 동시에 공세를 취하게 할 정도의 많은 보급물자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전전선에서 우세를 취하려 하다가는 오히려 약체화되어서 어디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으로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패튼를 정지시키기를 거부했던 반면에(그뿐 아니라 그는 패튼이 동진을 계속하여 라임(Rheims)과 샬롱-쉬르-마른(Châlons-sur-Marne)까지 전진하는 것을 허가했다) 하지스의 전 부대가 제 21 집단군과 협력하여 아르덴느 북쪽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몽고메리의 목적을 달성케 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북진의 주요목표지점을 리에쥬와 액스-라-샤펠 사이의 공간이 아니라 앤트워프 항구로 할 생각이었다. 그는 앤트워프 항을 장악하지 못하면 더이상 독일 진격을 위한 보급지원을 계속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이로써 첫 번째 논쟁은 끝났다. 다음의 논쟁은 몽고메리가 80마일의 진격을 겨우 완수하여 센 강에 도달했을 때 일어났다. 이때 패튼은 여전히 계속 더 전진해야했기 때문에 이미 센 강을 건너 신속히 전진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국가적 위신과 여론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때까지 추격전의 명수도 아니었던 몽고메리를 위해, 가장 잘 돌진하고 있던 패튼에게 정지를 명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10일후 몽고메리의 제 21 집단군은 200마일을 전진하여 독일 국경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의 입지가 이와 같이 크게 강화되자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본관은 우리가 베를린을 향하여 강력하고 사기 왕성한 공격이 가능한 상태에 있으며 이로써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두 군데서 총력으로 공격해나갈 정도의 충분한 자원을 갖고 있지 않다.
하나의 주된 공격이 결정되면 필요한 모든 보급자원을 최대한으로 공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타 작전은 잔여자원으로 최선을 다해 임한다.
공격 가능한 길은 둘밖에 없다. 하나는 루르를 경유하는 것이며 하나는 자르를 경유하는 것이다.
본관의 의견으로는 가장 효과적이고 신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공격은, 북쪽에서부터 루르를 경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메시지를 쓴 것은 매우 불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거론된 공격목표 베를린은 400마일 이상이나 떨어져 있었고, 이 시점에 있어서는 연합군의 도달거리에서 훨씬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며칠후 몽고메리는 독일 중앙으로의 예리한 공격에 관한 새로운 의견을 담은 편지를 보냈으나 효과를 얻지 못했다. 이러한 과장된 표현으로 말미암아, 아이젠하워는 몽고메리의 제안은 무모하고 검토도 불충분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으며 그런 주장도 무리는 아니었다.
북쪽으로부터 공격을 취하자는 제안은 9월 8일이 되자 한층 더 어렵게 되었다. 이 날에는 최초의 탄도탄 V2가 런던에 떨어져 영국정부는 제 21 집단군이 네덜란드에 있는 발사기지를 공격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몽고메리는 다시 자기 생각을 수정하여, 동쪽으로 루르를 공격하는 대신에 쥐더 해(Zuider Zee) 방면을 향해 북상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른헴(Arnhem) 작전 — 마켓-가든 작전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아이젠하워는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앤트워프가 해방되지 않으면 독일 진격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점에서는 매우 완고했다.
