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해부학에서 쓰는 말 (해부학용어)
다른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해부학에서도 나름대로 그 영역에서 주로 쓰는 전문언어가 따로 있다. 이것을 '해부학용어'(anatomical terms)라고 부른다. 해부학은 원래가 몸의 구조를 공부하는 학문 분야이기 때문에 구조물을 미세한 부분까지 모두 식별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몸의 어느 한 특정 구조물을 다른 구조물과 혼돈되지 않게 구별하기 위하여 일일이 고유한 이름을 다 붙이게 되는데 이렇게 붙여져 공인된 이름이 '해부학용어'이다. 그러나 해부학이 의학의 한 분야이기 때문에 해부학용어가 곧 의학에서 쓰는 전문언어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해부학용어는 원래 의학 분야에서 의사와 의사, 의사와 다른 의료인, 의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에 몸의 생김새에 관하여 정확하게 뜻을 주고받기 위하여 만들어진 전문언어이다. 사람의 몸 구조물을 가리키는데 쓰이는 해부학용어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만 따져도 그 수가 대략 1만 2천 개 가량 되지만 의학 분야에서도 해부학 아닌 다른 의학 분야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것은 그 중의 극히 일부분만이고 대부분은 해부학 분야 안에서 연구 목적으로 구별하기 위한 학술용어이다. 따라서 의사가 되는데 꼭 필요한 해부학용어는 그 중의 극히 일부인 천 개 미만 정도로 국한되고 그 중에서도 일반인과 공통적으로 쓸 수 있는 낱말은 매우 제한된 백 개 미만의 적은 수밖에 안된다.
의학 전문분야의 사람이 일반 사람과 같이 쓰는 용어라는 것은 결국 의사가 환자, 환자 가족,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대화를 할 때 흔히 쓰게 되는 말인데 대부분이 몸의 어느 큰 부분 또는 큰 내장 기관을 가리키는 정도에서 그친다. 가령 윗입술, 손바닥, 무릎, 심장, 척주, 턱관절, 좌골신경, 고막, 대뇌, 맹장, 아킬레스힘줄 같은 말은 해부학용어의 한 부분이지만 일반인들도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일반화된 용어이다. 그런가 하면 의학 분야 안에서 자주 쓰이는 해부학용어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낱말이지만 이 분야 전문직종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보편화된 것으로서 가령 무릎관절의 십자인대, 문맥순환의 곁가지, 간뇌의 시상하부, 정관팽대, 안구의 위곧은근 같은 용어는 의사면 누구나 다 알아듣는 용어이지만 일반인은 쓸 일도 없고 들을 기회도 별로 없다. 그런가하면 나머지 대부분인 만 여개의 해부학용어는 의학계 안에서도 해부학 분야 또는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분야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전문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용어이다. 예를 들어 해부학용어인 작은바위신경관틈새, 속섬
유막다리, 긴엄지굽힘근힘줄집, 사구체모세혈관토리는 관련된 몇몇 분야 외에는 다른 분야에서는 자주 쓸 일이 없는 용어들이다.
