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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春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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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丹寺 스크랩 효봉스님 법문 마무리
한베러브 추천 0 조회 48 10.10.11 16: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효봉스님의 법문을 제가 보관하고 있던 불일출판사 "효봉어록"에서 일부 발췌하여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책 표지가 누렇습니다. 제가 언제부터 보관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1984~87년경 사이에 받은 책이라 짐작합니다.

그 사이 간혹 읽어 보았지만, 이해가 어려웠는데 금번은 조금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효봉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용면 반성리 금성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후 평양보고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귀국(26세) 1913년~1923년 까지 10년간 법관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23년 36세에 인간이 인간을 벌할 수 없다는 생각에 판사직을 그만두고 3년 동안 팔도강산을 유랑하였습니다.

1925년 금강산 신륵사 보운암에서 石頭스님을 뵙고 戒를 받고 법명을 元明이라 불렀습니다(이후 1938년 4월 28일 새벽에

꿈속에서 보조국사 제16세 법손이신 高峰국사 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설법을 하신 후 법명을 曉峰이라 바꿈). 

스님은 趙州無字 로서 평생 화두를 삼았습니다.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하여 별명은 절구통 수좌였습니다.

 

1930년 늦은 봄, 금강산 법기암 뒤 토굴을 짓고 바깥벽을 막아 버린후 공부를 하였습니다. 1931년 여름,

비가 개인 어느날 아침 스님이 토글 벽을 발로 차 무너뜨리고 밖을 나온후 오도송을 지었습니다.

 

바다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이후 1937년 스님의 나이 쉰 살이 되던해 순천 송광사에 이르렀고 선방인 三日庵에 조실로 10년을 머물렀습니다.

이때 定慧 雙修의 구도관이 확고히 설정되었습니다.

1946년 부터 5년간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어 후학을 지도 하였습니다.

1954년 불교 정화 운동시 총무원장 종정의 자리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1966년 10월 15일 오전 10시 앉아서 무자 화두를 들고 호도알을 굴리시다가 입적 하셨습니다.

 

열반송

내가말한 모든 법은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千江에 비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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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上堂 설법이 1960년 동화사 금당선원을 마지막으로 보인다( 세수 73세).

뵌적은 없지만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계셨다는 것에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스님의 오도송을 이해 하려면 철저히 분별심이 없어야 합니다.

"바다" 라고 하면 바다 두 글자에 온통 정신이 쏠려 버리는 마음을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四相만 떨쳐버리면 큰 뜻을  이해 하리라 봅니다.     

첨언 2010.06.28) 사상을 떨쳐 버리면 바로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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