이와 같이 몽고메리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기에는 그는 너무 불명확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주장한 강력한 밀집대형은 예리한 공격으로 탈바꿈하였으며, 또한 그가 베를린을 목표지점으로 거론한 점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문제를 둘러싼 논쟁 때문에 핵심문제, 즉 1944년 9월에 먼저 앤트워프를 점령하지 않고 루르를 점령하는 것이 보급적으로 가능했는가 하는 문제를 애매하게 넘겨서는 안된다. 독일이 당시에 붕괴직전에 있었는지 아닌지에 관한 논의는 이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히틀러가 독일의 중심지에서 어떤 병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지 없었던지간에, 루르로 가는 길은 9월초에 넓게 열려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단지 연합군의 보급지원능력이 루르 공격을 지원하기에 충분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먼저, 몇 개의 가정을 세워야 한다. 우리의 연구목적상 루르를 향한 공격은 총 18개 사단(영국 제 1 군과 미국 제 2 군)에 의한 공격을 가정하고, 그 목표지점은 도르트문트(Dortmund)이며 이곳을 점령하면 루르를 포위할 수 있을 것이라 간주하면, 영국군의 출발지점은 뫼즈-에스코 운하(아른햄 작전이 시작되지 않았다 치고)였을 것이며, 한편 미군은 마스트리히트-리에쥬 지역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이들 지점에서 목표 도르트문트까지의 거리는 거의 130마일이었다. 독일의 모든 철도시설들은 운행이 정지되어 있었고 비행장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격부대에 대한 철도/공중보급이 불가능했었다고 가정하자. 계산은 모두 200톤의 능력을 지닌 중대 단위로 하기로 하는데, 그것은 SHAEF 병참전문가들의 계산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격개시 목표일을 9월 15일로 하고 1개 사단의 하루 소비량을 650톤이라 가정하면(미영 양군의 평균을 하면 이것은 다소 많을지도 모른다) 그 작전에 필요한 총보급량은 하루에 18×650=11,700톤이 되었을 것이다. 이 중에서 9개 사단으로 구성된 영국군이 5,850톤을 차지한다는 계산이 된다. 이 양을 우선 철도에 의해 벨기에에 있는 출발지점으로(2,500톤), 그리고 아른헴 작전에서 전용된 비행기로 브뤼셀까지 공중보급(1,000톤)과 노르망디에서 정지된 미군 3개 사단에서 차출된 트럭수송대에 의해(500톤) 운반될 것이며 이것은 합계 4,300톤이 된다. 몽고메리 휘하의 트럭수송부대를 사용해 나머지 1,550톤을 깡(Caen)-바이외(Bayeux) 지구에서 운반해야 했을 것이다. 각 트럭중대는 규정된 일일 100마일밖에 달리지 못한다고 가정하면 46개의 중대가 상기목적에 필요하였을 것이다. 도르트문트까지 왕복 650마일에 2일이 걸린다고 가정하면 전작전에는 (5,800×2)/200=58개 트럭중대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당시 영국은 총 140개의 트럭중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36개 중대는 캐나다 제 1 군 6개 사단의 보급과 항만정비를 하는 데 사용되어야 했다. 그러나 루르 진격은 하려면 할 수가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지스의 미군 제 1 군의 상황은 훨씬 더 어려웠다. 그의 9개 사단은 매일 5,850톤을 소비했지만, 이 당시의 할당량은 3,500톤밖에 안되었다. 후방작전사령부는 이것마저도 수송하기 어려웠다. 200마일 떨어진 센 강 남쪽의 철도로부터 수송을 하려면 약 35개의 트럭중대가 더 필요하였을 것이다. 도르트문트까지 진격하는 데 58개의 트럭중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총 부족수는 93개 중대가 될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제 3 군이 모젤 강을 향한 진격을 멈추고 파리-오를레앙 선에서 정지한다면 얼마나 많은 트럭을 전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된다. 패튼군을 지원했던 수송력에 관한 상세한 수치는 전혀 없지만 개략적인 추정은 할 수 있다. 9월 15일에 제 3 군은 하루 최저 3,500톤을 받고 있었다. 이 숫자는 혹시 다소 많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패튼은 휘하의 트럭들을 병참선에서 장거리운반에서도 활용하기 위해 전투지역에서만 운행하도록 하는 제한을 풀었기 때문이다. 3,500톤이라는 물자를 전선까지 180마일을 이동시키는 데는 52개 보급중대 — 여러가지 형태의 — 에 상당하는 능력을 사용했음에 틀림없다.