해부학용어가 생긴 역사는 해부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어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해부학이 제 자리를 잡기 이전인 초창기 즉 기원전 400년 경부터 약 천년 동안은 몸의 한 구조물에 여러 가지 이름이 여러 나라 말로 질서없이 붙여져있어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 사이에는 학문적인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해부가 처음 시작
되었던 나라의 말인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류어, 아라비아어로 제각기 다르게 붙여졌기 때문에 생긴 결과로서 어느 한 구조물의 통일된 이름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고 이처럼 천년 이상을 나라마다 제가끔 다른 이름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이 혼란을 정리하기 위하여 국제적인 모임을 가지고 한 구조물에는 어느 공통된 한 이름을 쓰기로 약속을 하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 국제회의가 1895년에 스위스의 바젤(Basle)에서 있었는데 여기서 라틴어로 제정한 통일된 해부학용어가 나오게 되었으며 이것이 유명한 '바젤해부학용어'(Basle Nomina Anatomica, BNA)의 시작이었다. 이 BNA는 약 40년 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그 동안 여러 나라 해부학자들로부터 잘 만들어졌다고 찬성도 받았지만 잘못되었다는 반대 의견도 드높아 드디어 1936년 독일 남부지방 도시인 예나(Jena)에서 있은 두번째 국제회의에서 '예나해부학용어'(Jena Nomina Anatomica, JNA)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JNA는 더 단명하여 약 20년 동안 사용되다가 드디어 1956년 프랑스 파리(Paris)에서 있은 국제회의에서 '파리해부학용어'(Paris Nomina Anatomica, PNA)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지금까지 통용되어 오는 해부학의 국제적 표준 해부학용어(Nomina Anatomica)로서 이것 역시 라틴어로 되어있으며 이것을 뿌리로 하여 각 나라는 자기 나라의 고유한 말로 구조물 이름을 붙여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이 표준 해부학용어는 국제해부학회 용어위원회에서 결정한 것만을 인정하고 있으며 제정된 뒤 30년 동안에 이 용어도 여러 차례에 걸쳐 기본틀은 유지한채 조금씩 고쳐져 1985년에 국제해부학용어집(Nomina Anatomica) 제6판까지 나왔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 우리나라의 해부학용어도 기본틀은 이 국제해부학용어에 두고 하나하나를 우리말로 만든 한글 해부학용어(제3판, 1993년 현재)를 공식용어로 채택하여 쓰고 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사용하는 해부학용어(anatomical terms)에는 순수한 영어로 된것이 대부분이지만 영어로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몇몇은 라틴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어용어는 짧고 간결한 반면 라틴어용어는 길고 다른 구조물과 명백하게 구분할 수 있는 자세한 설명조가 많으며 따라서 뜻의 전달에 있어서는 라틴어용어가 오해의 소지가 적은 반면 영어용어는 용어의 한 낱말만으로는 뜻이 애매한 경우도 더러 있다. 외국에서도 그렇고 우리 나라에서도 어느 한 구조물을 가리키는데는 특정한 한 용어로 쓰도록 되어있지만 말의 뿌리가 여러 군데서 온 것은 여러 종류의 복수용어로 된 것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어 영어 해부학용어에서 목에 관련된 구조물을 가리키는데에만도 어원에 따라 여러 갈래로 발전한 낱말 즉 neck(영어), carotid(그리스어), jugular(라틴어), cervix(라틴어), collum(라틴어) 등을 모두 쓰고 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용어는 그 문화가 어디에서 흘러들어 왔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가 섞여서 쓰이다가 차츰 어느 한 가지로 정착되거나 아니면 여러 가지가 모두 쓰이게 되거나 한다.
우리 나라 해부학용어 역시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현재 쓰이는 공식 해부학용어 중에는 한자에서 유래된 것과 순수한 우리 말에서 나온 것 그리고 극히 일부이지만 영어에서 유래된 것까지 섞여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척주는 한자에서 팔굽은 우리 말에서 피라밋세포의 피라밋은 영어에서 유래된 외래어 용어이다. 대부분의 용어는 한자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그것은 우리 나라가 우리의 고유한 글인 한글이 생기기 이전에는 한자로만 모든 것이 통용되어 왔었기 때문인 점도 있지만 한글이 생긴 뒤에도 같은 구조물 이름을 붙이는데 있어 한자를 선호하는 의식이 남아있었던 탓도 있어서 우리의 생활 속에 한자에서 유래된 말이 너무 많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다만 그 한자 용어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우리의 역사 한 허리를 잘라 일본이 지배해 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의학용어는 같은 한자라도 왜색이 짙게 깔린 일본식 표현과 일본식 발음이 아직도 우리의 문화 속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것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대한해부학회에서 이러한 왜색 짙은 한자용어를 순수한 우리 말로 고쳐서 부를 수 있도록 우리말 해부학용어를 만든 것은 우리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