9월 중순에 미군 제 8 군단은 브레스트를 향해 작전을 펴고 있었다. 이 작전은 원래 적절한 항만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미 때가 늦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전이 수행된 것은 단지 위신 때문이었다. 이 작전의 소비량과 수송능력의 상세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개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 당시 노르망디(Normandy)에서는 연합군이 사용한 철도가 셰르부르에서 돌(Dol), 레느(Rennes)지역까지 이르렀다. 거기에서 브레스트까지 80마일을 3개 사단을 위한 보급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약 15개 트럭중대가 바삐 움직였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이러한 부대들에는 자체적으로 보유한 트럭중대가 있었다. 상세한 수치를 구할 수 없지만 만약 잠정적으로 이들 차량을 임시로 보급중대에 배속시킨다면 벨기에의 하지스 부대에 대한 보급물자를 1,500톤 정도 증가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하지스에게 필요한 보급중대는 22개 중대가 감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르트문트 공격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71개의 보급중대 중 52+15=67개를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결론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도르트문트 진격은 힘들기는 하여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4. 결론
가능한 최상의 정보에 근거를 두고 계산한 바로는, 1944년 9월에는 영국 제 2 군과 미군 제 1 군을 루르로 실어 나르기에 충분한 수송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트럭중대의 수는 많은 관계요소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연구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요인도 간략하게 검토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아이젠하워가 몽고메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모든 병참자원을 영국 제 2 군과 미군 제 1 군의 공격작전 지원에 집중하였다면, 프랑스에 있는 연합군 43개 사단 중 12개는 완전히 전진이 불가능해지고 그들의 트럭부대들은 새로운 임무를 띄고 딴 곳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드래곤(Dragon) 작전에 의해 지중해에서 상륙하는 7개 사단은 주력작전과 무관했을 것이며, 24개 사단이 후방에 남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 중 캐나다 제 1 군에 속한 6개 사단은 영국해협 연안의 항만 공격을 위해 작전해야 했다. 따라서 루르지방의 진격을 위해서는 오로지 18개 사단밖에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너무 적은 수이기는 하였으나, 그 당시의 열세였던 독일군의 저항을 돌파하기에는 아마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독일의 영토 내에서의 진격거리는 비교적 짧았기 때문에, 진격부대(결국은 베를린을 향한 진격이 될 것이다)의 노출된 측면을 공중지원으로 커버하는 것은 어렵지않았다. 아른헴 작전에서는 4개의 강을 건너야만 했으나, 이번 작전에서는 2개의 강을 건너면 되었다. 루르로 향해 동쪽으로 뻗친 도로망은 네덜란드를 향해 북으로 이어진 도로망보다 훨씬 양호하였다.
일상의 소비물자 공급외에 벨기에에 전방비축기지을 설치하려 했으나 수송능력이 부족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루르 진격은 수백 마일 후방의 주 보급기지에서 직접지원을 받아야 할 상황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요청한 보급물자가 전선에 도착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우려도 있었으나, 당시의 하루 650톤이라는 수송량은 매우 풍족한 양이었으며, 또한 프랑스와 벨기에에 있는 연합군의 병참선(특히 철도수송 시설들)은 급속히 개선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병참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작전을 한다 하더라도 그 위험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독일 공군이 이 병참선을 방해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루르 진격은 실현되지 않았다. 연합군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진격하면서 이미 두 번이나 보급상의 문제보다 전략상의 요구를 앞세워 진격했기 때문에, 여기서 루르 진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병참선을 극한으로까지 연장시키는 위험을 초래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바이외에서 도르트문트까지의 거리가 패튼이 주파한 셰르부르에서 메츠까지의 거리보다 길지 않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연합군은 실제로는 450마일 이상의 거리에서 전방부대를 보급지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문제가 있다면 방향이 틀렸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것과는 반대로 루르 진격계획이 수락되었다 하더라도 미군에서 영국군으로 수송부대를 이동시킬 필요가 없었으며, 따라서 복잡한 결과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문제는 미군 상호간에 차량을 이관하는 데 있었다. 벨기에에 진주한 3명의 연합군 지휘관들(크레라, 뎀프시, 하지스) 중에서 몽고메리의 계획에 가장 방해가 되었던 것은, 하지스의 보급상의 문제점이었다. 패튼이 정지했다면, 그에 따른 여분의 수송부대는 하지스의 제 1 군으로 전속되었을 것이다. 제 3 군의 정지를 거부함으로써 아이젠하워는 앤트워프를 점령하지 않고는 독일진격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그의 의견을 실현시켰다. 그리하여 11월말 앤트워프 항이 겨우 점령되고 나서야 하지스를 위한 보급지원거리는 400마일에서 70마일로 줄었던 것이다. 영국군은 그때까지 센 강과 영국해협의 여러 항구로부터 충분히 보급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앤트워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젠하워가 무게중심이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우선 순위를 정하는 데 실패한 책임이 있다고 따진다면, 그것은 아이젠하워가 초인적인 통찰력을 지닐 것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연합군의 기본전략에 있어서 계획의 전환이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을 무렵 패튼은 전속력으로 진군하고 있었으며, 몽고메리는 진군해야 했던 거리가 훨씬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센 강을 향해 아주 느린 진격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상상력을 확대하지 않는 한, 항상 지나치게 신중하였던 이 지휘관이 그후 2주일 동안에 갑자기 자기의 능력을 초월하여 독일국경까지 200마일을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또한 몽고메리가 당초에는 패튼이 정지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패튼이 밀집대형을 구성하여 그의 공격의 측면을 보호해주길 원했으며 이를 위해 패튼의 공격목표를 동쪽 로렌에서 동북방의 벨기에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몽고메리 자신도 인정하듯이, 슐리펜 계획을 역방향으로 수행하고 있던 40개 사단들이 보급적으로 지원될 수 없다는 것을 그가 깨달았을 무렵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었다.
몽고메리는 처음에는 베를린 진군, 그리고 다음에는 독일 심장부를 향한 "예리한 돌파(knifelike thrust)"를 한다는 등 애매한 말을 함으로써 그의 계획이 수락되기를 더욱 더 어렵게 만들었다. 루르에 대한 18개 사단에 의한 공격은 아마 성공했을 것이다고 믿을만한 이유는 충분하지만 그렇게 적은 병력으로 독일의 수도까지 점령한다는 것은 예외적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리한 돌파"에 관해 말하자면, 단지 130마일 정도의 거리에서 수행되었다면 그것은 성공했을지도 모르지만, 400마일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목표를 찾아 — 더욱이 가장 가깝다는 기지마저도 다시 300마일 후방에 둔 상태에서 —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은 확실히 위험하고 심지어는 무모한 일이었다. 또 그러한 공격이 비록 18개 사단 규모라 하더라도, 보급적인 측면에서는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몽고메리 참모진은 불과 12개 사단에 의한 공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보급은 1일 1개 사단당 4백 톤으로 줄일 수 있었으나 이 양마저도 제 21 집단군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말했던 것처럼 그러한 행동은 파멸만을 초래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몽고메리의 제안이 아이젠하워의 전략에 대해 진정한 대안을 제시했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대답해야만 할 것이다. 계산상으로는 루르의 진격에 필요한 수단은 이론적으로는 확보가 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비록 전략적인 전개가 예상대로 발전되어 갔다 하더라도, 병참조직들이 충분한 속도로 적응하고 혹은 필요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오버로드작전을 위한 보급계획에서 시종일관했던 특징인 과도한 보수성과 소극성을 감안할 때 병참조직들이 그러한 적응력과 결단력을 지니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충분하다. 심지어 센 강으로부터의 진격이 수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병참지원이 실행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신중한 병참담당자들이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독일국경 돌파작전을 자진하여 지원하겠다고 제의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유럽원정군 최고사령부의 병참전문가들은 결코 영웅적 능력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수많은 작전들이 보급지원의 결여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아온 우리들로서는, 비록 실전상황에는 뒤쳐지기는 하였어도 최종적으로는 이의없는 승리를 거둔 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출처: 디펜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